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 -
/지음/송준인 옮김
두란노/2001년/300쪽/8,500원
▣ 저자 가트 린(Garth Lean)
영국의 저널리스트로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학 분야의 평생연구원인 그는 현재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개신교와 카톨릭을 통틀어 용기 있는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Brave man Choose』, 존 웨슬리에 관한 책 『Strangely Warmed』, 논쟁을 불러일으킨 크리스천 정치인 프랭크 부흐만에 관한 최초의 전기 『On The Tail of a Comet The Life of Frank Buchman』 등이 있다.
▣ 역자 송준인
서울대학교 영어학과(B.A)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 Th.M.)을 졸업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신학 박사(Th.D.기독교 윤리 전공) 학위를 받았다. 현재 총회 개혁 신학연구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는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 고전 52선』 외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18세기 말,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들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열악한 항해 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로 도중에 25%가 넘는 흑인들이 사망할 정도로 살인적인 노예 수송이 경제적 이익이라는 이유 하나로 묵과되고 있었다.
당시 150여 년 동안 약 200만에 다다르는 노예를 수송했는데, 이것이 국가 수입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당연히 이 노예 제도 지지파들은 막강한 상인, 재벌, 넬슨 제독 같은 식민지 기득권 세력, 대부분의 왕족, 귀족으로 구성되어 그 어떠한 반대의 소리도 ‘매국’으로 몰아붙여 잠재워버렸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의 윌버포스는 150번이나 되는 대(對)국회 논쟁을 통해서, 당시 ‘영국 제일의 웅변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불같은 사자후를 토했다.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노예 제도는 분명 하나님의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갖고 있다니..., 이러고도 오래 살아남은 제국은 역사에 없었다.”
두 번에 걸친 암살 위협과 갖은 중상 모략과 비방에 시달리면서도 윌버포스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영국의 수많은 뜻 있는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외롭고도 기나긴 싸움을 버텨 나갔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뜻을 세운 지 5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사흘 후, 윌버 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 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 차 례
1. 노예 무역의 중심지 영국
2. 헐 소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다
3, 윌버포스와 친구들
4. 요크셔에서의 승리
5. 회심
6.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7. 노예 무역 폐지 운동
8. 마침내 얻은 승리
9. 영국 사회의 상황
10. 또 하나의 소명, 관습개혁
11. 포화 속의 평온
12. 클래펌 공동체
13. 행동하는 공동체
14. 사람을 낚는 어부
15. 「실제적 견해」
16. 개혁자의 가정 생활
17. 노예가 먼저냐, 동포가 먼저냐?
18. 노예 해방
19. 정치가를 잃었는가, 찾았는가?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 -
가트 린 지음/송준인 옮김
두란노/2001년/300쪽/8,500원
1. 노예무역의 중심지 영국
200년 전, 영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노예 무역국이었다. 리버풀, 브리스톨, 런던 등지에서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직접 사로잡거나, 아랍상인들에게서 사거나 마을의 추장들과 교환하는 방법으로 노예들을 배에 실었다. 종종 추장들은 자신의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주민 전부를 팔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노예 무역은 영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1770년에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수출되는 십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다. 1783년과 1793년 사이, 리버풀의 노예선들만 해도 303,735명의 노예들을 서인도 제도에 실어 나름으로써 15,186,850파운드(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 정도)에 팔아 넘겼다.
영국으로서는, 노예 무역이 실질적으로 또 하나의 성공적인 사업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적인 정책이 되었다. 게다가 노예 무역은 국가 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었다. 노예무역이 영국 선원들에게 훌륭한 훈련을 제공하고, 영국 해군에게 없어서는 안될 신병 모집의 근거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노예 무역만이 국가의 번영을 가능하게 해주며, 청어를 비롯한 뉴펀들랜드 어장에 대한 지불능력과, 제당업, 조선업을 비롯한 다른 관련 산업에 대한 자금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퀘이커 교도들은 일찍이 1724년에 노예 무역을 정죄하였으며, 1761년부터는 펜실베이니아의 형제들과 제휴하여 노예 무역에 관여하는 모든 교우들과의 관계를 끊었다. 알렉산더 포프, 존 로크, 비국교도 신학자인 리처드 백스터 등은 노예 무역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노예 무역에 관해서 조지 윗필드와 논쟁을 벌였던 존 웨슬리는 the execrable sum of al villainy(저주받아 마땅한 온갖 극악무도한 일의 총합)이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정한 싸움이 의회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적절한 대변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 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위직에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버려야 했고, 더욱이 높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무게 있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는 또한 의회의 동정심과 혐오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웅변가여야 했다. 그리고 해가 거듭 바뀌어도 변치 않고 대의를 추구할 수 있는 확고한 신념과, 복잡한 문제를 잘 다룰 수 있는 지성과, 편견을 물리 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편견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매력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했다. 도대체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사람은 이미 하원 안에 있었다. 그는 다방면으로 준비를 갖춘 사람이었다. 1780년 10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윌리엄 윌버포스는 헐을 대표하는 의원이 되었다. 그의 케임브리지 동기생인 윌리엄 피트보다 3개월 앞서서 하원 의원이 된 것이다.
2. 헐 소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헐에서 태어났다. 헐은 영국의 네 번째 항구로서, 네 개 항구 중에서 노예 무역에 관여하지 않은 유일한 항구였다. 동쪽 연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옛날 발트해 무역 시절에 크게 번성했다. 월버포스 가문은 가까이에 있는 비벌리에서 200년 동안 장사를 했던 유명한 무역상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18세기 초에 헐로 이사해서 서른 두 살 때 시장이 되었다.
윌버포스는 몸이 약하고 키가 작았으며, 허약한 체질에 시력까지 나빠서 일생 동안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체는 약했지만, 원기 왕성했고 다정다감한 천성에, 열정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특별한 음역을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었다.
윌버포스가 윌리엄 피트를 알게 된 것은 하원의 관람석에서였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직후, 그들은 둘 다 정치에 뜻을 두고 그곳에서 밤마다 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윔블던에 살던 큰아버지가 죽을 때 상당한 유산을 남겨 주었고, 그의 사촌인 아벨 스미스가 헐에 있는 사업을 기꺼이 맡아서 운영해 주었으므로, 그는 자유롭게 정치에 몰두할 수 있었다.
헐에서 윌버포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젊은 사람이 출마를 한다는 것은 대담한 야망이었다. 헐은 영국에서 큰 선거구 20개 가운데 하나로 15,000명의 인구에 1,100명의 선거인단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망 있는 지역기반과 자신의 인기에 힘입어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여 정치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윌리엄 피트는 케임브리지에서 입후보하여 패배했으나 석 달 뒤 애플비라는 ‘부패 선거구’를 통해 의회에 들어갔다. 그것은 유명한 북부의 선거구 장사꾼인 제임스 로우더 경이 그에게 팔아 넘긴 것이었다.
3. 윌버포스와 친구들
윌버포스는 정치에 성공적으로 입문한 뒤 곧 런던 사교계에서 젊고 부유하고 매력적인 의회 의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게 되고 교분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로 인해 그는 하원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피트는 하원에서 했던 경제개혁에 관한 처녀 연설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피트는 6월에 자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미국 독립전쟁을 공박하는 탁월한 연설을 했으며, 12월에도 같은 주제로 또 한번의 훌륭한 연설을 했다. 6개월 뒤, 피트는 하원에 들어간 지 18개월 만에 약관 23세의 나이로 셀번 경의 행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윌버포스와 피트가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 정부는 폭스와 노스의 연립정부였으나 폭스가 제기한 인도 법안(India Bill)으로 인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법안의 골자는 동인도 회사와 인도에 있는 그 회사에 대한 정부의 임명권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것으로 피트와 윌버포스는 사력을 다해 그 법안에 대한 반대 투쟁을 벌였다.
폭스의 정치에 대해 영국 황태자의 도덕적 타락만큼이나 혐오하던 왕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는 왕의 직권에 의해 폐기되고 말았다. 다음날인 12월 18일에 왕은 연정을 해산하였고, 스물 네 살인 피트가 그를 적대시하는 하원에서 수상이 되었다.
영국 수상이 그렇게 젊었던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젊은이의 시대였다. 조지 3세 도 스물 세 살 때 왕위를 계승했다. 넬슨은 스무 살에 대령으로 함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웰링턴은 그 전임자인 클라이브와 마찬가지로 아주 어린 나이에 인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일구어냈다.
4. 요크셔에서의 승리
1784년 1월부터 3월까지 피트의 동의 안은 하원에서 번번이 패배했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피트를 수상직에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무기한 지속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의회가 해산될 것이 분명했다. 윌버포스는 매우 대담한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요크셔 주의 두 개 의석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요크셔는 영국 내 모든 주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주였다.
1784년 3월 25일 위빌의 주도하에 총선을 요구하기 위한 요크셔 자유민 총회가 요크 성의 잔디밭에서 열렸다. 이때 피츠윌리엄 경이 이끄는 휘그 당의 부호들은 젊은 수상인 피트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위빌의 청원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오전 중반부터 오후 늦게까지 토론이 계속되었다. 열 두 번의 긴 연설이 이어졌다. 대부분 그 청원서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청중이 지쳐가고 있을 무렵인 오후 4시쯤, 키는 160cm 정도에 가슴둘레는 85cm 정도밖에 안될 것 같은 작은 체구의 윌버포스가 연단에 섰다. 날씨가 몹시 추웠고 강풍이 불었기 때문에 어떤 목격자는 ‘그의 작은 체구가 맹렬한 날씨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으나 그의 훌륭한 목소리와 탁월한 연설은 가장 멀리 있는 청중에게까지 쉽게 파고들었다.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윌버포스 의원의 연설은 진실로 청원서에 반대하는 모든 연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의 연설의 빼어난 표현력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창함은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와 어우러져 우리가 어떤 말로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윌버포스가 연설한 지 거의 한 시간쯤 되었을 때 국왕의 사신이 급히 말을 몰고 청중들 틈을 뚫고 앞으로 나왔다. 윌버포스는 잠시 연설을 멈추고 전해 받은 편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극적으로 바로 그날 의회가 해산되었음을 선언했다. 그 편지는 피트가 보낸 것이었다. 윌버포스가 연설을 마칠 무렵, “이 사람을 우리 주의 의원으로 삼겠소!”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어 마지막으로 존 캐번디시 경이 등단했지만 청원서는 박수 갈채로 통과되었다.
그날 밤 피트파 사람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비데일의 래리 피어스가 “작은 윌버포스 만세!”라고 충동적으로 외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한 말씀드리겠소, 윌버포스 당신을 요크셔 주에 출마시키기 위해서 내가 500파운드를 내놓겠소.” 그 자리는 이내 윌버포스를 위한 선거비용 모금장소로 변했다.
윌버포스는 영웅이 되어 런던으로 돌아왔다. 윌버포스는 그 선거에서 단 한푼도 쓰지 않았다. 그의 지지자들이 모금해 준 18,670파운드의 선거 기금도 4분의 1만 썼을 뿐이었다. 피트는 선거에서 얻은 압도적인 승리로 국가를 이끌어 나갔다.
5. 회심
요크셔의 의원이 된 윌버포스는 스물 네 살에 자신의 힘으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내각의 장관들과 반대당의 유력한 지도자들 바로 다음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바로 이 시기에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되는 결정적인 두 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번째 만남은 학창시절 헐의 교장이었다가 당시에는 케임브리지 학감이 된 조지프 밀러의 동생인 아이작 밀러였고 두 번째 만남은 존 뉴턴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특히 그와의 만남은 어렸을 때의 기억과 함께 그가 한때 마음에 품었던 순수한 신앙적 열정을 다시 되살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윌버포스는 한때 큰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큰어머니는 윌리엄을 데리고 종종 교구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들으러 갔다. 윌리엄은 그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으며 특히 전에 노예선 선장이었던 존 뉴턴 목사의 설교와 간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윌리엄은 노년에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저는 그분을 아버지처럼 존경했습니다.”
윌버포스는 피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변화된 인생관을 썼고, 당분간 공직생활에서 물러나려고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트는 애써 윌버포스의 신념을 버리게 하려고 설득했으나 결국 그의 신념이 옳다는 것과 공박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공적 생활에 참여하는 문제에 관하여, “내가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세상에 순응하려면 공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피트와 마찬가지로, 뉴턴은 윌버포스에게 옛 친구들을 떠나지 말라며 “주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유익을 위해서 길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윌버포스에게 공적인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라고 요구한 셈이었다. 이런 판단은 윌버포스에게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그리고 개인의 성결과 세계를 위한 헌신 사이에서 성숙한 균형을 갖게 하였다. 이는 기독교의 기본이지만, 매우 신실한 신자들도 이를 자주 무시하고 있었다.
6.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소명
윌버포스는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여 공적인 생활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다. 어느 날, 그는 상류 인사들이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그 당시는 연극이 매우 타락했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도 그만두었다. 한편 그는 정치 활동에서 두 개의 법안을 하원에 상정했다. 하나는 온건한 의회 개혁을 좀더 진척시키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소 어설픈 인도주의적 법령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는 자신의 목적과 동기가 모두 철저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느꼈다.
여전히 그는 최고의 상류사회에서 환영받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어색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초기 시절에는 윌버포스의 철저한 삶의 변화가 냉혹한 사건처럼 보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786년 중반쯤에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던 쾌활함을 상당부분 회복했다. 월버포스는 만일 ‘진지함’이 인생의 본업이라면, ‘쾌활함’은 인생의 휴식이 되어야 한다고 자기 누이에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누이와 스미스 성을 가진 사촌들은 곧 그의 신앙을 따랐다. 피트가 총애하는 누이 해리엇과 결혼한 에드워드 엘리엇은 혼전에 시도한 성적인 모험을 시도했다가 1786년 9월 해산하는 과정에서 아내 해리엇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엘리엇과 피트는 ‘끔직한 동요 상태’에 빠졌다.
그 이후 수개월 동안 엘리엇이 주로 의지했던 것은 바로 윌버포스와의 우정이었다. 그는 점차 윌버포스와 신앙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은 자주 서로에게 각자의 마음을 열어 보였다. 엘리엇도 의원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일상적인 정치의 압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내가 자네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우리가 서로를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은 기도 외에 없다고 생각하네.” 윌버포스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존 손턴의 막내아들 헨리 손턴도 곧 뒤를 따랐다. 그는 의원이 되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윌버포스의 뒤를 이어 헐의 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이듬해 그는 뇌물을 주지 않고서 사우스위크의 험난한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무렵 윌버포스의 제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는 매슈 몬터규 의원과 먼캐스터 경이 있다. 또 다른 구스트리즈 클럽 친구이자 도싯의 의원인 헨리 뱅크스도 점차 동화되었다. 1786년 내내, 윌버포스는 자신이 공적 생활에서 감당해야 할 특별한 임무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무능하지만 재미있는 그의 대학 친구인 제라드 에드워즈를 통해 그 대답을 얻었다.
제라드의 장인은 윌버포스가 회심할 당시에 대령으로서 해군의 감사관을 맡고 있던 찰스 미들턴 경으로 하원에서 복음주의자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 미들턴 부부는 테스턴에 살고 있었으며 그들 주변에는 노예무역 폐지 운동에 헌신한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786년 가을경에는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여론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무역은 영국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의회의 결정 없이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미들턴 부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제라드의 친구인 윌버포스에게 하원에서 그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윌버포스는 자기가 그 일에 적임자가 아닌 것 같다고 답변했다.
그 해 겨울엔 클라크슨이 그 문제를 가지고 팰리스야드 4번지에 사는 윌버포스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마지막 자극은 피트에게서 왔다. 1787년 5월 12일, 피트, 피트의 사촌 그랜빌, 윌버포스는 캐스턴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참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피트가 말했다. “윌버포스, 자네 노예 무역이라는 주제에 대한 동의 안을 한번 제출해 보지 않겠나?” 한편 그는 여전히 아침 시간에 조국 영국의 도덕적 중생에 대한 필요성에 관하여 깊이 몰두했다.
10월 28일, 그는 점점 깊어져 가는 자신의 헌신을 일기에 이렇게 요약해 놓았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윌버포스는 이 두 운동을 동시에 수행하기로 결심하고 1787년에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7. 노예무역 폐지 운동
노예 무역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20년간 끊임없이 수고를 해야만 했다. 그 기간 동안, 윌버포스는 영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하원에서는 매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반대하는 분위기가 광범위했고 격렬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해군 제독 로드니 경은 자신이 서인도 제도로 가는 도중에는 노예가 정식 병영생활을 하는 군인보다 두 배나 넓은 공간을 차지하여 생활한다고 발표했다. 제독들은 한술 더 떠 아프리카인의 삶에서는 그들의 고국이 처한 야만상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실려갈 때가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했다.
토론이 있던 날 윌버포스는 즉석에서 세 시간 반이나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 원고는 아직도 옥스퍼드 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윌버포스는 대다수의 청중들이 내심으로는 노예 무역의 비인간성에 동의하지만 필수적인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조심스러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아무도 비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끔찍한 노예 무역이 의회의 권위 아래서 시행되도록 방치했다는 점에 대해서 영국의 전 의회와 더불어 저 자신을 참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유죄를 인정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우리 자신들만 무죄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1790년 총선 후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노예 무역 폐지론자들이 전국적으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클라크슨이 노예선 브룩스 호의 모형을 만들어 찍은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그 유인물은 450명의 노예들이 서아프리카와 서인도 제도를 연결하는 대서양 중앙항로를 지나는 동안 어떻게 정어리처럼 실려 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쿠퍼의 시 “흑인의 불평”도 인기를 얻었다.
윌버포스는 1791년 4월 18일에 한 번 더 노예 무역 폐지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국민들은 윌버포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1791년의 패배 후 몇 달 만에, 517건의 노예 무역 폐지를 위한 청원서가 단 4건의 반대 의견과 더불어 국회 의사당에 접수되었다. 심지어 리버풀까지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개혁되지 못한 의회에서 이 청원서들은 단지 근소한 영향만 미쳤을 뿐이다.
1792년 하나의 절충안이 헨리 던더스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 안은 윌버포스의 동의안에 있는 ‘폐지’라는 단어 앞에 ‘점진적’이라는 단어를 넣자고 제안함으로써 의회의 양심적인 부담을 덜어주었고 이 안은 230대 85로 기꺼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안은 당장의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헨리 던더스의 기만책에 불과했다. 윌버포스는 1794년에 다시 안을 제기했다.
윌버포스는 서인도제도의 선장들에 의해서 두 번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한번은 길에 숨어 있다가 그를 죽이려고 했던 일도 있었다. 1794년에 이어 1796년의 연이은 패배, 그리고 1797년에는 74대 82, 1798년에는 83대 87, 조지 3세가 그 싸움에 직접 뛰어들었던 1799년에는 54대 84로 참으로 그때까지의 투표결과는 아슬아슬한 패배로 끝났다. 1804년에는 하원에서 124대 49로 이겼으나 상원에서 또 다시 좌절되었다. 그러나 윌버포스의 기대감은 결코 낮아진 적이 없었고,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1805년은 역사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해였다.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승리와 넬슨 제독의 죽음, 아우스터리츠에서의 나폴레옹의 승리와 그의 영국 침공 계획 포기, 윌버포스의 가장 절친한 친구 피트의 발병이 있었다. 피트는 결국 1806년 1월에 죽었다. 피트의 뒤를 이어 그의 사촌 그랜빌 경이 수상이 되었다. 그는 18년 전 캐스턴에 있는 참나무 밑에서 노예 무역 폐지를 토의했던 세 젊은이 가운데 하나였다.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거대한 전투를 한창 진행하면서도 윌버포스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부여하셨다.’고 믿는 두 번째 ‘커다란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영국의 관습, 즉 도덕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의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다. 광산에서는 여성들이 70kg이 휠씬 넘는 석탄을 광주리에 담아 가파른 사다리 위를 오가며 운반했다. 그들은 이마에 두른 가죽끈으로 그 무게를 지탱했는데, 끝내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불구가 되기도 했다. 1780년 전형적인 한 탄갱에서는 일곱 살 미만의 아이들 173명이 일했다. 제분소에도 그런 아이들이 하루 13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했다.
윌버포스가 ‘영국의 관습을 개혁’하기 시작했을 때 마주해야 했던 상황은 바로 이러했다. 이제 그가 담당해야 할 몫은 상류층에 대한 각성과 온갖 잘못된 관습, 가혹한 사형제도(가축을 훔치거나 집이나 헛간, 건초에 불을 지르는 것 등에 대해 사형을 부과했는데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14세 이상 어린이에게까지 적용되었으며, 7세 이상의 어린이에게까지 적용되는 경우도 있었다.)의 개선 등 참으로 많은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노예제도 폐지라는 큰 명제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타락한 영국 사회 곳곳을 개혁해 나갔다. 과다한 노동시간을 제한시키고, 어린이 노동 보호법을 통과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가난의 근본적인 원인을 타개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인 구제보다는 직업 교육을 시키고 취직까지 알선하는 시스템을 정부가 더욱 구체적으로 실행하게 했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활성화시켜 문맹퇴치에도 앞장섰다.
또한 영국의 야만적인 형벌 시스템을 대폭 개조했고, 가난한 자들도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거칠 수 있게 하였으며, 형벌 제도에 있어서 벌보다는 갱생에 초점을 두게 했다. 동시에 상류사회 남자들의 결투 제도 폐지에도 앞장섰고, 호화판 파티만 일삼던 귀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이들이 여가 시간을 사회봉사에 쏟도록 했다.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윌버포스가 놀라울 정도로 꾸준하게 지속적인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그가 혼자서 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운동을 벌여 온 아주 초기 시절부터 자기 주변에 모여든 다양한 그리고 점점 커 가는 친구들 그룹의 후원을 받았다.
엘리엇과 헨리 손턴처럼 의회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롱을 받았으나 점차 은밀한 가운데 ‘성인들(The Saints)’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친구들의 모임은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만나는 완전한 비공식적 모임으로 시작되어 나중에는 클래펌에 합숙소를 세웠고 이곳은 곧 수많은 저명한 사람들의 방문과 합류로 이어져 공동의 헌신에 의해 연합된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윌버포스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노예들에 관한 것이었다. 1807년의 법령은 영국의 노예무역을 법적으로 폐지하였다. 그러나 그 규정이 준수되는 상황과 전세계적으로 채택되는 상황까지 이르는 데에는 여러 해에 걸쳐 더 많은 일이 요구되었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뜻을 세운 지 5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 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사흘 후, 윌버 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 제도를 통해 얻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오늘의 암담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체념조로 말한다. “이러한 총체적 부패 속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윌리엄 윌버포스의 삶은 한 사람의 헌신된 하나님의 사랑, 깊은 영성과 예리한 실력을 겸비한 평신도의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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