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로의 준비
1. 수도원제도(monasticism)의 발달
콘스탄틴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고,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5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전 로마제국의 압도적 다수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수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집단적인 개종이 촉진되면서 교회의 기강이 해이해졌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이상과 실천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게 되었다. 영적인 측면이 약해져 갔고, 예전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너무 해이해졌음을 느끼고, 세속을 탈피하여 고립된 가운데 보다 더 순결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면서 수도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도원운동은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일종의 갱생운동이다.
1) 최초의 수도승들
수도원 제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수도승은 애굽과 시리아의 광야에서 출현하였다. 이집트의 지형과 기후는 독자적 생활이든, 공동체 생활이든 수도사들에게 적합한 지역이었다. 나일강의 비옥한 계곡은 양편이 사막에 접해 있는 리본과 같았고, 비가 오는 일이 드물었다. 고행자들은 별로 은신처가 없더라도 약간의 양식만 있으면 혼자서 생활할 수 있었다. 3세기가 지나기 전에 기독교 은둔자들이 이집트에서 눈에 띄기 시작하였는데, 초기 수도사 가운데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애굽 출신의 콥트인 성 안토니(256-356)이다.
안토니(Anthony)는 약 250년경에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앙으로 교육을 받았다. 안토니는 20세가 되기 전에 양친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의 누이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러던 중에 안토니가 교회에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안토니는 즉시 자신의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동산을 팔아 자신의 누이를 돌볼 만큼만 남겨두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 후 안토니는 인간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며 금욕주의(asceticism)적인 삶을 시작하게 된다. 안토니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광야로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는 이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초기의 수도승들은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은자적인 성격이 강하여 독립적으로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여 수도했다. 이들은 멀리 떨어진 광야에 은거하면서 기도와 명상을 하고, 때로는 며칠씩 금식하면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 수도사들은 암자, 동굴, 초막, 오두막을 짓고 수도생활을 하였다. 금욕적이고, 은둔적이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형태의 수도생활을 하였다.
애굽의 니트리아, 스키티스 같은 곳에서 여러 집단들의 은자들이 있었다. 이들 상호간의 교류는 극히 제한적이고, 일주일에 단 한번 만나는 정도였다. 초기 수도사들은 독신생활을 하였고, 일부 극단적인 수도승들은 기둥들의 꼭대기나 벽에 갇혀 사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기둥의 성자들이라 하였는데 459년에 죽은 시몬 스틸라이트(Simon Stylites)였다. 스틸라이트는 36년 동안 기둥 꼭대기에 살면서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였다. 자기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는 이들이 시리아의 은자들 가운데 많았다.
2) 파코미우스(Pachomius) 수도원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하였다. 파코미우스 수도원은 수도원에 입주하여 수도원장과 일정한 규칙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최초의 수도원 공동체로 320년경에 시작하였다. 나일강변에 타벤니시(Tabennisi)에 안토니와 동시대 사람 파코미우스(285-346)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집트에서 이교도의 양친에게서 태어난 파코미우스는 20살에 황제의 군대에 잠시 근무하였다. 군복무 중에 병사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인들의 친절과 사랑에 감동을 받고, 군대를 떠난 후에 세례를 받고 은둔자가 되어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수도원은 중앙에 수도원이 있었고, 각 지회의 수도원들이 있었다. 각 수도원에는 200∼300명씩의 수도사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체계적인 규율과 운영규칙들이 정비되어갔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반대하였다. 먼저 남자들의 수도원이 세워지고 나중에 여자들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수도원의 체계적인 규율과 운영규칙들 ==
ⓐ 약 22∼40명이 한 집에서 공동으로 생활하면서 집집마다 모임을 위한 공동실이 있었고, 각 집에서는 가능한 같은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배치되었고, 일정한 제복을 입었다.
ⓑ 매일 규칙적으로 단체 기도회를 가졌고, 성찬식이 일주일에 두 번씩 집례되었다.
ⓒ 자신들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물품들을 공급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 멍석, 바구니, 종려 돗자리를 만들어 팔았다.
ⓓ 군대식으로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하였다.
ⓔ 질서 문란자들을 징계하고, 순결과 청빈한 삶이 요구되었다.
ⓕ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생계를 위해 일정시간 일을 하도록 하였다.
ⓖ 식사는 간단하고 육식과 술은 금지시켰고 식사는 하루 두 끼로 제한하였다.
ⓗ 수면은 누운 자세가 아니라 앉은 자세에서 최소한의 시간만 허락되었다.
ⓘ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재산을 공공기금으로 헌납하였다.
수도원의 폐단 ==
ⓐ 수도승들이 문화 및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 그리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등한시하게 되었다.
ⓑ 일반 사회에서 세속적 의무를 기피하는 자들, 과중한 세금으로 파산한 자들, 피신 중에 있는 범죄자들, 동성연애자들이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 자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고행(苦行)을 통해 자기 자신을 과시(果是)하고 시위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게 되었다.
3)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가이사랴의 감독에게 감화를 받아 364년에 안수를 받고 370년에 갑바도기아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 취임 후에도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어서 바실은 실제적 사회사업을 위해 가이사랴에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고 빈민 구제 기관은 물론 병원과 학교 등을 세웠다. 바실의 수도원 공동체의 이상 속에서 동방수도원 운동이 모체가 되었다.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되어가는 격변의 시대 속에 교회들에게 영적 각성을 촉진시키고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기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실의 수도원운동은 동방 수도원운동의 선구자이다. 바실은 폭넓은 견해를 갖고 있었고, 여러 수도공동체를 견학한 후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도움을 받고 직접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358년 30세 가까이 되었을 때 이집트를 방문하여 파코미우스 수도원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수도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바실(Basillius the Great)은 고립적인 고행생활 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하게 선호하였다. 수도사들이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반문화적인 당대의 수도원 운동을 보면서 바실은 금욕주의 운동이 개인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인 경향을 벗어나 사회적 목적을 지녀야 한다고 하였다. 바실 이전의 수도사들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복종 보다는 빈곤과 순결이 수도생활에서 일차적이었지만 바실에 와서는 수도생활의 일차적인 것은 빈곤과 순결이 아니라 복종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목적이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금식과 다른 금욕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죽이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데서 찾으려고 했다. 그래서 남이 알도록 금식하는 이들에게 엄한 중벌이 가해지게 되었다.
바실은 수도원 공동체와 기성교회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바실은 그리스도의 명령들 가운데 다수가 남과 함께 살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고립된 금욕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수도원의 공동체 인원도 30명 범위로 제한하였고, 내핍 생활 외에 무절제를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하루에 7회 기도하도록 하였다.
바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된다고 생각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병든 자를 돌아보며 슬픔에 처한 자를 위로하도록 하였다.
바실 수도원의 폐단 ==
ⓐ 이원론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영혼에 비해 육체를 낮은 차원으로 이해했고, 당대의 조류에 따라 육체를 영혼의 지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인간의 노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4) 서방수도원의 발흥 == 유럽의 수도원주의
서방에서 수도원 운동이 발흥한 것은 투어스의 마르틴(Martin of Tour), 제롬(Zerome), 요한 카시안(John Cassian)과 밀란의 앰브로스, 히포의 어거스틴, 요한 크리소스톰 등의 역할이 컸다. 이들의 의해 시작된 서방 수도원 운동은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되었다.
유럽식은 더 공동체적이고 그 성격에 있어서 덜 혹독한 것이다. 이런 유럽적 모델을 구체화시킨 사람이 Benedict of Nursia였다.
(1) 베네딕트식 (Benedictine) 수도원주의
Benedict(480- 550년 경)은 중부 이태리 Nurcia에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서 로마에서 학교를 다녔다. 로마의 부도덕한 삶은 그로 하여금 안토니식의 은자생활을 3년 동안 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고독한 수도사적 삶의 단점을 깨닫고서는 그는 파코미우스가 이집트에서 했듯이 공동체적인 수도원을 조직했다. 곧 많은 제자를 얻어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520년에 몬테카지노(Monte Cassino)에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원 개혁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베네딕트는 몬테카지노 수도원에서 실천할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다.
베네딕트 규율의 기본정신은 영속성(permanence)와 순종(obedience)이다.
영속성의 원리는 자기들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길 수 없다. 처음 수도원에서 종신토록 수도생활하게 하였다.
순종은 규율 자체에 관한 순종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에 대해서도 순종케 하고, 순종해야 될 이유를 설명하여 순종케 하였다.
잘못을 저지른 수도사는 은밀하게 권면케 하였다. 그러나 두 번 이런 권면을 받은 후에도 개전의 정이 없으면 공개적으로 문책하였고, 그 다음은 제명(excommunication). 그 다음에는 채찍. 그런 후에도 효과가 없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한다. 3번까지 재 수도원생활을 허용한다. 그 후에는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
노동을 중시한다. 순번제로 모든 노동에 동참케 한다. 취사 당번을 예배시간에 교대로 하며, 특별 조처의 사람들은 고참 순으로 취사 당번을 하도록 하였다.
그 이전의 수도원 운동에서는 가난이 자기 포기의 수단이었음에 비하여 베네딕트는 공동체 내에서 가난을 통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수도생활의 핵심은 기도생활이다. 대부분의 경건회는 예배당에서 행해졌다. 시119:62, 164에 따라서 낮에 일곱, 밤중에 한번 그렇게 하여 하루에 여덟 번씩의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집회의 대부분의 시간은 시편 낭송과 기타 성경 봉독으로 이뤄지는 데, 이런 8번의 기도의 시간들을 “교회법에 따른 기도 시간들(canonical hours)”이라고 불리고, 이를 거행하는 것을 “경건회(Divine Office)”라고 불렀다.
사실 베네딕트 자신은 학문 연구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학문 연구는 베네딕트 수도사의 주요 일과가 되었다. 부유층에서는 육체적인 노동을 천시했던 그 시대에 있어서 수도원은 가장 뛰어난 지성과 영적 작업이 고단한 육체노동과 종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베네딕트 규칙의 주요 조항 ==
a. 각 수도원은 수도원장(abbot)의 다스림을 받는다. 그의 말과 행동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이다.
b. 수도원장과 수도사들은 함께 살아간다. 중요한 문제가 전체가 함께 의논하해야 하고 덜 중요한 문제는 고참 수도사들과 함께 의논할 수 있다.
c. 종교적인 수련, 노동, 식사, 수면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이 있다.
d. 수도사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수도원에 결탁되어 있다. 다른 수도원으로의 이동이 자유스럽지 않고 가족을 이루면서 여생을 그 수도원에서 보내야 한다.
e. 수도원 삶은 규칙적이고 훈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이집트 수도사에게 보듯이 그런 육체적 고행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f. 각 수도원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다른 수도원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g. 수도원적 삶의 중심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을 하며 순종과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다.
베네딕트식의 실천은 남성들 가운데뿐만 아니라 여성들 가운데서도 확산되어 갔다. 이런 형태의 수녀원이 유럽에서 생기고 늘어갔다. 이런 경향은 잉글랜드에서 특히 강했는데 수녀원의 수녀들은 주로 부요한 계층 출신이었다. 수녀원들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2) 아일랜드식(Irish) 수도원주의
탁월하면서 영향력있는 수도원운동이 아일랜드에서 발전했다 아일랜드식은 안토니식의 엄격함과 파코미우스식의 공동체적 이념을 결함한 것이었는데, 아일랜드 교회의 설립자인 영국 기독교인 Patrick에 의해서 소개되었다. 5세기에 발전했고 선교 지향적이고 문화 창달의 성격이 강했다. 500-800년에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부 잉글랜드를 복음화했다. 그 수도사들은 또한 유럽 대륙에 가서 선교를 했다. 이 기간 중에 가장 식자층은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3) 수도원주의 운동의 이점들
게르만 민족이 5세기에 로마제국에 침입하여서 바로 로마식의 삶과 사회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해체의 과정은 오랜 세월을 두고 점진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600년까지는 이런 해체 작업이 상당히 진행되는 데, 그때까지 베네딕트식과 아일랜드식의 수도원 운동이 서부 유럽과 영국제도들에 상당히 확산되었다.
6세기 동안 교육과 여타의 문명화된 영향은 거의 전적으로 수도원들에 의해서 이뤄진다. 극소의 예외가 있지만, 성직자들만이 교육을 받았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군주인 사를마뉴 조차도 지식의 대부분을 스스로의 독서에 의해서가 낭독을 듣고 얻었다. 수도사들은 교회지도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철학자, 건축자, 왕의 고문, 농사의 전문가, 음악가, 장인(丈人)들이었다. 큰 수도원은 과거의 많은 책을 필사해서 도서관에 보존하였다. 많은 수도사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수도원은 유럽을 복음화하고, 많은 초기 로마와 기독교의 저술들의 상실을 보존하고, 보존된 교회와 문화에서 게르만인식으로 만들어 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수도원이 감당했다.
2. 교황제도의 발달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처음 알려진 것은 95년에 기록한 로마의 클레멘트의 편지에서부터이다. 20년 후에 이그나티우스의 편지, 114년에 기록한 헐마스의 목자론에도 나타나고, 2세기 말엽에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를 가리켜 “가장 위대한 우주적으로 알려진 교회”라고 칭하면서 로마교회가 부상(浮上)하게 되었다. 로마교회가 부상한 이유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 중의 하나이고,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고 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로마제국의 중심지이며, 교리의 정수, 다이아몬드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의 수진자이고, 정통주의를 변화하는 일에 있어서 뛰어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16;17∼19의 말씀에 근거하여 영광스런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 로마에 세워지고 조직된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전통성 있는 교회라는 측면에서 로마교회의 권위를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이방인의 교회의 중심지였고, 일찍이 신경(信經)이 발달하였고, 이단과의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라는 자신들의 자각은 대단했는데 약160년경에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로마의 영향력은 레오1세(Leo Ⅰ: 440-461)가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더욱 강화되어졌다. 그는 5세기 교황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레오는 셀레스틴과 식스투스 3세 아래서 420년과 430년대에 로마교회 수석 집사 역할을 하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지도력과 정통성을 인정받아 로마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감독으로 있는 440-461년 까지 21년 동안 서방교회에서 로마의 교황권을 확립하고 동방에서 발생한 기독론 논쟁에서 로마 교회의 전통적 기독론을 방어하는데 노력하였고, 야만인들의 침략 앞에서 로마교회를 다스리는데 진력하였다.
5세기 중엽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관계에 대한 기독론 논쟁과 로마 제국에 대한 야만인들의 침공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레오 1세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성직 임명과 관련된 사계 제일기간 즉 사순절, 오순절 이후 9월, 강림절에 매년 4번의 단식을 준행하게 하였다.
교회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마니교의 성찬 동참이나 태양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행위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452년 로마를 괴롭히는 흉노족을 찾아가서 담판을 벌이기도 하였고,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는 중재인이 되기도 했다.
교회의 삶에서 핵심적인 교리적인 문제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서방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 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서방교회의 기독론의 표준이 되었다. “로마는 감독 지위가 교회에서,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녔던 지위와 동일한 지위라는 그의 진술은 교황 제도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레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무루스와 레무스 대신 로마 수호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편지와 칙서에 나타난 문체를 보면 마치 황제가 내리는 조서의 문체와 흡사할 정도로 직선적이고 투명했다. 선구적 감독 레오는 그레고리 1세와 니콜라스 1세와 함께 교회의 역사에서 소위 “대제(Great)”라 불리는 세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다.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한다고 주장한 레오 1세의 업적을 통해서 로마교회의 우월성이 인정되고, 로마교회 감독이 교황이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초대교회(1~5세기) 감독제도의 발전
시기 |
출처 |
내용 설명 |
1세기 |
신약성경 |
모든 교회는 장로(감독)와 집사들은 사도들의 관리 아래 있었다. |
2세기 초엽 |
이그나티우스 |
감독직과 장로직은 구분되었고 각 교구들은 감독, 장로, 집사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
2세기 말엽 |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
일정 지역의 교회들을 관할하는 지방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
3세기 중엽 |
키프리안 |
목회직분과 제사직분이 구분되어 장로는 제사(속죄)하는 사제로 여겼으며 로마주교의 우위성이 공인되었다. |
4세기 초엽 |
니케아회의 |
대주교는 그들 교구의 규모에 따라 관례상 지방주교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
4세기 말엽 |
콘스탄티노플회의 |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의 주교들을 총대주교(대감독)로 추대하였으며 로마대주교 궐위시 그 역할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그 권한을 대행케 되었다. |
5세기 중엽 |
레오 1세 칼케돈회의 |
로마 대주교(교황)의 우위권 천명-레오 1세는 베드로 사도의 계승원칙을 내세워 모든 교회는 로마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역설하였다. |
로마대감독(대주교)이 교황이 된 요소
요소 |
결과 |
신약성서마16:17-19 |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모든 교회의 권한을 일임하셨다는 사실을 교황은 주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레오1세에 의해 처음 채택되었다. |
사도 계승권 |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사도 베드로의 최고 권위가 로마주교들에게 계승되는 것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
순교한 성자들을 존경하는 상황에서 로마는 두 사도의 순교지였다는 측면이 적극 고려되었고 또한 네로의 대박해시 로마교회는 굳건한 신앙을 유감없이 견지하였다. |
로마의 인구 |
도시와 교회의 규모가 주교의 권한과 관계가 있었다. |
제국의 수도 |
밀라노칙령 이후 대체로 황제들은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로마주교들의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
초대교회의 주요 교리논쟁
논쟁점 |
이단파 지도자 |
정통파 지도자 |
회의 |
결정된 사항 |
삼위일체론 |
아리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아다나시우스 호시우스 대(大)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힙포의 어거스틴 |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성과 본체성과 동등성을 지닌다.' |
기독론 |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
알렉산드리아의 씨릴 데오도르 레오1세 |
콘스탄티노플(381) 에베소(431) 에베소(로버회의)(449) 칼케돈(451) |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순수성, 불변성, 동일성을 지닌 분리할 수 없는 분이다.' 마리아는 '성모(聖母)'이다. |
도나티스트주의 |
도나투스 |
케실리안 힙포의 어거스틴 |
아를(314)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펠라기안주의 |
펠라기우스 코엘레스티우스 요한 카시안 아를의 케사리우스 |
힙포의 어거스틴 제롬 |
에베소(431) 오렌지(529) |
반(半)어거스틴주의 : 성만찬의 은총은 사람들의 원죄를 씻겨줄 수 있다. |
초대교회의 삼위일체론 이단
이단학설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모나키안주의 (양자설) |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 사모사타의 바울 |
예수는 수세(水洗)시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성부에 의해 양자가 되었다. |
사벨리안주의 (양태론, 성부고난설) |
시벨리우스 프락세우스 |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가지 방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
아리안주의 |
아리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유독시우소 유노미우소 |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다. |
반(半)아리안주의 (유세비안니즘) |
앙키라의 바질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나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
마케도니안주의 (성령피조물설) |
마케도니우스 |
성령은 하나의 피조물이다. |
초대교회의 기독론 이단
이단학설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아폴리나리안주의 |
아폴리나리우스 |
그리스도는 인간정신을 지니지 않았으며 대신에 로고스(Logos)를 지니고 있다. |
네스토리안주의 |
네스토리우스 |
로고스는 두 본질(God-Man)이 하나의 인격과 실체 안에 동시에 내주하신다기보다는 그 안에 분명한 두 존재 또는 인격이 계시며 그 두 인격은 본질적 연합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연합에 불과하다. |
유티키안주의 |
유티케스 |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은 로고스에 의해 흡수되었다. |
단성론 |
세베루스 할리카르나수스의 줄리안 스데반 니오베스 |
그리스도는 하나의 본성을 지니셨다(인격을 지니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을 수용하기란 곤란하다.) |
단의론 |
아라비아의 데오도르 세르기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씨루스 |
그리스도는 인간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신의(神意)만을 지니고 계신다. |
'신학연수과 > 초대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레스타인 지도 그리기(세로 직사각 지도) (0) | 2012.08.21 |
---|---|
초대교회 신앙의 위인들 (0) | 2009.12.16 |
초대교회 기타 이단들 (0) | 2009.12.16 |
초대교회의 이단들 (0) | 2009.12.16 |
폴리캅의 순교사화 (0) | 2009.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