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최원준 옮김 두란노

미션(cmc) 2010. 6. 19. 10:07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최원준 옮김 두란노/2001년 4월

헨리 나우웬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예수회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1932년 네덜란드의 네이께르끄(Nijkerk) 출생으로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다시 6년 간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하였고, 30대에 노틀담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그는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강단을 떠나 페루의 빈민가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는 다시 강단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의 저서는 30여 권이 넘으며『아담』『제네시 일기』『새벽으로 가는 길』『마음의 길』『상처받은 치유자』『영혼의 양식』『상처 입은 치유자』『영적 발돋음』 등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 역 자 최원준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자유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상처 입은 치유자』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헨리 나우웬 최고의 역작'이라는 평을 받은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사역자는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매우 정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시대 사역자를 '상처 입은 치유자'로 재정의한 헨리 나우웬은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임을 역설한다. 저자의 깊은 통찰력과 정확한 표현,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경험에서 비롯된 풍부한 사례들이 이 주제를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첫 장은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상태, 둘째 장은 고통받고 있는 이 시대의 상태, 셋째 장은 고통받고 있는 개인의 상태, 넷째 장은 고통받고 있는 사역자의 상태를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데, 점점 구체화시켜가는 방식으로 인간 내면의 고통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고통 속에서 진정한 사역자상을 독자로 하여금 발견케 하는 방식으로 씌여진 이 책은 나우웬의 글의 독특한 스타일을 대표하고 있다.

▣ 차 례

머리말

1장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

2장 뿌리 없는 세대를 위한 사역

3장 소망 없는 사람을 위한 사역

4장 외로운 사역자의 사역

맺음말

1.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 - 핵 시대의 인간이 추구하는 것

핵 인간은 과학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상실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출하게 해주었던 바로 그 과학의 힘으로 인해 인간이 자멸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지는 옛날 이야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핵 인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네 명의 왕자가 각자 어떤 특기를 숙달해야 할지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두루 다녀 보고 특별한 기술을 배우자.”라고 그들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한 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형제들은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배웠는지 서로 물어보았습니다.

첫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생물의 뼈 한 조각만 가지고도 ‘살’을 즉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웠어.” 둘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 생명체의 뼈에 살이 붙어 있으면 거기에 피부를 덧붙이고 털이 자라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 셋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살과 피부 그리고 털이 있다면 나는 팔다리를 만들 수 있어.” 마지막으로 넷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만약 그 생물이 팔다리도 있고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면 나는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법을 알아.”

이렇게 해서 네 명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특기를 선보일 수 있도록 뼈 한 조각을 찾아 정글로 들어갔습니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네 명의 왕자들이 찾아낸 뼈는 사자의 뼈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뼈를 집어들었습니다. 첫째가 그 뼈에 살을 붙였고, 둘째가 거기에 가죽을 씌우고 털이 자라도록 했으며, 셋째가 거기에 맞는 팔다리를 만들어 그 몸을 완성시켰고, 넷째는 그 사자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생명을 되찾은 그 야수는 무성한 갈기를 흔들어대며 일어나 무시무시한 입과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무자비한 발톱으로 자신의 창조자들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사자는 네 명의 왕자들을 모두 죽인 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역사 심리학자 로버트 제이 리프톤은 핵 인간이 처한 어려움의 성격을 몇 가지 탁월한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리프톤의 정의에 따르면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 등으로 핵 인간을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핵 인간의 강박과 고통에 직접 참여해 본 바에 의하면, 핵 인간이 자신이 갇혀 있는 알의 껍질을 깨고 날아가기 위한 방법에는 신비주의적 방법과 혁명적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경험적 초월(experiential transcendence)'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경험적 초월을 모색하는 인간에게 혁명과 회심이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과 인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별개의 과제가 아니고 십자가의 두 기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도록 명백히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혁명주의자셨지만 극단주의자는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사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비주의자이셨지만 사회적 악을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반역자로서 처형당하심으로써 주변에 충격을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핵 인간의 해방과 자유의 길이십니다.

당신은 자신을 신비주의자나 혁명가로 생각하기를 주저할 것입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당신은 자신 안에 신비주의자나 혁명가가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극적일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날 때도 있고 단지 부분적으로만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당신이 사는 동네에서, 당신의 가족 가운데서, 그리고 심지어는 당신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 가운데서 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서서히 나타나서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는 비전으로부터 힘을 얻는 모든 사람들 안에 그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언젠가 인간이 자유로워지리라는 확신, 즉 자유롭게 사랑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게 합니다.

2. 뿌리 없는 세대를 위한 사역 - 도망자의 눈을 바라보며

미래의 기독교 사역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그 논의의 올바른 기조를 설정하기 위해 짧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날 어린 도망자 한 명이 적의 눈을 피해 숨으려고 조그만 마을에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도망자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고 묵을 장소까지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망자를 찾는 병사들이 와서 그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묻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리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동트기 전까지 도망자를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는 그 소년을 적에게 넘겨주어야 할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두어야 할지 고심하다가 방으로 들어가 성경을 읽으며 동트기 전에 해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꽤 시간이 흘러 새벽녘이 되었을 무렵, 목사는 말씀 한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

목사는 성경을 덮고 병사들을 불러 그 소년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 주었습니다. 병사들이 도망자를 끌고 가 죽인 뒤 마을에서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목사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함께 기뻐하지 않았고,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날 밤 한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그 도망자를 적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네가 메시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러자 목사는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라이즈만이 말한 대로 오늘의 세대가 고독한 군중에 속한 익명의 일원들이라고 한다면 내일의 세대는 이 고독한 군중의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 그림자만이라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 도망자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내향적이고, 아버지가 없으며, 강박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적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그를 우리 마을 한가운데로 데려가서 그 젊은이의 모습 안에서 두려움에 싸인 이 세상을 구원해 줄 분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긍휼히 여기며, 묵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정확한 표현’이야말로 미래의 영적 지도자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다양한 경험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아의 희생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계시며, 자신보다 더 많이 치유하실 수 있는 손을 가지신 분을 모시는 내면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가 내향적 세대로서 정확한 표현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로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는 이 권위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권위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긍휼(compassion)'보다 더 적합한 말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즉 어떤 기쁨이나 어떤 슬픔도, 어떤 삶의 방식이나 어떤 죽음의 방식도 그에게는 이질적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긍휼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긍휼은 당파를 만드는 무서운 행위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될 수 있는 넓은 세계로 그들을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긍휼로서 자신의 동료들을 재발견하게 된 기독교 사역자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자신이 맺는 관계들, 그리고 자신이 개입된 사건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상생활의 베일 뒤에 감추어져 있는 새로운 세계의 윤곽을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묵상하는 비평가로서 그는 긴박하고 직접적인 일과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그에 빠져드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그는 인간과 인간 세상이 지니는 진정한 아름다움, 즉 항상 다르고 항상 매력적이며 항상 새로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합니다.

너무 무거운 임무입니까? 각 개인이 개별적으로 이 과제를 완수해야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리더십은 공동의 소명이며, 공동체 안에서 긴밀히 협력할 때 발전됩니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는 샤르댕의 말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는 세속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구성원들이 깨닫게 됩니다. 결국 기도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메시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구체적으로 잡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파악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3. 소망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 - 내일을 기다리며

이 장에서 나는 리더십이 이루어지는 가장 단순한 구조인 두 사람의 만남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바로 이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 리더십의 몇 가지 원칙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좀더 복잡한 리더십의 관계들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방문객의 짧은 대화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환자 해리슨 씨는 48세의 농장 노동자로 땅딸막하고 거칠어 보이며 말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툽니다. 매우 소박한 침례교 가정 출신인 그는 다리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한 대도시 병원의 생소하고 낯선 환경 가운데 완전히 얼이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부정맥 증세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방문객 존 앨런은 이 병원의 원목 밑에서 1년 동안 임상 목회 훈련을 받고 있는 신학생입니다. 존이 해리슨 씨를 두 번째로 방문하였습니다. 환자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 한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그 병실에는 다른 환자들도 있는데 그 중 몇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갑니다.

존: 해리슨 씨, 저… 지난 번에… 만나 뵈려고 잠깐 들렀습니다.

해리슨: 아, 네. 기억 나요.

존: 좀 어떠세요?

해리슨: 네, 그들은 지난 주에 나를 수술할 예정이었습니다. 나를 마취시켜서 수술실로 데리고 갔는데 내 심장이 너무 뛰었습니다. 그날 수술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결정하더니 나를 다시 여기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래서 내일 수술받게 됐습니다.

존: 심장이 너무 뛰었다구요?

해리슨: 예,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수술을 진행시키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던 거죠. …난 이제 수술받을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성공할 것 같아요.

존: 준비가 됐다고 느끼십니까?

해리슨: 아직 죽을 준비는 안되었거든요. 수술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를 잃어버리게 되니까요.

존: 마지막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면 어떤 조치가 취해져서 다리를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군요.

해리슨: 그래요. 만약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저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 되겠죠!

존: 수술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를 걱정하고 계시군요.

해리슨: 예! 물론 그들 말로는 그렇게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합디다. 그들은 여기서 나를 마취시킨 다음, 수술할 때까지 나를 여기에 놔 둘 거예요. 물론 난 수술 중에 죽고 싶지는 않아요. 마취 중에 죽는 것보다는 자연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존: 수술 중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건강해지는 유일한 길은 수술받는 것입니다.

해리슨: 예 맞아요.

존: 퇴원하시면 해리슨 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많죠?

해리슨: 아무 것도, 아무도 없어요. 고된 일만 나를 기다리고 있죠.

존: 고된 노동뿐이라고요?

해리슨: 예, 그래요. 물론 난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담배 수확기까지는 일할 준비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존: 담배 재배를 하시려나 보군요?

해리슨: 예, 8월경에 수확이 시작되거든요.

(침묵)

존: 저, 해리슨 씨, 내일 일이 잘 되시길 바랍니다.

해리슨: 고마워요.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존: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해리슨: 잘 가세요.

존은 다시는 해리슨 씨와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얘기를 나눈 바로 그 다음날, 해리슨 씨는 수술 도중 사망했습니다. 아마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존은 이 중요한 순간에 해리슨 씨를 인도하여 새로운 내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무엇을 의미했던 걸까요? 해리슨 씨에게 그것은 담배 농장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면 죽음 저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크리스천 리더십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관심,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깊은 믿음,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소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리더십은 섬김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섬기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동료와 함께 나누어야 하는 모든 취약점을 가지고 상황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의 경험이기에 고통이 수반되지만 동시에 인간을 혼란과 공포의 감옥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의 역설은 안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사람의 고통에 동참할 때에만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존이 해리슨 씨의 고뇌 속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그를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함께 그들의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며 교제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함께 나아가라고 도전받고 있습니다.

4. 외로운 사역자의 사역

이 강박적인 세상에는 우리가 해방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담대하게 소리 높여 알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증오와 억압으로부터 민족주의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며 평화와 정의를 주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해방자는 어떻게 오실까요? 나는 탈무드에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만한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찾았습니다.

랍비 요쉬아 벤 레비는 랍비 시메론 벤 요하이의 동굴 입구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아에게 물었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오실까요?” “가서 그분에게 직접 물어 보시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한 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다시 싸매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아마 이들에게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만 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랍비는 메시아에게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님이며 선생님이신 당신에게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메시아가 대답했습니다. “레비의 아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바라노라.” “주님은 언제 오시나요?” 그가 묻자 메시아는 ‘오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 요쉬아는 엘리야에게로 돌아갔고 엘리야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그는 사실 나를 속였습니다. 그는 내게 ‘오늘 내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오지 않았거든요.” 엘리야가 말했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했던 말은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한다면’(시 95:7)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시고 한 번에 하나씩 그분의 상처를 싸매며 자신이 필요하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것은 사역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첫 번째 징후를 명백하게 제시하는 것이 사역자의 의무이므로 그는 자신의 그러한 역할이 필요하게 될 순간을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처를 싸매야 합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는 상처 입은 사역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입니다.

우리가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 때조차도 치유가 오늘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지나칠 정도로 눈에 띄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고립이 우리 일상의 너무나도 커다란 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참함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고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 줄 해방자를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나 해방자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앉아 계시며, 우리의 상처가 소망의 표적이고, 오늘이 해방의 날임을 선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치유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모든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시 95:7-9)

실제로 우리가 그 음성을 듣고 사역을 통해 메시아 도래의 서광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역이 소망의 표적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은 살아 있는 진리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그 진리란 바로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맺음말 - 전진

상처 입은 자신의 상태를 치유의 원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를 원하는 사역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환대입니다. 사역자가 포용력 있는 주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오는 다양한 손님들을 통해 이 태도의 의미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병원의 비인격적 환경 속에서 방향을 잃고 죽음과 삶 모두를 두려워했던 늙은 농부 해리슨 씨, 내향적이고 아버지가 없는 강박적인 세대,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실존의 한가운데서 새로운 방식의 불멸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방향을 발견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사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이나 형식은 다양합니다. 사역자는 이러한 진실의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치우침 없는 관찰자로서 서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증명하는 증인입니다.

사역자에게 있어 환대란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고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들의 삶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물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손님들로부터 기꺼이 영향을 받겠다고 할 때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의 추구와 위험을 분담할 때라야 새로운 생각이 도출되고, 새로운 비전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길을 보게 됩니다.

2년 후, 10년 후 또는 20년 후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나눌 때 우리가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사역자의 부르심은 자신의 많은 손님들에게 이 전진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 신뢰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열망이 점점 커지며, 인간과 세상의 완전한 해방이 앞으로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