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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년도 | 졸업년도 | 출신학교 및 전공 |
학력 비고 | ||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미국 선교사. 한국이름은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72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대학·뉴브런스윅신학교 졸업, 1884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어 85년 감리교 선교사 H.G.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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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및 활동 비고 | |||
1886년 2월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이 고아원은 후에 야소교 학당, 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887년 한국 최초의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한국어 문법책을 영어로 집필, 성서번역위원회 초대 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한국기독교교육회 회장 등으로 일하는 한편,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교회연합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언더우드는 또한 콜레라 퇴치 작업에 힘을 기울이고, 그리스도신문을 발행하였으며, YMCA를 조직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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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발행년도 |
언더우드 - 귀염둥이 처음읽는 신앙위인전 6 | 2006년 6월 |
언더우드 목사의 선교편지 | 2006년 1월 |
언더우드家 이야기 | 2005년 7월 |
핑크 캐딜락의 여인 | 2003년 6월 |
한국교회의 선구자 언더우드 | 2002년 4월 |
와서 우릴 도우라 | 2000년 8월 |
하나님 내 영혼이 아파요 | 1996년 5월 |
조선에 온 선교사 언더우드 | 2000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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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믿음이 두터웠고 화공학 방면에 재주가 있어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였고 타자기와 묵지, 안전지 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 예술원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1865년 5세 때 생모가 별세한 후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존은 부친(언더우드의 조부)인 토마스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았는데 토마스는 의학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업자로서 18세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설교가이며 해외선교와 교파연합운동에 관심이 컸던 '와우'(Alexander Waugh)목사의 딸과 결혼하였다. '와우'의 폭넓은 도량, 인류애, 통합에 대한 집념, 지도력은 외손자인 언더우드에게 영향을 끼쳤다. 언더우드는 헤스부룩 소년학원을 마친 뒤 17세 때인 1877년 뉴욕대학에 진학하였는데, 그는 이 곳에서 희랍어와 웅변과목에서 월등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삼각법, 분석기하학, 천문학, 화학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이런 준비는 후일 제중원에서 자연과학 계통의 학문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1883년 여름과 이듬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New Jersey) 즉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선교사의 비전을 갖게되었고, 1884년 11월 목사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선교를 위하여 의학을 1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의 인도 선교 소망은 열네살때부터였으나 후에 선교지방 지역을 한국으로 바꾸었다. 그는 화란개혁교회의 선교부에 한국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재정부족을 이유로 거절되었다. 그 후 북장로교회에 가서 파견을 요청하여 처음에는 거절되었으나 곧 승인을 받게 되었다. 그 승인은 한국지망선교사가 파송되지 못할 형편이 되자 그의 몫으로 넘겨진 것이었다. 한국에는 이미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상해에 파송되었으나 곧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임지를 한국으로 옮길 것을 지시받고 1884년 9월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한국의 어려운 선교상황으로 인해 미국공사 푸트에게 보호를 요청하여 그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임명되어 표면적으로는 의사로 활동하였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부인이 임신중이고, 한국정세가 불안하다는 미국 공사관의 요청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다. 언더우드는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하였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들어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곳은 오늘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건너편 서울예원중학 자리였다. 언더우드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는 처음에 '정동교회'로 불려지다가 창립 3년 후에는 새문안제일교회로 혹은 새문안교회로불려지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지방에도 많은 교회를 세웠다. 선교사들은 1905년-1910년까지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에 종사하는 자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리하여 언더우드는 1916년 1월 초 일본으로 건너가 하루 9시간을 일본어 공부에 매진하고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교제를 넓혔다. 이런 강행군은 그의 몸을 심히 쇠약하게 하였고 병이 중하여 그해 3월 조선으로 귀환하였으나 31년 전 조선에 처음 입국했던 같은 달, 그리고 거의 같은 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의사의 권고에 따라 9월에 애틀랜틱 시(Atlantic City)의 병원에 입원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신간에 조선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