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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년도 | 졸업년도 | 출신학교 및 전공 |
학력 비고 | ||
1916 평남 평원군 공덕면 진광학교 졸업 1919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 1925 평양 숭실대학교 졸업(이과) 1926 미국 엠포리아 대학 졸업 1929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졸업 1948 미국 엠포리아 대학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56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77 숭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학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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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및 활동 비고 | |||
1931 평양 숭인 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1933 신의주 제2교회 목사(10년 시무) 1939 신의주 보린원(고아원) 설립 1945 서울 영락교회 창립(27년 시무) 1947 영락 보린원 설립 1947 대광학원 이사장 취임 1950 보성학원 이사장 취임 1950 CCF(기독교 아동복지 재단) 이사장 1951 부산 다비다모자원 설립 1952 영락경로원 설립 1952 영락 중, 고등학교 설립 1953 홀트 양자회 이사장 1953 선명회 이사장(36년간) 1954 영락 모자원 설립 1954 숭실대학 학장 역임 1955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40회 총회장 역임 1956 한국 기독교 연합회 회장 1962 서울여자대학 이사장 역임 1967 숭실대학 이사장 역임 1969 영락여자신학교 설립 1971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대학 이사장 역임 1973 영락교회 원로목사 추대 1973 군복음화 후원회 회장 1973 한국교회 진흥원 원장 1973 아세아 연합 신학원 이사장 1976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총재 1976 한국 외항선교회 명예회장 1983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 1984 재단법인 남강 문화재단 이사장 1985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재단법인 이사장 1988 군 복음화 후원회 명예회장 1989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대표 1989 선명회 명예 이사장 1990 한국 총연합회 명예회장 1990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1990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명예회장 1995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 '영락 애니아의 집' 설립 1970 국민훈장무궁화장수상 1992 템플턴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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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발행년도 |
한경직 평전 - 낮은 자의 모습으로 한 시대를 섬긴 영혼의 목회자 | 2003년 3월 |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 2002년 10월 |
평생에 듣던 말씀 : 한경직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설교집 | 2002년 9월 |
아름다운 사람 한경직 | 2000년 5월 |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 - 믿음의글들 179 | 2000년 5월 |
사도바울에게 배운다 | 1985년 8월 |
역경의 열매 1 : 기적의 수수께끼 | 1990년 5월 |
한경직 예화 : 설교예화 1 | 1984년 8월 |
하나님의 영으로 | 2001년 4월 |
주의 말씀 나의 명상 | 1991년 2월 |
장로 시무 핸드북 | 1987년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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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
1902년 12월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부친 한도풍씨와 모친 청주 이씨 사이의 3남1여 중 장남으로 태어남. 간리 마을은 평양 동북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옛날 원산에서 조랑말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선교사 한 분이 순천에서 자산 사인당으로 빠져야 할 길을 잘못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해는 저물고 갈 길을 더 갈 수 없어서 부득불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중 청년 셋이 평양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함께 마을 동쪽 언덕 위 돌배나무 밑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자작교회의 시작이다. 차츰 온 동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한씨 가문만도 20여 가구가 믿게 되었다. 간리 마을 복음화에 정성을 쏟은 분은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마을 동쪽 준령 넘어에 있는 법흥사 부석건물을 헐어얻은 재목과 기와로 첫 예배당을 지었다. 처음 모여 예배드렸던 그 자리에 예배당을 세운 것이다.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의 정석 그대로 이 마을을 복음화 되도록 지도한 선교사들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윗마을 동구 밖에 학교를 세웠는데 이 이름을 진광소학교라고 하였다. 설립자는 방위량선교사였다. 한경직목사의 육촌 형인 한병직목사는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으로 한국장로회 초대 목사중의 한분으로 간리마을의 대선각자였다. 그의 지도적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한경직목사의 교육편력에도 그의 지도의 손길이 있었다. 한목사의 부친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서도 한글과 쉬운 한문을 터득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지런히 일한 결과 소규모의 자작농이 되어 자립할 수 있게 되자 곧 결혼을 하였다. 그때 형편으로는 매 우 늦은 결혼이었다. 한목사가 열살 났을 때에 그 모친이 별세하였다. 한목사는 그 모친이 대단 히 부지런하고 인자한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계시다. 어릴 때에 모친을 따라 목화밭에 가서 목화따는 일을 돕던 기억도 새롭고,간혹 밤에 자다 깨어 보 면 모친의 언제나 늦도록 물레질을 하고 계신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고 말하 신다. 만혼을 하신 아버님은 아들에 대한 두가지 결심을 하였노라고 하였다."내 가 만혼하였으니 아들만은 일찍 결혼해야 할 것이고 내가 배우지 못하였으 니 아들은 힘 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고 하셨다. 한목사는 13세에 결혼하였다. 부친께서 결심하신대로 비교적 일찍 결혼한 셈이다.부인은 뒷동네 김씨댁 규수였다. 연상의 신부였기에 살림에 능하였다. 한목사가 남평양 영성학교에서 교편 을 잡고 있을 때 첫애기 순희를 낳았다. 미국유학 시절에는 특별한 환경에 처해 있는 부인들을 위하여 세운 숭현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한목사가 미국서 돌아왔을 때에는 건강상의 큰 문제가 있을 때였다. 투병 2년간의 병은 폐결핵이었으니 치유 후의 요양과 섭생, 음식과 수면 등 생활 전폭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여러가지 일을 수시로 접해야 하는 목사의 생활로서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일하고 내일 쓰러진다 하더라도 자신 의 몸을 위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부인 김찬빈 여사가 해내었다. 한목사의 오수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문 밖에 나가 앉아 아이들이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지어 방문온 손님과의 대화하는 시간까지도 제한하였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너무 지 나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목사의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 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한목사는 "그이는 나의 은인이라."고 까지 하였 다. 한경직목사가 영락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목회자로서 후대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한목사 자신이 신앙과 인격과 경건과 성 경중심의 목회로 일하였기 때문이다.다른 한편으로는 한목사의 일생 목회의 반려자로서 배후에서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고 목회의 대성을 위해서 일편단 심 희생 봉사한 사람이 부인 김찬빈권찰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군을 위하여 이렇게 희생하는 가운데 김찬빈권찰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이 질환이 불치의 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74년 12월 31일 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한목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하였는데 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참으로 인간의 수명이란 인간이 무어라 짐작할 수 없음을 새삼 느꼈노라"고 하였다. 일상생활의 균형이 깨어질 때 누구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삶을 주장하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에 깨어진 삶의 균형도,내심의 당황함도,우리 주님 친히 치유해 주시고 바로 잡아주셔서 보다 더 큰 것으로 한목사의 생활을 메워 주시고 채워주심을 감 사하는 신앙을 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딸 순희는 목사의 아내가 되 었으니 만족하시리라고 짐작되고 아들 혜원은 일찍 미국가서 공부하였다. 목사가 되어 미국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으니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목사에게는 친손과 외손 그리고 외증손이 있어서 크게 위안이 된다. 한목사님은 어려서 마을 서당에 다니지 않고 기독교 교육과 애국교육을 철 저히 하는 진광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진광소학교의 교육을 전담한 선생은 홍기두 선생이었는데 홍선생 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경영하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 학교 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다녔다. 진광에 부임한 후 30-40명 학생을 전담해서 가르쳤다. 홍선생은 한학과 신 학문을 겸비한 분이었다. 신앙이 돈독하고 덕망이 높았으며 민족의식이 투 철하고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이 어른의 교육적인 영향은 매우 컸다. 한목사는 통학하는 길옆 어느집 대문에 크게 인쇄하여 붙인 성경구절(요한 복음 3:16절)을 가면서 오면서 읽는 가운데 자연히 암송하게 되었다고 한 다. 이것은 그로서 처음 암송한 성구인 동시에 한목사의 어린 시절에 시낭 적 기초를 갖게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이런 경험을 가진 그는 지금도 [성경암송]교육과 [계시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 한다. 한목사의 지능은 출중하였다. 특히 수학의 재능은 누구도 추종을 불허하였 다. 이것을 간파한 한병직목사는 자기 동생을 반드시 중학교에 진학시켜야 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다. 한목사는 진광에서 이미 한반 월반하여 그 실 력을 과시하면서 드디어 진광을 졸업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시국관계로 오산학교 당국은 졸업식을 준비할 경 황이 없었다.결국 한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식 없는 졸업을 하였다. 오산을 떠난 후 시골 집에 한거하고 있을 때에 평양부근 남산고을 교회에 서 경영하는 영성(英成)학교의 교사로 초빙을 받았다. 때가 때인 까닭으로 한목사는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진광소학교 은사인 우용진선생을 찾아가 상의하였다. 부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우선생의 의견을 따라 영성학교에 부 임하였다. 처음부터 한목사는 대학진학의 꿈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남산골의 영성학교에서 평양과는 지척이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평양에 나가 숭실대학을 구경도 하고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은근히 알아보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비조달인 바 돈없는 한목사로서는 이 문제 해결 없 이는 대학진학의 문은 열릴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꾸준히 알아본 결과 고학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학의 길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일을 도 와주고 학비를 얻는 일을 말한다. 당시 남산골 교회에서는 석근옥집사의 조 부이시다. 석전도사는 한목사를 방위량선교사에게 소개하였다. 방선교사는 안주교회 선교사로서 숭실대학의 이사이기도 하였다. 방선교사는 자기가 관 할하고 있는 구역의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자기의 서기일을 맡겼다. 이로써 대학진학의 꿈은 실현되었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방위량선교사는 한목사에게 미국유학을 권유함과 동 시에 유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방선교사 자신이 준비해 주었다. 월남을 결김한 한목사는 당시 백마에서 활동하시던 윤하영목사와 함께 김 치선청년(현재 영락교회의 시무장로,숭전대학총장)의 안내로 정든 땅을 떠 났다. 1945년 10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목사가 설정한 세가지 사업 목표와 네가지 지도방침은 영락교회의 실상 과 그 참 모습을 설명하는 [씨와 날]이라고 본다. 이것은 영락교회의 뿌리 중의 기간이 되는 뿌리로서 영락교회의 역사적인 뿌리이며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가지 사업 목표라 함은 [전도][교육][봉사]이다. 한목사의 증언대로라면 이 삼대사업은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 다.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나 꼭 강조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즉 영락교회가 계획하고 경영하는 모든 일들이 이에서 연역되고 이에서 귀납되게 하는 것이 이 사업 목표를 세운 한목사의 뜻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한목사는 신의주에서 13년간, 영락교회에서 27년간,40년목회를 일기로 일 선에서 은퇴하셨다. 만사는 다 [때]가 있다. [나는 때]가 있으며 [죽는 때]가 있고 [시작한 때]가 있으니 [끝나는 때]가 있다. 70세를 고희라고 한다.살만치 살았다는 뜻도 있겠지만 인간의 수명의 가장 귀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도 있따. 이 중요한 단계에까지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고희라고 했다고 생각한다. 한목사는 정년은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소감의 말씀과 감사의 말씀을 하신다. "어언 내 나이도 70이 되었으며 고희의 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 다. 더구나 폐결핵으로 앓고 있을 때에 3년만이라고 이 생명을 더해주시면 하는 소원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고희의 수를 누리다가 정년 은퇴할 때까지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이다. 나의 이러한 감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따른다." 한목사는 기회있을 때마다 교역자와 장로, 제직과 여러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1.목사님들에게 목사는 모름지기 겸손하고 성실해야 하며 생활화된 설교로서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교역자란 먼저 그 자신이 구원받은 자로서 자신의 생 활이 산설교임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는 천국의 문지기로서 그 자신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름받은 소명감이 분명하여 신령한 눈 이 날마다 밝아져 보는 것이 분명한 비죤의 사람이어야 한다. 건축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지으려는 집을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듯 교역자는 비죤을 가지고 목회에 충실히 임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는 계속 자기 성장에 매진하여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 목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어야 한다. 물질,명예에 있어서도 그리고 성공에 대한 관심에도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성령으로 충만 하여 언제나 기도의 생활을 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2.장로님들에게 공정하게 교회를 다스려야 하며 덕으로 교인들을 대하여야 한다.[말]을 조 심해야 하며 [교회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이겨야 한다. 성서에 명시된 장 로의 자격을 생활화하여 뭇교인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어야 한다. 3. 전도사님들에게 우리 교회가 이렇게 커지니 전도사님들의 역할도 유난히 커져가고 있다. 목사님들 보다도 도리어 교인 접촉이 많고 또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전도사 님들의 임무가 어떤 면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선 한 목자가 되기를 바란다. 적절한 말씀으로 먹이고,기도하고,돌봐야 할 것 이다.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에 축복이 같이 하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음 성이 들리는 곳에 크신 하늘의 위로가 수반되기를 바란다. 4. 청년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근 면],[성실],[정결],[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삼아 이를 기리고 생활화하여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라! 나라사랑하는 참 길을 주안에서 찾으라! 나라가 여 러분을 부를 때에는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5. 부녀들에게 봉사와 섬김의 도를 힘써 지켜 교회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편만케 할 것 이며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전도사업에 가일층 힘을 기울 어여 할 것이다. 6.학생들에게 우리가 사는 20세기의 현실을 직시하세요. 이 세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식이 팽창하고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라! 지금은 이지식,이 기슬이 도리어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소.무슨 의 미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핵] 무기가 그 하나이다. 지식만능 기술만능이란 말도 옛 이야기이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 만도 부족하다. 이 지식, 이 기술을 바로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 식과 기술이 안겨주는 이 엄청난 힘을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바로 쓸 줄 아 는 사람이 과거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교육은 지식과 기술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것들을 배우는 동시에 이 모 든 것을 바로 쓸줄 아는 인간의 도야가 필요하다.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만 들지 못한다. 여기에 신앙문제가 들어온다. 인간은 약하다.인간은 죄인이 다. 구주가 필요하다.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신앙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학문명이 발전할수록 참종 교가 필요하다. 오직 참된 신앙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되고, 새사람이 될 때에 과학이 안겨 주는 모든 힘을 나 자신을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아니,온 세계를 위하여 바로 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내 마음과 내 가정과 내 나라와 아 니,온세계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것이다. 사람은 약하다. 내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나를 본래 지으신 조물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7. 집사님들에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니 주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사랑하라.[법]과 [규율]과[경우]를 초월하여 사랑과 화합으로 금도를 넓혀라.모든 불의를 사 랑으로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교회는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임을 기억 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인내로 교회 평화를 도모하라. 8. 신학도들에게 모든 학문 가운데 신학을 택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명감이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까닭이다. 체험과 그 환경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소명감 만은 누구나 공통할 것이 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도들은 이 소명감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소명감이 있는 신학도로서는 간단없이 "경건과 학문", 이 두가 지를 기억해야 한다. 꼭 같지는 아니한 것이나 중생의 체험을 통한 새 사람 이 되어야 하겠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성경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생활을 위하여는 매일 기도의 시간과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리고 모든 신학에 관한 학문을 진지하게 공부할 것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 지 말고 성경과 교회역사를 통하여 내려오는 그 중심적인 조류를 파악하기 에 힘쓸 것이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요 교회도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고 교역자는 우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또 그리스 도인의 최고 목표는 그리스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때로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라는 것 을 기억하고[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나아가기를 바란 다. 9. 교사들에게 모든 교사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어린 생명의 영을 맡은 청지기임을 알 아야 한다. 깨달음 없이 깨닫게 할 수 없으며 서지 못하고 서게할 수 없음 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믿는 교사는 이 민족의 새문화 창조의 역군임을 알 아야 한다. 사생동행 솔선수범의 곧 산 교육임을 명심해야 한다. 10. 공무원에게 대한민죽 공무원으로서 온 국민을 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임을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맡은 바 일에 충 성을 다하여 봉사하기를 바란다. 적은 일에도 충성하고 꾸준히 충성하기 를 바라며 특별히 국각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성경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러분 하나 하나는 우리 국가의 대표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우리 국민도 그리고 외국인들도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우리나라를 평가하게 된다. 관존 민비의 옛 사상을 온전히 버리고 권리의식의 자세도 씻어 버리고 문자 그대 로 공복의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 상식과 양식으로 모든 공무를 처리해야 하고 진정한 애국 애족의 정신과 올바른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깨끗한 생활 의 터전을 위하여 근면과 성실과 친절과 온유 겸손의 태도로 정말 민중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가난한 자,약한 자, 권세없는 자들을 잘 돌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고임을 받고 국가중 흥에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이며 실로 보람있는 삶을 가지게 될 것이다. 11.고학의 길 한목사님은 숭실대학 재학시에도 고학을 했지만 믹구 유학시에도 줄곳 고 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목사님의 가정형편으로는 고학하지 않고는 대학의 문을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숭실대학 시절의 고학은 돈벌어 학비를 조 달한다는 생각보다는 고학하는 그 일 자체에서 큰 보람과 큰 뜻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신다. 맡은 일에 취미와 성격에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하는 공 부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신다. 미국유학 시절에도 한목사님은 계속 고학을 하셨다. 학교에서 주는 대여장 학금도 있었고 학비를 보조하여 주는 선의의 어른들도 있었으나 고학을 계 속하셨다. 남의 상점에 가서 아침 저녁 청소를 해 주기도 하고 클럽에서 웨 이터 일을 하면서 숙식비를 벌기도 하였다. 고학을 통하여 얻은 것은 그 일 자체의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정신과 뜻과 생활에 있음을 경 험하였노라고 하신다. 우선 약속을 지켜야 하고 시간은 엄수해야 하고 책임 을 철저히 완수해야 하고 결근이 없어야 한다.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 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일을 시키는 사람은 시키는 사람으로서의 만족을 얻게끔 하여야 하고, 일하는 사람은 일 하는 사람으로서의 유익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여기에 삶의 필요한 사회적인 훈련이 있고 인격적인 훈련의 요소가 듬뿍 있음을 느끼셨노라고 하신다. 일을 시키고 일 을 하는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바람직한 인간 관게에서 창조되고 얻어지는 근로의 보상은 매우 큰 것임을 경험하셨다. 이것이 영구적인 직업이 아닌 임시적인 아르바이트라 하더라도 이 일을 통하여 얻어지는 직업에 대한 태 도와 훈련의 뜻이 매우 큰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하신다. 성실한 고학 생활은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신다. 한경직 목사의 공적이 이토록 빛나게 보이는 것은 그의 근검한 개인생활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락교회와 교계 그리고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영락교회가 마련한 남한산성의 조그만 외딴 집에 기거해 왔으며 6평 남짓한 그의 방에서 기도로 그의 여생을 보내었고 2000년 4월 19일 98세에 하늘로 돌아 가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