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 기타 이단들
1. 발렌티누스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며, 로마에서 사역하다 16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 교회의 일원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헬라사상과 동양사상과 결합시킨 인물이다.
발렌티누스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영지주의는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한다. 이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the Unknown Father), 심연(the Abyss), 나시지 않은 분(the Unbegotten)이라 부르기도 한다. 때때로 이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에게는 침묵(silence)이라 불리는 여자 동반자가 있다. 그는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아 마음(mind)과 진리(truth)라는 두 아이온(Aeons, divine beings)을 낳았다. 그들은 네 개의 아이온인 세계 - 생명(world - life)과 인간 - 교회(man - church)를 낳았다. 그들로부터 생산의 과정은 계속 되었는데, 세계 - 생명은 열 개의 다른 아이온을 낳아서, 아이온들은 모두 18개가 되고, 다시 인간 - 교회는 12개의 아이온들을 낳아서 총 30이 되었다. 인간 - 교회 사이에 태어난 마지막 아이론은 지혜라는 여자 아이온이다.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를 알기를 원했는데 도저히 알 길이 없게 되자 그녀는 절망에 빠져서 남자없이 “불확실함”이라는 아카모스(Achamoth)라는 자녀를 낳았다. 이런 비자연적인 출산 때문에 슬픔과 불안에 빠지게 된다. 다른 모든 아이온들이 그녀와 함께 슬퍼하고 아이온 마음과 진리에게 그녀를 도와달라고 애원하게 된다. 마음과 진리는 지혜를 슬픔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성령이라 이름 하는 두 개의 다른 아이온을 낳게 된다. 그들의 행위가 플로레마 사이에 조화를 회복시켰고, 그 사실에 감사해서 30개 아이온들 모두는 또 다른 아이온을 낳아서 ‘예수’라 이름 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아카모스가 데미우르게(세상의 창조자)를 낳았는데, 아카모스는 모든 물질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불완전한 기원과 성격 때문에 물질은 악하다. 데미우르게는 물질에 형태와 모양을 주었기 때문에 세상의 창조자이다. 데미우르게는 아카모스를 통해서 지혜와 연관을 맺는다. 지혜의 영향으로 데미우르게는 영적인 선한 요소가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지혜가 동정녀로 하여금 아이온 예수를 낳게 된다. 예수는 일생동안 그가 선택한 자들에게 이 지식을 계시했고, 이 지식을 받은 자들은 다시 그것을 후대인들에게 전했다. 십자가에서 하늘 아이온이 예수의 몸에서 떠났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가 아이온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교회가 영지주의를 거부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 때문이다.
ⓐ 지고의 하나님(the Supreme God)에 대한 지식과 그와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 세상의 창조가 절대자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열등한 신의 작품이다.
ⓒ 물질계는 악하다.
ⓓ 구주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지도, 죽음에서 부활하지도 않았고,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실제로 인간이 아니다.
ⓔ 단지 몇 사람 즉 태어날 때부터 영적인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
ⓕ 부활이 없다
2세기 후반이 발렌티누스가 전한 영지주의의 최전성기였다.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가 많이 논박했다.
2. 말시온주의
말시온은 소아시아 북부 해안 도시 시노페(Sinope)에서 감독의 아들로 태어나 140년 경에 로마로 이주했다. 그는 부유한 선주로서 신앙심이 깊고 신학적 소양도 지닌 인물이었다. 로마에서 세르돈(Cerdon)이라는 영지주의자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유세비우스는 “세르돈은 제 9대 로마 감독 히기누스 밑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교회로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서도 그 길로 계속 행했다. 비밀리에 자신의 교리를 가르쳤다가는 다시 그 교리들을 부인하였고, 어떤 때는 왜곡된 교리로 인해 정죄를 받아 형제들의 모임에서 격리되기도 했다”라고 전한다.
세르돈의 영향을 받은 말시온은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는 알려진 분이고 의로운 분이고,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분이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말시온은 반유대적인 기독교 시상을 가르쳤다.
(1) 신약과 구약의 대립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과 구별하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율법은 이미 폐지되었고, 복음은 일체 율법에 대하여 언급없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터틀리안은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키는 일이 말시온이 행한 특징적이고 주된 작업이다”라고 하였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고, 신약의 예수그리스도는 알려지지 않은 선한 아버지를 계시하신 분이다. 말시온은 구약보다는 신약을 선호하면서 유대주의의 영향과 사상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누가복음과 디모데서, 디도서를 제외한 바울서신으로 구성된 자신의 신약정경을 만들었다. 그것은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말시온은 바울을 유일한 사도로 간주했다.
말시온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율법을 주신 열등한 하나님, 손은 손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가르치신 불완전한 하나님, 실수도 하시는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고 실행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를 구분하였다.
자연히 구약, 율법,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신약과 복음과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하면서 구분하였다.
(2) 말시온의 기독론⋅구원론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15년(서기 29년)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고 하였다. 그는 미지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고, 예수그리스도는 인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하늘에서 직접 오셨기 때문에 인간 역사와 혈통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선하고 의로운 삶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율법을 깨뜨린 것이고, 그의 몸은 물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율법을 깨뜨리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이런 부정의를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구원받아야 할 자들의 영혼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을 사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혼만이 구원받기 때문에 육체는 부인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육체의 부활사상을 부인하고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결혼은 악한 것으로 보았다.
(3) 말시온의 영향
말시온의 사상은 기독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기독교를 헬라철학 사상과 혼합시켰고, 교회내에 영육의 분리 사상 즉 이원론을 뿌리 내려 타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말시온으로 인하여
ⓐ 정경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 사도신경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 창조주 하나님과 구세주와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성을 남겼다.
창조주와 구세주는 같은 하나님이고, 기독론, 삼위일체의 발달을 촉진시키게 되었고,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에서 찾았다. 창조주-구속주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되었다.
말시온은 로마교회에 의해서 출교 당하였고, 2세기에 자신들의 교회를 형성하였으며. 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3. 몬타니즘
몬타니즘은 본질적으로 기독교라고 할 수 있었는데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다. 데이빗 라이트라는 학자는 “몬타누스파는 광신자였으며 이단자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타니즘은 초대교회에서 배척당한 종교운동이었다.
(1) 배경
몬타누스에게서 출발하였다. “ecstasy”라는 영을 강조하는 서부 소아시아 지역인 브리기야(Phyrigia)에서 172년에 일어났다. 유세비우스는 “모든 선을 대적하는 큰 적수이며, 악을 조장하는 자이며, 또 인간들을 대적하여 온갖 음모를 아끼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새로운 이단들을 출현케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단들은 독사처럼 아시아와 브리기야 지방에 기어들어왔다. 남편을 버린 두 여인,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가 몬타누스를 돕기 위해 그와 합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은 몬타누스가 보혜사이며 그를 따르던 두 여인 즉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는 몬타누스의 여선지자였다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는 본래 이교제사장이었는데 기독교로 회심하여 이교주의를 포기하였는데,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하였다.
몬타누스는 결혼을 취소시키고, 금식하는 법률을 부과하고, 브리기야의 작은 마을 페프자와 티미움을 예루살렘이라고 지칭하였다. 돈을 징수하는 사람을 고용하고, 헌물이라는 미명아래 재물을 확보하기 위한 온갖 술책을 강구하였고, 자기의 교리를 전파하는 이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면서 교리를 든든히 성장시켜 나갔다.
이들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교회를 비방하라”고 가르쳤다.
(2) 가르침
몬타누스는 자기를 통해서 성령시대가 왔다고 가르쳤다. 성령께서 예언자 몬타누스와 그를 돕는 두 여인을 통해서 예언을 말씀하신다고 하였다. 맥시밀라는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가까이 있는 페프자에 형성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금식해야 하며 생업을 떠나 페프자에 가서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독신과 순교를 강조하였다.
몬타누스와 두 여인과 성령을 받은 자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까지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인들도 교회에서 직분을 맡을 수 있다고 하였다.
(3) 몬타니즘과 교회
예언과 은사에 대한 강조는 복음의 역사가 깊지 않은 경험 위주의 신앙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었다.
이들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교회의 감독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였고 종말에 대한 강조 때문에 핍박받는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4) 영향
몬타누스가 시작된 지 50년 이후부터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새 예루살렘이 페프자 마을에 임하지 않았고,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하던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쇠퇴하게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몬타누스와 막시밀라가 악한 영의 선동을 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교회에 끼친 영향은
ⓐ 성령의 역사가 사도시대와 같이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교회는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되었다.
ⓒ 교회의 권위가 조직적인 권위에서 영적인 권위로 바뀌게 되었고, 교회에 평신도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4. 노바티아누스파 (Novatianists)
로마교회의 장로였다. 파비안감독이 250년1월20일에 순교하게 되고, 코르넬리우스가 로마감독이 되자 당시에 명성을 날리던 노바티안이 반발하였다. 노바티안을 따르던 이들은 노바티안을 감독으로 추대하고 노바티안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배교자들은 종신토록 교회에서 출교해야 하며, 교회의 신성을 상실한 코르넬리우스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자신들만이 참되고 거룩한 교회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데키우스 황제 시대 (249-251)에 박해로 변절자가 많았는데 이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 오려할 때 어떻게 처리하느냐로 의견이 갈라지게 되었고, 로마 교회와 동방 및 서방 감독들과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관대히 대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엄중히 계율을 지키게 할 것을 강조하면서 로마 감독들은 여러 차례 회합하면서 노바티아누스를 파면하고 변절자들은 적당히 회개시키고 받아드리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신앙을 배반한 치명적인 범죄자는 교회에서 받아드릴 수 없다. 그 외 중죄는 우상 숭배, 살인, 음란 등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죄목은 분파주의자로 교회 질서 문란, 분열 조성하였고, 이단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분파는 7세기에 가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5. 도나투스파 (Donatism)
이들의 주장은 박해받을 때 성경을 버린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강경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범죄한 자가 속한 교회는 하나님이 떠났으니 제명하라고 하였다. 범죄한 교사에게 받은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따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카르타고 교회에서는 두 파로 분열되고 두 감독이 세워지고 북아프리카는 분란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처음에 이단을 규정했다가 33년에는 태도가 변하여 신앙과 예배의 자유 법령을 공포하고 가톨릭교회에는 관용 정책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330년에는 270명의 감독이 이 파에 속하게 되었다.
이들의 교리와 주장은 엄격한 교회의 규칙과 교인의 순결을 주장하고, 세속적인 교직자를 배격하고, 교회 일에 세속 사람의 간섭을 불허하며, 감독 정치를 채택하였다.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하였고, 개인주의로서 편협, 완고, 광신 상태로 흘러하게 되었다.
힐라리우스 (Hilarius)가 카르타고에 회의를 소집하여 이단으로 규정하여 집회를 금하고 교회당을 정통파에 양도하고, 414년 시민권 박탈을 박탈하며 예배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6. 마니교 (摩尼敎 : Manichaeism)
3세기에 페르시아왕국의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고유의 종교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에서 파생되고,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를 가미한 종교로서, 교조(敎祖) 마니(Mani.216-276)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불렀다.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 19세-24세 때 계시를 받았고, 인도와 중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많은 신도를 얻었다. 페르시아 궁정에서 우대했으나 반대자의 미움으로 십자가에 달려 가죽 벗겨 죽임을 당하였다.
마니에 관한 사실(史實)은 불확실한 점이 많으나, 일찍이 조로아스터교에 귀의하여 신의 계시를 받고, 30세 때 예언자로서의 자각을 한 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깨달은 바를 전파,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분파하였다. 그 후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받고 화형을 당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 <생명의 책>, <샤브라칸>, <신비의 책>, <마니서한(書翰)(교훈집)>, <거인(巨人)의 책> 등이 마니교의 성전(聖典)이 되었는데, 14세기 마니교 소멸 후에 없어져 그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20세기에 와서 유럽 학자가 그 사본을 발견함으로써 학계에 널리 알려졌다.
마니교에는 간명한 교의(敎義)와 예배 양식, 엄격한 도덕계율이 있었다. 그 교의는 광명⋅선과 암흑⋅악의 이원론(二元論)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현실세계는 명⋅암이 혼돈되어 있으나 멀지 않아 광명의 세계가 예정되어 있고, 그 예언자이며 지상의 구제자로서 마니가 파견되었다고 말한다.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므로 생겼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인생이 돌아갈 곳은 해탈이며 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마니교도에게는 각자 속에 내재하는 광명의 소인(素因)을 기르기 위한 엄한 계율이 요구되었다. 육식과 음주를 엄금하고, 악행을 삼가며, 정욕을 멀리하여야만 했다. 마니교는 메소포타미아, 수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서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교세가 급격히 발전하여 중앙아시아 일대와 로마제국에까지 확장되고, 다시 인도⋅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13∼14세기에 쇠퇴⋅소멸하였다. 그러나 마니교는 동⋅서양세계를 문화적⋅종교적으로 결부시키는 가교적 역할을 한 공로가 크다.
니케아회의 이전의 이단종파
이단 |
지도자 |
역사적 사실 |
가르침의 특징 |
에비온파(엘케파, 만데파) |
1세기 후반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생한 후 소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대부분 유대인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히브리적인 마태복음을 중시하였다. |
구원에 필요한 부분인 모세율법의 보편성을 가르쳤으며 바울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예수는 메시야이지만 단지 세례시 성령이 임한 인간일 뿐이라 하였다. 특히 천년왕국의 임박함을 기대한다. | |
노스틱파(영지주의) |
마술사 시몬 (1세기) 케린투스 (1세기 말엽) 바실리데스 (2세기 초엽) 사투르니누스 (2세기 초엽) 말시온 (160년경 사망) 발렌티누스 (160년경 사망) 타티안 (110-172) |
특히 그리스철학인 플라톤철학에 기초하여 동방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 대한 포교는 미흡했고 교회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제국 전체에 걸쳐 다양한 종교운동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신앙과 신약성서 정경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교회는 진리의 보고(寶庫)로서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하게 되었다. |
그들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영지'(gnosis)를 지닌 자로서 신성(神性)이 어떤 '영적인'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Pleroma). 따라서 성(性)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 현태를 일반적으로 취하여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거부하며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세계는 조물주(=여호와)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
몬타누스파 |
몬타누스 (2세기) 브리스킬라 (2세기) 막시말라 (2세기) 터툴리안 (160-220년경) |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류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
마니교파 |
마니 (215-277) |
페르시아에서 발생, 배화교의 영향으로 성장하였고 마니는 그의 육체를 벗고 환생했으며 그의 시체는 페르시아 거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심취한 바 있으며 후대 바울학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알비겐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었다. 엄격한 계급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 |
창조의 이원론적(빛과 어두움) 견해를 지니며 그리스도는 빛으로, 사단은 어둠으로 묘사한다. 이들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마니가 올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계시 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추종세력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표방하였다. |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 이단
이단학설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모나키안주의(양자설) |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 사모사타의 바울 |
예수는 수세(水洗)시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성부에 의해 양자가 되었다. |
사벨리안주의(양태론, 성부고난설) |
시벨리우스 프락세우스 |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가지 방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
아리안주의 |
아리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유독시우소 유노미우소 |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다. |
반(半)아리안주의 (유세비안니즘) |
앙키라의 바질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나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
마케도니안주의 (성령피조물설) |
마케도니우스 |
성령은 하나의 피조물이다. |
고대교회의 주요 교리논쟁
논쟁점 |
이단파 지도자 |
정통파 지도자 |
회의 |
결정된 사항 |
삼위일체론 |
아리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아다나시우스 호시우스 대(大)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힙포의 어거스틴 |
니케아(325) 콘스탄티노플(381)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성과 본체성과 동등성을 지닌다.' |
기독론 |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
알렉산드리아의 씨릴 데오도르 레오1세 |
콘스탄티노플(381) 에베소(431) 에베소 (로버회의)(449) 칼케돈(451) |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순수성, 불변성, 동일성을 지닌 분리할 수 없는 분이다.' 마리아는 '성모(聖母)'이다. |
도나티스트 운동 |
도나투스 |
케실리안 힙포의 어거스틴 |
아를(314)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펠라기안 주의 |
펠라기우스 코엘레스티우스 요한 카시안 아를의 케사리우스 |
힙포의 어거스틴 제롬 |
에베소(431) 오렌지(529) |
반(半)어거스틴주의 : 성만찬의 은총은 사람들의 원죄를 씻겨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