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의 인물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미션(cmc) 2009. 10. 19. 07:13

이 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성 별 :  남
입학년도 졸업년도 출신학교 및 전공
학력 비고
토마스는 9살 때 아버지의 새 부임지인 하노버로 이사를 했으며 클란도버리 칼리지(college)에서 3년간
공부했다. 그는 총명했고 공부를 유달리 잘해서 14살 때 옥스퍼드대의 지저스 칼리지(college)에
장학생으로 입학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입학하지 않고 외과의사가 되기 위해 2년간
닥터 워터만 밑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겨 의사공부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의 ‘운들’ 초등학교 교사로 간다.
경력 및 활동 비고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1840 ~ 1866 )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865년 9월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만나 구사일생.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의 와중에 순교(27세)
제 목 발행년도
토마스 목사전 - 대동강가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 2006년 4월
인물 소개
1840년 9월 7일,토마스는 영국의 라도느 지방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경건한 회중교회의 목사였다. 1848년,토마스가 여덟살되던 해에 가족은 농촌의 조그만 마을로 이사하는데
그 순박한 자연을 벗 삼는 토마스의 성장과정은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토마스는 개구쟁이였으며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사랑하는 눈빛 초롱한 과묵한 아이였고,독립심과 우정의 소중함도 비교적 일찍
깨달았으며,기도와 주님을 찬양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1856년,16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좀더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런던 대학 뉴 칼리지에
지원하였다.
생활이 여의치 않은 부모에게서의 도움없이 장학금만으로 생활하다가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결국 건강을 해쳐 휴학을 한다. 그가 휴학을 하게 되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온누리에 속히 그리스도를 전해 주고 싶은 열정적인 선교의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이론적인 학문의 갇힌벽을 넘어서서 선교사명을 감당하고자 열망한 그를 닫힌 눈과
수직적 사고를 지닌 교수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였다. 복교 후 모든 관심과 정열을 선교 사업 준비에
헌신하던 그가 선교사들과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생생한 체험담을 들으면서 그는 더 뜨겁게 자신의
선교의지에 불을 질렀다. 선교사들과의 만남 이후, 그의 모든 생활은 선교를 위한 제반의 준비과정이었다.
당시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를, 1795년 발족한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있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를 직접 방문하고 온 그는 그의 진의(眞意)를 의심하는 교수들에게 재차 그가 중국
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기를 소망하였다. 그에 대한 오해를 푼 교수들이 그의 소망을 허락한
1863년 5월, 비로소 그는 꾸준한 인내가 필요했던 대학 시절을 끝마칠 수 있었다. 자기 희생의 정신으로
봉사하겠다는 결단을 지닌 채 스스로의 자질을 다스리며 분주하게 수속과 절차를 밟던 그에게 마침내
중국 상해 선교사로서의 임명이 떨어졌다. 총회에서 파송절차를 밟은 뒤 토마스는 고향 하노바로 가서
1863년 6월 4일,아버지가 목회하고 계신 하노바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사역지로 혼자 떠나는
토마스를 염려하는 가족의 마음을 받아들여 심사숙고한 끝에 그는 선교사역의 동반자로서 "순진한 비둘기
같은" 캐롤라인 고드페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여렸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토마스의 동행자가 되기를 기쁘게 선택한 것이다. 1863년 12월 초, 마침내 토마스
부부가 중국 상해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낯선 이국땅에서의 매서운 추위와 식생활
곤란,그리고 당시 상해 책임자로 있던 선교사 무에헤드의 불성설하고 무책임한 선교 형태들이었다.
1864년 3월 11일,토마스가 그녀에게 적합한 거처를 마련하고 또 앞으로의 선교 방향도 설정하고자 아내를
떠나 한구로 떠났을 때, 그동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정신적 불안감과 외로움이 겹친 캐롤라인은 유산으로
인해 나흘동안 돌봐주는 이 없이 홀로 병들어 앓다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상해에 온 지 1년 만에 토마스는 다른 일터를 향해 거처를 옮겼다. 상해를 떠나 산동성 즈푸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세관에서 일하던 로버트 하트 경에게 어학적인 재능을 인정 받아 "선교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떠난다는 조건 아래"통역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몸은 비록 통역관으로 묶여 있었지만 토마스는 그 나름대로의 선교활동을 쉬지 않고 계속했다.
그가 시작한 성경연구반은 얼마 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었으며,
그들 스스로가 전도해 오는 귀한 역사도 일어났다. 캐롤라인을 잊기 위해 그는 더욱 이 일에 헌신하였다.
회원들의 토대가 잡혀지면 세례를 주기도 하였고 멀리 러시아 선교 구역까지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토마스는 이제 선교사역에 더욱 헌신하기 위해 새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련을 주시고 단련시켰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만을 위하여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겠다고 서약한 것이다.
그는 미련없이 세관 일을 그만 두었다. 즈푸에 머물면서 토마스는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 겸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알렉산더 윌리암슨 목사와 잦은 교류를 하였다. 어느 날, 윌리암슨의 집에 간
토마스는 그곳에서 조선 천주교인 김자평과 최선을 첫 대면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가 예수회에 대해 아시아 포교를 지시한 후로 쟈비엘이
1541년에 인도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하고 1549년에는 일본에도 복음이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은
1581년에 마테오 리치가 광동을 기점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천주교가 일본과 중국에 전파되자,
그 사이에 낀 한국이 소외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783년 북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북경에 머무는 동안 1784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세를 받고 귀국하여
천주교를 전했다. 불어나는 신자에 놀란 조정에서 이 해에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신해(1791),신유)
(1801),을해(1815),정해(1827)의 박해를 거쳐 1863년 대원군의 집권으로 그 박해는 극에 다드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자평 등 두 청년은 장사도 할 겸 조선 땅에서 이곳 중국 산동성 즈푸로 피신해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모양새나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보아 천주교인이 확실하다는 것을 토마스는 대화
중에 느낄 수 있었다. 토마스는 조선인들과의 운명적 만남을 계기로 조선을 향한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선교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윌리암슨에게 조선 선교의 뜻을 내리추었을 때 그 위험성 조선
선교의 뜻을 내비추었을 때 그 위험성 때문에 윌리암슨이 망설이자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마침내 심사숙고 끝에 윌리암슨이 토마스를 조선으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1865년 9월 4일,
토마스는 윌리암슨이 준 한문 성경을 가지고 조선으로 향하였다. 조선에서의 박해는 자신을 위한
연단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 당시의 조선은 복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토마스는 약 두 달 반 동안 한국의 서해안에서 그 동안 배운 조선어로
복음을 전파해가며 가지고 간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토마스는 그 해 12월 초에 조선을 떠났다.
즈푸에 돌아와 다시 북경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제법 안정적인 선교지의 여건을 만들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잊을 수가 없었다.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는 더더욱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선교 의지를 키워갔으며 이윽고 조선을 향한 제2차 선교여행을 계획하였다.
자신이 조선의 서해안에 뿌린 성경이 몰래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선교 열망을 더욱 확고히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1차 선교여행시 인위적인 위험과 자연재해의 위험 속에서 구사 일생으로 겨우
살아 온 그였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이 나누어 준 성경을 읽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은 병인박해(1866)라 불리는 천구교도 대학살의 시기였다. 이 난의
와중에서 조선을 탈출한 리델,페롱,칼레 세 신부는 프랑스 해군 사령관 로즈에게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참형을 보고했고 이에 격분한 프랑스 정부와 로즈 제독은 함대 출병을 결심하고 토마스에게 통역관으로서의
동행을 요청했다. 이 계획은 프랑스 함대가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좌절되었다. 출병의 여유를 갖지 못하므로
좌절되었다. 선교의 수단을 상실하여 실망하던 토마스는 이윽고 조선으로 가는 미국 상선 제너널 셔면
호라는 미국 상선에 동승할 수 있었다. 이 배에는 토마스를 비롯하여 선장,기관원, 중국인 통역 조능봉 등
모두 24명이 승선했다. 이 배의 선주는 무역을 위해 조선에 간다고는 하지만, 그의 속셈은 조선에 있다고
알려진 금은보화를 약탈하는데 있었다. 1866년 8월 9일.즈푸를 떠난 셔먼호는 백령도를 지나 때마침 장마로
인해 물이 불은 대동강을 쉽게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이 동안에도 토마스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경책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기독교가 사교로 금지된 상태이므로 상륙을 허락할 수 없다는 관군들의 통고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각오로 조선에 온 토마스에게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계획은
순탄치 않았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널 셔면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가면서 평양으로 항진하였다. 그러던 중 대동강의 수위가 갑자기 줄어 셔먼호는 양각도 서쪽에 좌초된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평양의 수비군은 시탄 운반선 서너 척에 화약과 인화물을 가득 실은 다음
배를 엮어 매어 상류로부터 불을 질러 셔먼호 쪽으로 내려 띄웠다.
셔먼호는 화염에 휩싸이고 배에 불이 붙자 선원들이 강으로 뛰어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다.
이 때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에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을 쳐 나왔다. 이 토마스 목사를 포교
박춘권이 칼로 쳐죽임으로써 토마스목사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요, 진정한 의미에서는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이 때가 186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 되는 해였다. 토마스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 도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다가 되돌아갈 때 이것을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갖고 간 성경을 읽은 후에 그는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이후에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가 순교하기 직전에 군중들을 향해 성경을 뿌렸는데, 당시에는 종이가
귀하던 때라 주워간 사람들이 벽지로 썼다고 한다. 이영태라는 사람은 이 벽에 발린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청년 토마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의 짧은 인생을 하나님과 이 민족을 향해 불사른 꿈의 젊은이었다.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그는 얼마든지 화려한 인생을 설계하여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의 재능과 젊음을
하나님 섬기는 일에, 그리고 미지의 나라 어는 낯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치고자 했다.
이 큰 꿈 앞에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이라는 엄청난 장벽이 가로막고 가슴을 찢는 슬픔이 그를 휘몰아
방황케 했지만, 더 처철한 박해의 고통에서 헤메이는 이 민족의 처량한 삶을 확인하게 된다. 박해의
칼바람이 부는 이 동토에서 그는 뜨거운 생명의 소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진한
사랑과 그의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뜨거운 피로 얼어붙은 이 땅을 생명이 움트는 옥토로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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