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초대교회사

초대교회 신앙의 위인들

미션(cmc) 2009. 12. 16. 08:43

초대교회 신앙의 위인들

 

1. 터틀리안(Tertullian)

150년경 카르타고에서 아버지는 백부장, 어머니는 이교도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40세에 신자가 되었다.

‘서방신학의 대변자,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몬타니즘과 연관이 깊었다. 삼위일체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목회적 관심이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흐른다.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두 번 이상 용서가 되지 않는 7가지 치명적인 죄들, 유아 세례를 반대하였다. 플라톤주의를 거부하고 스토아주의로 기울었다. 인간이 믿는 것은 그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와 철학을 대립되는 것으로 보고 철학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고등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에 두었다. 라틴의 법전을 신학적 용어로 집대성함으로 라틴신학의 정초를 놓았다.

그의 신앙관은 시조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는 죄악론에 입각하였다. 영혼은 부모에게서 유전 받았다는 유전설을 취하였다. 죄도 유전 받은 고로 죄가 육체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포괄했다고 하였다.

2. 키프리안(Cyprian)

200년에 카르타고의 이교도의 부잣집에서 출생, 수사학, 문학, 법학 교사가 되었다. 246년에 캐실리아누스 장로의 영향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는데, 일생동안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제2의 출생은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의 방편에 의해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하였다. 기독교인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장로로 안수로 받았고, 248년에 감독이 되었다. 노바투스가 주도하는 5명의 장로집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기독교인들이 그를 감독으로 추대되어 8년 동안 헌신적으로 감당하였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로 사막 동굴에 피난 가서 서신으로 교회를 격려하였다.

키프리안의 교회론은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 교회를 버린 자는 외인이고,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없다. 노아 방주 밖의 사람이 멸망 받음 같이 교회 밖의 사람은 멸망당한다. 교회는 단일, 즉 가톨릭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있을 수 없다. 교회는 감독에 의해 세워졌으니 감독 없으면 교회도 없다. 분리한 교회나 이단자의 세례는 무효이다. 교회 통일을 주장한 가톨릭교회 사상의 시조이다.

3. 이레니우스(Irenaeus)

1) 생애

카토릭 교회 ‘교의학의 아버지,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신학자’라 불린다.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권위 등 여러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2세기 영지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역설하였고, 기독교교리를 종합시킨 인물이다. 일생동안 영지주의를 논박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계획을 역사 신학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다.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를 반대하면서 헬라적 사색의 도움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순히 새로우면서도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고 하는 이들의 견해도 반대하였다. 오직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였다.

이레니우스는 130∼140년 사이에 소아시아 특히 서머나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의 제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때, 177년 포티누스 감독과 다른 약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리용과 비엔나에서 순교당한 후 리용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가 202년에 순교 당하였다.

2) 저서

이레니우스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 『사도적 설교의 논중』이라는 저서만 남아 있다.

『소위 영지주의의 고발과 논박』==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기록한 작품으로 <이단논박>으로 알려졌고, 5권으로 되어 있다.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프톨레매우스의 제자들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사도적 설교의 논중』==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창조에서 최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를 제시하였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창조는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무(無)에서의 창조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창조주와 하나님을 별개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고, 둘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3) 사상과 가르침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 속에서 완전히 찾을 수 있으며, 이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레니우스는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전도시키려고 하였다. 타락으로 인간은 마귀의 종으로 예속되었다고 하였다. 인간의 타락에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연의 계획을 수행하심으로 실행된다고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즉 계속성과 완성을 동시에 주장하면서 신구약성경의 극단적인 대립을 주장하는 이들을 배격하였다. 창조와 구속은 연속선상에 있고, 이원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창조와 구속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할 수 있는 구심점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원형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인간들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인간상을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일환이다.

이레니우스의 전통(가르침)은 성경에서 유래하며 교회에 보전되어 왔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한 스승으로부터 다음 스승에게 전수되었고, 이것은 일반적으로 확산되었다고 하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정확성은 그들의 가르침의 통일성에 의하여 확신된다고 믿었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에 대하여 “저 가장 영광스러운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설립된 대단히 크고 가장 오래고 잘 알려져 있는 로마의 교회”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는 구속사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것은 창조와 구속을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구약과 신약을 통일시키고 있다. 이것은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하나이며, 같은 하나님임을 확신하는데 비롯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 신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4. 오리겐(Origen)

3세기 초 기독교계에서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과 이단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인물이다.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254년에 데시우스 황제(Decius) 박해 때 얻은 고문 휴유증으로 두로에서 죽었다.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60평생에 걸쳐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서 기독교신앙을 변호하였고,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에서 기독교를 증언하였고, 교회 내에서는 기독교교육자가 되기도 했다.

오리겐의 부모는 원래 이교도였으나 오리겐이 어린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세베루스 황제 때에 교회가 심하게 핍박받을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순교를 당하였다.

아버지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리겐은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그의 옷을 감추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오리겐은 순교를 단념하였지만 “우리 때문에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라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보내서 부친의 순교를 격려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오리겐에게 독실한 신앙교육을 시켰고, 오리겐에게 헬라문학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가르치며 매일 성경을 외우도록 하였다. 그런 후에 헬라문학, 언어학을 배우게 되었다.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서 알렉산드리아 세례 지원자(catechumens)학교를 관장하게 되었다. 대부분 밤 시간에는 성경연구를 하였고, 대단히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을 하였고, 간혹 금식기도도 하고, 잠자는 시간도 제한하고, 끓어오르는 열정 때문에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맨발로 다니기도 하고, 꼭 필요치 않은 음식과 포도주를 삼갔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까지 하였다. 오리겐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욕적인 생활의 표본들을 제시하면서 많은 방문자들도 그와 동일한 행로를 추구하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오리겐은 신비주의적인 삶을 살았다. 무분별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어느 정도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신앙에 관한 완벽한 이성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오리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명상함으로서 영적 생명에 진보를 이룩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러한 영적 명상이 신자로 하여금 기독교적 삶을 살도록 어떤 시각을 영혼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삶은 영혼을 순결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명상에 도움을 준다고 하였다.

오리겐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 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나타났다.

오리겐은 헬라철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갖고 있었다. 헬라철학은 18세에 교육에 종사하게 되면서 새신자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외부로부터 즉 유대와 이방인 사회로부터 오는 공격은 물론 내부로부터 오는 이단들의 주장에도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신플라톤주의의 원조인 암모니우스 사카스를 연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유세비우스는 “헬라인들까지도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존경할 정도로 이방 철학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고 전한다.

오리겐은 요한복음, 마태복음, 아가서, 로마서, 창세기, 시편, 선지서, 바울서신에 대한 주석을 썼다. 수백 편의 설교를 썼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겐의 생애에 6000여 권의 책을 기록했다고 전한다. 그에게는 잘 훈련된 소녀들로 구성된 7명 이상의 필경사가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교대로 오리겐이 구술하는 것을 받아썼다.

『제 1원리에 대하여(페르 아르콘: De Principus)』== 알렉산드리아에서 신앙을 교육하는 동안 저술한 책이다. “고대가 낳은 최초의 조직 신학 교과서”라고 불리는 책이다. 신론, 창조론, 타락론,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 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다. 오리겐은 구약성경의 사건들, 인물들, 규범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성경의 진리를 밝히고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화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 ==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하는 글이다. 셀수스는 에피큐리안이었는데 교회를 비평하였는데, ⓐ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 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에게서 얻었다. ⓑ 이적은 참으로 기적이 아니라 마술일 뿐이다. ⓒ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이다. ⓓ 마리아는 간음한 여인이며, 로마 병사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태어난 아이가 예수이다.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에서 출생하였다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셀수스의 비평에 반박하였다.

오리겐의 신관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성자를 성부와 같은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성부는 영원 전에 성자를 낳았다고 하였다.

5.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

콘스탄틴는 288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린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이다. 브리튼, 고울, 스페인을 통치하였던 그는 박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부친이 305년에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을 때 콘스탄티누스의 충성을 위한 볼모로 갈레리우스의 궁전에서 지내야 했다.

1)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다.

306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심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콘스탄틴은 갈레리우스의 궁전을 빠져 나와서 고울 지방에 갔는데 몇 개월 후에 부친이 죽고, 그곳의 군대는 콘스탄틴을 후계자로 천명하게 되어서 권력투쟁이 시작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맥시미안(Maximian)의 딸인 파우스타(Fausta)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동방의 로마제국 지배를 꿈꾸던 맥시미안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306년에 부친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 서방 제국의 아우구스투스로 선언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먼저 브리튼과 고울 지방의 로마 군인들의 충성과 지지를 확신한 콘스탄틴은 312년 “이교적 마술을 의지하는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권좌에서 축출시키기 위해서 이태리로 행진하게 된다.

로마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밀비안 다리에서 역사적인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전쟁 하루 전날 312년10월25일 대낮에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다. 그 위에는 “이 표지로 정복하라(In hoc signo vinces( in this sign conquer)”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콘스탄틴은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하게 된다. 다음 날 26일 전쟁에서 콘스탄틴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막센티우스는 티베르 강을 건너 도망하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콘스탄틴은 24세에 서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그는 이 전쟁에 승리하면 기독교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동방에서는 305년에 디오클레티안이 막시미안과 함께 퇴위한 후에 갈레리우스가 동방의 아우구스투스가 된다. 307년에 갈레리우스는 친구이며 동료군인인 리키니우스를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의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하게 되고 311년에 갈레리우스가 병사(病死)하게 되자 리키니우스와 막시민이 함께 일리리아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야심이 컸던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틴의 누이를 아내로 맞아드리면서 동맹을 맺게 된다. 313년 2월에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최초의 선언이 되었다. 이 칙령은 교회에 예배의 자유와 그전에 빼앗긴 모든 재산을 다시 돌려주는 것을 포함했다.

2) 박해의 종언

서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틴과 동방의 통치자가 된 Licinius는 314년 회전했으나 양자 사이에는 10년의 평화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이에 중요한 변화는 리키니우스가 이교도들의 지지를 기대하여 반 기독교적 노선으로 선회하게 된다. 결국 콘스탄틴은 리키니우스 마저도 물리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23년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아들 Crispus가 해전에서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패퇴시켰다.

콘스탄틴은 그의 장인 막시미안, 첫째 처남 막센티우스, 둘째 처남 리키니우스, 아들 크리스푸스, 아내 파우스타를 죽이고, 그는 단독 그리고 무소불위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밀라노칙령을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는 십자가형 사형제도와 검투를 폐지하고, 축첩 제도를 엄벌하였고, 이혼에 제한을 두었다. 여자에게도 토지 이외에 소유권을 인정하였으며, 죄인 이마에 화인(火印) 금하였다.(자자형금지)

교회의 법률을 국가가 공인하여 교인간의 쟁투에 대한 교직자의 판결은 법률상 유효하게 되었으며, 대의회 결의는 국가의 법률이 되었다. 교회의 법률에 대한 불가침을 선포하였고, 사죄, 감형 요구권을 교직자에게 부여해 주었다.

콘스탄틴은 이교제사장에게만 허락했던 면세를 기독교 성직자들에게도 확대하였고,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고,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고 하였다. 감독의 권한을 확대시켜서 소송을 감독의 법정에서 다를 수 있도록 하며, 일반 관료들은 감독의 판결에 순종하도록 하였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돌로 쳐 죽이는 풍습을 금지시키고, 교회의 건축을 장려하였다. 박해 받을 때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며, 교회 재산 관리법을 제정하고, 기부금 제도를 공인하며, 타종교의 잔인성과 불결한 행동을 금하였다. 관직에는 기독교 신자에게만 허락하였다.

332년에 수도를 보스포루스의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그 이유는 야만인과 페르시아인을 방어하며, 새로운 기독교 수도 형성하고,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목적으로 수도를 옮겼다. 수도를 옮긴 다음에 그 도시를 확대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고 수많은 교회들을 건축하였다. 파손된 이교사원을 수리하거나 다시 건립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기독교인들이 이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콘스탄틴을 계승한 세 아들들은 부친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게 되었다. 둘째 아들은 341년에 이탈리아에서 이교 희생제를 폐지시키고, 셋째는 미신 숭배를 금지시키고 어리석은 이교적 희생 제사를 폐지하고, 이교사원을 폐쇄하라고 하였다.

콘스탄틴은 세 왕자에게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케 하였다.

장남은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차남은 콘스탄스(Constans), 삼남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차남은 형을 죽이고 동생과 함께 나라를 차지하다가 차남은 10년 후 자객에게 암살당하게 되고, 천하는 삼남에게 통일되게 되었다.

6. 앰브로스 (Ambrose)

고율의 수도 트레베에서 340년에 출생하였다. 고울, 브리튼 그리고 스페인 전역의 통치자로서 로마에서 가장 세력이 큰 정치가 중의 하나였던 그의 부친은 앰브로스 13세 때에 죽었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 법률가가 되기 위해 로마에서 교육 받았다. 30세에 이탈리아 상부의 통치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히 다스렸다.

하나님은 지성적인 정치가의 일생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꿔놓았다. 374년 아리우스 파였던 밀란의 감독 아욱센티우스가 죽은 후에 정통주의와 아리우스파 사이에 감독선출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중, 앰브로스는 질서유지를 위해 선거장에 참석하여 선거의 진행을 참관하게 되었다. 선거 중반에 “앰브로스를 감독으로!”라는 어린 아이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그 어린아이의 음성을 귀담아 듣게 되었고, 그 외침은 하늘의 명령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앰브로스를 감독직에 선출하게 되었다.

앰브로스는 세례도 받지 않았고, 세속적인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출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감독선출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었다. 감독직을 수용한 앰브로스는 373년11월24일에 세례를 받고 12월1일에 감독직에 오른 후에 397년 사망할 때까지 탁월한 행정가로 교회를 개혁해 나갔다.

감독직에 오른 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바쳤다. 군림하는 감독이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찾아가는 감독이 되었다. 금전에 깨끗하고 삶에 솔직하고 성경연구에 게으르지 않은 성직자의 모습을 지녔다. 앰브로스의 영향으로 어거스틴이 개종하게 되었다.

앰브로스는 철저하게 전통주의교회 입장에 서 있었고, 아리우스파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퇴치하려고 하였다.

390년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로마군인 장교 한 사람을 살해한 사건 때문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데살로니가 백성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7000명의 데살로니가 인들이 학살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 때문에 앰브로스 감독은 황제에게 “데살로니가 사건은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지극히 잔악한 사건”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항의하면서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황제가 묵살함에 따라 기독교인이었던 황제는 주일날 황제가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왔을 때 앰브로스는 황제의 출입을 막고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황제는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황제의 참회가 있은 다음에 예배에 참석케 하였다.

7. 제롬(Zerome)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교회에 수도원제도를 도입하여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넓은 식견과 빼어난 언어적 은사는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빼어난 성경번역가로 남게 되었다.

이탈리아 북부 스트리돈 성읍에서 331년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콘스탄틴 황제가 즉위하여 기독교가 발전하던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제롬을 로마에 보내서 수사학과 문법을 공부시켰다. 로마에 있는 동안 세례를 받은 제롬은 독일 트리엘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기독교서적을 읽고 수도생활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

제롬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모델은 키케로의 이상과 기독교신앙을 합일시켜 당대의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변호하는 일을 했다.

안디옥에서 장로로 안수를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잠시 체류한 제롬은 382년부터 385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감독인 다마수스에게 발탁되어 시편과 복음서의 라틴어번역을 의뢰받고 이것을 계기로 22년 동안 번역 사업을 완수하여 구약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로마를 떠난 제롬은 팔레스틴의 성지를 방문하고 베들레헴에서 사역하는 동안 히브리어에 기초한 성경번역을 계속 추진하여 구약성경 완역을 405년경이었다. 제롬은 성경번역 외에도 150여 개의 서신을 남겼다.

8. 어거스틴(Augustine)

역사, 신학, 철학, 문화 등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어거스틴은 “고대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동방교회의 전통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기독교 전통을 정통주의화 하면서 서방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중세의 스콜라철학, 교황의 정치, 교회제도의 정립의 초석을 이룬 인물이다.

1) 성장배경

354년11월13일 북아프리카의 누마디아 지방 타가스테에서 패트릭(Patrick)과 모니카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은 죽기 얼마 전에 개종하였고, 모친 모니카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뛰어난 수재였다.

어거스틴은 17세에 유학생활을 하던 중에 카르타고에서 여러 여인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진리에 대한 열망이 끊이지 않았는데, 버질과 키케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 사상적 배경

마니교 == 373년 육체적인 방황과 지적인 방황을 하던 19세에 동방에서 기원된 마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젊은 시절 자기 정체를 인식하던 철학 체계가 마니교였다.

신플라톤주의 == 어거스틴이 29살 때에 마니교를 청산하고, 카르타고를 떠나서 로마로 진출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의 원조인 플로티누스에 몰두하여 황홀경을 체험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이원론과 아카데미 회의주의를 동시에 극복하고 영적실체를 발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는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을 밝혔고, 내적 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추구하게 된다.

3) 어거스틴의 회심

어거스틴이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밀란으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384년 밀란으로 이주한 어거스틴은 앰브로스 설교에서 기독교가 웅변적일 수 있고, 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동시에 아다나시우스의 <성 안토니의 전기>는 어거스틴에게 상당한 도전을 주어 세상과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로마서13;13-14절에 의해서이다.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84년 밀란으로 이주한 후에 밀란의 감독 앰브로스의 설교에 감명을 받고, 386년에 기독교로 귀의하고 387년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수년 후 어거스틴은 히포(Hippo) 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395년에 히포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430년 게르만족인 반달족의 침입 때에 말 발급소리를 들으며 임종하였다.

4) 사상

a. 인식론

플라톤과 기독교전통을 함께 수용했으며 이 둘을 완벽하게 연합시킨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토마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를 종합한 실례로 평가받고 있다.

어거스틴은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였다.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어거스틴의 노력은 세례 직후에 저술한 <독백(Soliloquia>, 394년의 <참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 395년 6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416년에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나타난다. 신플라톤주의의 구조 속에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은 초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이성을 통해 신앙을 발견한다는 사실, 즉 신앙을 찾고 지성을 발견한다.”는 인식론 원리를 갖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믿는다. 나의 힘이 미치는 한 나는 순종하리라. 나는 그에게 나의 능력을 크게 하여 주실 것을 열심히 구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근본적으로 자기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랑의 개념에는 자아를 포함시켜야 하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개인 의지의 완성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 의지의 완성을 통하여 이룩하려는 사랑은 큐피디타스(cupiditas)이며, 세속적인 선을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회심 이전에 인간의 삶을 특징지우는 행복론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카리타스(Caritas)에 기초한 행복론이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와의 결합을 통하여 이룩되는 사랑을 말하며 회심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지운다.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큐피디타스가 지배하는 인간이 회심 이후에 카리타스가 지배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여 갔다. 즉 의지 중심이 세상적인 것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사랑의 두 개념 -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 - 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b. 교회론

도나투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인격적 체험 대상으로 믿었고, 그리스도의 양성을 주장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원죄를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확신하였다. 예정론, 무형 교회 내세관 확인하였다. 정통 신자 됨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 하였다. 성례와 의식과 관계를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단자의 세례도 교회에서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에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c. 은총론(인간이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은총론을 체계화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강조. 후에 이단으로 규정됨)

어거스틴 : ‘은총 + 행위 = 구원’

어거스틴의 인간론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불가항력적 은총론에서 출발하였다.

구원의 3단계

1단계 ;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상태(아담 범죄 이전) - 아담이 안 죽을 수 있었는데 죽었다.

2단계 ;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아담 타락 이후 인류의 상태) - 죄를 안 짓고 승리할 수 없다.

3단계 ;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하나님 나라에서의 인간 상태) - 죽을 수 없는 상태

➡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자연히 예정론으로 연결되었다.

어거스틴의 이중예정론

d. 역사 이해

로마 멸망과 연관해서 이해하였다. 412년 ‘신의 도성’은 기독교 역사 철학이고 변증서이다.

하나님의 도성(아벨의 도성)

인간의 도성(가인의 도성)

하나님의 사랑

자기 사랑

거룩한 사랑

탐욕

초점이 하나님께

인간에게

그러므로 종국에는 인간의 도성은 하나님 도성을 섬겨야 하고, 로마의 멸망이 하나님 도성의 멸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도성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두 도성이 공존하는 이 세대에 사는 우리는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 펠라기우스

354년에 태어난 영국인 수도사로 5세기 초에 로마의 도덕적 부패 시정에 노력하였다. 성질이 온순하고, 품행이 엄정하고, 지식이 명석한 인물이다. 카르타고의 장로가 되려다가 파울리누스의 반대로 못되었다. 에베소의 장로가 되어 그의 학설이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431년 에베소 대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교리적 차이

아우구스티누스

펠라기우스

1

하나님의 예정, 불가항력적인 은총

의지 노력으로 개인구원

2

아담 죄로 죽음

아담 처음부터 죽을 사람으로 출생하여 범죄 여부없이 죽음

3

아담의 죄는 후손들에게 영향

아담에게만 적용, 인류는 무관하다

4

유아에게도 원죄 있다

새로 태어난 유아에게 아담과 동일

5

아담 범죄로 죽음, 그리스도 부활로 삼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6

믿음 통해 구원, 세례시 사죄된다.

그리스도 오기 전에 무죄자가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상징적 차이

구분

아우구스티누스(Augstinus)

아퀴나스(Aquinas)

신 관

신을 인격적 체험의 대상으로 믿으며, 삼위일체설 확립

유일신 삼위일체는 계시로만 안다.

인 관

원죄유전, 영혼 유전, 완전타락, 선행불가능

완전타락 불인정, 선행가능

기독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확신, 신인양성주장

그리스도 없이 속죄 가능, 그리스도의 구속을 십자가의 죽음만이 아니고 전생애가 구속사임

구속론

카토릭 신자됨이 구원의 필수 조건,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는 구원의 필요조건

그리스도의 없이 구원가능,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이 최선의 길, 그리스도와 신비적 일치가 구속

예정론

예정론의 주장

세계 종교회의 일람표

장 소

소 집 자

연 대

논 점

결 과

1

니케아

콘스탄티누스대제

325

호모이우시우오스 유사,

호모우시우스 동질

니케아신조제정, 동질, 부활절 동일함

2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오도시우스대제

381

아리우스설 인성 제한 부당 타고

아폴리나리스부인, 신인양성

3

에베소

테오도시우스2세

431

키릴로스설 대 스트리우스설

키릴로스 이김, 펠라기우스설 이단

4

에베소

(도적회의)

테오도시우스2세

449

유티케스의 일성론 반대

이성론 채택

5

칼케돈

마르키아누스

451

레오서한, 통성론 배격

칼케돈신조

이성일인격

6

콘스탄티노폴리스

유스티니아누스대제

553

일성논자와 화해하려고 삼장형

유이성의 본체인 로고스

7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누스4세

680

일의론

성화숭배반대

이의론

성화숭배

8

콘스탄티노폴리스

바실리우스

869

-879

이그나티우스 대주교 대 포티우스 성령의 출처

이그나시티우스 복직으로 포티아의 파면

니케아신조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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