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지음

미션(cmc) 2010. 6. 19. 10:04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지음 IVP/2003년 2월/254쪽/8,000원

▣ 저 자 김영봉

충남대학교에서 경영학,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 미국 SMU와 캐나다 McMaster 대학에서 신약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협성대학교에서 신약 신학을 가르쳐 왔으며, 2002년에는 미국 Drew 대학교의 방문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사귐의 기도』『마태복음주석』『신약성서 이해』『예수의 영성』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전반적으로 한국 교회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번영을 신실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으로 여겨왔다. 반면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는 재앙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최근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그 수입에서 하나님의 몫과 다른 사람의 몫을 정직하게 떼고 나면 그 나머지를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깨끗하고, 수입에 대한 몫 가르기에서 깨끗하면, 나머지 돈에 대해서도 ‘깨끗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이것이 진리로 통하는 우리 상황을 매우 염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생각하면 ‘깨끗한 부자’되는 것이 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한 삶’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부르셨다. 거룩한 삶이 언제나 부유한 삶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독교 청부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제한적으로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는 부르심과 자신의 수입에서 다른 사람의 몫을 떼라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은 잘한 일이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핵심에 속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르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남은 돈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부르심을 듣고 나면 ‘깨끗한 부자’가 목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차 례

제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제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제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제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제5부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

제1부 돈에 대한 반듯한 생각

내가 어렸을 적 아버지는 짐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멀리 있는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아 주셨다. 이발을 마치면 아버지는 이발사에게 ‘적어 둬!’라고 말씀하시고 그냥 나오셨다. 아버지와 우리 네 형제가 1년 동안 부지런히 드나들며 이발을 했어도 돈을 낸 기억은 없다. 그 대신 보리타작을 마치면 보리 한 자루를, 가을 추수를 마치면 쌀 한 자루를 실어다 주시고는 그 모든 값을 치르셨다. 또 장날이면 어머니는 흰 쌀을 잔뜩 담아서는 장으로 가셨다. 돌아오실 때면 언제나 손에 생선이며 신발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쌀을 주고 물건으로 바꿔 오신 것이다.

불과 40여 년 전 우리의 농촌 상황이다. 당시에도 돈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에 비해 돈의 중요성이 훨씬 덜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웬만한 문제는 돈 없이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달라졌다. 도시에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모든 거래가 돈으로 이루어진다. 시골의 작은 가게에서도 돈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불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모두들 재테크에 관심이 많다. 재테크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항상 한두 권씩 올라 있고,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스팸 메일 중에서도 반 정도가 ‘많은 돈을 쉽게 버는 방법’에 대한 선전이다. 돈을 벌고 불리는 일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점이 있다. 돈을 다루는 기술을 익히기 이전에 먼저 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에 관한 기술’을 배우기에 앞서 ‘재물에 대한 철학 혹은 신학’을 배워야 한다. 그것 없이 재물을 키워 가기만 하면 결국 재물 때문에 낭패를 당하게 된다. 금을 캐 가지고 귀국하던 사람이 배가 침몰하자 금 상자에 자신의 몸을 묶고 익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듯, 돈은 우리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돈이 현대인의 삶에서 중요해진 만큼 그것 때문에 당하는 피해도 적지 않다.

돈이 본질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점은 옳다. 하지만 돈이 본질상 위험한 것임을 망각하거나 돈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 재물과 하나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지 둘 다 가지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돈이 끌어들일 수 있는 악한 영적 능력 때문이다. 이 말은 돈 자체에 귀신이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돈은 사회적 약속에 의해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이 그 힘에 예속될 때, 그것은 단순한 구매력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영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리처드 포스터는 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돈은 단순한 중립적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것도 매우 악마적인 성격의 힘인 것이다.”

둘째,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돈의 유혹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하는 본능을 주셔서 다른 존재와 함께 나누며 살아가도록 만드셨다. 이 본성대로라면 세상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같이 넉넉하게 살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사랑의 본능이 비뚤어진 데 있다. 타락으로 인해 남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 타락한 본성 때문에 돈은 위험하다. 인간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 수렁과 같다. 그리고 돈 때문에 더 많은 욕구가 생기고 그 때문에 인간은 더욱 타락한다.

그러므로 돈의 위험성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칼은 잘 사용하면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살상 무기가 된다. 마약은 잘 사용하면 치료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인간을 파멸시킨다. 담뱃갑에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고 적어 넣은 것처럼, 돈에도 “지나치게 많은 돈은 당신의 삶에 해롭습니다”라고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 위험성을 너무도 쉽게 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요청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뜻을 오해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방법으로 번 돈’이 바로 하늘에 쌓는 보물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를 선용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헌금하는 것이 돈을 ‘하늘에 쌓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신 것이다. 우리 마음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 이끌리게 되어 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은 욕심에 이끌려 지상의 물질을 보물로 여김으로써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가장 귀한 것으로 여김으로 우리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바라도록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더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재물이 가진 위험과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하늘의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을 견고하게 하나님 나라에 묶어 둘 때 비로소 돈이 제대로 보인다. 그 때에야 돈을 섬기지 않고 도구로써 사용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돈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제2부 욕망으로부터 자유한 삶

많은 사람들이 금욕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고행을 통해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모든 욕망을 철저히 억압하는 태도를 금욕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동남아를 여행하면 금욕주의적 수도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2001년 『기네스북』에는, 한 팔을 들고 있는 것이 신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고 십여 년 동안 팔을 들고 수행하는 어느 수도사의 사진이 나온다. 그의 종교적 열성은 정말 놀랍지만,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행동만을 보고 금욕주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금욕주의는 ‘인생의 일반적 쾌락을 절제하고 물질적인 만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금욕적이다. 극단적 금욕주의는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지만, ‘금욕적 경향을 제거한 기독교’ 역시 상상할 수 없다.

경제 문제를 다룰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인간의 욕망이다. 돈이 위험한 것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돈 문제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욕망의 문제를 제대로 보고 해결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정신의 주도적 원리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신은 ‘배’다. 배를 채우는 것, 즉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은 하나님이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실현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정체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욕망을 그대로 둔 채 욕망의 대상만 바꾸자는 것은 속임수다. 그것을 ‘거룩한 욕망’이라고 부른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대해 우리는 자주 그것을 ‘본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틀린 말이다. 더 가지려는 이기적 욕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심, 더 편하게 살기 원하는 욕심, 혹은 오감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인간의 본성인가? ‘본성’이란 본래 인간에게 주어진 바탕을 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런 이기적 본성을 우리에게 심어 주셨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는가?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는 이기적 욕망이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다른 피조물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생겨났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자 새로운 삶의 중심이 필요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이 ‘자아’였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기적 욕망과 물질적인 것으로 욕망을 채우려는 경향이 본성이 아니라 타락함으로 생겨난 제2의 본성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욕망은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요소가 아니다.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면 그 욕망을 위해 사는 삶도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본성이 아니라 치료해야 할 질병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만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행복을 찾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그분과 다시 하나가 되어 삶의 중심에 그분을 모셔 들임으로 그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하고 이기심과 욕망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신다.

모든 욕망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목적이 아니다. 단지 인간성을 타락시키는 욕망을 경계하고 제어하며 하나님과 하나됨을 전심으로 추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참 인간이 되기를 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은 외형적으로는 얼마간 금욕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식욕은 하나님이 우리 몸에 입력해 주신 좋은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잘 사용하면 건강을 도모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식탐(食貪)이 되면 필경 건강을 망친다. 음식 먹을 때는 식욕에 압도되지 말고 몸을 위해, 즉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한다. 그것이 노자(老子)가 전해 준 지혜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번다면 반드시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욕망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을 따라 돈을 추구하는 것은 망하는 길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건강과 가정을 희생시킨다. 하지만 살기 위해 돈을 구하는 사람은 무한정으로 구하지 않는다. 그는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만족할 수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많은 돈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필요한 만큼’이라는 말이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새로 지어지고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착각한다.

우리의 살림살이를 정직하게 살펴보면 꼭 필요한 물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원해서 소유하게 된 것들이 더 많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주변을 보면 딱한 일이 많다. 학생들은 책값이 없어 복사해 사용하면서도 최신형 핸드폰에 여러 가지 부속품들을 붙이고 최첨단의 전자 기기를 가지고 다닌다. 가계에 짐이 되더라도 남들이 가진 것이면 모두 가지려는 사람들도 있고, 체면과 품위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져 욕망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비로소 눈이 열려 ‘필요’와 ‘욕망’을 구분할 수 있다. 욕망의 요청을 절제하며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의 돈만 있으면 충분하며 따라서 그 이상의 나머지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만족도 불가능하며,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도 없다.

제3부 나눔으로 풍성한 행복

내 소비를 줄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덜어 주는 나눔은 내 행복을 감소시켜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눔이란 어느 한 편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다른 한 편을 부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 부를 쌓는 것이 결국 나와 이웃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처럼, 나눔은 나와 이웃 모두를 풍요롭게 한다. 이 진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나눔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단지 누구를 도왔다는 공로감만 있을 뿐이다.

진정한 나눔이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의 감화력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 내 손에 들어온 넘치는 재물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영성적 나눔은 구제나 자선이 아니다. 그들의 몫이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것을 깨닫고 제 주인을 찾아 돌려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아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다른 사람이 눈물짓고 있는 이상 나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웃을 때 나도 진정으로 웃을 수 있다. 나눔은 이러한 생명의 신비를 깊이 인식하고 행할 때 참된 의미를 가진다. 내 것으로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고통 받고 눈물짓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 한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할머니들의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한 할머니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은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삯바느질 혹은 폐지를 주워 번 돈을 모아 대학교에 기증했다. 그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만족하면서 돈을 모았다. 이 저축은 큰 나눔을 위한 저축이었다.

기업가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 선생을 존경한다. 그가 기업을 일구어 많은 돈을 모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재산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으로 번 돈을 저축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 돈을 재투자하여 사업을 더 일구고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한다면 그것은 좋은 나눔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통장에 쌓인 돈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는다. 좋은 제품과 그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안정된 삶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들 중에도 기업의 공개념(公槪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신의 돈과 희생으로 일군 기업이니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내 것’이라는 애착심 없이는 큰 기업을 일구기 어렵다. 그러나 그 기업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기업의 수입을 모두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인의식과 소유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마치 자기 개인 돈을 주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일꾼들을 위해 포도원을 경영하는 선한 주인처럼 혹은 양들을 위해 목장을 경영하는 선한 목자처럼, 기업가들도 기업을 직원들의 것으로 그리고 모든 시민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기업가들도 다른 직원들처럼 자기 몫의 월급에 만족할 정도로 성숙해져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기업가들이 무슨 재미로 고생하며 사업을 하겠는가?”라고 질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얼른 보면 정당한 반론인 것 같지만, 이 질문을 뒤집으면 “나는 내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인 사업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하는 데서 보람과 기쁨을 얻어야 한다.

제4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섬김

나는 제자들에게 “목회자는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이것을 잘못 알아듣는다. 아무런 영적 능력도 없이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허드렛일이나 도와주는 것을 ‘섬김’으로 착각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의 삶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작업복을 입고 교인들의 이삿짐을 따라다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가 ‘섬기는 자’라는 말은 목회자로서의 능력과 권세를 교인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잘 섬기기 위해서는 영적 능력과 권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직장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직장에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맡은 자리에서 잘 봉사하기 위해 그 자리가 요구하는 전문적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한 회사의 사장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그 회사를 잘 키워 좋은 제품을 사회에 공급하고 사원들이 안정되게 살도록 돕는 것이다.

최선의 봉사를 위해 훌륭한 실력을 갖추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는 봉사만을 강조해 왔다. 열심히 노력하여 전문적 자질을 키우는 것을 ‘세상 일’로 규정하고 부정적으로 가르친 교회들도 많다. 그 결과 오늘날 직업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문가적 탁월성을 발휘하는 예가 많지 않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갈수록 전문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교회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로만 모이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서 매우 조심할 것이 있다. 그렇게 키운 실력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섬김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고 입신양명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처럼 속기 쉽다. 선한 일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돈을 추구하다 보면 그 돈의 마력 때문에 어느새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마음을 쓰게 된다. 실력도 그와 같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실력을 배양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구를 채우는 데 사용된다면, 그 실력은 돈과 같이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 있다. 숨은 곳에서 헌신적 봉사를 하다가 매스컴에 노출되어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로 ‘뜨는’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유명해지기 위해 일하지 않았지만, ‘뜨고’나면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가 권력 혹은 유명세에 얼마나 취약한 지를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잘 섬기기 위해 전문가적 실력을 쌓는 일은 찬성하시지만 더 높아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지기 위해 실력을 쌓는 일은 찬성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축구하는 일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준비된 실력을 사용하여 봉사할 때 하나님은 그에 맞는 자리에 우리를 알아서 세워 주실 것이다.

한편, 경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사람을 앞지르려는 욕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 타락한 본성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덕을 쌓아 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경쟁심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경쟁에 참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본성을 제어하여 경쟁 체제 안에서 협력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자세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학생의 경우, 시험에 대한 경쟁적 태도를 협력적 태도로 바꾸라는 뜻이다. 즉, 남을 떨어뜨리고 내가 붙자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그에 합당한 자격을 얻고자 애쓰라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함께 응시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게 된다.

회사원의 경우, 승진을 아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인정받고 승진해야지, 다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고 그를 넘어뜨리고 올라서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경쟁이 인간의 능력을 계발시킨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로 인한 폐해가 더 크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은 경쟁을 통해서만 계발되지도 않는다. 에디슨이 경쟁심으로 그 많은 물건들을 발명해 냈는가? 미켈란젤로가 경쟁심으로 그 대작들을 남겼는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의 업적은 또 어떠한가?

놀랍게도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은 성장 과정에서 경쟁에 실패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경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어냈다. 경쟁이 가장 심한 스포츠에서도 진정으로 위대한 선수는 자신의 경쟁자는 자기 자신임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경쟁심을 버리고 낮은 곳을 찾아가는 자세는 패배의식이 아니다. 공무원이 승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봉사를 목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회사원이 더 높아지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패배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깊은 차원에서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사람만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약함을 극복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같아지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주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의 능력으로 높아지려는 욕구를 버리고 섬기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제5부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

“힘에 대한 항구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는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본성인데, 그것은 죽을 때에나 끝이 난다.” 토마스 홉스가 인간의 권력 지향성에 대해 간파한 말이다. 실로 인간 행동의 동기를 깊이 캐고 들어가면 결국 ‘힘에 대한 욕구’라는 최종적인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참된 힘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인간 실존의 핵심을 묻는 질문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빽’ 혹은 ‘줄’이 중요했다. 혈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돈으로 더 강한 힘을 끌어댔다. 이것은 줄 대기라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고, 이 틈새에서 부정부패가 무럭무럭 자랐다. 일단 승리해서 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은폐할 수 있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힘을 추구하고 줄 대기에 참여해 왔다는 점이다. 지난 몇 년 간 부정부패로 적발된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소위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았는가? 부정한 운영으로 소요에 휘말린 학교 재단 가운데 소위 ‘기독교 재단’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원치 않으시며, 그것을 위해 부정한 술수를 동원하는 것도 원치 않으신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그분의 제자답게 행동하기를 원하신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 이르러서는 그 부패의 사슬이 끊어지기를 원하신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섬기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여 힘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고 부정의 올무에서 벗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최근 한국 교회의 ‘권력 지향성’은 우려할 만한 상황에 이르렀다. 권력자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그 권력으로 주의 사업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돈 많은 사람을 인도하면 그 돈으로 더 능력 있게 일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영향력이 큰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면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으며, 그들을 전도함으로 이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아랫물을 붙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먼저 윗물을 맑게 하자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높아지고 강해지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논리가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윗물을 맑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설사 윗물을 맑게 하여 아랫물을 더 빨리 그리고 더 쉽게 정화시킬 수 있다 해도, 그 결과로 우리는 교만의 함정에 빠진다. 어떤 일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돈이나 권력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치 않으신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건강하게 하려면 뿌리부터 견고하게 해야 한다. 높은 데를 쳐다보지 말고 낮은 곳을 보아야 한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무 전체가 건강해지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높은 사람’보다는 ‘낮은 사람’에게 더 공을 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주님은 낮은 데로 임하셔서 낮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셨다. 마땅히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 요한계시록은 전통적으로 패권주의적 기독교가 가장 애용하는 책이다. 그리스도인의 최후 승리와 악한 자들의 혹독한 징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인들이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불의한 자들에게 임한다. 돈과 권력을 손에 쥔 그리스도인들은 이 비전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십자군 전쟁을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 전쟁은 이런 전투적 열심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을 잘못 읽은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하나님을 대신해 칼을 들어 악한 자들을 징벌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다. 그분은 로마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당하셨다. 하지만 그 무력함 때문에 그분은 참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으셨다. 우리 주님은 죽임을 당하심으로 살림을 받으셨고, 낮아짐으로 높아지셨고, 무력해짐으로 참된 힘을 받으셨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난도 당하고 순교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역설적 존재다. 무력함 속에서 참된 힘을 드러내고 죽음 가운데서 참된 생명을 드러내며 낮은 데 처함으로 진정으로 높은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대단한 역설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역설을 알지 못하면 세상에서 통하는 힘의 논리에 속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적인 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히 힘의 유혹을 거부하고 무력한 쪽을 택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함’은 인자하고 친절한 태도라기보다는 인간적인 힘에 호소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지는 편, 손해 보는 편, 밀려나는 편을 택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이들이 결국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은 반길 일이다. 더 많은 힘을 얻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은 반길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좋은 성적과 업적을 내는 것은 반길 일이다. 하지만 그 목적이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섬기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목적이 그렇게 설정되면, 승진과 당선과 성취를 위해 부정을 행하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있다. 목적이 그렇게 설정되면, 승진하지 않아도, 당선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힘을 얻으려면 승진하고 당선되는 길밖에 없지만, 섬기는 길은 그 외에도 많기 때문이다. 지미 카터가 재선에 실패한 후 더 많이, 더 잘 섬길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