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럼

무엇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인가?

미션(cmc) 2010. 2. 18. 07:23

무엇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인가?

 

그날에 우리는 알게 되리  

  시 121편에 거의 매 구절마다 지켜 주신다는 말씀을 담고 있다. 3, 4, 5, 7절은 각 한 번이지만 8절은 두 번 나온다. 이렇게 지켜 주신다는 의미로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지켜주심”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자적인 의미와 개념으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3절에 나오는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는 지켜주심”은 길을 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자전거나 대중교통이나 자가용으로부터 안전사고와 도보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 주는 차원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은 일반종교에서 다루고 있다면 기독교와 성경 속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는 상황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실족케 되는 상황이 신구약을 합치면 상당한 양의 단어를 분석해야 하며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누구로 인하여 넘어진 상태, 엎어졌다, 떨어졌다, 빠지다, 무너지다, 당하다, 죽어졌다, 망해졌다, 자기 곳으로 날아갔다, 넘어졌다, 배척하다, 걸림돌이 되다, 오해하다, 범죄 하다, 시험에 빠지다, 버리다, 포기하다, 거리끼게 되다, 거치게 하다. 부딪히다, 올무를 놓다, 무릎을 꿇다, 부딪히다, 실족하다, 예리하게 잘라내다. 그로 인해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되다 등 다양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만 가지고도 몇 번에 걸쳐 칼럼을 쓰게 된다면 다른 부분을 다루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심지어 성경공부를 하게 된다 할지라도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며 설명해야 하며 시리즈로 계속 다루어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단순히 한글로 된 성경구절만 해도 43구절이지만 연계된 구절을 합치면 수백 구절이나 수천 구절을 다루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무엇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며 그것을 위해 졸지도 아니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차원도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을 일일이 지켜주신다면 하나님의 눈은 얼마나 많겠는가? 아무리 기계적인 눈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또한 초능력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지켜 주신다고 하면 왜 우리 주변에는 특히 기독교인들이 사고가 나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일까?

 

  시 56:13에 보면 “생명의 빛에ㅔ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시며” 시 66:9에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려고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것이다.” 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말씀은 시 37:31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는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삼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실족하지 않도록 밤낮 주야로 지켜 주시는 것이다.

 

  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니 흔들리지 아니하고” 시 18: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제 않게 하셨나이다.” 는 말씀은 더욱 뒷받침해 주는 내용이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너무나 실족을 잘 하고 있다.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고 하면서 얼마나 육신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가면을 뒤집어쓰며 가식과 위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지 너무나 모른다. 나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면 하나님께 영광과 축복이라는 단어를 나열하면서 찬양하며 극성을 떤다. 그러나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면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으로 착각하여 금식을 하거나 철야를 하는 등 더 더욱 극성을 피운다.

 

  종교개혁이라는 미명아래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을 핍박하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악랄하게 극형을 처하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한지 모른다. 남몰래 딸기 잼을 먹었거나 주름치마를 입었다고 해서 신앙교리에 위배된 명목아래 극심한 고문을 한 뒤 죽어버리는 것을 갖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치부해 버리는 일들이 교회사 안에 수두룩하다.

 

  이것이 백일하에 드러내지 못하고 쉬쉬 숨기고 있는 교회역사학자들이나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저질은 일들이 수치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무나 무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일들로 서구교회의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생명의 빛으로 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그 자체가 너무나 기적 중에 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현재 기독교 안팎으로 실족케 하는 함정들이 얼마나 많으며 그로 인해 넘어져 있는 자들, 빠져있으며, 실족을 당해 무너져 망해져 있는 상태, 자기만 넘어지면 되는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져 있는 형극을 보게 되면 기가 막히다. 또한 시험에 빠져 있는 자신으로 인해 걸림돌이 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 거치게 되는 존재가 된다.

 

  또한 신앙생활 속에서 불리하게 되면 과감하게 믿는 자들을 버리게 되며 심지어 내 안에 있는 주님마저도 예리하게 잘라버리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인정사정도 없는 몰인정한 존재가 되어버리며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절대로 자부하지 마라.

 

  마태복음 26:31~35까지 내용은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것을 예언한 내용에서 3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나를 인하여 실족하리라)는 말씀이며 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주를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실족하지 않겠나이다)라는 내용인데 ( )는 일반 성경에 관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육으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주님을 버리겠다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공명심에 의하거나 자신의 객기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육의 모습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내 입으로 실족하지 않겠다고 하는 맹세는 땅으로나 하늘로도 어느 곳을 두고 맹세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만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지 내가 실족하지 않는다고 자부하지 마라. 우리 주변에 실족당해 있는 분들이 있는데 그들이 신앙이 부족하거나 인격이나 덕망이 부족해서 실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실족할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한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자신 몸을 죽이면서까지 우리와 함께 죽으셨다. 삼일 동안 함께 장사지내시고 그 후 부활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시며 천국의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것을 믿는 순간 영원한 실족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이 사실을 성령에 힘입어 믿어질 때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 육신을 지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무가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썩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보다는 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한 사람을 베풀어 주신 것을 믿기만 하면 사단이 쳐 놓은 실족의 올무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이다.

 

  시 121편의 핵심적인 내용은 육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못하게 하시고 부활의 그리스도로 옷 입어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육신을 단순히 지켜주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는 지켜주시고 누구는 지켜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지켜주심에 대해서 은총의 기준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지켜주심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말씀을 살펴봐야 한다.

 

  주님과 한 몸이 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이라면 비록 나는 자주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 분이시라면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내가 넘어진다는 것은 육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 주님과 한 몸이 된 영의 존재는 넘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증명하는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이란 의미를 과거 칼럼을 통해 언급한 적이 있다. 즉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십자가상에서 표출한 것으로 올바르게 증명, 즉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해 낸다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얍복 강나루에서 씨름한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맛보았지만 그것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게 임한 고통과 아픔은 실족하지 말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야 한다. (다음 칼럼에서 계속)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