'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제네바서 칼빈과 동역한 낙스, 종교개혁 박차
1561년 장로교총회 설립, 미국·호주 등에 영향
1.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선구자들
▲ 존 낙스(John Knox).
1.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선구자들
16세기에 접어들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번져나가자, 당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던 스코틀랜드 의회는 1525년 종교개혁 사상을 “추하고 악한 교훈”이라고 비난하며 그 전파와 확산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대륙으로부터 프로테스탄트 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영역한 신약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면서 개신교 사상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또한 1528년에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계명성’이라 불리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1528)이 순교를 당하기도 했다. 해밀턴의 순교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 간 20여 명에 달하는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열망하는 개혁자들의 목소리는 계속되는 박해에도 그치지 않고 오히려 높아만 갔다. 그 중에는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 46)도 있었으니, 그는 후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이 될 존 낙스에게 개혁신학과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한 인물이었다.
조지 위샤트는 애버딘대학교에서 고전어를 배운 뒤 몬트로즈에서 교사로 일하던 1538년 헬라어를 가르친 혐오로 교회 당국에 소환되었다. 이 일로 그는 스코틀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피했으나 그곳에서도 같은 이유로 정죄를 받자 스위스로 건너갔다. 스위스에서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은 위샤트는 스위스의 첫 신앙고백서인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를 영역했다. 이후 1544년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주의 신앙을 전하는 한편, 가톨릭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을 비판했다. 이 와중에 1545년 고향에서 공증인과 가정교사 일을 하고 있던 존 낙스가 조지 위샤트를 만나 회심하고 종교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일반 시민들 사이에 개혁주의 신앙을 수호하고 왕실과 교회당국에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위샤트는 이러한 개혁운동의 주동으로 지목되어 1546년 1월 대주교의 조카인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으며 1546년 3월 1일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2. 존 낙스의 초기 개혁운동
위샤트의 화형은 시민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항거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격렬해져서 억울하게 죽은 위샤트를 위한 피의 보복을 해야 한다거나 생명은 생명으로 갚자는 맹세들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이윽고 1546년 5월 29일 봉기한 시위대는 위샤트의 화형을 명령한 비튼 추기경의 관저를 급습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튼 추기경을 살해한 시위대는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후 세인트 앤드류스는 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1547년 4월 10일 존 낙스 또한 박해를 피해 그가 가르치던 세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피신했다. 낙스는 그곳 사람들의 요청으로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 설교자로 봉사하며 이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게 되었다.
이렇듯 세인트 앤드류스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의 요람이 되었지만, 반정부세력 확대를 우려한 왕실과 교회 당국이 프랑스의 원병과 함께 반격해 와 결국 1547년 7월 말에 함락되고 말았다. 체포된 수비대원 전부는 프랑스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해야 했지만, 다행히 19개월 후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석방된 낙스 일행은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949년 영국 추밀원은 낙스의 종교개혁 정신을 높이 사서 그를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도시인 버위크의 설교자로 임명했다. 이곳에서 낙스는 예배 개혁과 복음적인 설교를 행하며 저명한 설교자로 이름을 날렸으며, 1551년 영국왕 에드워드 6세의 궁정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여왕이 즉위한 직후 영국교회가 가톨릭 복귀를 선언하고 개신교 지도자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낙스는 1554년 영국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머문 후 스위스 제네바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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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개혁 운동을 일으킨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내전 당시 에딘버러의 시민들은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을 위해 종교개혁자들의 편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 ||
그러던 중 낙스는 세인드 앤드류스, 스터링, 에딘버러, 퍼스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비밀리에 형성돼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555년 은밀히 귀국해 전국을 순회하며 가톨릭교회의 교직 제도와 미사 등을 비판하며 종교개혁 사상을 고무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낙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리하여 낙스는 1556년 제네바로 돌아오지만, 소위 ‘종교개혁 추진 동맹’(Lord of Congregation)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1557년 12월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회중을 위하여” 모든 권력, 재산, 생명을 바치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한편, 낙스의 편에 서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제1 스코틀랜드 언약〉(The First Scottish Covenant)을 맺었다. 그리고 그들은 낙스의 귀국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런 와중에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리던 영국의 메리 여왕이 사망했으며 이후 시행된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관용정책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에서도 개신교에 개한 핍박이 누그러졌다. 당국은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서 제한적인 종교관용을 선포했던 것이다. 이에 낙스는 1559년 5월 2일 귀국해서 스코틀랜드에 팽배한 미신과 우상 숭배, 폭정을 제거할 것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3. 내전과 낙스의 스코틀랜드 개혁
낙스와 종교개혁자들이 가는 곳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당시 섭정이었던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했다. 종교관용 정책을 어긴 당국에 분노한 군중이 3개의 수도원을 약탈하고 교회당을 파괴하고 왕궁을 불태우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서면서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 섭정 측과 영국의 지원을 받던 종교개혁자 사이에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던 중 아가일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경, 레싱톤의 메이트랜드 등 정계 주도 인사들이 섭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종교개혁자 진영에 합류했다. 그 결과, 기즈의 메리는 10월 섭정에서 물러났다. 이에 힘을 얻은 존 낙스 일행은 설교 운동에 박차를 가했으며, 1560년 1월 엘리자베스 여왕이 배와 군대를 보내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해 가톨릭교회의 중심지인 리스를 공격해 함락시키면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그해 8월 낙스 일행은 의회를 소집해 가톨릭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프랑스와의 외교 단절을 선언하는 등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하고, 이를 세 번 이상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또한 계급적인 교회 제도의 악습과 오류를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를 결의했다. 이에 대해,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해 낙스를 비롯해 윌록(John Willock), 스포티스우드(John Spottiswood), 더글라스(John Douglas), 로우(John Row) 등 6명으로 구성된 신조작성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을 작성했다.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서는 의회의 승인을 얻어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성경 해석과 교회론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채택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아닌 성령의 조명 가운데 해석되어야 하며, 성경만이 무오하고 절대적 권위를 가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교회 의식 가운데 미신적인 것이 많으므로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할 것을 주장하며,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찬을 영적 임재로 해석했다. 이어 1561년 12월 5일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와 함께 스코틀랜드장로교총회를 조직해,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초의 장로교 총회가 시작됐다.
이 같은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은 후일 장로교로 발전했고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전파되어 그 곳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또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가 1880년대 이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한국에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이런 점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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