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 삶의 현장에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
로버트 허드넛 지음/전의우 옮김
요단/2002년 9월/324쪽/9,500원
▣ 저 자 로버트 허드넛
미국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명망 있는 작가이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 박사 과정을 포기한 그는 교회성장과 목회행정에 대한 열정과 경험을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보여주었다. 아울러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로 신앙인들을 이끌고 있다. 대표 저서인 『흑암 속에서 만난 하나님』에서 그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일리노이 주 위네카 장로교회를 사임하고 미네소타 주 카티지 그로브에서 기도생활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 역 자 전의우
연세대학교 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역서로는 멘토링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서인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마음』『하나님은 언제 우리 삶에 개입하는가?』『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 등이 있다. ‘98 한국 기독교총연합회 출판문화상’ 신앙부문 최우수도서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으로 역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Short Summary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삶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리스닝 포인트에 이르렀으며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었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성경의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대면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지혜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한다. 각 장들은 매일 깊이 묵상하며 읽거나 시간을 내어 공부하기에 아주 적절하다. 주제에 대한 명료한 접근과 간결한 스토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리고 늘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차 례
1부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2부 역경 가운데서의 부르심
3부 긍정적인 경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4부 부정적인 경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5부 일상적인 경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6부 왜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가?
소명 - 삶의 현장에서 듣는 하나님의 음성
로버트 허드넛 지음/전의우 옮김
요단/2002년 9월/324쪽/9,500원
1부 부르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사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큰 신비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정말로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뚜렷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통해서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들의 삶을 통해 말씀하신다. 놀라운 사실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한 방법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면 된다. 적절한 때가 되고 사건들이 충분히 축적되면,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리스닝 포인트(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 리스닝 포인트는 갑작스럽게 ‘불시에’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점진적인 것이다.
한편 리스닝 포인트는 단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에서 여러 차례 찾아올 수 있다. 신약에 기록된 가장 유명한 부르심은 바로 바울의 부르심인데,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다. 평생 동안 자주 듣는다. 어느 성으로 가며, 누구를 만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님은 말씀해 주신다. 또한 리스닝 포인트는 개인적이며, 사람마다 다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바람은 제 불고 싶은 대로 분다(요 3 : 8).”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받은 부르심은 바울이 받은 부르심과 같을 수 없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도 그들이 받은 부르심과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을 제한할 수 없다.
성경에서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아주 부정적인 경험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부정적인 경험이 너무나도 긍정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또 하나의 사실은,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지극히 상상적인 경험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심의 고전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그는 비록 희미하긴 했지만, 자신이 가야 할 약속의 땅이 있다고 느꼈다. 파스칼과 칸트와 로크도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지향하는 사람이 아직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수 13 : 1).”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음을 안다.
히브리어로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뜻이다. 부르심을 듣는다는 것은 부르심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르심을 들은 것이 아니며, 부르심 또한 아니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부르심엔 순종이 따른다. 당신에게 임한 것이 부르심이라면, 당신은 결코 그 값을 매길 수 없다. 당신이 그 값을 매겨야 한다면, 그것은 부르심이 아니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리스닝 포인트를 놓쳐버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 자신을 리스닝 포인트로 이끄는 바로 그 일상적인 것들 때문이다. 현재의 것들은 너무나도 쉽게 성경이 말하는 우상으로 돌변한다. 그러나 일단 그 우상을 제거하면, 온전함과 구원과 예수께서 풍성한 삶이라고 부르신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속사람’은 겉사람과 연합하는 과정을 겪었다. 말하자면, 존재자가 행위자와 연합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연합이라고 말하는데, 성령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속사람을 일깨우는 과정은 바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으로 특징되며, 영적 연합의 마지막 단계로 가면 우리는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도다.”라는 바울의 위대한 진술이 옳다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속사람(영혼)을 일깨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혼을 일깨울 부르심이 필요하다. 부르심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쳇바퀴를 돌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당신은 자기 수련에 대한 책과 정신요법에서부터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에 이르기까지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보았지만 당신의 속사람을 해방시킬 수 없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의 삶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좌절하고 있다. 결국 당신의 영혼을 해방하는 데 돌파구가 되는 것은 부르심이며, 그 시점이 바로 리스닝 포인트이다. 영혼(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하나님을 연구하는 신학과 연관이 있다. 영혼의 불안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시작이다. 어거스틴은 “당신 안에 안식할 때까지, 우리 영혼에는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든 부르심은 명령이라는 것이다. 명령은 요구보다 한 단계 위이다. 우리가 좌절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학적 명령을 받아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방법으로 이 징후를 유용하게 사용하신다. 여기서 신학적 명령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그 대답은 여러분 각자의 리스닝 포인트에서 제시될 수 있다.
부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에 대해 말할 때 물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당신을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부르심은 무엇인가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우리의 속사람이 이러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일이 우리 삶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첫 번째 증거이다. 물론 이 불안이 반드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부르심일 때 당신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 부르심에 이끌린다. 당신도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 : 8).”
‘네가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워라’라는 경구가 있다. 때로는 당신이 느끼기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되는 부르심이 사실은 남아야 한다는 부르심일 수 있다. 이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으나 부르심은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부르심은 당신의 자발적인 지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필연 가운데 있다. 당신은 선택되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 : 16)”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 : 44)”라고도 말씀하셨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도록 이끌림을 받은 것을 해야 한다. 이것이 당신의 ‘고결함(integrity)'이다.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요 당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이다.
초대교회의 이레니우스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히 살아있는(생기있는) 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신지 아닌지 아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당신이 온전히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은 마침내 온전히 살아 있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 : 22~23).” 당신의 삶에서 이러한 열매들이 맺힐 때, 당신은 그것이 부르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받은 부르심이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한 방법이다.
성령의 각 열매는 우리가 리스닝 포인트에 이르고 부르심을 들을 때 맺힌다. 물론 이 때 죄가 거듭 고개를 내밀어 아홉 가지 열매를 삼키려 하고, 그 결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풍성한 삶이 희미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신의 풍성한 삶이 점점 더 희미해지고 불안감을 더 많이 느낄수록, 당신은 그 다음 리스닝 포인트로 더 가까이 이끌리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가 있을 동안에는 그 열매를 즐겨라. 이것은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부르심은 들을 수 있는 것
우리는 성경 속의 부르심들을 기적으로 여겨 근접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부르심들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일단 부르심을 들으면 거기에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순종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소명받은 일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상황이다. 그래서 바울은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 : 18).”고 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죄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겉사람과 속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 찢겨진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치료할 수 없다. 우리는 치료받아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찢겨진 우리를 잠시 동안만이라도 온전케 하고, 치유하며,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그분의 세미한 음성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것은” 친히 그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써 찢긴 그들을 치료하시고 하나 되게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다시금 온전케 되었다. 이제 우리가 부르심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로이다. 믿음이나 순종이 선물이 아니라 자기의 성취로 여겨질 때, 그것은 자아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를 선물로 받아들일 때, 당신은 자신의 실패나 좌절, 위기도 선물로 여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부 역경 가운데서의 부르심
타향살이 가운데서의 부르심 -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고향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타향살이에는 뭔가 창조적인 것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광야에 계셨다. 아브라함은 네겝 사막에 있었다. 친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것은 친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어 준다.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함으로써 부쩍 성장하거나, 비즈니스 여행이나 심지어 입원까지도 창조적인 자원에 대해, 즉 이전까지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자원에 대해 우리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곳에 있으며, 여기서 이전에 결코 듣지 못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또,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이것은 그가 고향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까지도 잃었다는 뜻이다.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외톨이의 처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현재 우리의 자리가 충분히 부적절한 자리라고 느끼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이 당신의 리스닝 포인트일 수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에 응답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33세쯤이다. 33세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칼 융은, 35세가 넘어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들의 심리적 문제는 실제로 신학적인 문제 -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문제 - 였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어린아이나 청년들은 부르심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무엘과 예레미야처럼 어려서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문제에 더 예민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 : 1).”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명령이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르심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신다. 그러나 당신이 부르심에 응답할 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찾아간 것처럼 너무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항상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그 일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인 것일 때 당신은 그 어떤 불확실성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 가운데서의 부르심 - 탕자
당신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실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하는가? 탕자의 비유(눅 15 : 11~32)에서 예수께서는 한 청년의 실패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사건의 첫 고리는 바로 이것이다.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예수께서는 그가 “다 없이한 후” 한 농장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실패를 포함하여 삶의 사건들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지경까지 당신을 낮추고 있다. 탕자처럼, 실패는 당신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며 그곳에서 당신은 마침내 겸손해진다. 겸손해질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한다. 탕자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극히 궁핍할 때 하나님께 나온다. 하나님은 바로 이 궁핍(need)에서 시작하신다. 우리의 삶이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혼자이며 실패했을 때, 가진 자원이 바닥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에 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분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 삶이 바닥에까지 떨어지기 전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당신이 탕자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한다면 그것은 당신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기억하라. 성경이 당신을 움직일 힘을 갖지 못한다면, 성경은 결코 지금까지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아래로 향하던 소용돌이가 갑자기 멈추더니 위쪽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제 탕자는 제정신이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한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고전적 회개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다. 큰아들은 고백할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궁핍함도 없었고, 하나님도 없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회개의 원래 의미는 ‘마음의 변화’이다. 회개하면 당신은 달라진다. 당신은 변화한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는 완전히 180도 달라졌다. 돼지우리에서의 그의 리스닝 포인트가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삶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가? 이들이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을 우리는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놀랍게도 탕자의 아버지가 바로 그랬다. 그는 아들에게 돈을 준다. 아들이 떠나는 것을 그냥 지켜본다. 그런데 왜 작은아들은 집에 돌아오고 싶어하는가? 왜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지 않는가?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를 되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는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아버지의 부름에 대답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실패자들을 찾아 구원하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탕자는 속죄한다. 속죄가 없다면, 즉 우리가 떠났던 분께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회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속죄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로 하여금 속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고백하거나 회개하거나 속죄하기도 전에 그에게 입을 맞춘다.
불확실함 가운데서의 부르심 - 초대교회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리스닝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의 다락방 모임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이 작은 무리가 느꼈을 불안을 우리는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이들은 지도자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잠겨 있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120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 : 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 : 8).”
성령께서 오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다렸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령께서 오실 것이기에. 기다림은 위기의 순간에 특히 도움이 된다. 이들의 힘은 기다림에서 나왔다. 이러한 힘은 위기가 순리적으로 해결되도록 기다리는 데서 생겨나며,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리스닝 포인트에 이르러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처럼 인내라는 선물은 위기를 부르심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위기 가운데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행동하고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된다면 인내, 즉 기다림을 밀어내게 될 것이다. 당신이 위기 가운데서 잠잠히 기다릴 때 그 기다림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능력은 당신에게서 나온 것일 수 없다. 당신에게 맡겨뒀다면 아마도 당신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죽고 나서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데는 자그마치 50일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기다림 속에서 자신들의 리스닝 포인트에 이르렀기에 이들은 나가서 “세상을 온통 뒤집어놓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위기 가운데서 함께하는 기다림에는 이렇게 큰 능력이 있다.
또한 오순절 이야기는 우리에게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말한다. 성도란 위기에 처한 우리가 부르심을 들을 때까지 함께 기다려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 : 14).” 합심기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이런 기도에는 능력이 있다.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싶다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통해 함께 기도하라.
기도하며 자신들의 소명(부르심)을 기다리고 있던 다락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명이 증거사역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의 증거 능력은 성령께서 이들에게 임하셨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당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면 그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당신의 소명은 이제 기다림에서 증거하기로 옮겨졌다.
시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 예수님
당신의 부르심이 진정한 것인지 테스트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당신이 그 부르심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견딜 수 있는지 보는 것이다. 이러한 유혹은 예수님까지 대상이 될 정도로 아주 실제적이고 보편적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음성으로 그분의 부르심은 진정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런데 그러기가 무섭게 광야에서 마귀는 그분을 유혹(시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잊기가 쉽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 : 1).” 그 분의 경험 전체가 성령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부르심에 순종하고 부르심을 듣는 자가 계속해서 순종하기 위해서는 유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진실하기 위해서는, 실제의 자신보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유혹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유혹은 영적 경험이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피상적으로 살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유혹을 물리치는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고 그 형상을 충실하게 유지할 수 있게 하신다.
일단 우리가 받는 유혹이 영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유혹에 대한 우리의 시각 전체가 바뀐다. 유혹이 더 이상 프로메테우스적인 싸움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기회로 보인다.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은 분명 은혜의 경험이었다. 그분은 유혹을 피하지 않으셨다. 유혹으로부터 도망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유혹이 자신의 부르심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부르심에 충실할 수 있게 하시는가?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펼쳐들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각각의 유혹을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유혹은 친구나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도 오고, 종교적 의식에 수반되기도 하며, 우리의 약점과 장점이 모두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혹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는 바울의 말이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 : 13).”
3부 긍정적인 경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감성 가운데서의 부르심 -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부르심을 듣기 어려울 거라고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 산헤드린, 즉 입법권과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까지 갖는 70명의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로 구성된 유대 대법원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거친 사람들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들은 야고보를 죽였다. 성경에 따르면 이들은 스데반을 죽였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이러한 지위와 권력을 가진 니고데모가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인생에서 지위와 권력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그는 내면 가장 깊은 곳, 그의 속사람에서 예수님께 이끌렸다. 그는 겸손할 수도 있는 바리새인이었으며, 학생이 될 수도 있는 선생이었으며, 인도를 받을 수도 있는 지도자였다. 예수께서 갑자기 마을에 나타나심으로 인해 그가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만 알기 위해 세웠던 그의 삶의 모든 구조물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적어도 이성으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성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을 감성으로는 알고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그의 하나님 추구에 대한 해답을 예수께서 갖고 계실 것 같은.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해 묻는다. 예수께서는 약간 퉁명스럽게 대답하신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 : 9~10).”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스케줄에서도 벗어난 니고데모는 마침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리스닝 포인트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 이후에 우리는 공회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을 판결할 수는 없지 않소(요 7 : 51)?” 그러나 이것은 용기 있는 그의 멋진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르심(소명)이기 때문이다. 용기는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것은 그가 자원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그것이 부르심일 때, 위험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후 니고데모는 다시 소명을 받는다. 이번에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것을 돕는 것이다. 그는 향료를 백근쯤 가져왔다. 그리고 그들은 향료를 시신에 뿌리고 시신을 세마포로 싼 다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서 가까운 동산의 새 무덤에 두었다. 만약 동료가 그를 보았다면, 니고데모는 추방당했을 것이다.
사랑 가운데서의 부르심 - 바울
우리에게는 두 개의 기본적인 감정이 있다.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너무나 많다. 바울도 분명 마찬가지였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미움을 살까봐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를 다른 모든 사람들과 분리시켰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613개의 생활규범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틀렸으며, 바울이 이것을 말해 주는 최초의 증인이다.
우리는 두려움을 막아보려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비판하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또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속에는 두려움보다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 : 18).” 기본적인 감정 가운데 긍정적인 것은 사랑이며, 이것은 두려움보다 깊은 감정이다.
바울은 두려움에서 놓여날 때까지, 그의 삶에서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을 다루는 자신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할 정도로 두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너무나도 강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살인자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래로 치닫는 그의 삶의 소용돌이를 막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고 있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발견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 : 16).”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살면서 이 사랑에 대해 벽을 쌓는다면 이것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쌓은 벽을 뚫고 들어오셔야 한다. 바울과 같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바울의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그가 그 경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사랑할 때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그분은 사랑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며, 그분 자신이 그것을 몸소 보이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사랑은 유일하게 근본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진리를 사랑 위에 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유일하게 근본적인 것으로 볼 때 생기는 문제는 진리가 사랑을 몰아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새주의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가족적이든, 문화적이든, 민족적이든, 철학적이든 간에 오만하다. 예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역할을 하길 그만두고 예수님 역할을 해야 한다.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죽여왔던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회심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체험이 그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겉사람뿐만 아니라 속사람이 변화된다. 그의 부르심이 그로 하여금 자기 존재의 더 깊은 곳으로, 사랑이 두려움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께서는 이처럼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다. 우리는 회개할 수 없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불가능한 명령들 가운데 하나였다. 바울이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듯이, 예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움직여 회개케 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당신이 회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그렇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4부 부정적인 경험 가운데서의 부르심
깊은 슬픔 가운데서의 부르심 - 한나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워 울고 먹지도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슬픈 마음을 가눌 길 없을 때, 가장 멀리 계신 것 같은 하나님께서 사실은 가장 가까이 계실 수 있다. 어두워지자마자 별들이 빛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갑자기 한나는 직감으로 행동한다. 그녀는 성전으로 간다. 무엇인가 그녀를 이끄는 것이 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그녀를 성전으로 이끈다. 깊은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 성전으로 이끌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 거라는 직감으로 행동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만이 고통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지탱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성전이 계시적인 방법만을 위한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과 이성과 직감을 거치기 전에는 계시의 빛을 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이런 과정을 축소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길이 거의 아니다.
그녀는 술이나 일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서 도망치기보다는 직감으로 행동한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도하며 통곡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한나는 항상 직관적인 행동을 했다. 그녀는 음식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지와 지성과 감성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집중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한나가 “속으로(마음으로) 말하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깊은 정신적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고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 직감으로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다. 엘리는 한나를 성전으로 이끌어 온 그녀의 삶의 사건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 : 17).”
한나는 돌아가 음식을 먹는다. 이성의 고요한 빛이 돌아온다. 지금은 곰곰이 생각하며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갖게 되는 때이다. 한나와 그녀의 남편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다. 두 사람은 성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며 잠자리를 같이 한다. 이것이 전부이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생활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별한 것은 “주께서 한나를 기억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비탄 가운데서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이것만으로도 부르심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끝난 후 고요한 이성의 빛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만 가운데서의 부르심 - 욥
욥은 그렇게 무서운 재앙을 자신에게 허락한 데 대해, 사실 그 원인을 제공한 데 대해 따지고 들면서 사사건건 하나님과 논쟁한다. 빈번하게 잘못 해석되는 구절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욥 13 : 15).” 욥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보다도 귀중하게 여긴 것은 자신의 자랑스런 ‘순전함’이었다. 욥은 오만하다. 이것이 그의 문제이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고 또 치신 것은 그를 겸손케 만들며, 그가 마침내 리스닝 포인트에 이를 수 있도록 그를 낮추시기 위함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욥은 자신이 줄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주께 대하여 듣기만 하였삽더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들은 것은 풍문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 : 5~6).” 고난은 우리의 오만과 독선을 제거하고 우리를 리스닝 포인트로 이끌 수 있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 : 34).”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있어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계셨다.
5부 일상적인 경험 가운데의 부르심
습관 가운데서의 부르심 - 다니엘
재차 말하지만 우리를 리스닝 포인트로 이끄는 것은 다름아닌 삶의 사건들이다. 다니엘은 잡혀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종교가 전혀 다른 낯선 문화 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경건의 습관을 유지했고,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했다. 다니엘은 인생의 황금기에 있었지만 규칙적으로 경건을 연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를 시기하던 관리들이 꾸민 음모로 사자굴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다니엘이 취한 행동은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단 6 : 10).” 다니엘이 이처럼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좋은 때에 준비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절정에 있을 때 밑바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식사법과 기도 생활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접촉을 유지했다. 경건의 습관은 마치 그의 몸의 일부와 같았다.
종교에서 습관에 해당하는 단어는 ‘의식(ritual)'이다. 매일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다니엘에게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그가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사자굴에서 나와서 왕에게 자신의 목숨이 보존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단 6 : 22)”라고 말한다. 의식이라는 단어는 ’짜맞추다(fit together)'라는 어근에서 나왔다. 종교의식의 목적은 삶의 일들 - 사건들, 사람들, 좋은 시간과 나쁜 시간들 - 을 짜맞추는 것이다. 로렌스 형제가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 부른 것과 함께 일들이 짜맞춰지기 시작한다. 의식이란 말은 ‘셈(arithmetic)'이라는 어근도 갖는다. 우리는 의식을 통해 일들이 어떻게 축적되고 우리가 잠재적인 리스닝 포인트를 향해 어떻게 이끌려가고 있는지를 보기 시작한다.
예배 가운데서의 부르심 - 이사야
이사야는 교육을 잘 받은 최상류층이자 지배계층이었다. 그는 정치에 적극적이었고, 특히 외교정책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고, 자신의 종교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정기적으로 예배도 드렸다. 그는 또한 주전 742년 자신이 어떻게 리스닝 포인트에 이르러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이야기도 남겼다. 부르심은 예배 중에 찾아왔다. 이사야가 말했듯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사 6 : 1~7).” 예배는 그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당신이 예배 가운데 몰입할 때, 당신은 하나님에 의해 발견될 수 있다. 말씀을 듣고 눈을 감고 목소리를 높이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모두 이를 위한 것이 아닌가?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으로부터 역시 자신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으로 옮겨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 5).” 하나님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뿐만 아니라 가장 나쁜 부분에 대한 깨달음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그러나 가장 나쁜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 먼저 온다. 하나님이 없으면 죄의식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신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 : 6~7).” 이사야의 입술을 지진 숯불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고백한 후에야 이루어지며, 그의 고백은 예기치 않은 부르심이 있은 후에야 이루어진다. 이사야가 자신과 하나님의 단절을 고백하는 상상력 있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받고 단절이 회복된다. 다시 말해, 죄가 없으면 용서도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죄도 없다. 그리고 상상력이 없으면 하나님도 알 수 없다. 부르심은 상상력에서 주어진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마지막 단계는 그의 헌신이다. 부르심의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의 헌신에서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라(사 6 : 8~9).” 용서의 능력은 너무나 크기에 누구든지 용서를 경험하는 사람은 용서한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한다.
회심한 이사야에게 임무가 주어진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는 임무이다. 이사야에게 있어 이러한 깨달음은 예배에서 일어났고, 그를 리스닝 포인트로 이끈 것은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위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 ‘자기 삶의 진정한 소명’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자아가 바로 여기, 그들이 부르심을 받는 곳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바로 다음 예배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우리의 상상력의 뇌관에 불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특별한 위기로 이끄는 삶의 사건들 속에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삶의 사건들은 항상 이런 일을 하고 있다.
6부 왜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가?
탐심 때문이다 - 솔로몬
솔로몬은 탐심이 우리의 귀를 막아 부르심을 들을 수 없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예이다. 성전 봉헌 때 하나님께 서원했던 바로 그가 얼마 후에 “왕의 마음이. …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왕상 11 : 4).”라는 평가를 받는다. 솔로몬은 경제를 신학 위에, 탐심을 하나님 위에 두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받는 유혹이다. 경제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간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사울처럼 솔로몬도 출발은 좋았다. 지혜도 받았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 : 3).”가 그의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리스닝 포인트에 서있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는 아버지 다윗을 통해 들었던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왕상 2 : 3).”는 부르심을 순종하는 데서 이미 멀어져 있었으며, 미래의 부르심에도 귀를 막고 있었다. 그에게는 힘과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었다. 솔로몬의 문제는 그의 성취가 그의 귀를 막아 부르심을 듣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자기 신뢰 때문이다 - 젊은 부자 관원
젊은 부자 관원에게는 모든 것이 형통했다. 그는 1세기의 경영학 석사였으며, 뛰어나고 똑똑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에 자신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할 정도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성경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막 10 : 21).”고 말하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열세 번째 제자가 되길 원하셨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필요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 : 20)”,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 : 16).”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으니 영원한 생명인들 왜 갖고 싶지 않았겠는가. 자신을 신뢰하거나 최소한 자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아직은 사건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바른 일을 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아이들을 잘 키우며 결혼생활을 훌륭히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예수께서 제시하신 태도와는 완전히 대조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이미 성공자이기 때문에 성공자가 되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요지를 말씀하시기 위해 젊은 부자 관원에게 불가능한 명령,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 19 : 21).”
부자 관원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 : 22).” 이것이 요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었으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께 오면서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속사람을 들여다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젊은 부자 관원으로부터 자기 신뢰의 껍질을 벗겨버리셨다는 뜻이다. 자신의 자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하는 것만이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가 되는 방법이다.
왜 그는 부르심을 순종하지 못했는가? 그 대답은 젊은 부자 관원의 필요가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필요만으로는 우리를 리스닝 포인트로 이끌기에 부족하다. 주림(갈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필요인지 주림인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이 당신의 머리에서 창자로 내려갔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을 리스닝 포인트로 이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삶에서 부족한 그 무엇에 닿아 있는 시점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 준비되는 것이다.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각 복음서에 나타날 때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리스닝 포인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삶에서 주리고 있는 무엇인가에 의해 그분께로 이끌리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 : 35).” 이러한 주림을 느끼기 위해서는 당신의 삶에서 자기 신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이 때 당신은 리스닝 포인트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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