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럼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재정복을 당한 기독교’

미션(cmc) 2010. 2. 18. 07:28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재정복을 당한 기독교’

 

 영광의 나라

- 2006년 韓國크리스찬 學術文學賞 著述大賞 作 -

‘다시 써야 하는 세계 기독교사’(3)

부제 -서양 사상사의 재해석과 기독교-

   

글 심 상용 (월드크리스챤성경학연구소 소장)

 

 

1. 일편률적으로 역사를 기술해 버리는 기독교회사

 

    대부분의 기독교회사(基督敎會史를) 보면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AD.70년경을 기준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떠난 원시기독교가 여러 경로를 거쳐 로마로 들어가 수많은 핍박의 과정을 거쳐 결국 로마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AD.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공인하는 과정을 마치 고속도로를 달려가듯이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기독교가 대제국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고 최상의 국가 로마가 정식 종교로 공인함으로 대승리의 장정을 일사천리로 그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서 단숨에 골인지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승리한 것과도 같이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과연 이 역사만이 유일한 역사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역사가 진정으로 성경과 복음을 위한 역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 역사 안에 다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안에 어떤 역사적 음모가 내포되어져 있어 과연 그것이 역사의 전부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소위 가톨릭과 그 교리사상을 전승한 기독교가 채색시키고 있는 역사에는 수많은 미스터리가 존재하고 엄청난 음모가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음에도 보기 좋게 밀봉시켜 놓고 그것만이 유일한 기독교 역사라고, 또한 성경과 복음의 역사라고 기술해 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중간에 역사의 주체자(主體者)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뒤바꾸어 놓았는지 드러내지도 아니한 채 하나로 뭉뚱그려 그것만이 유일한 교회사라고 일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출발선에서 출발한 선수의 주자가 중간에 동일한 같은 유니폼을 입은 다른 주자에게 바턴을 빼앗기고 넘겨주어 헬라화 된 사상체를 이룬 다른 주자가 그것을 받아 결승선은 통과한 사실을 거의 지적하지 않거나 한다 해도 눈에 보일까 말까하는 극히 일부분 적으로 영향을 준 정도로 한 줄로 요약해 버리고 넘어가는 형국이다.

 

   교회의 주도권이 서남아시아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과정이 어떻게 뒤바꾸어지고 어떤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치명적으로 사상적 주체가 무엇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기독교로 유입되어 기독교화 되었는가에 대하여 그 현저한 변화에 아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그 실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결과들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예루살렘을 나오기 이전의 원시 기독교의 연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사를 기만하고 있어도 그 역사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이 전부려니 생각하고 마치 소경이 소경 이끄는 대로 끌려가듯 가면적인 역사에 대하여 맹신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기술이 그리스 - 로마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손해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덮어 쓴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을 가증스럽게도 기독교로 탈바꿈시켜 세계적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철학사나 기독교사에서 단 줄로 처리해 버리고 마는 ‘기독교가 희랍화 되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이 내포되어져 있는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 역사의 뚜껑을 제대로 열어보면 어마어마한 대사건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려려니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2. 로마를 정복한 기독교 재정복을 당한 기독교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E. Gibbon)은 그의 주저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로마제국 쇠망사’에서,‘콘스탄틴 종교(기독교)는 1세기도 못되어 로마 제국을 최종적으로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자(기독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복당한 책략자들의 책략에 넘어갔다. --- 이교도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복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복당한 이교도들이 복수했다는 사실과 로마에서의 기독교의 공인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에서 단숨에 골인지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필자 역시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가 그렇게 귀결되었으면 하는 마음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 같은 기대는 단지 기대일 뿐이다. 사람들은 기대할 수 없는 기대를 마치 사실이라도 되는 것인 냥 덥석덥석 집어 먹고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E. Gibbon)이 말한 앞의 주장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혼자만의 독단적인 주장도 아니다. 기독교는 로마를 정복하여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지만 ‘정복자(기독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복당한 책략 자들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역사의 소산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복당한 책략 자’나 ‘이교도들’이란 고대 그리스 - 로마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말은 예루살렘의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했지만 끝내 그리스-로마인들은 기독교에게 자신들의 사상적 영지(領地)를 그대로 내어주지 않았다. ‘정복자(기독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복당한 책략 자들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지적은 기번의 지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종교와 철학 사상적 근간과 바탕위에 기독교를 덮어 씌워 형식은 기독교라는 이름이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사상을 되살려 그것을 소위 기독교라는 명목으로 세계화 시킨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면으로 삼아 자신들의 사상을 부활시킨 것이다.

 

  겉으로는 철저하게 기독교로 치장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그리스-로마 종교 및 철학사상으로 탈바꿈시켜 역사 앞에 내 놓았으니 그것이 소위 정통기독교라는 것이다. 얼굴은 기독교인데 그 내부는 철저하게 그리스-로마의 것이었다, 그 위장은 대철저한 위장이었고 기만적인 조작에 의한 사기적 행위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성경과 복음을 이어받은 역사라고 여겨왔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가 그리스-로마화 한 것이 세계 사상사에서는 극히 일부분 적으로는 언급되어져 있으나 아직도 그 실상의 전모가 공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부분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하여 국가 종교가 되었다는 한가지 사실에 도취되어 수면 아래 어떤 역사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로마는 기독교에 의해 정복을 당했으나 그들은 역사를 멀리 내다보며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기독교를 자신들의 종교체계로 소리 없이 바꾸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 종교철학 사상을 버리지 않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사상체계를 둔갑시켜 그것을 가톨릭이라는 보편적 종교로서의 기독교 정통교리라고 조작해 나갔던 것이다. 철저하게 그리스-로마사상체계를 가톨릭과 기독교 정통교리로 좌정시켜 나갔던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모두 성경과 교회와 기독교만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설정해 놓았고 누가 보아도 성경만을 말하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남의 차가 좋다고 그 차를 가져다 자기네 페인트를 칠해 놓는다고 자기 차라고 하면 정말 자기 차가 되는가? 남의 집이 좋다고 자기가 자기네 페인트를 가져다 온통 자기 페인트를 칠해 놓는다고 그것이 자기 집이 되는가? 그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든 타의적으로 이루어졌든 자기 차이 되고, 자기 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오늘날까지 이에 대한 착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상체계에 성경을 도배시켜 만든 기독교 신학은 철저하게 위장된 허구체(虛構體)에 지나지 않지만 서로가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공유할 수 있다는 공통분모와 그 허구성을 밝혀내고 드러낼 수 없는 한계로 인해 기만의 역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역사를 주도해 나왔던 것이다.

 

  사상적으로 로마의 영역권 안에 있던 사람들에 의한 기독교의 그리스 로마화 작업은 자신들의 철학과 종교 사상에 성경을 도배시켜 놓음으로 자신들의 사상의 계속성을 유지케 하고 기독교를 형식화 시켜 놓았다. 마치 바다에 사는 게가 소라껍데기를 덮어 쓰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격이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소라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그 안에 게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격이다. 

 

3. 정통기독교라는 이름의 로마 가톨릭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을 기독교적으로 부활시켜 완성된 종교가 소위 로마 가톨릭(Roma Catholic)이라는 종교체이다. 거의 2천년의 시간이 흘러도 로마 가톨릭의 역사가 성경의 역사라고 외치는 데 근본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사실 개신교 측에서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교리 사상적 우산이 가톨릭의 계보아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혹자의 사람들이 가톨릭을 공격함으로 자신들이말로 로마 가톨릭과 다른 독자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제스처(gesture)를 취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과 역사적 기원에 대한 유전자 게놈(genome)구조를 추적해 들어가면 예외 없이 로마 가톨릭에서 그 가지가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톨릭은 예루살렘의 원시기독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역사가 아니라 그리스-로마 의 철학과 종교사상이라는 근간에 철저하게 성경을 모자이크해서 나온 종교라는 사실이다. 형식상으로는 성경같이 보이지만 그 내용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이교도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사상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주체는 예루살렘의 원시기독교의 후예들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출신 사람들에 의해 변형된 기독교라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로마 철학과 종교에 의해 재정복을 당해 발현한 종교가 기독교 정통성을 자랑한다는 로마 가톨릭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가톨릭의 사상적, 신학적, 교리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개신교가 자랑하는 정통성이다.

 

  에드워드 기번(E. Gibbon)이 지적한 바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복당한 책략 자들의 책략에 넘어갔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교도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복수했다’는 뜻은 그리스 로마인들의 이러한 책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의미이고 이교도들의 신앙과 사상방식이 기독교화 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역사적 결과는 표면상으로는 기독교가 승리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기독교 아니라 기독교의 탈을 쓴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철학의 부활인 것이다. 이 작업은 AD.100년부터 로마 중심의 문화권의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로마 가톨릭이 정치적으로도 그 세력이 완전하게 구축된 4세기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완성된 것으로 그 정체가 로마 가톨릭이다.

 

   그 특징을 보면 철저하게 그리스 -로마 사상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단지 예루살렘에서 나온 원형 그대로의 복음이 그들을 감동시켜 예루살렘의 순수 원형의 기독교를 그대로 공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로마 방식으로 탈바꿈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채색작업은 완벽한 도색이었고 감히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화려하게 꾸며놓아 오직 성경만 보이도록 해 놓음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리스-로마인지, 또 어디까지가 성경인지 모를 정도로 완전하게 일치시켜 놓았다. 역사에서 이처럼 완벽하게 만든 판도라의 상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저히 섞어 놓을 수 없는 물과 기름을 하나로 섞어 어디서 어디까지가 물이고 기름인지 모를 정도로 정말 화려하게 포장시켜 놓아 하나의 역사로 역어 로마에서 다시 태어난 전혀 다른 존재자이지만 로마 가톨릭이라는 정통의 이름으로 재창조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사 앞에 그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4. 희랍으로 들어가 희랍사상으로 재창조된 기독교

 

   교회사가인 윌리스턴 워커(Williston Walker)는 그리스 로마라는 희랍으로 들어간 기독교의 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기독교가 희랍으로 들어가면서 희랍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독교는 직면한 기존의 개념들(희랍의 전통적인 종교 철학의 사상 체들)로부터 많은 자료를 취하여 그 구조를 형성해야만 했다’라고 하였다. 워커의 이 분석은 한마디로 가톨릭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에 대한 종교적 기원에 대한 결정적인 요인에 대하여 지적해 주고 있다.

 

   집을 짓기 위하여 터를 잡고, 뼈대와 골조를 세우고, 벽을 채우고 지붕을 만들어 집의 윤곽을 잡아 나가는 일이 그 집의 형태를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어느 터에 자리 잡느냐에 따라 주인이 결정되고, 그 기초와 뼈대를 어떻게 구형화(構形化)시키느냐에 따라 어느 양식의 집이냐가 결정되고 그 벽과 지붕을 어느 양식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건물이 한옥이 되느냐 양옥이 되느냐 불란서 식이 되느냐 하는 등의 건물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희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원시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에 대해서 후론하겠지만 이때까지의 특징은 교리적으로나 사상적 체계화는 아직 구조화 이전이고 주로 실천적, 행위적, 전파 적인데 더 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희랍으로 들어간 기독교는 변증적, 교리 사상적, 논쟁적인 측면으로 성격이 변하는데 이에 대한 근간이 철저하게 희랍적, 헬라적, 그리스-로마 사상 화에 기초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로마라는 희랍으로 들어간 기독교는 형식상으로는 기독교였지만 내용은 더 이상 예루살렘을 떠나온 예수가 구상한 기독교가 아니었다. 이미 AD 70년 이전에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이나 직계 제자들은 세상을 모두 떠났고 그나마 서남아시아로 흩어진 1세대들의 원시기독교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나마 서남아시에 있었던 원시기독교의 후예들조차 대략 AD 135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교회의 교권을 장악한 로마교회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로마 가톨릭으로 발전한 로마교회는 더 이상 교리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남아시아를 이단화 시키고 원시 기독교와는 일정한 선을 근 로마교회의 독트린적인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가 희랍으로 들어가면서 희랍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한 부분은 바로 그리스 로마의 사상화로 구성된 로마 가톨릭교회가 완성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교회의 최고지도자 빅토르가 서남아시아 교회들의 지도자 폴리갑을 이단으로 낙인한 후 교회사는 급격하게 세계 최강국인 로마의 로마교회 중심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교회사의 주도하고 있는 주요 인물들 즉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 클레멘스나 마더 저스틴, 빅토르 등이 교회사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인물들은 하나같이 로마 가톨릭과 로마교회라는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사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교회의 변증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주도적인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이때부터 이미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들의 기독교 변증의 특징은 희랍사상에 의거한 변증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5. 현대기독교까지 휘어잡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앙개념들

 

   지금도 가톨릭 교인들이나 가톨릭의 교리사상을 전승한 기독교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로마 신앙개념의 말들을 주저 없이 쓰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은 성경과 무관한 개념들임에도 가톨릭과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더 남발하며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눈에 보이는 우상만이 우상이 아닌 것이다.

 

  성경을 손에 들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쓰지 말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이 먼저 나서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며 우상들의 사상을 추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신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우상적 신앙개념들을 먼저 쓰고 있으며 그러한 개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것이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마치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져 있고 자신들은 오직 성경만을 믿는다고 목숨 바쳐서 지킬 것이라고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영지(領地)는 어디까지나 이교도들의 사상적 영지일 뿐이다. 입으로는 성경을, 예수를, 복음을 외치나 그들의 영혼과 몸과 마음은 그리스-로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것은 예수가 지시한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로마의 고대 철학과 종교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서 있는 신앙의 터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로마의 영지인 것이다. 그들에게 성경은 단지 그리스-로마로 가는 도로를 편리하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아르콘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달려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로마의 전통적 개념의 사상일 뿐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한 ‘이교도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복수했다‘는 이교도들의 성공한 사상적 방식을 가지고 이교도적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도 자신은 성경을 따라 신앙생활 한다고 가톨릭 교인들이나 가톨릭의 교리사상을 전승한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예 그것이 착각인 줄도 모르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그들은 손에 성경을 들고 다니는 이교도들의 후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냉정하게 말한다면 성경을 이용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철학을 전승하는 이교도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들의 입에서는 수많은 이교도들의 그리스-로마의 종교사상체계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는 것이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제 4제 정통기독교 교리사상체계로 둔갑한 이교도 희랍의 콘텍스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