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소명 /오스 기니스 지음/홍병룡 옮김

미션(cmc) 2010. 6. 19. 09:52

소명

오스 기니스 지음/홍병룡 옮김

IVP/384쪽/2000년 9월/9,800원

▣ 저 자 오스 기니스

제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이후로는 미국에 체류하면서 현재 기독교 문명과 철학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대외정책에 대한 연구․교육․출판을 목적으로 세워진 브루킹스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과 미국의 종교의 자유를 주로 연구하는 단체인 윌리암스버그 헌장 협회의 이사장을 지낸 바 있는 그는 유럽, 미국, 캐나다 등을 광범위하게 다니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해 왔다. 현재는 고든 맥도날드와 함께 트리니티 포럼의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도전받는 현대 기독교』『무덤파기 작전』『교회 성장 운동의 새로운 기초』등이 있다.

▣ 역 자 홍병룡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IVP 대표간사로 일했다.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와 기독교학문연구소에서 각각 공부하였고, 현재 호주에서 로버트 뱅크스 박사의 지도하에 영국 옥스퍼드 선교센터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역서로 『여성, 그대의 사명은』『서로 서로 세우자』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세계적인 변증가요, 연설가인 오스 기니스가 30년 이상의 오랜 기간 '소명'이라는 주제와 씨름한 끝에 내놓은 그의 대표작이다. 수많은 선택을 앞에 둔 십대에서부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주제인 소명은 우리가 창조된 구체적인 목적, 즉 부름받은 그 목적을 발견할 때에만 우리 인생의 소명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존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의 답은 바로 소명이다.

인생의 단 하나의 동기가 하나님의 소명일 때 소명의식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궁극적인 나침반이 되며, 우리 인생의 줄거리를 파악하는 열쇠이고, 혼란한 세상에서 수수께끼 같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풀어내는 열쇠가 된다. 저자는 성경, 역사, 고전, 사회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 및 변증가, 분석가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폭넓게 아우르며 여러 측면에서의 소명을 빠짐없이 부각시켜 줌으로써 읽는 이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삶을 꿰뚫게 만드는 동시에 일과 자기 정체감과 성장에 대한 동기를 부추긴다. 이 책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성취하려는 사람들, 특히 소명을 추구하고 성취하기 위해 어떤 대가도 지불하고자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 차 례

1. 소명 : 궁극적인 존재 이유

2. 진정한 추구자는 그 어디에

3. 나는 누구인가?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8.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

9. 유일한 청중

10. 불꽃 같은 인생

11. 책임성 : 과연 누구를 위한 책임인가?

12. 소명의 사람들

13.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15. 네게 무슨 상관이냐?

16.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18. 창문이 있는 세계

19. 신앙의 세 가지 함정

20. 일편단심으로 사는 인생

21. 한낮에 꿈꾸는 사람

22. 평범한 것에서 광채를

23.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24.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25. 때가 왔도다

26. 최후의 부르심

소명

오스 기니스 지음/홍병룡 옮김

IVP/384쪽/2000년 9월/9,800원

1. 소명 : 궁극적인 존재 이유

우리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한다. 우리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갈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있는지,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널(Journal)』에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진정 내가 하길 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해당되는 참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며, 내가 그것을 '위하여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는' 그 사상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가 창조된 구체적인 목적, 곧 우리가 부름받은 그 목적을 발견할 때에만 우리 인생의 소명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 창조주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그러면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

2. 진정한 추구자는 그 어디에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와 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걸작들을 남긴 다빈치는 끝없는 지식욕과 인생상을 절감하면서 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비범한 정신이 생각해낸 것 중에 그가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장엄한 실패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소명의 경이로움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적인 추구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경우, 그 때 소명은 추구자 자신이 추적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진지한 추구자들은 지난 3000년간 서구 세계의 추구를 형성했던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견해' 중 하나를 추구하게 된다. ‘아가페’의 길은 추구의 수단이 ‘에로스’와 다르다.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거리를 생각할 때 다빈치와 같은 그 어떤 추구자인들 그 간격을 메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탐색을 시작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발견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추적당하고 있는 추구자’라는 이 오래된 이야기는 C. S. 루이스가 신앙을 찾은 여정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루이스는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옥스퍼드의 철학자요, 문학자로서 그의 명저들은 널리 읽히고 있다). 오늘날에는 추구자라는 용어가 종종 제멋대로 사용되나 다빈치와 같이 화려한 인생을 살지만 인간 자율적인 유한한 추구로는 불가능하다는 비극을 직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명의 진리가 위안과 약속을 준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명시적인 약속, 곧 추구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는(“찾으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약속이 있을 뿐 아니라 추구자 자신이 오히려 추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분의 직접적인 예가 있다.

3. 나는 누구인가?

1989년 해방된 체코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바츨라프 하벨은 해방 전 두 번의 옥살이를 거치면서 쓴 서구의 고전적인 3대 옥중서신이 된 「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감옥에서의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인 인생의 의미를 붙들고 씨름하게 된다. 하벨은 깊이 고뇌한다. 인간 개개인의 정체성은 책임성을 가정하고 또 그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없다면, 혹은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책임성이라는 개념과 ‘소명’에 관한 논의는 이해할 수 없는 공염불에 불과할 것이다. 부르는 자(Caller)가 없다면 부르심(소명)도 없다.

요즘 세상에서 바츨라프 하벨과 같은 정치 지도자는 드물다. 그의 열정적인 씨름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소명의 진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또 다른 증거이다. 소명(call 또는 vocation)이라는 개념은 개인의 정체성의 기반과 인간됨 자체를 이해하려는 현대인의 추구와 연관되기 때문에 우리 각자에게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의 위기는 현대인에게 항상 붙어 다니는 불가피한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서구 역사상 위대한 개혁자 중에서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5년 25세 때 회심하게 되었을 때 정치를 집어치우고 기독교 사역의 길로 접어들 뻔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윌버포스 역시 ‘영적인’ 일이 ‘세속적인’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존 뉴턴(Amazing Grace의 작시자)은 그에게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고 설득하자 윌버포스는 많이 기도하고 숙고한 끝에 뉴턴의 조언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은 그를 국회의원으로서 억압받는 자들의 자유를 옹호하도록 부르고 계셨다.

소명의 총체적인 성격이 왜곡되어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일종의 이원론을 바로 가톨릭적 왜곡이라 부를 수 있다. 한편, 소명에 대한 개신교의 혼동은 이보다 더 잘못된 ‘개신교적 왜곡’을 초래했다. 이것도 일종의 이원론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켰을 뿐 아니라 후자를 전자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현대 세계의 압력으로 인해 개신교적 왜곡은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소명이란 용어를 이를 대치하는 하나의 용어로 축소시켰다. 종교개혁 초기를 거쳐 청교도 시대에는 일, 거래, 고용, 직업 등과 같은 단어들이 서서히 소명과 교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소명은 직업이 되었고, 직업은 부패했으며, 소명은 이제 수입은 적지만 좀더 실제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고상하게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개신교적 왜곡의 재앙에서 회복되는 길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소명이 마치 부르시는 분이 없는 어떤 것인 양 생각하는 모든 관념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둘째, 좀더 적극적으로는 일차적인 소명을 우선적인 위치로 복귀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소명의 배경이 되는 예배를 회복하고 또한 소명의 핵심인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다른 어떤 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소명을 함께 묶어 놓음으로써 두 가지 왜곡을 피해야 한다. 일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개신교적 왜곡을 극복하고, 이차적인 소명을 강조함으로써 가톨릭적 왜곡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원론은 소명의 힘을 없애지만 총체적인 이해는 소명의 위력을 발휘하게 한다. 하나님의 것이 되고자하는 열정이 소명에 응답하는 모든 이의 에너지를 모으는 원동력이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존 콜트레인은 매우 뛰어난 솜씨로 <지극히 탁월한 사랑>을 연주한 다음 ‘눈크 디미티스!‘(그 곡을 그 때보다 더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으리라고 느낀 뒤의 찬사)라고 말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진수에 해당하는 가장 깊은 재능을 표현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이것이 소명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하나님은 보통 우리의 재능에 부합되게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재능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경이로운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본연의 자아가 되도록’ 부르시고 ‘우리의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하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을 따를 때에만 진정 ‘본연의 모습’이 되고, ‘우리 존재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타인을 위한 우리의 것’인 재능은 이기심이 아니라 섬김, 곧 완전한 자유가 된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오늘날 세계 도처에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나중에 “여보게,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했던 대로 행동했고 이제 여기에 묻히노라고 우리 주님께 전해 주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세 번째 천 년을 맞이하는 문턱에서 이 도전은 믿음만큼이나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행동을 촉발해 내고 강화시키는 믿음을 요구한다.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 중 많은 이들이 소명의 진리에 담긴 다차원적인 의미를 알고자 노력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현대 세계의 도전과 현 시점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꿋꿋하게 버틸 때‘는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대로 행동할 때이다. 행동할 때는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대로 믿을 때이다. 믿을 때는 바로 신앙에 대해 안락하게 생각하던 좁은 사고 방식에서 박차고 일어나 그분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때이다. 이 소명은 가장 깊고도 강렬한 우리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8.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

조지 스테이너(George Steiner)의 소설 『A.H의 산 크리스토발로 가는 길』은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소설의 줄거리는 놀랄 만큼 단순하지만 헌신된 유대인인 스테이너는 이 책에서 나치주의가 지닌 더욱 명백한 세력 - 역사적․경제적․사회적․심리적 - 의 저변에 깔려 있는 더욱 본질적인 신학적 악을 간파했다. 스테이너의 결론은 도덕적으로는 잘못되었을지 모르나 다른 수많은 기독교적인 진술보다 소명의 진리에 훨씬 더 가깝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진리에 대한 사단의 증거로 볼 수 있으며, 소명에 대한 모든 부적합한 견해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형태로 오신 놀랍고도 자비로운 그 잠시동안의 사건을 제외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로서 말씀하시고,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의 책임은 그 말씀에 귀기울이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의 이면에는 소명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말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제시하시는 가장 깊고도 완전한 표현인데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 시초이다. 따라서 그분이 부르실 때 귀기울이고 그분을 신뢰하며 순종하면 우리는 그분의 위엄과 존귀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말의 의미를 격하시켜 버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우리의 문화 전체가 현대 세계의 선물에 너무나 의존한 나머지 실제로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과제 중에서 현대 세계에 대한 신앙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 우리 사회와 같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 개인주의적인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개개인이 실제로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함으로써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신앙의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

9. 유일한 청중

조셉 프래지어가 쓴 전기 『앤드류 카네기』는 소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점을 부각시켜 준다. 자신의 계획과 시도에 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목표’, ‘야망’, ‘성취’, ‘평가’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청중’이라는 중요한 요소는 쉽게 간과하는데 문제는 우리에게 청중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청중을 갖고 있느냐이다. 이런 관찰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기울이면서 산 인생은 다른 모든 청중을 밀어내는 단 한 분의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 낸 인생이다.

마틴 루터 킹이 『버밍햄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쓴 것처럼 “당시에는 교회가 단순히 여론의 생각과 원리를 기록한 온도계가 아니라 사회의 관습을 변혁시키는 온도 조절 장치였다.” 지도자인가, 뚜쟁이인가, 자이로스코프인가, 갤럽 여론 조사인가, 온도 조절 장치인가, 온도계인가? 오직 단 한 분 그 유일한 청중의 임재를 연습하는 자들만이 전자에 이르고 후자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군인이었던 찰스 고든 장군의 성품과 삶이 뛰어난 본보기다. ”나는 단 한 분 그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고 있다. 다른 모든 청중 앞에서는 내가 입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10. 불꽃 같은 인생

우리 시대에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불타던 인물이었다. 파스칼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요, 서구 문학의 위대한 걸작으로 꼽히는 『팡세』의 저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부분 파스칼의 수학적 업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나 그의 심오한 성품과 재능에 불을 붙여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르게 한 요인은 우리 모두에게도 열려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런 면에서 파스칼은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삶에서 가장 깊은 성장과 최고의 영웅적 자질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열쇠다.

하나님의 소명을 좇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성장의 비밀이 되고 영웅적 자질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 첫째, 하나님의 소명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라도록 직접 도전한다. 마치 운동 코치가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듯이,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내듯이, 하나님의 소명은 다른 어떤 소명도 도달할 수 없는 깊은 차원에서 우리 안에 공명하게 되고, 다른 어떤 소명도 측량할 수 없는 높은 경지로 우리를 끌어올린다. 둘째, 하나님의 소명의 핵심에는 모방의 요소가 담겨있다. 바울이 사용한 '본받는 자'라는 단어는 중요한 용어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델을 닮는 것 - 관찰하고 모방하는 것 - 은 제자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스승의 권위 아래서 경험을 통하여 스승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그것은 그들의 제자도와 배움의 핵심이자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1. 책임성 : 과연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

파블로 피카소는 20세기 예술의 최정상에 위치한 천재적인 예술가이다. 그러나 그는 대인관계 특히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탐욕스러운 괴물과 같았다. 무신론자였던 피카소는 하나님을 부인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교회로 가서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과의 사랑의 약속에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한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소명은 도덕적 책임의 근거를 찾는 현대적 추구와 윤리 자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책임성이라는 개념은 ‘영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 이 단어가 급속히 부상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책임성의 본래의 개념은 그 뿌리가 절단되어 시들어 죽을 운명이라는 점이다. 현대적 의미의 책임성은 그 기원과는 모순되게도 ‘누구’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모두 ‘무엇’에 대한 책임이 되어 버렸다.

12. 소명의 사람들

남부 프랑스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샹봉(Le Chambon) 시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5,000명 이상의 유대인 어린이를 구출한 영웅이었다. 샹봉 이야기는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좇을 본보기로는 너무나 드문 경우이나 그것은 또한 현대의 신자들이 쉽게 잊어버리는 소명의 또 다른 차원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의 소명에는 개인적인 차원이 있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개별적인 소명뿐 아니라 공동체적인 소명도 부여하신다.

공동체가 현대 세계에서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고통스럽게도 공동체적 소명 의식을 다시 정립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몇 가지 분명한 도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현대의 임의적인 개인주의 성향에 단호히 저항해야 함을 뜻한다. 둘째, 우리의 공동체적 소명에 대한 헌신은 모든 개인적인 소명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적과 유익을 존중해야함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확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 관행은 기독교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어떤 관행에 대하여 ”이 관행만이 기독교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분명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방식이 많이 있지만 어느 하나만이 유일하게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우리가 공동체적 소명에 헌신한다는 것은 개혁은 지속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개혁을 개혁하는 것도 필요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13.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

미국 연방 정부의 고위 관료이자 주(駐)서독 대사였던 아더 번즈는 아이젠하워에서 로널드 레이건에 이르는 수많은 대통령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했던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아더 번즈는 또한 유대인이었는데 1970년대에 백악관의 비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아더 번즈의 기도는 워싱턴에서 전설적인 기도가 되었다. 이것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 소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기독교라는 세 용어를 생각해 보라. 당신은 첫 번째 용어가 두 번째로 그리고 세 번째로 진전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우선 각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은 인격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흐르거나 혹은 참신하고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해 매력을 느끼더라도 ‘기독교’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거나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누구나 금욕적이었는데 기독교계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Christian)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썼다. 니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인은 오직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썼다. 역사는 ‘그리스도’에서 ‘기독교’로 초점이 전환된 것 자체가 바로 타락의 표지임을 보여 준다.

이처럼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기독교로 이어질 때 하향 곡선을 그으며 미끄러지는 것으로부터 소명의 진리는 우리를 어떻게 보호해 주는가? 첫째, 소명이 그 성격상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좇아갈 때에만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둘째, 소명은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하나의 여정으로 보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셋째, 소명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모두 각기 다른 단계에 위치해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한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음을 알려 준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윌리엄 골딩의 소설 『첨탑』」의 주제로는 자만심과 허영심을 든다. 골딩은 이야기를 잘 펼쳐 가면서 등장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소명의 어두운 면을 부각시킨다. 소명의 이면에는 자만심의 유혹이 있다.

소명과 자만심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부름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수많은 방법으로 당신의 귀에 속삭이시는 세 가지 음성을 듣는 것이다. “너는 선택받았어. 너는 재능 있는 인물이야. 너는 특별해.” 이어서 당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한 사단의 메아리에 반응하게 될 것이다. 즉 당신 자신에게 결코 크지 않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선택받았어. 나는 재능 있는 인물이야.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당신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소명의 경이감이 무서운 자만심으로 자라난다.

15. 네게 무슨 상관이냐?

볼프강 모차르트는 틀림없이 천재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있는 소수에 속한 인물일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그처럼 창조적인 재능을 지닌 인물이 그렇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었을까? 모차르트의 실제 인생과 각색된 인생은 모두 통렬하고 비극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이다. 소명의 진리는 재능과 욕망과 거의 불가피한 질투의 유혹 사이의 연계성을 깊이 다루어 준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경쟁이 예증하듯이 소명이 질투에 약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질투는 우리의 재능과 깊은 욕구가 우리의 소명의식과 얽혀진 곳에 침투한다. 둘째, 질투는 경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명을 타락시킨다. 셋째, 질투는 소명을 공격한다. 질투는 과도한 자기애(愛)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게 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혹을 받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남의 진보를 우리 자신의 소명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역시 듣게 될 것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를 따르라!”

16.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돈은 영적인 문제다. 이 도전은 소명과 모든 면에서 관계가 있다. 세계 경제의 이슈들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이슈가 외형적으로 투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명의 진리에 있는 또 다른 측면을 접하게 된다. 소명은 과거 근대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자본주의를 지도하고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소수의 진리 중 하나다.

물론 우리 마음 속에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 있으나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다. 텍사스의 어느 석유 갑부의 동료는 그 갑부에 대해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든 상관없이 그의 마음은 항상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이야기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현실에서 실제로 재현된 무서운 이야기는 ‘항상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였다. 끝없는 탐욕에 대한 이 같은 관찰을 보면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맘몬(Mammon : ‘부’를 의미하는 아랍어)‘의 의미는 매우 독특하다. 그 분은 그 단어에 이전에는 없었던 힘과 정확성을 부여하셨다. 돈은 결정적인 영적 능력을 지닌 능동적인 매체로서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선하게 혹은 나쁘게 사용할 때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능력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소명의 진리는 돈에 흠뻑 젖고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를 향해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로 소명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매순간 즉각적이고 결정적으로 돈과 시장을 뛰어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좀더 실제적으로는 소명은 시장 중심의 의식 구조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전혀 다른 행동 양식을 사회에 소개한다. 우리는 돈으로 보상받기 때문이 아니라 부름받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

17. 나태함이란 이름의 질병

“나는 하지 않는 편이 낫겠소.” 이 말은 1853년 허만 멜빌이 쓴 단편 『바틀비 이야기』에서 25회 이상이나 반복된다. 『바틀비 이야기』를 단순한 소설로 읽든 혹은 저자의 생애에 대한 배경으로 읽든 간에 그것은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켜 준다. 소명은 죽음에 이르는 죄인 나태함을 제거하는 최고의 해독제이다.

소명의 진리는 나태함이 지닌 이 모든 측면에 대해 다룬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주에 의해 개인적으로 부름받은 만큼 우리가 하는 일 속에서 우리 삶의 매순간과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의미를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도전받고, 감동받고, 책망받고, 격려받기 때문에 한 순간이라도 편안하고, 미지근하고, 진부하고, 지루한 것에 안주할 수 없다. 그 소명은 항상 더 높고, 더 깊고, 더 먼 곳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18. 창문이 있는 세계

오늘날에는 뉴턴의 사상보다 자본주의와 산업화된 테크놀로지 같은 현대화의 세력들이 ‘죽음의 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용어는 ‘세속화’이다. 현대 세계가 종교에 입힌 세 가지 중요하고 해로운 압력 중 가장 크고 으뜸가는 압력은 바로 세속화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명의 진리에 담긴 또 다른 차원을 볼 수 있다. 소명은 세속화를 지향하는 거대한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영적인 훈련에 정진하고 초자연적인 실재를 경험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화를 제대로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속화는 사회 및 문화의 여러 부문에 연이어서 종교적 이념과 기관들의 결정적인 영향력이 중화되어 버림으로써 종교적인 이념이 덜 의미 있는 것으로 종교적 기관들이 더욱 변두리로 밀려나는 과정이다. 특히 그것은 현대적 의식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해서 오감(五感)의 세계에 국한되어 버렸는지를 언급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세속화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통의 실재를 현대 세계의 공식적인 실재일 뿐 아니라 유일한 실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인은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묘사한 ‘창문 없는 세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19. 신앙의 세 가지 관점

1520년 두 명의 젊은 네덜란드 사제들이 마틴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 쓰인 혁명적인 어구를 읽고는 경악했다. 그들은 매우 민첩하고도 단호하게 반응했는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삶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바로 그 다음 주일 저녁에 교회 문을 잠갔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 바깥으로 내보내졌으므로 삶의 모든 영역과 매순간에 걸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해야만 했다. 그 두 사제의 단순한 행동은 든든한 전통으로 자라나서 네덜란드 교회의 훌륭한 특징을 대변하게 되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탁월한 19세기 기독교 지도자로서 후에 20세기 네덜란드의 첫 수상이 된 인물이다. “전 피조 세계의 어느 한 영역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외치시지 않는 곳이 없다.”하고 말할 정도로 높은 소명에 대한 그의 비전과 우렁찬 네덜란드 전통은 나름대로 결함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소명의 진리가 지닌 또 다른 차원을 가리킨다.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심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유화(privatization)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공적인 삶에서 믿음의 첫째 함정은 ‘사유화’인데 사유화란 현대화가 삶의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을 갈라놓고, 사적 영역을 개인의 자유, 성취, 믿음이 작동하는 특별한 장으로 강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문제인가? 한 마디로 사유화된 신앙은 총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구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한 곳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명은 신앙의 총체성을 주장함으로써 사유화에 저항한다. 소명은 모든 인간적인 충성과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 긴장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정치화에 저항한다. 소명은 사회 속에서 계속적으로 관여하여 사회 변혁성을 일으키게 하는 태도와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기둥화에 저항한다.

20. 일편단심으로 사는 인생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내면의 비전으로 불타오르고 경건한 신앙으로 연단된 꿈꾸는 인물이었다. 그는 영웅적인 일편단심, 결코 위축되지 않는 확신, 칭찬이든 배척이든 어느 것에도 상관하지 않는 단호함, 실망과 패배와 죽음에 대한 과감한 도전 등으로 불굴의 정신을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소명이 지닌 또 다른 측면을 잘 보여 준다. 소명은 다원화를 강요하는 현대의 압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 힘겨운 시대에 중심 잡힌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우선 순위와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원화’(pluralization)라는 또 하나의 불편한 단어는 현대 세계가 신앙에 대해 행사하는 세 번째로 큰 압력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다. 다원화란 선택과 변화의 확산이 선택안의 수를 급속히 배가시키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적인 영역의 모든 차원 - 소비재로부터 대인관계 그리고 세계관 및 신앙에 이르기까지 - 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21. 한낮에 꿈꾸는 사람

오스카상에 빛나는 걸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올슨 웰즈의 <시민 케인>과 더불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 두 편으로 꼽힐 것이다. 로렌스의 작품 『지혜의 일곱 기둥』서문의 내용 중 ‘한낮에 꿈꾸는 자’란 로렌스의 용어는 소명에 응답하는 것을 잘 묘사하는 표현이며, 소명의 독특한 특징 한 가지를 예증해 준다. 소명은 현재에 대하여 외부적 관점으로 꿰뚫고 들어옴으로써 기독교적 비전에 찬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근원이 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각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붙잡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뻗어나가도록 불타는 가슴과 날개 달린 발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의 매시간 그분의 소명을 느끼는 의식이 내 안에 자라고 있소. 결국 전 세계를 두루 다니는 유랑민의 인생을 살게 될까 걱정되오. 당신과 나를 위한 위대한 날이 다가오고 있소.“ 그는 또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 앞에 얼마나 장대한 분투의 인생이 활짝 펼쳐져 있는가! 그분의 사업을 위해 매수당하지 않는 영혼, 그것이 나의 책임이다.“ 한낮에 꿈꾸는 자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좇을 때 바른 코스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22. 평범한 것에서 광채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유익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인 양 가장하는 것은 한 마디로 웃기는 짓이다. 많은 일이 지겹고, 또 그로부터 벗어날 길도 없다. 단지 해야만 하는 일들일 뿐이다. 마루를 닦고, 기저귀를 갈고, 하수구를 뚫고, 쓰레기를 버리고, 범죄자를 처벌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즐비하다. 우리는 종종 말했듯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식으로 더러운 일을 지칭하며, 그 일이 우리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그뿐 아니라 현대 세계는 그런 단조로운 일을 피하게끔 맞추어져 있다. 편리함은 선택 및 변화와 더불어 소비중심 생활방식의 거룩한 삼위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소명의 진리는 이 모든 태도에 반발하면서 인생을 달리 보고 다르게 대하도록 도전한다. 일상적인 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과 비천한 일을 높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소명은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삶을 변혁시켜 일상적이고 비천한 일에도 평범함의 광채를 부여하는 것이다.

23.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현대 세계는 그 특성상 “우리는 아무 것도 빚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카뮈는 “인간의 첫 번째 기능은 망각이다.”라고 썼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망각은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도덕적인 문제다. 그것은 죄의 직접적인 표출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는 모든 것을 빚졌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소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해서는 안 되며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감사는 소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감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은 더 쉽고 정확한 시각이다.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성 어거스틴과 성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역사상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제기한 이 질문을 묵상함으로써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여기에는 한 가지 대답, ”아무 것도 없다.“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서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받았기 때문이다.

24.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추구한 모습은 항상 하나님의 겸손한 바보(le jongleur de Dieu)가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는 시도, 곧 역사상 가장 단순하고 급진적이며 강력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성 프란체스코의 이러한 자각과 그에 따른 행동은 소명의 또 다른 차원을 강화시켜 주는데 이것이 없이는 소명이란 주제를 완전히 섭렵할 수 없을 것이다. 소명은 제자도의 대가를 수반한다. 가장 큰 도전은 자아를 버리고, 자신을 고난받고 배척당한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정한 바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보처럼 비치는 자’는 다르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보로 비치고 또 그렇게 대우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어리석음이 소명과 제자도에 왜 그처럼 중요한지를 실제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과 동일시되는 데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둘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가 세상의 본질에 정반대인 존재, 세상 앞에서 반문화적인 존재로 분명히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바보처럼 되는 것이 소명에 필수적인 이유는 그것이 손해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25. 때가 왔도다

가이우스 줄리어스 시저는 결정적인 순간에 민첩한 인물로 유명하다. 줄리어스 시저의 비상한 경력과 자신의 때를 포착하는 기술, 스스로의 운명을 자기 손에 맡기는 모습 등은 소명의 진리의 또 다른 특징을 부각시켜 준다. 소명은 성공적인 삶을 특징짓는 타이밍 감각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올바른 일을 제때 하는 것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 타이밍은 인생의 본질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 아래서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것은 줄리어스 시저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타이밍 감각은 예수님의 소명의식에 중심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네 가지 주제가 우리의 소명 안에서 타이밍 감각을 가지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째, 소명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문제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한, 참새 한 마리까지 주시하시는 그분께 우리 인생의 타이밍 문제도 의뢰할 수 있다. 둘째, 소명은 타이밍을 맞추기 위한 부적절한 방법을 포기하는 문제다. 우리는 올바른 대상에게 권위를 부여해야 하며, 우리가 다가갈 대상 뿐 아니라 우리가 등을 돌려야할 것에 대해서도 분명히 해야 한다.

셋째, 소명은 준비 자세의 문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최고 수준의 순종이다. 마치 충분한 연습을 거쳐 완벽하게 조율된 교향악단의 모든 시선이 지휘자의 지휘봉에 집중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그분의 미세한 음성이나 표시에도 응답할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넷째, 소명은 결단의 문제다. 하나님은 자기 인생의 과업에 유보 없이, 후퇴 없이, 헌신할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백성으로서 시대의 징조를 읽고 당대에 그분의 목적을 위해 섬길 준비가 된 자들이다.

26. 최후의 부르심

헬무트 칼 버나드 폰 몰트케는 비스마르크 수상의 육군 원수로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을 무찌른 선봉이었다. 몰트케 원수의 4대 조카인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는 히틀러 치하에서 20세기 독일의 가장 유명한 순교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37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몰트케는 아내에게 보낸 최후의 편지에서 “사랑하는 여보, 나의 삶은 끝났소. 그렇다고 내가 기꺼이 좀더 살고 싶고, 이 땅 위에서 기쁘게 당신과 좀더 살기 원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소만 그렇게 된다면 나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과업이 필요하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 곧 그 과업은 완성되었소.”라고 썼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나기 불과 몇 개월 전에 플로텐지 감옥에서 처형된 10명 중에는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 백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헬무트 제임스 폰 몰트케의 죽음이 지닌 빛나는 용기는 소명의 진리에 담긴 마지막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소명은 인생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특전과 그 도전에 중심적인 것이다. 소명의 진리는 우리 인생의 시작에서 만큼이나 인생의 마지막에도 중요하다. 소명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열쇠와 같은데 그 이유는 인생의 말년에 맞이하는 세 가지 큰 도전에 대처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첫째, 소명은 우리가 마지막 순간에 도달할 때까지 목적의식을 갖고, 그래서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는 가운데 인생 여정을 걸어가도록 박차를 가해 준다. 둘째, 소명이 우리가 유종의 미를 거두게 돕는 이유는 우리의 직업상의 종결과 소명의 종결을 혼동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셋째, 소명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도록 격려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돕는다.

당신은 자신의 비전과 자신이 성취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 때문에 좌절을 느낄 수 있다. 혹은 당신의 인생 이력서가 타협과 실패와 배신과 죄로 얼룩져 있어서 우울함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장막이 걷히고 당신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를 - 그리고 당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부름받았는지를 - 알게 되기까지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말라. 이것을 깊이 숙고하라. 최후의 부르심이 우리 각자에게 올 때 우리가 완전히 소명에 응답했고, 그 도를 좇았으며, 유종의 미를 거둔 상태에서 발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