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알마 / 2007년 11월 / 319쪽 / 15,000원
▣ 저자 아서 제이 클링호퍼(Arthur Jay Klinghoffer)
미국 러트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정치학 교수이다. 그는 수많은 저서에서, 인권, 학살, 소비에트 공산주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분리 정책, 원유와 금의 정치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저서로『아프리카 사회주의에 대한 소련의 전망(Soviet Perspectives on African Socialism, 1969)』, 『소련과 앙골라(The Soviet Union and Angola, 1980)』, 『이스라엘과 소련: 소원해지는 것인가 화해하는 것인가(Israel and the Soviet Union: Alienation or Reconciliation?, 1985)』, 『인종 분리 정책에 기름칠하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밀 원유거래 폭로(Oiling the Wheels of Apartheid: Exposing South Africa's Secret Oil Trade, 1989)』, 『세기의 사기: 불가사의한 초대형 유조선 살렘 사건(Fraud of the Century: The Case of the Mysterious Supertanker Salem, 1988)』,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대한 소련 정책의 역학(The Dynamics of Soviet Policy in Sub-Saharan Africa, 1991)』, 『국제 시민 재판소: 인권 향상을 위한 여론 동원(International Citizens' Tribunals: Mobilizing Public Opinion to Advance Human Rights, 2002)』들이 있다.
▣ 역자 이용주
한양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주립대학교 올버니 캠퍼스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버펄로 캠퍼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세종대학교에서 영미 소설 및 비평 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에드거 앨런 포우: 텍스트 해체의 서술 기법』, 『주체의 역사: 헨리 제임스의 유령적 주체성』들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현대 미국 소설 개론』,『 20세기 비평 이론』들이 있다.
▣ Short Summary
지도는 드넓은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모험을 하고 싶도록 영감을 준다. 이 책은 지구 공간을 가로지르며 드러나지 않은 지리학적 지식을 찾아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탐구 여행서로서,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지도의 모습을 뒤집는 질문부터 던지고 있다. ‘왜 유럽은 지도 상단에 표시되어 있고 아프리카는 지도 하단에 표시되어 있을까? 3차원의 구체를 2차원의 평면으로 제작한 지도에는 어떤 특정 지역이 위다, 아래다를 구별할 수 없는데 왜 대부분의 지도는 항상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지도의 구성에 담긴 권력의 비밀에서 찾는다. 지도 제작 과정에는 지도 제작자와 국가의 가치관이 철저히 투영되기 때문이다. 한 장의 지도에는 한 시대의 세계관과 정치적 의도가 서려 있고 지도 제작 과정에는 왜곡이 존재한다. 이 왜곡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제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 예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도가 서양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형성하는 권력의 도구로 어떤 기능을 했는지 긴장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 제작자의 의도를 밝혀내는 일이다.
이제 국가 단위와 국경을 묘사한 전통적인 세계 정치 지도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영토에 대한 민족적 욕망은 강렬해지고 있다. 국경의 의미가 약해지고 있는 지구화 현상 속에서 지리와 관련한 국제정치의 이해는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한다. 독도는 단순히 한민족의 주권과 자존심을 지키는 ‘땅’이 아니라 배타적 경제수역을 수호하는 방패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척박한 산악 지대는 극단적 이슬람 주의를 주장하는 탈레반과의 이념적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이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중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송유관이 지나는 자원 전쟁의 전략적 요충 지대이다.
현재 지도는 세계화의 충격으로 끊임없이 변화고 있다. 현재 지도학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하학적 투영도법을 고안해 내는 일이 아니다. 국제관계에서 차지하는 지리학의 중요성을 폭넓게 이해하고, 빠르게 진화하는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는 새로운 창조적 표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 차례
추천글 / 머리글
제1장 지도 제작자의 거울
권력의 도구
제2장 문화적 요인
제3장 정치적 조각 그림 맞추기
제4장 교묘한 수완
제5장 관찰자의 시각
세계관
제6장 위도의 완성
제7장 새로운 방향
제8장 제국의 지리학
제9장 지정학
제10장 서반구 방어
제11장 냉전
지도의 혁명
제12장 사회적 항의와 해체
제13장 조각들의 재배열
주석 / 옮긴이 글 / 찾아보기
지도와 권력
아서 제이 클링호퍼 지음
알마 / 2007년 11월 / 319쪽 / 15,000원
지도 제작자의 거울
지도 제작자는 분명 과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지도를 제작하지만 그들은 같은 지역에 대해서도 상이한 지도를 제작한다. 지도는 제작자의 경험, 미학, 정치학을 반영하며 의도적으로 제작된다.
마음의 눈 : 지도는 투영도(投影圖, projection)다. 우리는 빛이 필름이나 투명한 물체를 통과해 스크린에 이미지를 만드는 현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구체 안에 불이 켜진 전구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구체 표면의 특징들이 구체를 싸고 있는 종이, 즉 이후 평평하게 펼쳐질 종이 위에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구체는 2차원의 평면 지도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데, 종이로 구체를 원통 모양으로 싸느냐 원뿔 모양으로 싸느냐에 따라 투영도의 본질이 달라진다. 이와 같은 투영도는 지도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조작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경 지도가 등장하기 시작하자 중심에 그려지는 대상이 자민족 중심적 가치(개인적인 자기중심주의와 사회적 혼합물)에 따라 결정되었다. 지도 제작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투영도는 지도 제작자의 내적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그 지도는 ‘관찰된 것’이 아니라 ‘보는 행위’에 바탕을 두었다. 지도 제작자가 지도를 제작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바는 객관적일 수 있으나 그것은 상당 부분 제작자 자신의 문화적․정치적 견해(심지어 지도 제작자 자신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결국 지도 제작은 제작자의 세계관을 반영하게 되며 전통적인 ‘투영의 심리적 기능’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사실 검증 : 과학은 수천 년 동안 지도 제작에 이용되어 왔다. 측량 도구, 인쇄 기술, 위성사진, 컴퓨터 등은 과학으로서의 특성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지도 자체는 아직도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과학적 객관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록 위성사진들이 지도 제작의 기반이 되고 있지만 제작자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구역, 각도, 축척 및 기타 요소들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3차원적 실체를 2차원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지구의 양극은 평평하게, 적도는 불룩하게 표시됨으로써 거리와 각도가 왜곡된다. 지도와 사진은 변형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작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도 제작자의 ‘지도 제작 개념’이다. 지구는 또한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진화한다. 역동적으로 공간변화를 이루고 있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이제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고, 최소한 기원전 2만 년까지는 좁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던 북아메리카와 아시아도 분리되었다. 만약 지구온난화가 계속된다면 해안선은 후퇴하고 키리바시(Kirivati)와 몰디브 같은 섬나라들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도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매일 해안선이 변하고 있다. 종종 강줄기의 위치가 변하기도 하는데, 국경 지대인 경우 정치적 분쟁마저 불러일으킨다.
즉 지도는 제작자의 심리적 투영에 의해 생성된 부정확성과 축척의 한계 때문에 단지 재현하려고 의도한 사실의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다.
정치적 여파 : 어린 시절 나는 세계지도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고, 왠지 내가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확실성에 조화된다는 믿음으로 여러 나라의 지도를 그렸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학급 ‘시사 문제’ 담당 기자로, 급우들에게 그 전쟁에 관해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지도로 표시된 전쟁을 꼼꼼히 추적했는데, 화살표와 선들이 지형뿐만 아니라 전술과 정치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국제 관계를 전공하는 정치학자가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지도에 매력을 느꼈으며, 지도가 세계 정치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지도에는 언제나 주관적인 인식이 들어가 있다. 제작자의 관점이 축척, 중심점, 방위, 지역 명칭 그리고 지도에 표시할 것을 정하는 등의 다른 많은 요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도의 객관성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목적은 표면에 나타난 이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그것이 지도 제작자의 의도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아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한 개인의 세계관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반영하며, 문화적인 제한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도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 제작자의 의도를 밝혀내는 일이다.
권력의 도구
문화적 요인
지도는 ‘문화와 문명의 거울’,‘문화적 텍스트’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지도는 인간 습성의 정신적 특질을 반영하며 그 시대와 장소의 사회적 질서에 대한 시각을 제공한다.
어디가 위쪽인가? : 중국인들은 ‘천하(天下)’라는 개념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기원전 5세기 지도를 보면 중심이 같은 사각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의 가장 안쪽 사각형에는 황궁이 있고, 바깥쪽으로 수도, 봉건 제후들의 영토, 평화 지역, 야만인 지역 그리고 ‘야만적인 미개인들의 땅’이 존재한다. 여기에 표준화된 축척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궁에서 밖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지역은 점진적으로 작게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심, 즉 ‘자기’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감소되는 도덕적 가치는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의 증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지도의 방위도 자의적이다. 문화적 전통에 의해 지도의 디자인이 정해진다. 북쪽이 지도 위쪽에 위치해야 할 과학적인 증거는 없으며, 미국 사람들이 ‘위쪽인 북’으로 또는 ‘아래쪽인 남으로’ 가야 할 이유도 없다.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쓰는 관습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대화가 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방위가 표준화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방위는 어떤 장소에 접근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강을 고정된 기준점으로 이용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를 그릴 때는 일정한 양식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북쪽을 향하는 지도는 고대 그리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제작한 지도는 이 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지도의 방위는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예외적 지도가 있는데, 스튜어트 맥아더(Stuart MaArthur)의 〈수정본 세계지도(Universal Corrective Map of the World)〉이다. 1979년 호주에서 출판된 이 지도는 남쪽을 향해 있고 자오선은 호주의 캔버라(Canberra)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도에서 유럽은 오른쪽 하단 구석에 위치하며 미국은 왼쪽 하단에 놓여 있다. 이 지도의 주석에 따르면 이것의 목적은 ‘세계 권력투쟁의 암울한 무명의 심연’으로부터 호주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정치적 조각 그림 맞추기
지도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라 권력을 나타낸다. 지도는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본질적으로 공간에 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개념을 전파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권력의 공모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통제 :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의 권위를 표현한다. 고대 중국에서 패전국은 정복자에게 복종과 영토 분할의 상징으로 자신들의 지도를 바쳤다. 보다 강력한 국가와의 동맹을 원하는 중국의 제후국은 복속의 상징으로 지도를 넘겨주었다. 1940년 소련군이 핀란드의 카렐리아를 점령했을 때, 소련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거의 1,600만 개의 지역 지도가 압수되었다. 또한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정보부는 전시에 독일을 위해 일했던 스웨덴의 지도 제작자 헤딘(Sven Hedin)이 제작한 중앙아시아 지도들을 찾기 위해 소련이 점령한 지역을 수색했다.
지도가 국가 안보나 상업적인 이유 때문에 비밀에 붙여지는 경우도 많다. 1504년 포르투갈에서는 지도나 항해 일지를 국외로 반출하는 사람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동시에 지도 제작 도구의 수출을 금지하는 국왕의 칙령이 공포되었다. 지도에 관한 포르투갈의 보안 제도는 스페인과의 심각한 해상 경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향료를 얻기 위해 아시아에서 경쟁할 시기에는 그 절정에 달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에 인도에 도달했는데, 항해와 아시아 탐험에 관한 결정적 세부 사항이 16세기 전반기 내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잠재적으로 군사적 표적이 된 지점이 있는 지도에서 적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30년대부터 소련은 자신들의 지도를 심하게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첩보 요원들을 기만하고 정확한 폭격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지도에 축척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를 잴 수가 없었다. 해안선은 변경되었으며 위도와 경도는 정기적으로 부정확하게 표시되었다. 강, 철도역, 다리의 위치도 약간 변경되었다. 1988년 소련의 지도 제작 책임자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했으며 국가보안위원회가 지시한 일이라고 밝혔다. 이때는 이미 인공위성 사진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허위 지도가 필요 없는 시절이었다. 냉전 시기 동안 모스크바 지도에는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1960년대에 미국 정부는 버지니아 주 랭글리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건물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지리학과 정치학 : 초기의 지도는 ‘국가’ 형태의 정치적 단위를 묘사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우주론적인 것이었다. 영토는 정복을 통해 획득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땅덩어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발견’의 개념은 없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유럽인들의 ‘발견’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세계의 조각난 지역들이 국가의 형태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7~18세기 지도들은 권력과 주권을 강조했으며, 정치학이 지도 제작에서 재현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현재도 유효하다.
쓰라린 국민 감정 때문에 한 지역에 대한 지명들이 경합하는 일이 발생하는 예를 보자. 남한과 북한은 ‘일본해(Sea of Japan)’란 명칭을 거부하고 ‘동해(East Sea)’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동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지만 ‘한국해(Sea of Korea)’, ‘동방해(Oriental Sea)’, ‘고래 바다(Sea of Whales)’ 등의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영국국립도서관에 소장된 80장의 18세기 지도들을 조사해본 결과, ‘한국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62개, ‘동해’는 7개, ‘한국해’와 ‘동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2개, ‘일본해’는 6개, ‘중국해’는 3개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일본의 군사력이 강해지고 일본인들이 영문판 지도를 출판하기 시작하자 ‘한국해’라는 명칭 대신 ‘일본해’라는 명칭이 우세하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1929년 국제수로기구(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는 이 명칭을 인정해주었다.
2차 대전 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인들은 이 문제를 국가적 자긍심과 관련된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한국(남한) 사람들은 ‘일본해’라는 명칭이 제국주의의 잔재라고 주장하면서 개명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동해’라는 명칭을 선호했으며 ‘한국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91년 국제연합에 가입한 후로 한국은 국제연합 지명표준화회(CSGN)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1998년, 제7차 국제연합 회의에서는 ‘일본해’와 ‘동해’의 병기를 권고함으로써 이 분쟁의 결정을 미결로 남겨두었다. 많은 지도책과 단체가 이 관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기관들과 CNN은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해냈는데, 그것은 이 바다에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는 것이었다.
중동의 용광로 : 땅과 국경, 민족 자결권에 대한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은 끊임없이 무력 사태를 발생시켜 왔다. 이 역시 지도가 정치 도구로서 선택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생생한 실례다. 지도 제작자들의 취사선택의 자유는, 그들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다.
아랍 국가들은 1947년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에 의해 설정된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합법화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1949년에 국경은 휴전선으로 바뀌었는데, 이스라엘은 더욱 확장되었고 팔레스타인 아랍국가는 사라졌으며, 국제연합의 계획하에 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 가자지구는 ‘특별 국제 제도’로 관리하게 되었다.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지도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수없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지도에서는 그 나라의 휴전선이 사실대로 표시됐고,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요르단과 이집트가 점령한 것으로 표시했다. 영국과 파키스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세계지도에는 이 합병을 합법적인 것으로 표시했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지도는 다양했다. 실제 상황에 충실한 지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묘사하지 않았다. 그 지역은 ‘팔레스타인’으로 표기되었고, 급진적 아랍인들은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에 포함시켰다.
관찰자의 시각
해석하는 사람은 자신의 평가 기준에 따라 상을 수립하기 때문에 심리적 투영은 지리학적 개념의 근거가 된다.
지형의 상대적 배치 :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 족은 방위를 결정할 때 자신의 위치와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 사이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중심으로 지구를 ‘동반구’와 ‘서반구’로 나누며 그 동쪽(East)을 ‘동방(Orient)’이라고 부른다. 지난 4세기 동안 유럽은 지도를 지배해왔기 때문에 많은 유럽인의 인식은 지도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말엽에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 생겼고, 이에 따라 지리학 용어들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아시아(West Asia)’라는 명칭은 ‘중동(Middle East)’이라는 이름으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는 명칭은 변하지 않았다. 민족적 입장에서 볼 때 ‘동방(Orient)’이란 명칭은 ‘정치적으로 불평등’한 단어가 되었다. 이 명칭은 자체적으로 그 지역이나 문화적 유산을 정의한 용어가 아니라 유럽의 입장에서 방위를 해석해 정의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륙의 개념도 항상 자의적이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구별은 정말로 모호하다. 러시아는 이 두 대륙에 걸쳐 있다. 터키는 대체로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유럽 연합(EU)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다. 터키의 외무장관 캠(Ismail Cem)에 의하면 “터키는 7세기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모두 속한다고 생각하며, 그 다양성을 자산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분명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주변국들로부터 배척받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시안 게임에서 제외되었고, 근본적으로 유럽 국가로 행세해야만 한다. 이스라엘 팀은 유럽 농구연맹과 축구연맹에서 경기를 하고 있으며 매년 유로비전 콘테스트에 참가곡을 내고 있다. 지리학적 지역을 기준으로 교대로 의석을 차지하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은 비상임 회원으로서 서유럽,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뉴질랜드와 함께 절충 집단에 속해 있다.
기독교 세계 : 유럽은 지중해 북부에 위치한 불확실한 지역이었다. 특히 7세기에 이슬람이 부흥한 후 유럽은 견제세력이 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의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했는데, 문화역사학자 딜란티(Gerald Delanty)의 견해에 따르면, 이 태도는 ‘동양’ 안에 있는 유럽의 정체성의 핵심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종교적인 지역이 확장됨에 따라 유럽은 9세기에 ‘기독교 세계’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이슬람이 부흥한 후 유럽인들은 오스만제국의 존재를 이질적 ‘아시아’의 침입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골치를 썩었다. 그들은 19세기 말 ‘근동(Near Asia)’이라는 표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유럽과 ‘극동(Far East)’ 사이의 지역을 의미했다. 이것의 목적은 오스만제국을 유럽으로부터 의식적 측면에서 떼어놓으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 지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분명 유럽에 속해 있던 발칸 반도가 근동에 포함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제국이 붕괴되자 유럽 내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근동에서 제외되었으며, 터키와 서부 아시아 국가들을 지칭하는 ‘중동(Middle East)’이라는 용어가 도입되었다. 이처럼 유럽의 지리는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이것은 단순한 자연적 특성을 넘어서 대륙이 정의된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자기 중심주의 : 경도는 매우 중요한 지리학적 개념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지표면의 지형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투영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록 자의적으로 설정된 것이긴 하지만 지구가 360도의 원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며, 이 자오선 수치를 통통해 세계가 정돈되고 표준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더욱 쟁점이 되는 문제는 어디에 0도의 경도, 즉 본초자오선을 설정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것은 그 선을 어디에 정하더라도 수학적 측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영국의 그리니치(Greenwich)에 본초자오선이 정해진 경위는 기하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도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가 그리니치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 힘을 썼다. 그 과정에는 거대한 권력 경쟁과 책략들이 있었다.
세계관
제국의 지리학
탐험과 식민 정책이 가속화됨에 따라 지도 제작(법)도 대부분 유럽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때 측량과 지도 제작 기술이 없는 사회는 불이익을 당했으며, 나머지 지역에는 외세의 흔적이 새겨졌다.
창시자 : ‘발견의 시대’는 15세기에 시작되었고 이 시대의 특징은 유럽 국가들(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탐험이었다. 식민지를 통해 유럽의 영향과 기독교가 세계로 전파되었고, 이 지리학적 확산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해상력이었다. 이 제국주의적 야망은 지도의 발전 과정에 잘 나타나 있으며, 해외 영토에 대한 권리를 구현할 때 지도는 거의 법률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근거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실례를 통해 ‘세계에 대한 신학적 관점의 투영’과 ‘개인적 관찰과 확인을 통한 지도 제작자의 정신’이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도를 외교와 상업에 연결시킴으로써 지도 제작을 제국의 전망에 부합시켰다. 근거 없는 가설들 때문에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상식에 도전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함으로써 유럽의 지리학적 지식을 확장시킨 위대한 항해사였다.
메르카토르는 현대 지도학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1512년에 태어나 1594년 사망할 때까지 플랑드르와 독일에서 작업했다. 정확한 지형을 보전했던 그의 지도는 정밀한 방어와 각도로 인해 ‘발견의 시대’ 내내 항해사들에게는 실용적이었다. 수학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했고 지형 대신 정치적 단위를 특징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 태동하던 유럽 제국들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의 고객은 유럽 인들이어서 그는 다른 대륙보다 유럽이 보다 세밀한 지도를 만들었다. 지도에 나타난 왜곡과 유럽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메르카토르는 지도 제작법의 수학적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지도와 투영법은 400년 이상 이 분야를 지배했다. 전 세계 학생들은 그의 지도들을 통해 지리학을 배웠고, 유럽 중심적인 편견을 갖게 되었다.
왕과 국가를 위하여 : 투영도법은 지도학, 영화(제작)학, 심리학뿐 아니라 국제정치학과도 관련된 개념이다. 국가는 식민지와 기지 그리고 군사적 권리를 탐색하면서 해외로 ‘권력을 투영’하는 일에 관여한다. 따라서 지도 제작에서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은 유럽의 팽창과 쌍을 이루며, 지도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계획과 연관되었다. 한 지역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 영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며, 여행 경로에 대한 정보는 군사 작전과 영리 사업에 도움이 된다.
국가의 경제활동을 지배하는 단체의 대표들은 국가 정책에 영향을 줄 때 부유해지기 때문에 자주 영국 관료들에게 지도를 제시했다. 그리니치 본초자오선에 중심을 맞춘 대영제국 지도에는 자주 선박과 전신의 접속로가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전략적인 힘과 기업가 정신이 자주 보조를 맞추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구성 요소들이 흔히 선명한 붉은색이나 분홍색으로 표시된 것은 그 색조가 ‘브리타니아여 지배하라!(Rule Britannia!)’는 개념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지도가 갖는 설득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많은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위조된 지도를 제시 수단으로 강구했다.
학문의 형성 : 소위 ‘제국주의’라고 알려진 유럽 제국들의 성장과 더불어 19세기 지리학의 주제도 변화했다. 지리학에서 경제가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탐험가이며 언론가)는 이것을 ‘상업을 훈계하는 과학’이라고 묘사했다. 자원 채취와 배급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하층계급과 범죄자 등의 잉여 인구를 방출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물색되었다. 군대, 특히 독일과 영국의 군대는 장교들이 해외 작전에 관련된 정보 수집 능력을 키울 수 있게 지리학 교육을 강요했다. 이렇게 해서 독도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작전은 전쟁을 계획하는 데 중요한 훈련이 되었는데, 그것은 군국주의가 군주주의, 사회적 진화론과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 탐험에 자금을 대고 지도 제작에 관여하는 지리학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 과학자였던 리빙스턴(David N. Livingstone)이 묘사한 대로 빅토리아 시대에 지도는 ‘탁월한 제국주의 과학’이었으며 단순히 ‘세계를 발견하는’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일을 했다. ‘제국주의’가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지리학을 학문 분야로 발전시킨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시기에 지도는 사회와 경제적 요인들에 관한 제국주의적 관점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바람이나 해류 같은 물리적 힘들에 관해서는 관심을 덜 쏟았다. 지도학은 보다 교훈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지정학(geopolitics)’이라고 알려지게 된, 지리학과 국가 권력을 연결하는 도구가 되었다.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 관점에서 지리를 분석하는 지정학은 19세기 말에 학문 분야로 발전되었다. 지정학은 외교 정책과 깊이 관련되었고 전략 이론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응용 정치지리학’ 또는 ‘지리학적 정치학’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세계 정황을 국가가 숙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지정학은 지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했는데, 국제적인 환경 속에 존재하는 지리학적 갈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지도학은 더 이상 항해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사 작전을 수립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지정학적 분석 방법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성행했다.
지도의 혁명
사회적 항의와 해체
서구의 정치적 좌파 지도 제작자들은 인식된 자본주의와 유럽의 헤게모니를 해부하여 그 결과를 지도에 반영했으며, 전통적인 지리학과 지도학의 기본 원리들을 공격했다.
페터스의 법칙 :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급진적 지리학의 옹호자는 페터스(Arno Peters)였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좌파 활동을 하다가 나치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다. 페터스는 선전 수단으로서의 영화에 관한 논문으로 1945년 젊은 나이에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52년에는 세계 모든 지역을 고루 다룬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세계사를 출판했다. 그후 페터스는 정치적 도구로서의 지도의 효용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특히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지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매료되었다. 그는 1967년 헝가리 과학원에서 이 문제에 관해 연설을 했고 자신의 세계지도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페터스의 지도는 ‘페터스 이전’과 ‘페터스 이후’ 등의 용어가 지도학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기존 지도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페터스의 등면적도법(等面積圖法)은 오랫동안 유럽 중심적 이미지를 제공했던, 북부 대륙을 과장했던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에 대한 응답이었다. 페터스는 메르카토르가 이데올로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지도를 왜곡했다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투영도법의 결과에 의아해했고, 평등주의 원칙에 입각해 이와 반대되는 지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페터스는 ‘백인 우월주의와 외국인 혐오에 근거한 과거의 세계지도’와 달리 ‘새로운 지도’는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통적인 지리학 개념들을 ‘새로운 가면을 쓰고 착취를 계속하려는 유럽 식민지주의 국가들의 시도’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접근 방법을 유럽 중심주의에 대항해 자라나고 있는 ‘전 세계적 유대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페터스는 메르카토르 투영도법에 나타나는 크기의 왜곡을 대체하는 정밀한 면적 표현법을 사용했다. 즉 그는 지도책이 한 지역에 치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지도에 똑같은 축척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지도의 중심에 그리니치 본초자오선을 설정했는데, 실제 크기에 충실한 이 지도에서는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이 가장 잘 눈에 띄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 미국판 지도책에서는 아메리카 지도를 맨 앞에 놓았지만 캐나다를 미국 앞에 두었다.
조각들의 재배열
지도학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새로운 기하학적 투영도법을 고안해내는 일이 아니라 빠르게 진화하는 세계의 모습을 반영하는 새로운 창조적 표현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도는 역동적인 초국가적 세계화의 충격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재구성 : 우리에게 익숙한 대륙과 국가, 국경들은 서서히 부상하고 있는 21세기 세계 질서와 관련된 필수적 기본 원칙들로 재고되어야만 한다. 지도의 새로운 이미지들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땅을 기준으로 하는 심장부 논리는 소련의 붕괴, 냉전의 종식과 함께 퇴색되었고, 최근의 해저 광물 채굴권 경쟁으로 인해 바다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에 따라 인접 영토에 관한 지역학 연구 프로그램은 바다를 통한 문화적 연대를 강조하는 보다 역동적인 연구들로 대체되고 있다. 캐롤라인 제도의 풀라와트(pulawat) 주민들은 바다를 물이 아니라 “항로들의 집합”으로 본다. 이 ‘항로’들은 섬과 섬을 연결하는 ‘도로’이며 만남의 길이다. 현대의 지리학자들도 이와 유사하게 바다를 장벽이나 장애물이 아니라 연결 수로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은 《지리학 논평(Geographical Review)》 1999년 4월호의 제목, ‘바다의 연결’에 잘 나타나 있다.
국제 사법권과 인도주의적 개입이 국가 주권보다 우위에 서게 되자 외교와 국제법의 기준이 되는 영토 중심의 국가는 힘이 약해졌다. 또한 대륙도 예전의 지위를 잃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문화적 분할 현상이다. 움마(umma, 신앙 공동체)라는 공동의 개념을 갖고 있는 이슬람과 이와 유사하게 초대륙적인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대치하고 있다. 정체성을 결정했던 지리적 요인들이 약화되면서 대륙의 구분은 중요성을 잃었으며 인종 중심 구분에 비해 부차적 요소가 되었다.
최근의 세계화에는 세 가지 변이가 등장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가치관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HO) 그리고 대기업들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보통은 반미주의적으로 노동자, 여성, 환경주의자 그리고 해당 민족들로부터 지원을 끌어내려고 모색한다. 마지막으로는 과격 이슬람 주의가 있는데, 이것의 목표는 이슬람을 따르지 않는 다르 알 하브르(전쟁의 세계)를 쳐부수거나 개종시켜 전 세계에 다르 알 이슬람(평화의 세계)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지구화는 국가 주권을 기만하고 국경을 약화시키며 역동적인 ‘흐름과 조직’을 강조한다. 지구화 과정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세력과 저항 세력들은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대신 (비록 9․11 이후 국경을 강화하는 분위기가 생기긴 했지만) 자본․무기․인력․이데올로기 그리고 상품의 이동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지리에 구속받지 않는 초국가적 테러리즘이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군대를 대체하며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국가 단위와 국경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세계 정치 지도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국경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의 유연성은 지도에 표시하기가 어렵다.
국제 관계 전문가인 클레어(Michael Klare)는 지도 표현상의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자원이 존재하는 지역이 미래의 분쟁 지역이 되면서 정치적인 국경이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클레어는 석유, 광물, 목재, 물, 그리고 기타 자원들이 색으로 구별되는 지도(적도 지대, 특히 아프리카가 강조되는)를 상상했다. 심지어 ‘필연적으로 불명확한 국경’을 갖고 있는 ‘상응하는 정치 형태를 결여한 네트워크 문명 사회’도 있다. 이것은 사이버 공간에서만 존재하며 이것의 토대는 영어권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정보 혁명’이다. 이 ‘영어권 세계(Anglosphere)’는 기술 혁신을 기반으로 하며 국경이 없는 문화적 공동체다.
공연 시간 : 유럽인들이 전통적으로 지구를 극장에 비유하듯 지도학은 대중매체의 한 형태이다.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썼듯이 ‘전 세계는 무대’이다. 전 세계를 투영한 지도에 묘사된 것은 공간에 대한 현세적 구조물을 주장하려는 욕망의 심리적 투사이다.
지도는 영화의 프레임과도 유사하다. 영화가 스크린에 투사될 때 필름 릴이나 카세트로부터 이야기 전체가 투사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영화는 감독이 작업한 선별된 프레임을 모아놓은 것이다. 감독은 포함되어야 할 것과 배제되어야 할 것을 결정한다. 본질적으로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표현하는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이들은 관객들의 의식을 조정하기 위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배열하고, 해석한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사실’들이 선별된다.
그러므로 정해진 테두리가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프레임은 지도와 유사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지도도 단지 지구의 일부만을 표현한다. 지도 제작상에 조작이 가해진다면 명백한 기술 혁신이라는 객관적 수단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선동당할 수 있다. 위성사진, 전지구위치시스템(GPS), 컴퓨터 그래픽이 정밀한 지도 제작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들은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지도 제작자의 의도에 따른다. 제작자는 지도가 그림이나 삽화와 비슷해지도록 하기 위해, 방위, 축척, 시점 또는 관측 고도를 손쉽게 바꿀 수 있다.
그렇다! 경험적 실체가 각색되어 결과물로 나온다. 그러나 투영(법)은 이것이 구성하는 현실의 표현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지도는 세계의 역사와 정치를 묘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반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이미지들에만 집중하지 말자. 그 과정을 숙고하고 그것을 만든 제작자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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