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권위있는 목회자 (As One with Authority)

미션(cmc) 2010. 6. 19. 14:05

권위있는 목회자 (As one with Authority)

: 목회 지도력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 ?

목 차

서 문  1 장 : 권위를 읽어버린 목사들 - 권위의 위기는 어디서 오는가 ?

제 2 장 : 권위란 무엇인가 ? - 권위의 기초

제 3 장 : 권위의 관계적 차원 : 공동교역은 가능한가 ?

제 4 장 : 권위와 교회 : 교회란 무엇인가 ?

제 5 장 : 교회지도자의 중심과제들 : 권위는 공유할 수 있는 것인가 ?

제 6 장 : 권위있는 지도력 : 성찰적인 지도력은 가능한가 ?

제 7 장 : 성찰적인 지도력의 구조

제 8 장 : 신성의 대변자

후주

참고문헌

서 문

이 책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전통적인 계층구조적인 개념이 붕괴되는 시대에 진정성 있는 권위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하나로 쓰여졌다. 이 책은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교역을 공유하므로서 교역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지도력은 성찰적인 지도력 (reflective leadership)이며 구체적인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성찰적인 지도력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한다. 나는 이 책에서 지난번에 저술한 Ministry as Reflective Practice (Carroll, 1986)에서 제한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깊이 고찰하면서 확장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어떤 목사들과 평신도들 중에 권위의 문제로 전혀 고민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무오성으로 권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의 전통주의자들은 아직도 교회의 무오한 가르침의 직제를 옹오하고 있으며, 흑인교회의 수많은 목사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아직도 수행하고 있으며 권위의 문제로 도전을 받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권위를 재고하는 이런 책 때문에 오히려 이제까지 잠잠하던 권위의 질문이 제기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권위문제는 현실적으로 부딛치는 잇슈요, 고민스러운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목사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권위의 수행에 대하여 재고하고 교회의 지도력을 재정립할 수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책에서 나는 성직자를 안수교역자, 목사, 신부 등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했다. 나는 이러한 명칭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이 책에서는 같은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사용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나는 교역이라는 단어를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역으로 사용한다. 안수 교역자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장로를 안수하여 세우는 개혁전통의 교회들에게 약간의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항상 포괄적인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지만 성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저자들을 인용할 때에는 이것이 그렇게 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권위에 대한 나의 시각은 내가 공부한 사회학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통합적인 시각에 서 있다. 나는 역사가들과 성서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저작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분들은 하트포트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을 공부한 현장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방법으로 그들 자신의 지혜를 나와 함께 나누었다. 수많은 현장 목회자들로부터 얻은 통찰들이 이 책에 포함되었다. 하트포트 지역에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은 여러 주일동안 목회현장을 토의하면서 나도 거기에 참여하여 의견을 나누고 배우게 허락해 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윌리암 위킨스 목사, 리차드 그리피스 목사, 제임스 키드 목사, 아치 맥기 목사, 그리고 폴 쌘트마이어 목사등이 있다.

또한 나는 나의 목회실천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인내로 경청해주고 - 어떤 것들은 인내가 없이는 경청하기 어렵다 - 비평과 통찰을 나에게 제공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 하트포트 신학교의 동료교수들은 나의 성찰적인 지도력 연구에 중요한 파트너들이다. 나는 여러 장들에 대한 비평적인 피이드백을 제공해준 클리포드 그린 교수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게리 보우마 교수도 나의 원고를 읽고 조언해 주었다. 교회 연구 프로젝트 팀(낸시 애어맨, 레베카 삼, 칼 더들리, 아디쓰 해이스, 윌리암 홀웨이, 윌리암 맥키니, 그리고 바바라 휠러)은 이 책의 앞부분을 하루종일 토의하며 귀중한 피이드백을 주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도날드 쉔과의 대화는 나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분명해 지겠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나의 주장에 중요한 밑받침이 되었다. 나는 또한 웨스터민스트 죤낙스 출판사의 알렉스 스미스, 다니엘 알렉산더, 그리고 돈 리플리의 유익하고 깊이있는 편집조언에도 감사드린다.

나는 또한 릴리 장학재단과 지금은 은퇴하신 이 재단의 전 부총재 로버트 우드에게도 감사드린다. 릴리 재단이 이 책의 연구조사를 지원해 주었다. 봅 린의 풍성한 지혜와 격려의 선물에도 똑같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신학교협의회의 기초 잇슈 지원금은 이 책의 처음 부분의 연구조사에 귀중한 힘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나의 아내 앤 유잉 캐롤에게 증정한다. 그녀의 인내와 격려와 양육과 지원은 결정적이었다. 나는 또한 그녀가 평신도로서 교역현장에서 실천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책의 계획

제 1장에서 나는 목사들이 권위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여러 가지 목회삽화들은 목사와 평신도들이 경험하는 목회위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나는 또한 이런 권위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언급했다.

제 2장에서 나는 목사와 관련하여 권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규명하였다. 첫째로 나는 특별히 안수교역을 하는 데에 어떠한 권위가 있어야 하는가를 질문했다. 목사의 권위는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교회의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를 논의하고 나서 나는 목사의 권위의 두가지 부차적 기초들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신성의 대변자로서 목사와 전문가로서 목사의 전문지식이다.

제 3장에서도 나는 계속 권위의 의미를 개발하면서 특히 권위의 관계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목사와 평신도와의 관계,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는 교역에서 권위를 어느 정도 공유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귄위 관계가 변화하는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 가를 보이기 위해서 교회사로부터 여러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목사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토의를 끝낸 후에 나는 오늘 교회와 교회의 교역이 직면하고 있는 논점들에 비추어서 목사의 권위의 개념을 재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나는 제 4장에서 교회와 교회의 교역에 대한 가정들을 자세히 검토했다. 제 5장은 여기에 기초하여 기술하였다. 공동교역의 관점에서 교회지도력, 특히 목사의 지도력의 독특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토의하였다. 나의 목적은 목사의 권위수행을 재고하는 기초로서 교역실천의 현상학을 제시하였다.

목사와 평신도의 공동교역이라는 틀 속에서 권위를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을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신성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의미를 재고해야 한다. 나는 마지막 3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쉔(1983, 1987)이 제시하는 일반 전문직업실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성찰적인 지도력"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규명하고자 했다. 제 6장에서는 목회하는 목사의 사례를 사용하여 성찰적인 지도력의 역동성을 탐구했다. 7장에서는 목회지도력의 실제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을 고찰하면서 성찰적인 지도력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오늘날에 신성을 대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과 성찰적인 지도력이 요구하는 전문성과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질문하였다.

여러 각도에서 이 책은 성찰적인 실천의 하나의 실례이다. 독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 가서야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약간 자세히 소개하려고 한 목회회의 비전에서 발전되었다. 여러 자원들에서 도출한 여러 학문들로부터 발견한 관점도 성찰적인 실천의 성격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번 여러번 단계에 따라 틀을 만들고 다시 새로운 틀을 만들면서 목회실천을 성찰하고 상황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면서, 그리고 다른 목사들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를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잭슨 W. 캐롤 저

목사와 권위 : 권위있는 지도력의 길은 있는가?

제1장 권위 있는 목회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 -흔히 보는 범퍼스티키-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는 범퍼스티커는 1960년대 후반에 반문화운동이 일어난 후에 생겨난 것으로, 모든 형태의 권위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는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강력한 하나의 권고이다. 이것은 신념상실을 촉구하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수많은 현장 목회자들이 피부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안수 교역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기들의 권위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무리들이 예수 님을 만나면서 가졌던 경험과는 반대로, 수많은 목사들은 "자신들을 권위 없는 자"로 경험하고 있다. "권위를 상실한 목회자"는 어느 설교집의 제목이기도하다(Craddock, 1979). 이것은 초기 청교도 설교자들이 교인들과 뉴잉글랜드 동네에서 보여주던 "엄청난 권위"와는 거리가 있다. 해리 스타우트(Harry Stout)는 식민 뉴잉글랜드의 설교와 종교문화의 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의 설교는 교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자 헌신한 유일의 권위의 음성이었다(1986: 19).

권위란 특정한 집단이나 기관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는 권리이다. 이것은 지도자가 실제로 가지고 있거나 또는 추종자들이 자기들의 지도자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 특성, 성격 및 전문성, 또는 이들의 결합에 근거하여 생겨난다.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집단의 사상과 행위들에 영향을 주거나, 지도하거나, 조정하거나 또는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사람들과 집단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여야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목사는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양 떼를 돌보며, 감독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평신도를 훈련하여 세우는 권위를 부여받는다. 교단에 따라 안수규범이 다르고 이에 대한 해석도 다르지만, 안수식은 권위부여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교회들은 안수를 통해서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목사들은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진정으로 자기는 어떠한 권위를 부여받은 것인가?

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한 분의 감리교회 감리사가 안수식에서 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 후 교회를 향하여 자기가 나에게 위임받은 목회 기능을 수행할 권위를 부여한다고 말씀하였다. 9년동안 나는 교회-학원 목회자로서 나의 최선을 다하여 성실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위임받은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동안에 나는 나의 권위에 대해서 다소간에 누구나 경험하는 도전을 받아왔다 : 절차들에 대한 가벼운 불일치. 나의 전임자는 나와 다르게 실행했다는 충고들, 설교 내용이나(특히) 찬송가 선택에 대한 흔히 있는 의문제기, 그리고 교육관 건축에 대한 초기의 반대, 가장 크면서도 가장 중요한 도전은 인종간의 정의 잇슈에서 왔다. 교인들은 나의 설교와 사회 참여 모두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도전 가운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교구 상급 지도자의 지원과 여러 해 동안 교인들과 사이에 맺어왔던 긍정적인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의 설교와 행동에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라도 나를 신뢰하고 돌보아 주었다. 그렇지만 나의 꽃은 장미에서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설교하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나의 권위는 심각하게 시련을 당하였다.

그 당시에 나의 권위에 치명적인 도전을 가한 두 번째 요인은 나의 내면서 온 것이었다. 물론 내가 교역하던 대학교 캠퍼스의 상황이 나의 내면의 문제를 유발한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나의 내면의 문제는 더 심각하게 나의 권위에 도전을 주었다. 학원 목회자로서 나는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그 이유는 내가 목회하는 학원의 인식론적 가정이 나의 권위의 궁극적 기초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증거하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을 배격하는 관점과의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에는 나와 함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나의 목회의 권위는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었고, 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대처하여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나는 실존적인 상황에서 바울 사도의 말씀 "내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안다."(고전 13:12)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 9년동안에 나는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한 사회적 논점들의 시험을 당하였다. 인종차별, 핵무장과 세계 평화, 테그놀러지의 변화, 부자와 빈자들 간의 갈등 등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한 기독교적 입장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받은 소명과 안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권위있는 대답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과연 나와 교회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영향력 있는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경험들이 내가 교회목회를 버리고 신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도록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 경험이 안수 교역에 대한 나의 관심과 소명을 결코 약화시키지도 않았다. 특별히 이 경험들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고, 만나고 교제하는 목사들이 부딪치는 권위의 문제에 예민한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목회의 지도력의 권위에 대한 질문은 결코 감소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어떤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삽화들은 목회자들이 직접 현실적으로 경험한 사례들인데 신중하게 검토해 보라.

·한 분의 여자 목사가 일 주일 내내 회의에서 회의로 약속에서 약속으로 계속 뛰어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거의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던 그녀가 드디어 거의 탈진한 상태로 "내가 무엇을 위해 이처럼 뛰어다니고 있는가?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무슨 중대한 일을 성취하였는가?"하고 자문하고 있다.

·교회행정을 맡고 있는 목사는 자기 교회가 지역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토론하는 에큐메니칼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그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만일 그 계획을 계속 추진한다면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조적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주제에 무엇을 한다고 야단인가?"

·지난 20년 동안 해마다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아 온 어느 교단은 교인 감소 때문에 파라노이드 증세에 빠져가고 있다. 그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뒤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예리하게 촉구하고 있다. 수 많은 지교회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런 교단의 위기 의식을 함께 느끼고 있다. 그들은 성장을 약속하는 프로그림이나 테크닉이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교단 지도자들에게 호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째서 그런 프로그램이냐?" 또는 "어쩐 목적으로" 등의 질문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4년된 젊은 목사가 여러 가지 어려운 목회문제에 부딛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제직회에서 발생한 갈등의 문제였다.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는 법들을 신학교에서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으며,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을 이러저러한 목회실제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드디어 미몽에서 깨어나 신학교육의 실패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다.

·오랫동안 성직자로 봉직해온 한 분의 천주교 신부는 좌절을 토로하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사용해 온 자기의 지도력 스타일에 자기 교인들이 점점 더 심하게 반항하고 있다고 아픔을 이야기한다. 여러 해 동안 평신도들은 성직자가 교회일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해 왔는데, 아니 기대해 왔는데, 어째서 이제 와서 자기의 결정에 그처럼 자주 반항하고 교회의 방향을 수정하라고 소리지르고 있는가? 자기 교회와 가까이에 있는 흑인 개신교회 목사도 한때 그처럼 유순하던 평신도들이 결정과정에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고 좌절을 토로하고 있다.

·갓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 한 사람은 목사와 교인들이 공동목회를 해야한다는 평등주의 신학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평신도들이 자기에게 지도와 지시를 기대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분노하기까지 했다. 평신도들은 그를 전문가로서 대우하려했으나 그는 단순히 능력을 배양시키는 자로 남기를 원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 한 분은 일대일 상담, 개인 완성의 설교, 그리고 슈퍼마켓식의 프로그램등으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성공하고 있다. 그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목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약간 풍자 섞인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교인들의 가려운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지 그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한 분의 여목사는 목회를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행정을 철저히 점검하고, 회의에 충실하게 참여하며, 필요한 가정을 열심히 심방한다. 그녀가 계획하고 인도하는 예배는 잘 계획하고 진행된다. 그런데 어째서 교인들이 그녀의 목회에 무언가 빠졌다고 불평하는지요? 교인들은 그녀의 목회에 영적인 깊이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 어떤 교인은 이런 말을 한다. "그녀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학생으로서 그리고 캠퍼스 지도자로서 대학교 4학년 학생이 안수교역의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면서, 진정으로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지도력의 은사를 최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인가 질문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결단을 하는데 주역인가 변두리인가?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진정으로 더 크게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잇지 않을까?" 그녀는 신학교에 가는 대신에 법과 대학에 진학하였다.

위의 사례들의 여러 가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풍자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하나 하나의 삽화들은 실제 목회현장에서 경험한 목사들의 경험이다. 더구나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 하나의 사례들은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문제들, 즉 끝이 없이 바쁜 목회자의 일정들, 교인들에게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가는 성직자들, 목적의식이 없이 수단만 붙들고 있는 목회들,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목회 현장의 사건들, 그리고 권위주의 적인 목회에 대한 저항 등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사례들은 전문가들에 대한 요구, 기독교 복음을 무비판적으로 문화에 혼합시키기, 경영은 잘하면서도 기독교적 진정성을 상실하기, 안수교역자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목회를 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혼란에 빠진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다.

요점은 많은 성직자들 -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들도 - 지도력의 권위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권위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낮은 사기, 쇠약하게 만드는 스트레스, 탈진, 그리고 최근에 상당한 메디아의 관심을 끌어모은 성직자들의 도덕적 실패와 같은 잇슈들도 권위에 대한 질문에 연관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삽화의 사건들과 비슷한 딜레마와 상황들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외기는 목회의 권위의 문제를 재고하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복음에 합당하고 20세기 말기의 교회와 교역에 합당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 권위에 대한 바른 관점을 발견하고 위에 소개한 상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권위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는 목사들을 도울 수 있게 권위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새로운 것일까? 위의 실례들은 이미 오랫동안 보아왔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는가? 어느 의미에서 그 대답은 예이다.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질문은 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있어 왔다. 시대마다 교회는 그 시대에 해당하는 권위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그 문제 자체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이 있지만, 그 시대마다 그 시대에 독특한 형태로 지도력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옛 찬송가의 가사대로 "새시대는 새 의무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 나름대로 독특하게 교회를 지도하는 목회의 지도력의 이해와 실천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목사의 권위와 지도력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

무엇이 현대에 많은 목사들이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지도하는데에 어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우리는 "희생자를 비난하는" 시험에 빠져서, 문제가 목회자들 자신 속에 있다고 지적할수도 있다. 물론 목사들 자신들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이 당면하고 있는 수 많은 어려움들은 여러해 동안 축적되어 온 광범위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그 그 근원이 있으며, 이것이 교회와 결과적으로 목사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왔다. 모든 복잡한 변화를 모두 자세히 검토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4가지로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에 의문제기, 교회 자체의 변두리화, 교회의 일을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함,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신도와의 공동목화에 대한 목사들의 강조이다.

신앙의 위기

권위자와 지도력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 첫번째 요인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역사성 또는 상대성에 대한 인식과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칭하는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신념이다. 하나님과 및 인간의 생활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이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캠퍼스 목회를 하던 나에게 도전해 온 문제였으며, 이것은 나만의 문제라고 믿지 않는다.

마크 코넬리 (Mark Connelly)의 희곡 푸른 초장(Green Pasture)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세상의 모습들을 조사한 후 "못을 박아 놓았던 모든 것은 헐렁하게 풀어져 있다!"고 보고했다. 과학의 성취들과 현대생활의 다원화는 모두 가브리엘의 관찰이 너무나도 사실임을 뼈져리게 깨닫게 만들고 있다. 과학과 다원화는 모두 "무시간적인 진리들이나 영원한 확실성을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으며, 정확한 교리나 불변하는 도덕적 원리들을 이야기 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대신에 우리도 우리의 신앙을 신화들과 은유들과 상징들을 사용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많은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신앙을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으며, 딘 켈리 (Dean Kelley, 1972)의 주장이 옳다면, 그것이 최근에 보수적인 교회들이 성장하는 비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보수주의 기독교인들도 현대주의의 도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기들의 신앙의 내용과 스타일을 좀더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유연하게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보수적이든 자유적이던 간에 우리 인생 경험을 끊임없이 인생이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사건이요, 그런 다양한 가능성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으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도 아주 다르게 해석 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가 기독교 적인 시각 또는 적어도 유대적 기독교적 시각의 가정들을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신앙에 대한 도전을 무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들이 양분되어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구분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정들과 주장들-예를들면, 상업이나 정치적 가정들과 주장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부여하는 주장들과 구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파편화되고 분열된 방법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쟝 폴 싸르트르(1956)의 함축성 있는 언어인 "나쁜 신앙"이 암시하는 바의 억지와 자기기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진실을 자기 자신에게서 숨길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 여행의 용이함, 거주지 이동성, 그리고 고도의 다양한 문화사회의 성장등은 우리의 인생을 그처럼 산뜻하게 구획지어 살아가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또 다른 전기적 사건들을 예로 들고 싶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것이 지나간 오랜 시대를 반영해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미국의 남부지역에서 자라났다, 나는 비록 그 지역 내부와 외부에 살고있는 다른 사람들이 남부식의 생활방식(좀 완곡하게 말해서 정당한 인종분리주의)의 진실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의 회심-(나는 그런 말로 밖에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다)-은 15세에 일어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남부를 떠나서 국가적 행사인 청년 컨퍼런스에 참석했는데 이 컨퍼런스는 인종에 차별을 두지 않았었다. 내가 컨퍼런스에서 돌아와 아침예배시에 그 컨퍼런스의 경험을 보고 하려고 했을때 나는 당황하게 되었다 : 감히 인종 차별에 대한 나의 회심을 이야기 하고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인종의 신은 죽었다는 사실을 선언할 것인지, 또는 그 경험을 용케 숨기고 안전한 부분만 보고할 것인지 곤경에 처한 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는 첫번째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을 젊은이들의 잘못된 이상주의로 치부하고, 다음에는 젊은이들을 그러한 파괴적인 행사에 참석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만들었다.

오늘날 나의 교회가 과거에 했던 것처럼, 그러한 경험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소수파에 속하는 종교 전통과 경험이 다른 문화들을 배울 수 있다. 집에 돌아와서 자녀들이 문선명파에 빠지거나 하리 크리슈나에 빠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기의 이웃이 이슬람교도이거나 불교도일 수도 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뉴에이지 강신술사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상업, 의약, 국제 사건 또는 자기개인의 생활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도덕적 문제가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흑인 문제, 여성학자 또는 제3세계 비평가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신념과 가정들에 도전을 받을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과 경험들을 무시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이런 것들은 자기가 이제까지 확신을 가져 왔던 절대적이요, 영원한 진리들과 도덕적 원리들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일 수 있다. 남부인의 생활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10대에 내가 당면했던 딜레마는 대략 40년후에 우리가 당면한 도전에 비교해서 약한 것 같다.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도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뿌리를 흔드는 도전이며, 이것은 목사만 아니라 평신도도 꼭 같이 당하고 있다. 많은 평신도들은 가공하지 않은 원단과 같이 통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을 이제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백화점에서 여러가지 다른 생산품가운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고르듯이 전통의 다양한 단편들 가운데서 자기 나름대로 선택하여 받아 들이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 (예, 리오타드 Lyotard,1984)은 이러한 현상을 "위대한 이야기들의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다. 캐나다 사회학자 레지날드 비비(Reginald Bibby, 1987:83)는 이것을 더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옛신들은 버려진 것도 아니요 바꾸어 진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들은 조각들로 깨어져서, 조각난 형태로 종교적 소비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그러한 풍조하에서 목사들은 어떻게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지도 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세 사람의 심판에 대한 해묵은 야구이야기가 있다. 볼과 스트라이크를 어떻게 구별하냐고 물었을 때 첫번째 심판은 "나는 볼은 볼이라고 부르고 스트라이크는 스트라이크로 있는 그대로 부릅니다"하고 대답했고, 두번째 심판은 "나는 볼로 보이는 것은 볼이라고 부르고 스트라이크로 보이는 것은 스트라이크라고 부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세번째 심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선언하기 전까지는 볼도 아니고 스트라이크도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뜻 깊은 인식론상의 논쟁이 요약되어 있는 반면 (뒤에 다시 한번 이 점을 논하겠음) 나는 여기서 단순히 다음과 같은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수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 구조의 절대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그것은 당연히 볼이기 때문에 볼이라고"말하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같이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나머지 두사람의 심판의 이야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이 양자는 모두 애매하게든지 아니면 담대히 고백적인 입장에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하면서도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쉽게 넘길 수 없는 위험과 취약점을 가진다. 이것은 프레드 크래閺(Fred Craddock)이 설교자의 디테마를 기술하면서 인식한 다음의 말에서 그 깊이를 볼 수 있다:

[설교자] 자신의 신앙이-결코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서-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이 설교자를 설교에 부적격 한 자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설교자가 실제로 느끼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신앙이 전체 교인들을 불구로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해서 절름발이가 되었을때, 그것을 교인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한다. 그것을 자기에 대한 전통적인 기대와 자신에게 솔직해야 된다는 사실과의 사이에 뼈아픈 갈등을 일으키면서, 이 갈등은 우리시대에 너무 극적으로 고조되어서 교역자들의 설교를 더 이상 못하게 만들거나 설교하기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다. (1971 : 14)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는 상황

역사성과 상대성은 제 1차적으로 문화적 수준, 즉 의식과 사고의 수준에서 목사의 권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권위의 위기에 기여하는 교회의 사회적 위치를 중심에서 변두리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앞서 삽화에서 언급한 젊은 대학생이 안수교역을 포기하고 법과대학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그 이유로 특별히 오늘날 주요 (주류) 개신교 교단들 가운데 널리 퍼져있는 인식, 즉 오늘의 교회는 우리 사화의 변두리로 밀려났고 목사의 역할은 감소되고 있다는 인식을 이야기 한다. 이러한 인식이 진실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것을 안수교역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지도력의 실천에 대하여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인식은 광범위한 세속화 과정의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세속화에 따르면, 교회는 다른 사회구조를 위하여 규범적인 기대를 처방하는 상당한 권위를 가진 중심적인 구조로부터 밀려나 변두리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누가 종교적 기본원리를 가지거나 또는 어떤 기관을 신성한 근거에서 설립한다고해도 우리들 대부분은 중세에 절정을 이루었던 기독교 기관과 같이 중요한 사회기관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교육적 기관들과 여가시설, 심지어 가족기관과 같은 것도 점차적으로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자유로운 기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 기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합당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를들면,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는 것, 정치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 다른 기관의 상황에서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개인들에게 가르치는 것, 의미있는 필요에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하는 등 특별한 경우 - 정치적인 모임, 현충일, 또는 독립기념일 등 - 이외에는 궁극적이요 신성한 목적을 별로 찾아 볼 수 없으며, 모두가 자체의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기관들의 지도자들을 현대과학과 테크놀러지를 통하여 저기들의 목적달성을 위한 기능적으로 합리적인 수단들을 찾는다. 쟈크 엘룰(Jacgues Ellul, 1964)은 이러한 현상을 "테크닉"의 승리-"한가지 최상의 방법"찾기라고 불렀다.

이제 교회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다양한 기관들 중에 한가지 특수한 기능을 가진 기관에 불과하며, 사회의 다른 분야에 합당한 행동을 처방하거나 명할 수 있는 권위(적법)를 상실하게 되었다. 기껏해야 교회 지도자들은 도덕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설득시키는 아주 간접적인 방법으로 결정과 실천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가지 중요한 예외는 가족으로, 교회는 아직도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가치와 규범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변하고 있으며, 가족들은 점차 변하는 성역할과 여성인력의 대거 산업사회 속으로 유입되는 등의 다른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재형성되고 있다. 사회학자 토마스 루크만 (Thomas Luckmann)의 범주를 사용한다면 (1967), 이제 주요 경제와 정치 구조에 의하여 지배받는 공공의 영역과 개인들이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가족, 다양한 자원단체,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여가 활동등으로 구성된 사적영역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는 사적 영역의 한 부분에 귀속되며, 그것도 사회의 중심보다는 변두리에 있다.

목사는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이동하는 변화에 잡혀 있다. 아직도 대중들은 여러 가지 여론조사에서 보는대로 목사를 상당히 존중하지만, 목사의 제 1차적인 역할은 개인들의 사적인 삶의 문제들을 돕는 것이라는 신념들이 점점 널리 퍼져가고 있다. "복음에나 전념하고, 정치에 손대지 말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는 목사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공공의 잇슈들은 교회가 관여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제2차적인 과제요, 교회의 제 1차적인 과제는 아니라는 견해가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교인들의 공적인 생활-예를들면,직장 세계에서의 논점들-은 그들의 사적인 경험에서 점차 구별되고 소원해지고 있으며, 매우 복잡해지고 특수화되고 있다. 이것은 공적인 잇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이 직장에서나 또는 공적인 정책의 문제에서 일어나는 윤리적인 잇슈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목사들은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사회학자 이반 밸러 (Ivan Vallier,1968:453)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목사들은 실천적인 문제의 해결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 지식체계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목사들의 지식은 규범적이요 닫힌 지식이요, 과학적이요 열려진 지식이 아니다. 세속의 전문가들은 처방을 내리는데 목사들은 해석을 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 사건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건에 의미를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현상은 결코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논술하겠다. 목사가 공공분야에서 생겨나는 잇슈들을 이해하고 신앙의 관점에서 그러한 잇슈들을 도덕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히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에 속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에 있어 어려움은 오히려 수 많은 목사들에게 변두리적 존재감을 더해주며, 결과적으로 자기들의 지도력의 권위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지원제

목사들의 자기권위의식에 영향을 주는 세 번째 요인은 미국 종교 생활의 자유지원제이다. 이 제도는 내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정교분리에 대응하는 미국식 방법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 교회들과 회당들은 특별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자유롭게 자기들의 종교신앙을 함께 나누며,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일한다. 자발적으로 모인 집단도 다른 모든 집단들이 즐겨하지 아니하는 어떤 특별한 법적 특권이나 지원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에 교단주의들과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구조들을 생겨나게 했으며, 모든 교단을 다원구조가운데 하나로 머물게 만들었다.

종교적인 자유지원제는 목사들의 권위문제를 포함하여 미국인들의 수 많은 생활 분야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왔다. 이것은 시드니 미드 (Sidney Mead, 1956)와 제임스 구스타프슨(James Gustafson,1963)에 의해서 자세히 논의 되었다, 미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역사 초기에, 자유지원제 원칙은 지역주의와 개교회주의를 특히 강화 시켰으며, 정교분리 원칙이 제공했던 목사직의 권위를 대폭 감소 시켰다. 자유지원제도는 그 목적 때문에, 설득과 정치, 영향력의 과시 (특히 영혼 구원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들의 권위의 가장 중요한 근본으로서 개인적인 경건에 의지하려는 목사들의 욕망을 증가시켰다. 더 나아가서, 자유지원제도의 지역주의적, 개교회주의적 성격은 목사들이 어떤 충격으로부터 보호를 받거나 법정 소송을 준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교단지도자의 도움 없이 자기 교회 평신도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해결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적어도 미국 역사 초기에는 그러했다. 미드(217)는 불란서 철학자 마이클 쿨람-쟝 드 크레브 꾀르(Michael Gullaum-Jean de Crevecoeur) 가 미국농부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언급한 사실을 인용하였다, "목사는 고용인 이상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가 지기일을 충실히 하면 약정된 봉급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봉급을 받지 못합니다. 설교를 하지 않으면 수년동안 교회는 아무것도 목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평신도주의와 영향력에 대한 강조 등, 종교에 대한 이런 자유지원제적 접근의 여러 성격들의 결합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다시 19세기 중엽에 목사들의 전문화 의식에 기여했다. 이 시대에 전문화 직종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에 참여함으로써 목사들은 이미 허용되고 있는 자유지원제보다 더 많이 자기들의 환경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그 이유는 지역주위, 개교회주의, 그리고 평신도주의 가능성들에 대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신학교육을 더 실천적으로 하도록 만들었다. 그 이유는 교회를 지도하는데에 더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목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스타프슨은 미드의 역사적인 분석을 최근의 사실까지 연장시켰다. 그는 특별히 자유지원제와 그 결과로 생겨난 교단중심주의가 목사들간에 현재와 장래의 교인들의 지원을 받으려는 경쟁을 유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평신도는 신앙에서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목사들은 자기교회를 위하여 그 시장에서 정당한 할당을 얻어내는 방법을 찾고 있다"(Gustafson 1963:733). 구스타프슨이 이런 글을 쓴 이후에, 교회성장운동이 미국 종교 무대에 급속히 등장하였다, 목사들은 실천적인 방법으로 매주시장(수요보다 공급이 많은 시장)에서 더 많은 할당을 얻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신학적 근거에서 보다는 교인의 감소 또는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욕망에서 기인되고 있다, 미드와 같이 구스타프슨도 평신도의 인기와 지지를 얻기 위하여 기능적이거나 도구적인 목회를 선호하는 현상을 창출하는 자유지원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과 권능을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목사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목사들은 실천적인 목회에 참여하여 자기 지역사회나 교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심리치료자, 가족치료자, 청소년 레크레이션지도자, 지교회의 다양한 기관 행정지도자가 되고자 하고 있다(732).

자유지원제와 평신도 지원의 중요성은 또한 목사들에게 평신도의 생활을 지배하는 세속활동에 까지 종교활동을 확장시키게 만들고 있다. 구스타프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목사의 전통적인 기능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생각될 때, 목사들은 평신도들과 접촉할 수 있고, 문화생활의 중요한 흐름에 따라 갈 수 있도록 자신들을 재적응하고 있다"(733).

이 모든 것은 모든 목사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활동들 때문에 너무 바빠서 자기들의 진정한 책임소재를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들은 평신도에게나 자기교단에 충실할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하나님께 충실해야 한다. 목사들은 가끔 내가 앞서 언급한 삽화의 어느 목사처럼, 평신도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그들의 모든 가려운 데를 긁어 주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래서 목사들은 헌금을 잘하는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하고, 공격적인 행위를 피하며, 교회의 전반적인 목표를 향해 가기 보다는 기술적인 영향력 있는 일을 하는 데에 힘쓰며, 바쁜 일정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하고 있다는 소명감을 상실해 버린다.

미드와 구스타프슨이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자유지원제는 미국 역사 초기부터 미국 교회들과 함께 해왔다. 이것은 기관의 조직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연의 가치체계가 되어 왔다. 권위와 지도력 잇슈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새로운 것이 현금의 상황에서 더 있을까? 물론 있다고 본다. 내가 믿기로는, 세계 제2차대전 이후 베이비품 세대 교인들이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유지원제 가치의 강화가 그 하나일 것이다,

여러 분석가들이 새로운 자유지원제 가치들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여론조사가 다니엘 양켈로비치 (Daniel Yankelovich,1981) 는 이 가치들을 청교도에 영향을 받은 자기부정의 윤리에 대조가 되는 자기 완성의 윤리라고 지목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국인의 80%정도가 자기완성의 윤리를 추고하고 있다고 추상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심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세대마다 35%이하라고 보았다. 로버트 벨라 (Robert Bellah)와 그의 동료들은 공저 마음의 습관 (Habits of the heart, 1985)에서 이러한 새로운 문화를 개인주의의 두형태, 즉 공리주의와 표현주의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미국 문화속에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공리주의적 사고)고 보았다. 공리주의적 입장은 경제와 직업세계와 같은 동적 세계를 지배하여 왔으며, 표현주의적 가치는 최근에 와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우리의 사적인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이 양자는 함께 자율적인 개인주의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이것은 개개인을 자기가 실행할 역할과 충성할 위탁을 선택할 자유성이 있다고 믿으며, 이것은 어떤 높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판단 할 때 효과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이계속하여 주장하고 있다.

문화자체의 이해에 따르면, 우리 문화의 표현적 성격은 개인의 자유와 성취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의 천재적 성격은 결혼과 직장에서 정치와 종교적 참여에 이르기 까지 개인의 모든 헌신이 도덕적인 당위성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기의 행복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7)

미국의 주요 기독교 전통들의 분석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들을 반영하면서, 웨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와 월리암 맥키니 9William McKinney)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문화와 삶의 스타일의 출현을 "새로운 자유지원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 선택은 종교적 대안들 가운데 하나를 택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종교자체를 하나의 선택으로 보며, 자기의 추구를 위해서 다양한 전통들을 선택적으로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급진적으로 개인주의적 종교는 하나의 자율적인 신자를 상정하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영적인 순례를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권위, 훈련, 실천, 그리고 공동생활같은 문제들은 낮 설은 것으로 여기거나 적어도 부차적으로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일을 추구할 것이냐 하는 개인의 선택이다. 개인적인 헌신을 할 것이냐 공동체에 헌신할 것이냐 하는 것도 자기의 선택하기에 따라 부차적으로 생각한다(1987,40).

이 저자는 이러한 주제의 귀결은 "종교적 권위의 쇠퇴와 제도적 신앙에 대한 충성의 약화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권위와 이에 대한 존중의 전통적인 통로들 - 교황의 무오성과 성경무오설에서 지교회 목사, 제사장 또는 랍비의 영적인 역할에 이르기까지 -은 얼마동안 침식당해 왔으며, 이들 구조에 대한 언어적 직접적인 의문제기가 1960년대에 와서 격렬하게 높아졌다." 모든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는 시대 풍조하에서 목사의 권위가 도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평등주의와 공동목회

과거와 현재의 표현 모두에서 미국 종교의 개인주의적 자유지원적 가치와 더 넓은 문화가치는 목사의 권위와 그 행사에 영향을 미쳐온 네 번째 요인인 평등주의적 강조와 병행해서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형태이건 계층구조는 심각하게 의심을 받고 있다.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구원보다는 자기 실현이라고 정의하기로 한다), 어떤 제사장도, 설교자도, 또는 전문인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목사들과,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평등주의는 만인 제사장의 교리와 교역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다는 이해로 신학적인 정당성을 지원 받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교역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것이요, 성직자들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기독교역사 가운데서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두 교역자라는 강조와 교역은 목사에게 전적으로 귀속된 것이라는 강조가 시계추와 같이 진동을 계속 해왔다. 미국인 들의 신앙 생활은 전자의 방형으로 기울어져 왔다. 최선의 의미로 공동교역(shared ministry)은 목사와 평신도 간에는 기능적인 차이만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상호 보완하며 교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금에 와서 공동교역에 관한 강조는 개신교에서 뿐 아니라 로마 천주교에서도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제2바티칸 공의회는 교역이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쉽과 교역의 상호성을 강조하는 여성학자의 관점도 이런 문제를 강화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다. 여성학자들은 계층구조와 지배에 근거를 둔 권위 구조에 저항했왔다. 공동목회에 대한 강조는 본서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더 나아가서, 평신도들을 종속 적으로 만드는 독재적인 교역 스타일을 조장하는 권위주의에는 정당하게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앞서 본 바 있는 삽화에서 로마 천주교회의 제사장과 흑인교회 목사와 같이 많은 목사들은 교회교역에 더 크게 기여하고 싶어하는 평신도들의 요구에 힘들고 괴롭지만 적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 그들은 코네티컷트에 소재한 로마천주교회 교인들이 자기들과 공동교역을 거절하는 독재적인 신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례와 같이 분노한 평신도와 대면하여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질서에 있다. 교역에 있어서 목사와 평신도간에 서로 구별이 있으면서 상호보완적인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이 없이 공동교역을 무비판적으로 주장하면, 목사뿐아니라 평신도의 교역의 권위에도 엄청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어떤 평신도들은 누구나 교역에 대해서 실제로 심각하게 생각이 들면 신학교 입학하고 안수를 받으면 누구든지 전통적으로 목사가 담당해오던 교역을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서 제 2 의 기회로 안수교역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가정을 반영하고 있다. 공동목회에 대한 혼란은 목사들에게 약간 다른 면에서 나타난다. 어떤 목사들은 평신도와의

공동목회를 강조할 때, 자기들만의 독특한 어떤 전문성이 있을 것인가 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에버리 델레스 (Avery Dulls)는 로마 천주교회에서 교역의 관점을 선호하고 전통적인 성직자의 교역에 대한 반항이 "현재 교회가 당하고 있는 소명의 위기의 근원 가운데 하나"이라고 믿고 있다 (1978,174).

공동 교역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자기들의 역할은 협력자라고 생각하는 다른 목사들은 앞서 본 사례에서와 같이 평신도들이 계속해서 전문목회를 요구할 때에 좌절을 경험한다. 데이빗 슐러(David Schuller)와 그의 동료들이 행한 미국과 캐나다의 목사와 평신도에 대한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이 최근에 크게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공동교역을 하라고 부름받은 자라고 보지 않고 제 1차적으로 구경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1975;73).

사회학자 쉐릴 클라인만(Sherryl Kleinman,1984)은 미국 개신교 주요 교단 신학교의 학생들이 강력한 평등주의 행동 교역적 접근을 배운 후에 필드웍과 학생 전도사로 교회에 나갈 때 자기들을 권위자로 취급하는 평신도들과 만나면서 놀라고 실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제 1차적으로 "진정성 있는 인간이 되는 것"으로 보고 평신도보다 무언가를 더 아는 전문가나 권위자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평신도들을 자기들의 목사에게서 이보다 더한 것을 찾는다.

클라이만은 학생들의 권위에 대한 태도와 안수교역자(목사)에 대한 태도를 목사의 역할의 몰 개성화, 특히 특정한 지식과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주장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나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면, 목사나 평신도가 교회생활에서 전문성과 비평적 사고의 필요성을 경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해석할 때, 몰개성화는 중요한 실수이다. 목사가 이런 자원들에 대해서 독점적인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되지만, 평신도들은 목사가 자기의 교역에서 특수한 지식과 전문성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 실상 목사들이 받은 교육은 이것을 준비시켰다고 할 수 있으며, 목사들은 이점에서 자기의 전문성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 지적한대로 나는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하는 공동교역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목사의 권위 행사는 그러한 공동교역을 방해하지 않게 해야 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요점은 평등주의와 공동목회에 대한 강조가 교회에서 목사의 권위와 지도력에 대한 혼란을 야기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강조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신앙의 역사화, 종교의 사회적 현장의 변화, 그리고 자유지원제와 함께 교회교역에서 목사의 지도력에 대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하나의 요인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식민지 뉴 잉글랜드에서 가지고 있던 목사의 권위적인 입지를 다시 회복할 수 없을 것이며, 사실 우리들 대부분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권위를 의문시하는 여러 가지 잇슈들과 직면한 목사들은 자기들의 귄위를 주장 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내어서 사려 깊은 지도자로서 권위를 행사하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제 2장 권위의 정의

교회는 돌 위에 새긴 질서와 안전과 영원의 언약이다. 그러나 정치학에서도 친밀한 관계의 삶에서도 그런 것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 하는 것은 환상일까? -리챠드 세네르

교회에 대한 세네트의 묘사는 내가 앞장에서 이야기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한때 질서와 안정과 영구성의 성채로 보이던 것이-그래서 교회를 지도하던 목사의 권위를 위한 견고한 기초로 보이던 것이-많은 사람들에게 그 신성성과 절대성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세네트의 관찰은 독일의 시인 하이네 (Heinlich Heine)의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그는 친구와 함께 프랑스에 있는 아미엔즈의 대성당 앞에서 있었다. "하인리히, 어째서 이제는 이처럼 엄청난 건축물을 더 이상 짓지 못하는 거지요?"하고 친구가 묻자 하이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나의 친구여,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네, 우리 현대인들은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이야, 저런 고딕 시대의 대성당을 지으려면 견해보다 더한 것이 꼭 필요하다네."①

권위에 미치는 영향력이 무엇일까? 세네트가 질문한대로, 건축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환상일까? 질서와 안전과 의미를 제공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든지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구조들까지라도, 유지할 수 없는 것일까? 세네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요 나도 이에 동감한다. 대성당들을 짓도록 영감을 불어넣은 확신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지라도-우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역사화에 물들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의 가능성들이나 무오한 교회나 무오한 성경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나는 권위와 권위들에 대한 우리의 필요가 환상이거나 감소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범스티커가 우리에게 권고하듯이 우리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우리는 권위가 권위주의적이 되고 억압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두려워 할 수 있다 ;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의 가장 깊은 진리와 규범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하지 않고는 어떠한 공동체 안에서도오랜동안 함께 살아갈 수 없다;또한 명료한 음성과 해석과 실천 능력이 있는 지도자들의 지도력이 없이 공동체는 계속 유지될 수 없다. 어떠한 공동체도 어떤 형태로도 공동체를 생존하게 하고 그 공동체의 목표들을 달성케 할 수 있는 지도력이 없이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권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공동체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적은 독재이다. 그것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순종을 강요한다. 공동체의 적은 권위를 오용한 권위주의요, 개인 각자가 자기에게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무정부주의가 공동체의 적이다.

인간 공동체에 진리인 것은 동시에 교회에서도 진리이다.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을 수행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한 가장 깊은 확신의 권위에 교인들이 기꺼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런 핵심적인 신조들과 가치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언어로 선포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갈등들은 조정되어야 한다. 교회와 다른 공동체들과 사이의 경계선들은 분명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교회 생활과 사역에 대한 지침은 확실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지도력을 의미하며, 지도력은 권위를 의미한다. 결정적인 질문은 권위가 있어야 하느냐 이든지 지도자들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권위인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지도자인가?이다

권위에 대한 하나의 관점

권위는 어렵고 복합적인 개념이다. 권위의 여러가지 의미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쟁들을 소개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② 오히려 이 책은 목사와 평신도 모두의 교역에 적용할 수 있게 권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개발하려는 시도이다. 본장에서 개발하는 권위에 대한 관점을 그 자체로서 소중하지만, 이 책의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 권위에 대한 개념들을 재정립하기 위한 기초로 사용하고자 한다.

권위와 힘(power)은 가끔 대조적인 개념이면서도 가끔 교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양자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힘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 힘은 그것을 사용함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느냐 그렇지 않으냐와는 상관이 없다. 한사람의 지도자가 그 힘을 사용함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사용할 때, 그 지도자는 폭력 또는 강압적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권위는 합법적인 힘이다. 집단에 속한 개인이 한 사람의 지도자의 지도를 따르거나 그 집단의 규약의 정하는 명령에 따르거나 또는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할 때에 그들은 집단 생활에 방향을 지도하는 지도자, 규약, 또는 성경의 권위-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명령이 그 집단의 핵심 가치, 확신, 그리고 목적과 일치 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문화적 대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집단에 속한 개인은 세금을 내거나 교통법규를 단속하는 경찰관에게 순종해야 하는 경우와 같이 맹종의 요구에 항상 기쁘게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승락해야만 할 때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요구하는 자의 적법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또는 그 요구의 적법성을 인정하기 때문에)그리고 순종하는 것이 전체의 선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복종한다.

이것을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야기한다면,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교회나 또는 교회 기관인 교회의 목적과 기본적인 신앙과 일치하며 거기에 기여한다고 인정하여 그것을 적법한것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목사나 평신도 지도자가 적법하게 힘을 행사할때 - 즉 권위를 가지고 힘을 행사할 때 - 그는 옳다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교회의 교인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도하고, 영향을 미치고, 조장하고, 또는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계층적이요 상의하달방식이요 권위주의적인 형태로 권위를 행사하며 교인들은 종속적이요 복종적이 되게 할 수도 있다. 또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은사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힘을 사용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교역의 권위를 주장하게 지도할 수 있다. 어느 경우이든 집단이 힘을 행사하는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동안에 지도자는 권위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적법성에 대한 강조는 권위의 관계적 성격을 뒤받침 한다. 권위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집단이나 기관의 인정함 없이 어느 개인이 개인 스스로 소유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어느 개인은 상당한 카리스마나 또는 다른 필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목사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깊이 있는 음색을 가지고 설교할 때에 상당한 매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특성들이 그의 영향력을 높이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힘의 행사가 적법하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런 특성들은 권위로 해석되지 않는다. 권위는 성문화된 규정에 정하는 바에 따라 적법하게 행사하는 공식적인 인식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적법성을 받아들임으로 보여 준 바와 같이 약간 더 비공식적인 인식일 수도 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안수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거나 감독의 임명을 받는 것은 적법성을 부여받는 공식적 또는 구조화된 방식들이다. 지도자로서의 적법성은 좀더 비공식적으로 교회나 공동체의 부언의 동의에 기초할 수도 있다. 즉 목사는 자기의 신앙적 진정성이나 증명된 능력, 또는 이 양자 모두 때문에 지도할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진정성과 능력은 안수와 청빙의 기초라고 가정할 수 있으나, 교회나 공동체가 지도할 완전한 적법성을 목사에게 부여하기 전에는 목사는 진정성과 능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 안수받은 목사들은 가끔 이 순간을 제 2의 안수로 경험한다: 이것은 온 교인이 그 목사의 적법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본장의 뒷부분에서 그리고 다음장에서 이런 잇슈들을 상술하고자 한다. 요점은 권위가 하나의 관계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도할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집단이나 공동체와 분리해서 권위를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 권위

교회가 어째서 권위를 부여 받는가를 논하기 전에 한가지 더 일반적인 견해를 이야기하고 싶다. 권위에 대하여 논의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정치적 법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행위의 통제를 제 1차적으로 강조한다. 목사와 다른 전문가들도 때때로 행위를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은 견해들과 신념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을 갱신하고, 사람들의 현실을 정의하는 방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의사들과의 토론에서 폴 스타(Paul Starr)는 이것을 사회적 권위에 대조해서 문화적 권위라고 불렀다.

목사는 설교하거나 가르치거나 또는 상담할 때에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싶어하고 행동에 영향을 주고 통제하는 데에 관심을 덜 갖는다.

목사는 개인들이나 집단의 그들의 행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나, 목사의 제 1차적인 의도는 다른 사람의 의식을 갱신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그 교회가 그 목사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힘, 즉 적법한 힘의 사용이라고 할 것이다. 참으로 교회와 같은 지원 집단에서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의 행사하는 권위의 대부분은 그 성격상 사회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이다.

문화적 사회적 권위는 흔히 결합되어 나타난다. 교인들에게 교회의 선교를 위해 헌금으로 지원하라고 요구(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는 그들이 왜 선교를 지원해야 하는지 하는 인식을 갱신하는 설교를 먼저 한 후에(문화적 권위의 사용), 해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의 해석(인식갱신을 위한)없이도 목사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교인들이 그 중요성을 이해한다면 더 열심히 헌금할 것이요, 더 많이 헌금할 것이다.

대체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문화적 권위 행사는 사회적 권위 행사에 앞선다. 의사들도 목사들도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국가의 강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자원 단체는 목사가 교육을 통해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한 때 목사도 수찬 정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는 경제적인 복종의 수단으로 추방-아미쉬는 이것을 격리라고 불렀다-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수단은 아직까지도 원칙상으로는 가지고 있으나 이제 그런 수단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의 지옥불을 믿거나 지옥을 있는 그대로 믿었던 때에 그런 수단들이 가졌던 무기를 지금도 가지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③

목사는 복종을 강제하는 권한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총회의 결의나 법으로 강제하는 권한이 규제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천주교회 감독들은 교리가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감독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강제적인 권한이 없다. 실제로 1988년 선거에서 주교들은 임신 중절을 반대하면서 임신중절을 찬성하는 당이나 후보자에게 투표해서는 안된다고 천주교인들에게 가르친다면, 교회의 세금공제 혜택을 철폐할 수 있다는 법정 소송을 제기 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④

끝으로 문화적인 권위는 과거의 지성적인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문화적 목적물들 가운데 존재할 수 있다. 그런 권위는 성경과 같은 신성한 텍스트 속에나, 사전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공인된 참고서나, 또는 미국헌법과 같은 창립 문서등에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현실을 해석하거나 애매하거나 갈등이 있는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에 협의할 수 있는 권위들이다. 이것은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즉 목사는 지도력을 행사하는 근거로서 성경을 내세울 수 있다.

요약하면 목사의 역할은 목사가 행위에 영향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데서 사회적 권위를 포함하지만, 목사의 역할의 대부분은 현실을 바르게 정의하고, 의미와 가치를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는 데에서 문화적 권위에 속한다. 앞장에서 나는 목사가 동료 세속 전문인들과 비교하여 약간 결함이 있다고 한 이반 밸러(Ivan Valler)의 판단을 인용하였다,"그는(목사는)해석하는데 비해서 세속의 전문인 동료들은 처방한다 ; 그는 그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건에 의미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우리가 사회적 권위와 문화적 권위 사이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처방하는 것 보다 해석하는 것이 결함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행동을 처방하거나 또는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종류의 권위를 이야기 하는 것뿐이요 따라서 우리는 이 양자가 모두 중요한 권위라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권위의 기초

어째서 하나의 집단은 지도자나 그룹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인가? 그들의 신뢰를 보증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들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잘 알려진 중요한 하나의 대답은 세가지 형태의 권위에 대한 막스 웨버(Max Weber,1968:212-271)의 이론이다. 권위는 전통적인 근거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 전통적 권위는 아주 오랜 전통의 신성성에 대한 공인된 믿음과 거기에 근거해서 행사되는 권위의 적법성에 근거한다(215). 또는 권위는 카리스마적 근거 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이 권위는 어떤 특정 개인의 뛰어난 신성성, 영웅적 삶과 행위, 또는 모범적인 성품과, 그 사람이 세우거나 인정한 규범적인 모범이나 질서에 대한 충성에 근거하는 권위이다(215) 마지막으로 권위는 합리적-법적 근거위에서 행사할 수 있다 ; 이 권위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제정한 규칙--권리의 정당성을 신뢰하는 믿음에 근거하는 권위이다(215). 웨버는 이런 묘사는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했다 ; 즉 위에 묘사한 것은 권위의 순수한 모습을 기술한 것이다. 현실에서 보면 이 형태들이 약간씩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어느 한 형태가 지배적으로 들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회를 포함하여 현대의 기관들 가운데서 각각의 권위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유서 깊은 전통에 근거한 권위가 있다 :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해 왔고, 그렇게 계속 행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어느 교회든지 보면 자기 교회의 전통을 지키는 자를 자처하는 비공식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반드시 있다. 또한 목사의 역할의 한 측면은 역사적으로 교회의 전통, 특히 성경적 전통의 보호자의 임무를 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비록 우리가 카리스마를 그의 성품과 동일시하여 그 의미를 평가절하지만, 카리스마는 아직도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근거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보통 강한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카리스마는 하나님이나 신성한 것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거나 새롭고 의미있는 미래를 구상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등의 신비한 매력에서부터 우러나온다. 히브리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모형이지만 동시에 히틀러도 독일의 신성한 과거 역사와 1000년 왕국의 비젼을 보여준 점에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중요한 모형이다.

웨버의 견해에 따르면 , 전통적인 권위도 그리고 카리스마적 권위도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법적 권위, 즉 이성이나 기술적인 능력, 그리고 법적인 재가에 근거하여 부여받은 권위가 제 1차적인 권이이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목사들을 포함하여 전문적인 권위는 대체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합리적-법적 근거에 기초한다.

우리는 권위를 부여하는 웨버의 세가지 근거들을 약간 다른 방법으로 바꾸어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이 목사의 권위를 이해하는 데 더 쉬울 것이다. 시작하면서 우리는 먼저 궁극적 기초와 부차적인 기초를 구분하여야 한다. 궁극적 기초들은 권위의 근거가 되는 기초 경험들과 확신들이다. 부차적 기초는 집단에서 적법하게 힘을 사용하는 자격을 규정하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다.

궁극적인 기초

웨버의 이론으로 돌아가서 권위를 부여하는 궁극적인 기초를 고찰하면서 시작해 봅시다. 수많은 해석가들( 예 Nisbet, 1966:251이하)이 지적한 바와같이, 웨버는 카리스마를 한 형태의 권위 이상으로 보았다. 그것은 웨버가 실제로 이것을 완전히 논술하지는 않았지만, 성스러운 것들과 그것과 사회와의 관계를 보는 웨버의 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카리스마는 한 사회나 집단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권위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는 힘의 한가지 표현이다.⑤ 신성의 힘인 카리스마는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알라, 도, 나치의 "피와 땅", 또는 미국식 생활방식등 어떠한 용어로 정의하든지 간에 그들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모든 사회기관과 권위의 개념들이 그뒤에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근본주위자들이 종종 글자를 영과 대치시켜 놓음으로써 이 사실을 잊어 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근거로서 성경의 개념이나 교회전통 뒤에 숨겨져 있다 그 신성불가침의 것은 명시적으로 -예를 들면 하나님이나 알라와 같이-있는 그대로 인식되고 명명될 수도 있으며, 또는 예를 들어 "미국식 방식"⑥과 같이 하나의 집단이나 기관의 문화를 특징지우는 핵심신념들과 가치들의 형태로 묵시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어느 누가 권위를 가지고 합법적으로 사용한 힘은 궁극적으로 신성불가침의 힘이나 또는 그 집단의 핵심 신념과 확신에서 도출된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하여 존 쉬츠(John Shutz)는 사도바울이 행사한 권위의 연구에서, 하는 것은 목사나 제사장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다.

이것은 신성불가침의 것을 해석하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이며 기능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든지 또는 좀 더 조심성있게 한 기관이나 그 목적에 대한 일련의 핵심가치들과 신념의 용어를 사용하든지 간에 신성부가침의 개념에 있어서 사회기관의 중요성을 지적해 준다. 이것이 하나의 특정한 집단 안에서의 권위의 궁극적기초이다. 지도자는 그 집단의 핵심 가치들과 신념들을 보호하고, 해석하고, 대변하며 , 그것들을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자로 신뢰를 받기 때문에 권위를 부여 받는다. 나는 이것이 모든 기관에 해당되는 사실이지만 교회와 교회가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에서의 권위(합법적인 힘)는 목사의 권위를 포함하여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확신에 특별히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가지 역사적인 경험들과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아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들과 그 확신위에 근거한 경험들은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행사나는 힘의 궁극적인 근원이요, 그 힘을 정의하는 특성이 된다. 그것들은 성경이나 전통과 같은 다른 권위들의 적법성의 궁극적 기초도 된다.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의 전통(들)에 권위를 부여하고, 권위자들이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근거하여 세워졌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로서 신성불가침에 대한 확신과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하나님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들을 식별할 수 있다는 확신들의 공유를 의미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자명한 것이며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성경의 무오성과 교회의 가르침의 무오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교회의 가르침의 직을 통해서 분명히 알려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의 가르침과 훈계는 권위적이다. 그들의 이러한 무오한 근원에서 분명하게 계시되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확실성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대한 불일치가 초대 교회부터 교회의 역사에 점철되어 왔지만, 오늘에 와서 그러한 불일치는 첨예되었다. 우리의 하나님 지식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의 역사화와 상대화가 점점 심해지면서 초래된 신앙의 위기를 이야기한 앞장의 논의를 회상해 보라. 이러한 깨달음은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이 자명한 것으로 믿어오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수많은 기본적인 신앙의 확실성들을 침식 시켰다. 우리는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에 근거하여 역사화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이 계속하여 권위로서 기능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의 무오함을 믿기 때문도 아니요, 역사적 경험들의 상대화를 피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적법성을 고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명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힘에 대한 믿을 수 있는 비젼의 근원으로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과 훈계들이 그들 자신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것을 분별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목사와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이 무오성을 주장하거나 무오한 성경이나 교회의 옷을 입었기 때문도 아니요, 교회가 그들에게 목사의 직을 위임했기 때문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힘과 목적을 믿을 수 있게 대변하고 해석하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그들을 이런 식으로 신뢰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떻게 적법성을 획득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에서 힘을 사용하는 부차적인 기초들에 우리를 인도한다,.

즉,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특히 목사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더 구체적인 이유를 고찰하게 우리를 인도한다.

권위의 부차적 기초들

수많은 부차적인 요인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종교지도자들이 권위에 역사적으로 기여해 왔다. 거기에는 제사장 계급의 일원으로서 계승, 독특한 신체적 또는 심리적 자격의 소유, 성스러운 전통에 대한 특별한 지식, 카리스마와 모범적인 성결, 또는 여러종류의 전문성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모두 하나씩 검토하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이미 그들 중 몇가지를 웨버의 이론을 이야기 하면서 소개하였다. , 오히려 , 본장에서의 토의는 현금의 종교지도자들의 역할에 적절한 두가지, 즉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이 두가지 기초들 중 어느 하나를 가지는 것은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 양자는 심각한 긴장 관계에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회학자 친구 한사람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랍비의 아들이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그는 까만 성직의 의복을 입는 랍비나 제사장을 만날때마다 뱃속 깊이에서의 경외감정이나 일어난다고 나에게 고백하였다. 이것을 그는 불합리라고 칭했다. 그에게 반응을 일으키게 만드는 의복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랍비인 자기 아버지에 대한 계속적인 존경의 한가지 형태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자기 아버지와 다른 성직자들이 대변하는 -그 아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에라도- 신성불가침의 힘에 대한 경외이다. 아버지가 자동차를 타고 시운전하면서 교회앞에 서있는 자기 가족의 제사장 앞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 차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자기 아내와 자녀들에게 설명하는 TV광고도 이 비슷한 경외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 제사장은 신성불가침의 상징이요, 그래서 그 TV광고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신성불가침을 신뢰를 요구한다.

어떤 목사들은 이러한 동일시를 유도하고 일부러 엄숙한 목소리와 다른 제스쳐를 사용하면서 자기의 거룩성을 상징적으로 보이려고 하지만, 많은 목사들은 그러한 동일시를 싫어하고 그러한 동일시가 종종 가져오는 경외를 달가와 하지 않는다. 평등주의를 강조하면서 , 어떤 목사들은 목사 까운 대신에 T셔츠를 입는다든지 전통적인 까만색을 밝은 색깔로 바꾸어서 자기들의 성직을 현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소년과 같이 보이고 싶어하기도 하고 소녀와 같이 보이고 싶어도 한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동일시를 피하기는 매우 어렵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목사는 이 사회에서 구조화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이다. 이것이 바로 목사가 가지는 권위 또는 합법적인 힘의 근원이다.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도록하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를 지도하는 권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교회의 확신에 긍극적으로 기초한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 있어서 도 마찬가지이지만 결론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신성한 힘을 실제로 구현하고 또는 그들은 핵심적인 신앙과 가치들을 성육신하고 있다는 신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현존의 일시적 또는 영구적 통로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권위자로 인정 받는다. -웨버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들은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다. 자기의 권위에 대하여 바울의 내세운 증거는 우리가 이미 본바와 같이 하나님이 부르심의 결과로 자기 에게 임한 영적인 힘에 대한 호소이다 요아킴와츠(joachim Wach 1944:34)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종교적 권위를 누리는 사람들은 신과 특별히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인정 받는다; 그러므로 이런 경험에 관계하는 모든 자가 제 1차적이요 간접적으로 그 경험에 관계된 모든자는 종교적 인간의 삶에서 제 2차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밖에 없다.

기독교전통에서 보면, 이런 형태의 종교적 권위에 적어도 두가지 주요 변형을 볼 수 있다 : 하나는 천주교의 변형(또는 제사장적 변행)이요, 다른 하나는 복음주의적(또는 경건주의적)변형이다. 이 두 형태는 실천에서 자주 합병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천주교적 변형을 설명하면서 어반 홈즈(Urban Homes)는 제사장들을 "성례적인 인격"데오토코스("하나님 - 나르는 자"),"비법전수자"라고 불렀다. 홈즈에 따르면 91978:67),"비법전수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에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말과 행동, 제사장의 현존 바로 그 자체를 통하여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적 변형이 더 크게 강조하는 제사장의 도덕적 성격이나 경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실상을 통해서 신성불가침을 나르는 자(hearer)로서 제사장의 신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홈즈는 전문적인 교역 모델에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 내가 믿기로도 그렇다 전문적인 교역 모델은 도구적 기술을 선호하여 교역자의 존재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16세기 트렌트 교부들이 세운 신학교들은 - 문제그대로 "오판"-신학생들을 세상적인 영향에서 보호하여 성례전의 직무를 위해 양육시켰다. 학문적 관심들과 목회기술들은 제사장의 직에 들어갈 수 있는 영성형성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에 있었다, 더 나아가서 독특한 성직자의 제복을 입고 독신을 유지하는 것은 신성불가침을 나르는자로서의 제사장의 독특성을 상징해왔다.

복음주의적 개신교도들 (19세기에 미국의 개신교도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속했다)은 천주교의 교역모델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성례전적 신학에 동의하지 않은 반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자기들의 목사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나 실천적인 목회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목사의 권위의 핵심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면적인 소명, 즉 성령의 은사가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으로 인도할 수 없다. 복음주의자들은 성직자의 성례전적 역할이나 대표자로서의 역할보다도 목사가 가진 인격적 소명 또는 내면적 부르심에 더큰 무게를 주었으며, 계속해서 주고 있다.

내면적인 부르심의 중심성은 18세기에 일어난 논쟁, 즉 길버트 테네트(Gilbet Tennet) 가 이끄는 대부흥운동의 지지자들과 필라델피아 노회의 반-부흥운동주의자들간의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반-부흥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바와 같이 목사후보생이 교역훈련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교역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부르심을 꼭 받아야만 하는가? 테네트의 아주 확고한 대답은 '중생하지 못한 목회의 위험"이라는 고전적인 설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설교에서 무엇보다도 그는 중생하지 못한 목사를 "자기도 수영할줄 모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사람"에 비교했다. "그렇게 하면 사도행전에서 보는대로 물에 빠질 것이요 바보와 같이 죽고 말 것이다..."(Smith,etal.1960:326)

교인들은 끊임없이 목사가 하나님과 가까웁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는 다음의 이야기에서 잘 볼 수 있을 것이다.91987)

대부분의 신자들은[목사를] 그의 의식집례자의 역할 가운데서만 보며 그의 인격을 미화시켜 이상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어느 여인은 자기 목사의 설교가 자기와 같이 평범하고 죄 있는 사람에게까지 적용될 수 있다고 놀라워 했다."어떻게 저분과 같이 저렇게 훌륭하신 분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의 특성들을 알 수 있을까? 나는 그 분이 우리같은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도 자기들과 같이 죄있는 인간이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사를 세상의 더러운 것들 보다 조금 위에 있는 자요, 평범한 사람들 보다 무언가 다른 사람으로 보고자 한다.(122)

그러한 관점은 근본주의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회에 속한 한분의 신자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나는 x박사9목사)에게 문제를 가지고는 결코 찾아가지 않습니다." 그녀는 목사를 비판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는 하나님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분이라는 칭찬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가 제사장직의 성례전적 성격에 있든지 또는 복음적 설교자의 인격적 거룩성에 있든지 간에 천주교적 관점과 복음주의적 관점을 모두 안수받은 목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믿는데에 동의하고 있다, 목사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통로요 도구라는 확신이 있다. 이것은 평신도가 그들의 지도자에게 부여하는 중요한 존중과 신뢰의 요인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기초하여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목사에게 평신도와 구별되는 어떤 특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점은 다음 장에서 좀더 자세히 논술할 것이다. 본장에서는 원리상으로 그 대답은 아니지만 가장 실천적으로는 예라는 사실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바울의 권위의 사용을 연구하면서 슈프(shüts)는 바울이 권위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바울이 약할 때에 바울에게 임하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능력과의 특별한 관계에 호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린도전서 1-2;고린도 후서 11-13장을 보라)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능력이 자기와 같은 지도자들만이 특별히 소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을 들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올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1세기 말에 와서 바울 이후의 교회들은 사도들의 영적 권위를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권위와 구별하기 시작했다. 4세기에 와서 교회는 모든 성직자들을 평신도들이 얻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자로 보았다. 평신도는 영성적으로 2급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장구한 성직자주의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영적 능력의 오용-인생 가운데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라는-은 목사의 권위의 하나의 중요한 부차적 기초이다.

전문성과 권위

목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부차적 기초는 전문성이다. 이것은 교역과 교회의 사명에 아주 중요한 자원으로서 지식과 기술을 목사가 가졌다고 믿는 것이다. 권위의 부차적인 기초로서 지식 또는 전문성은 특별히 웨버가 주장하는 세 번째 타인의 권위, 즉 합리적-법적 권위이며 이것은 현대 전문 직업의 특성이다.

전문성을 목사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의 초기에 사도전승의 순수성은 사도들의 후계자로 보았던 장로(후에 감독이라 불림)들에게 위임되었다. 그들의 책임에는 교회의 생활을 감독하며 돌보는 것도 있었다. 버나드 쿡(Bernard Cooke,1975:419)은 이것의 실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과정의 초기에는 신학교를 세우는 일 같은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교훈, 모범, 그리고 실습훈련을 통하여 교역의 비결이 전수되었다.

그래서 가장 엄격하고 가장 협의의 사도적 전승에 첨가하여, 설교, 예전집례 요리문답 구성, 그리고 공동체 조직등의 감독 전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직무의 숙달은 분명히 감독이 사람들 위에 영행력을 행사는 권위 형성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은 특히 지교회담임 성직자들에게 항상 기대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개혁교회전통에서 칼빈의 영향아래, 교역자의 학식이 강력히 강조되었다, 학자의 의복인 제네바 까운은 개혁교회 목사의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 전통은 뉴잉글랜드 청교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비록 뉴잉글랜드의 평신도들이 거의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대부분이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경해석에서 목사의 전문성을 존경했다. 목사들이야 말로 성경을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고 해석을 위해 주석,사전, 그리고 다른 책을 접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은 목사의 권위에 중요한 근원으로 평가되었다(shout1987:32).청교도 목사들은 또한 구원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남녀와 상담하면서 목회적 분별력을 보여 주도록 기대받고 있었다( Halifield,1983:81-82)교인들의 영원한 운명은 거기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목사들이 분별과 상담에서 정확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했다.

전문성은 교회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성직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기초의 한 부분이 되어 왔지만, 19세기 중엽에와서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그랬다. 이 때는 많은 사람이 전문직에 대한 현대적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이다.(Bledstein,1976;Larson,1977;Russoll,1980 등을 보라)이전에 전문직은 -특리법관,의사그리고 목사 -중요한 신분적 특권으로 생각되어 왔다. 전문 직업인들은 계층 질서가 분명했던 사회에서 자기들의 교양과 교육으로 특권을 누렸으며, 자기들네간의 직업집단을 구성하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전원적인 농촌사회가 도시의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과거의 "신분"을 의미하면서 전문직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새로이 생겨나는 전문직종들과 함께 전문인들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지식과 봉사에 대한 전문적인 필요에 대응하기 위하여 더 구체적으로 정의되고 직업에 따라 집단화 되었다. 블레드 사타인의 주장대로 (1976:x),"가장 분명하게 중류 계층의 사람들이 전문인들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문지식과 봉사로 사회에 기여하여 자기들의 세상적인 자위를 향상하며, 직업사회에서 자기 위치의 상승을 기대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현대 과학과 케트놀러지의 등장은 상당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새로 생겨난 전문인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실천의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이론은 중요한 인간문제들을 다루는 기술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현존하는 학교들을 개선하고, 새로운 학교들을 설립하여, 새로운 전문인들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대학교들과 전문학교들의 성장에 큰 힘이 되었다. 상당수의 신학교들이 부분적으로 안수교역자의 전문화에 대한 새로운 강조의 결과로 세워졌다. 뉴잉글랜드의 조합교회 목회에 영향을 준 이러한 변화를 회고하면서 도날드 스콧트(Donald Scott,1978:145-155)는 그것을 "직무에서 직업"으로의 변화라고 불렀다.

1950년대까지 제도적인 용어로, 목사는 하나의 전문직업인이 되었으며, 응집력이 있고, 자의식이 강한 직업집단, 즉 일종의 기구로 조직되고 규정되어서, 평신도나 공공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누가 성직자 계급에 들어올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을 스스로 가지게 되었다... 목사이든 아니든 간에 성직자의 근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이제 전문직업인이 되었다. 그것이 성직자로서 자신의 정체감을 창조해주며 지탱해주고 자기의 역할을 규정해주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공동체 집단에 속하게 하며, 사회의 다른 집단과 자기들을 구별해 주는 것이 되었다.

권위의 근거로서 전문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특별히 높여주는 것은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을 규정해주는 것이 자기들의 전문성과 따라서 자기들의 권위를 향상시켜 준다는 스코트의 관찰이다.

전문인으로서 성격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현존의 종합적인 관리자요 규정자로서 목사의 집단적인 적법성을 신장시켰다. 전문 기술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독점은... 공인된 개업자의 집단에 합당하게 소속되었으며, 그들간의 의식과 훈련을 거쳐 (이미 의식과 훈련을 거친 자들이 규정하고 지배하는)평신도나 아마츄어가 아니라 "전문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시카고 대학교 총장 윌리암 레이니 하퍼(William Rainey Harper)와 같은 교육자들의 지도 아래, 교역자의 교육을 좀더 전문적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교역실천에 과학적인 근거를 세우려는 노력과 그 실천에 필요한 목회기술 훈련을 크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성서 비평의 발달, 과학적인 신학의 개발노력, 그리고 특히 실천신학 분야의 폭발적 발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신학교육에서 과학적으로 교역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일어난 결과들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 것이었다.

성직자의 권위의 근거로서 전문성은 계속하여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거의 주요 모든 교단들은 안수교역에 필요한 신학교육을 요구하거나 그에 준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흔히 상당한 교육을 받은 평신도들로부터 오는 교육받은 성직자에 대한 압력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교단들에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전문성의 종류들도 다양하다. 그것은 교단이 다 가지고 있는 안수교역의 지배적인 이미지 또는 모델에 때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기대하는 안수교역자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schulleretal,1980),장로교단과 개혁전통을 가진 성직자들의 대인 관계 능력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고, 남침례교회는 공격적인 전도를 강조하며, 정교회 신자들은 제사장의 예전 집례의 지도력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차이는 가치있는 전문성에 대한 교단적인 차이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필요한 전문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다르게 나타났다. 도날드 오스본9Ronald Osborn)의 미발표 논문을 인용하면서, 죠셉휴(Joaeph Hough)와 죤캅(John Cobb,1985)은 미국 역사에서 시대마다 지배적이었던 4가지 안수교역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대가(master)모델(주로 19세기 이전에)로 안수교역자들은 가장 교양있는 신사로 만능의 지식을 소유한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 대가모델 다음에는 부흥사 또는 설교자 모델이 나타났는데 (주로 19세기에), 이때에 목사들은 설득력있는 설교자가 될 뿐 아니라 전도의 심리학과 테크닉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건축자 (builder)모델로, 안수교역자들은 거대한 제도적인 교회를 개발하고 행정하며, 그 교회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했다. 이 모델은 20세기 초에 대도시에서 각광을 받았다. 마지막 모델은 경영자 모델로, 휴와 캅은 이 모델이 오늘날 요구하는 지배적인 안수교역의 이미지라고 믿었으며, 이것은 효과적으로 기관들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전문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휴와 캅은 이 모델에 특별히 비판적이었다. 이 모델은 결국 비신학적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들의 비평에 동의하며, 제 5장에서 성찰하는 지도자로서의 교역자상을 제시하면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지금으로서는 전문성이 욕사에서 권위를 부여하는 하나의 중요한 기초라는 사실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특정한 교역 모델이 무엇이든지간에, 교역 수향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추는 것은 교회가 자기의 자에게서 가치를 발견하고 권위자로 인식하는데에 하나의 근원이 된다.

요약하면, 성직자의 권위에 적어도 두가지 부차적인 기초들이 있다 :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다는 것 (로마 캐돌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변형을 가지고 있지만)과, 전문성이다. 이 두가지 기초는 서로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 양자는 중생하지 않는자의 교역이란,s 테네트의 비탄과 같이 서로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는 요나단과 에드워드 주위에 모인 복음주의자들과 챨스 쉥시(charles chauncgy)주위에 모였던 합리주의자 사이에 분열되었던 뉴잉글랜드의 경우와 같이, 또는 더 최근에 전문교역 모텔에 대한 수많은 비평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상호배타적인 분열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나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앞장에서 기술한 권위의 위기 상황에서 이양자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성직자들의 권위회복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목사들이 오늘 이 시대 상황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에대한 신실한 해석자라고 평신도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르고 이것은 영성과 전문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며, 어느 하나를 배제하고 어느 하나를 선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인 권위와 제도적인 권위

권위에 대한 이런 관점에 또 하나의 구별이 있으며 나는 이것을 이미 암시한 바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수받는 사람의 권위를 그 안수를 통하여 가입하고, 사회적인 공인을 받은 공식작인 목사나 제사장의 직책에서 도출한 것인가? 아니면 안수받은 교역자의 권위가 자기 자신 즉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자신의 인격적인 자격이나 특성에서 도출한 것인가?

직책의 권위는 직책으로 제도화된 창설자의 카리스마나 가르침을 보존하고, 신성불가침의 전통을 보호하려는 종교집단의 관심을 반영한다. 미르시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59 : 101)는 "진정한 죄는 [신화[를 잊어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리가 안수받을 때에 동참하는 직책안에 제도화된 권위는, 예를들어 사도전승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진정한 죄가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도이다.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무모한 성경에 대한 확신은 이와 비슷한 시도이다. 권위는 사도전승의 계승자들의 안수를 통하여 제사장 직책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교회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도 발생한다.

직책의 권위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경우에, 성직자의 개인적 자질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권위는 전적으로 성직자 직책을 위임 받았다는 데에서 도출된다, 그레함 그린 (Graham Green)의 소설 힘과 영광(1946)에서 주인공은 믿음을 상실한 알콜 종두자 제사장이다,. 한번은 그가 경찰들의 눈을 피해 어느 시골 마을에 숨어 있을때에 그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몰려와 미사를 집례해주기를 요구했다. 직책의 권위 때문에 그는 자기의 말대로 "자기의 신앙의 결핍과 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놓을 수" 있었다. 이것은 4세기 도라티스트 논쟁시에 자격이 없는 제사장일지라고 접법하게 성례를 집례하면, 그의 내면의 동기가 그 성례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교회의 결정을 반영한다.

직제의 권위는 전통의 신성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반면, 개인의 인격적 권위는 영성이든 전문성이든 간에 인격적인 권위가 전혀 없는 성직자가 가능하지 않게 지켜준다. 이것은 이 책에 근거하지 않고, 성직자의 인격적 자질과 성격이 성직자에게 합법성을 부여하도록 보장하는 인정에 근거한다. 그린의 위스키제사장은 그가 동참하게 된 제사장의 직제 때문에 성찬을 집례할 수 있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로 교회에서 시무했다면, 그는 심각 문제에 봉착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여기에 적용한다면, 교인들이 신학교를 졸업하여 갓 안수 답은 목사를 초청하여 교회를 지도하는 권위를 부여했다면(아마도 새로 교회에 부임하는 어떤 목사의 경우에도), 그것은 그가 안수를 받았다는 데에 근거할 것이다. 교인들은 그 목사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교단의 증명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개인적인 성격과 자질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자로서 개인적인 권위를 인정받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앞서 "제 2의 안수:(second ordination)이라고 불렀다. 이런 종류의 권위는 얻어가야 하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에 근거를 둔 권위와 전통능력에 근거를 둔 권위를 구별할때와 같이 직책의 권위와 인격적인 권위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양자는 가끔 갈등관계 있을 때가 있으며, 교단에 따라 양자중 어느 하나를 더 크게 강조하고 있다.

이 두가지 종류의 권위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서로 구별될 수 있는 것이며, 성직자가 기능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성직자의 사회참여에 관한 연구에서 해롤드 웅리(harold Quinley,1974:276-277)는 자기의 권위가 직책안에 제도화된 성직자들이 자기의 권위가 자기의 자질에 더 크게 의존하는 성직자들 보다 논쟁적인 잇슈에 더 깊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직책은 개인적 권위가 제공할 수 없는 자유를 그 직책을 가진 성직자들에게 제공한다. 이와 비슷하게 제임스 무드(James Wood, 1981 :75이하)도 성직자가 공적인 권위(직책의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 교인들은, 자기들의 개인적으로 그 정책들과 실천들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라도, 교단과 성직자들이 시행하는 논쟁적인 정책들과 실천들을 더 관용하여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성직자의 권위가 개인적인 자질과 관계 능력에 더 기초하는 교회와 단이 하는 것보다도 더 자기 교회나 단의 정책들을 도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민권운동이 한참일때에 남부에서 교회를 시무하던 무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사실임을 발견했다. 직책의 권위를 강조하던 교단에 있는 교회지도자들은, 교회의 인정에 자기의 권위의 기초가 있었던 우리의 동료들 보다도, 인종차별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에 더 큰 제도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의 교회 교인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랬었다, 내가 시무하던 교회의 교인 가운데 한 분은 자기가 나의 인종문제에 대한 견해에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내슈빌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내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내가 감리교단에 속했고 감리교단은 직책의 권위를 더 중시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동시에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직책의 권위와 개인적인 권위의 조화를 더 강력한 권위의 조화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우드(1981:82)가 지적한대로,"실질적으로 공인된 직책의 합법성을 중시하는 기관들은 자발적인 지원을 촉진하기 위하여 인격적인 자질에 따라 합법성을 신뢰할 수 있게 개발하고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직책의 권위와 인격적인 권위는 상호 강화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두가지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들-신성불가침의 대변자와 전문성-을 직책의 권위와 개인적 권위의 구별을 결합하여 다음의 도표와 같이 목사의 권위의 네가지 오리엔테이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권위의 이해


직책의권위

인격적인 권위

신성불가침의 대변자

A

성례전적 /제사장적

B

인격적인 경건

전문성

C

법적으로 공인된 자격

D

인격적으로 인정받은 자격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는 성례직전 또는 예전적인 교단들에서와 같이, 제 1차적으로 직책에 근거할 수 있다. (A)또는 그것은 중생과 내면적은 부르심에 가장 큰 강조를 두는 전통에서와 같이 그것은 목사의 인격적인 경건을 인정받는 것에 일차적으로 근거할 수 있다(B). 데이비드 슐러와 그의 동료들(1980:45-46.50-55)은 미국의 교역자라는 제목의 연구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권위에 대해서 이 두가지 형태 모두를 발견하였다. 남침례교단의 교회들과 다른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저자들이 "영성적 강조"라고 부르는 교역모델을 선택하여, 여기에는 개인의 영성, 윤리적 생활, 그리고 유능한 목사의 표지로서 전도의 능력을 포함시켰다.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두 번째 교역 모델은 저자들이 "성례전적-예전적 강조"라고 명명한 모델로서 이것은 성직자의 제 1차적인 기능을 성례전 집례로 여기며, 신성의 대변자로서의 성직자를 강조한다. 그리고 영국성공회 - 이 모델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는 또한 전문성에 관해서도 이렇게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성직자가 직책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전문적인 설교 능력, 교육, 또는 목회지도력의 다른 요소들을 필수적으로 훈련받았다는 공적인 인정을 받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실체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C) 예를 들면 장로교목사들은 "가르치는 장로"로 안수를 받으며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다는 능력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목사의 직책을 가르치는 직으로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는 제도적으로 합법적으로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전문성을 개인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서 인격적인 권위를 얻을 수 있다(D). 예를 들면 예수님은 그의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마7:29)가르치는 직책의 권위를 자기고 있던 서기관들은 전통과 다른 권위자들을 인용하면서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분명히 나타났던 인격적인 전문성과 진정성을 결여했다. 예수님은 인간생할에 중심에 하나님을 현존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실예는 폴 해리슨 (Paul Harrisoon)의 미국 침례교인들의 중생연구에서 볼 수 있다. 침례교회 교단지도자들은 교단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C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율적인 침례교회들의 공통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설득함으로 개인적인 전문성에 근거한 (D)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권위는 인격적인 권위였다, 이것은 직책상의 권위나 "합리적-법적인"권위라기 보다는 해리슨이 명명한 "합리적 - 실증" 권위이다, 이렇게 4가지로 권위의 형태를 나누는 것은 제 1차적으로 여러 다른 교단들에게 권위에 대하 강조하는 차이점들을 발견해 내기 위한 것이다, 이 네가지 형태들이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다는 권위의 형태들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긴장과 갈등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이해하는데 유익하다.

일장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교단들은 정치형태가 감독 정치나 장로정치로 남아있는 경우에도 점차적으로 개교회주의 또는 자유지원제로 움직여 가는 것 같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에서도 사실이다, 로마카톨릭 교구들의 지도력의 형태를 언급하면서, 데이비드 리즈(Darid Leege,1986:1)는 로마천주교회 교구들에 대한 주요 연구조사에서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현대 미국의 교구들에서 볼 수 있는 지도력이 단순히 하나의 신분이 아니라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다는 점이다, 권위는 직위에 있을 수도 있으나 그 직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적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는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격적인 권위가 그 중요성에서 상승되고 있으며, 계속해 상승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들과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점차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 헌금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교인들이 표현하는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방식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지 교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자기들이 이해하는 대로 기독교적 정체성에 충실하려고 할 때에 발생할 논쟁과 갈등과 쫓겨 날지도 모르는 가능성들 때문에 나약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과 같은 사회에선 정교분리가 뚜렷한 상황에서 성직자가 교회 밖으로 어떤 적법성을 가지려고 한 그것은 직책의 권위가 아니라 인격적이 권위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할때에 우리의 인격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해석자라고 인정을 받는 방식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개인들을 가르치면서 그들 자신의 잘못된 욕망과 관심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때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나마지 부분에서 논술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내가 인격적 권위의 중요성이 계속 상승하고 있으며, 다음 장들에서 특별히 이점을 강조하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직자의 취약성에 대해서 내가 언급한대로 이런 경향에도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격적인 권위가 직책으로 권위를 압도해 버릴때에 엘리아데가 "진정한 죄"라고 이야기한대로 신화를 잊어버리고 (파괴시킬)위험성이 있다. 권위의 두가지 형태는 모두 필요하며 서로가 서로를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 3장 권위의 관계적 차원

[평신도는..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지의 성격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철학자들의 총명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기술자나 농부를 초청해서도 안된다. -에드워드 a. 팍-

모든 전문인들은 평민들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죠지 버나드 쇼-

이러한 진술들은 본장의 주제의 핵심을 묘사하고 있다 :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권위 관계는 어떻게 구조화 되는가? 더 구체적으로 목사와 교회지도자들은 챺의 오만이나 쇼의 냉소가 없이 교회가 요구하는 권위를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까? 더 적극적으로, 교회 전체의 교역, 즉 안수교역과 평신도 교역 모두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고 능력 향상을 받게 하기 위하여 권위는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질 수 있을까? 이런 잇슈들은 권위의 관계적 차원을 반영하고 있다. 본장에서 나는 전문교역 모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교역들에 특별한 관심을 집중하면서 오랜 동안 시도되어온 목사와 평신도 관계를 모형화 시키는 여러 가지 변수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권위 관계들을 모델화하기

앞서 언급한 대로 권위는 사회 관계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사용을 인정하거나 합법화해주는 사회 집단이나 공동체를 떠나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한 집단에서 부모와 자녀, 지도자와 따르는자, 전문인과 고객, 교사와 학생, 목사와 평신도와 같은 관계는 권위를 내포하는 역할에 따라서 구조화 된다. 이런 역할에 따른 모형화 - 즉 그들이 참여하는 관계의 종류-가 권위의 관계적 차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뜻이다. 그러한 모형화는 하나의 연속선을 따라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 연속선의 한쪽 겉은 불균형 권위 관계로 힘에 대한 접근이 불균형하기 때문에, 역할 파트너의 한 족이 다른 편을 지배한다.

그 연속선의 또 다른 쪽 길은 고도의 균형적 권위로 거기에는 어느 편의 지배 없이 역할 파트너 서로가 힘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거나 또는 힘의 균형이 유지된다. 교회의 역사가운데서 어느 특정한 시대의 권위관계의 모형은 대체로 시대의 사회 안에서 보는 더 광범위한 권위 모형을 반영한다. 신학자 에버리 델레스가 주장한대로 (1978,168)기독교 교역 발달의 역사적 연구는 아마도 각 시대의 교회가 교회의 구조들과 직제들을 조정하여 그가 처한 사회환경 가운데서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균형적 관계

일반적으로 권위관계 그리고, 특별히 목사-평신도 관계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불균형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여러 작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nd)는 권위 관계를 일종의 대중의 유아기 회귀로 기술하였다. 강력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권위자들은 아동기의 종속관계로 회귀하도록 격려하고 그의 정신분석의 목적은 -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 자율적인 인간, 즉 자아(ego)를 강화시켜 원본은(id)의 불합리한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환자들을 도와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초자아(superego)-외적인 권위자들이든지, 양심이든지, 또는 또 다른 형태의 권위의 표현이든지 간에 -에 굴복하기 보다는 이성을 사용함으로서 그렇게 하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인본주의 심리학을 자율적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엄격한 비전을 조절하여, 자율적인 인간 대신에 자기실현 또는 자기 완성이라는 목표로 대치하였다. 필립 리프(Philip Rieff,1966)는 이것을 "치료법의 승리"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1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또는 "신자유지원제"의 문화를 비평하는 한가지 흐름이 되고 있다.

교회의 불균형 권위에 대한 최근의 비판의 중심은 전문적인 교역 모델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이런 비판의 대부분은 이유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직자-평신도 한계의 모형에서의 불균형은 현대 전문직업문화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으며, 성직자-평신도의 차이 변화에 대한 또 다른 기초들이 거기에 개입 되었다.

차별화 지도력에 대한 필요성은 오히려 교회역사 초기에 아마도 1세기 말에 개발되었다. 연륜이 적은 교회가 내적인 갈등에 직면하고, 그 크기와 복잡성이 더 해가고, 그레코-로만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종교운동들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에, 어떤 특수한 지도력 기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들이 조직화 되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의 힘과 권위에 대한 다툼이 일찍부터 일어났지만 불균형적인 관계는 4세기에 생겨났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계층구조적 교역 이해가 개발되었을 때, 성직자들에게 기대되었던 모범적 신성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목회신학자들은 상대적인 영성에 따라서 교회의 사람들에 순서를 정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감독이요, 둘째는 다른 성직자들이요, 셋째는 수도사(평신도)들이요, 마지막은 평신도-일반 성도들- 들이었다. 버나드 욚(Bernard Cookes 1975:265이하)은 이런 발전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직자들이 점차적으로 기독교 사회에서 분리된 계급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기능의 위엄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회원권의 성격자체에서까지 평신도 위에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교회의 "머리"라고 칭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중세기에 와서 계층구조적인 교역 모델은 완전히 꽃피웠다. 이것은 모든 것이 "존재의 고리"가운데서 자기의 자리를 가졌다는 중세기의 봉건 사회의 계층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덜레스가 "교회의 제도적 모델"에 그리고 약간 낮은 정도이기는 하지만 "성례전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숨겨져 잇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적인 모델에서 제사장의 권위는 교황과 주교들 그리고 그들의 권위를 나눠가지는 제사장들에게 집중되었으며,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직책의 권위가 있으며, 가르치고, 성화시키고, 통치하는 권한이 주어진다. 덜레스(1978:163)는 제도적 모델의 불균형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제사장]이 가르칠 때 사람들은 그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제사장의 지식이나 그 개인이 받은 은사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직책 때문이다. 그가 성찬을 집례할때에 그 제사장은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신성한 힘(예: 열쇠를 맡은 자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 명할때에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위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명에 항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례전적 모델은 주교나 제사장의 법적인 권한을 적게 강조하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주교나 제사장의 특별한 신성성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 모델도 역시 불균형 관계를 만들어 낸다. 즉 제사장은 "하나님과 가까이 머무는 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특별히 경건한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평신도는 제사장의 중보기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 덜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1978:174), 성례전 모델도 의도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제 2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이 모델은 우리가 뒤에 보게 되겠지만, 좀더 균형적인 권위를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모델과 성례적 모델의 법적 영적 불균형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사장직의 예전적 측면을 강조하는 성공회 교회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것은 개신 교회들 가운데도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이런 교회들은 목사가 하나님께 이르는 특별한 통로요 이것은 일반 평신도는 가질 수 없는 능력이라고 보고 목사와 평신도들간의 불평등의 권한 관계를 인식하는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신성 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모범적 신성성은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권위 관계에서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 모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델은 권위의 기초를 특별한 전문성에서 찾고 있다. 덜레스가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델에 따르면, 교역의 전문가 모델은 성례전 보다 말씀을 우위에 두고, 이 말씀의 해석과 선포를 중시하는 "말씀의사자"모델과 특별한 동질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평민들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쇼의 이야기는 전문적인 권위가 불균형 관계를 만들어 내며, 고객들-성직자의 경우에는 평신도들-을 종속 관계로 묶어두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준다. 평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자원들에 대한 전문가의 접근은 그들의 힘의 한가지 근원이며, 전문가 지배의 불균형 관계의 하나의 요인이다.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희귀한 자원들은 평민 대중이 자기들의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전문적인 의학 지식, 고객들이 갈등 소송이나 정의 구현에 필요한 법률 상담,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하는 평신도들을 위한 성경 해석의 전문성 등을 들 수 있다. 평신도들이 이러한 전문적인 자원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동안에, 평신도들은 그 자원들을 접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지하며, 이것은 가끔 평신도와 전문가들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더하게 만든다. 만약 내가 건강이나 법률이나 구원에 대한 전문가라면 나는 네게 필요한 자원들을 가졌을 뿐 아니라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들 사이의 거리를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거리감을 더하게 만드는 것은 전문가의 권위를 더해 주는 특별한 복장 또는 다른 상징에서 보여주는 전문가의 비법이다: 의사의 하얀 복장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기계들, 판사의 가발(영국)과 특별한 법정 의식, 예배 경험에서의 목사의 까운, 향기, 그리고 종의 사용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전문인들은 기준을 세우고 특별한 규범을 만들어 그 직업에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 등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그래서 돌팔이들에게서부터 대중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한 보호는 가끔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 한다고 해도, 좀더 냉소적인 비평가들은 전문인들의 단체를 전문가들의 힘의 근원에 대한 전문가의 독점 유지 기능으로 보고 있다. 교단들이 규정하는 안수를 위한 요구 상황들도 어떤 점에서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요구되는 전문성에서의 어떤 차이들은 다른 특별한 요인 없이도 피할 수 없이 불균형을 만들어 낸다. 이런 필요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얻던 편의 사람에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편의 사람보다 더 큰 힘을 부여하는 일종의 기능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 모델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이런 차이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으려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높이려고 하는 분명하게 계획적인 시도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를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라는 항목으로 보고 싶다: 즉 그것은 특별한 전문성에 기초하여 전문가에게 특권적 신분을 부여하려는 이데올로기로 전문가 모델을 전향시키는 것이다. 본장의 서두에 인용한 에드워드 챺의 분명한 평신도에 대한 경멸은 이런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논평은 19세기 중엽 소위 현대적인 전문직이 등장할 때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문가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미국 성직자들 사이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다. 나는 현대 전문가주의가 출현한 바로 이전의 역사를 예를 들어 약간 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사건들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 변화를 가져온 실례들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전염되고 있는 논쟁점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종교사에 대한 부기(附記)

18세기로 들어서 미국 사회는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17세기 뉴 잉글랜드의 특성이 되어왔던 교회와 사회의 유기적 관계가 뒤집어진 것이다. 뉴 잉글랜드 개척 초기에 목사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상당한 존중과 인정을 받고 있었다. 18세기가 진행 되면서, 사회는 더욱 세상적이 되었고 그런 변화의 결과로 더욱 단편화 되었을 뿐 아니라, 목사의 위치도 중심에서 밀려나고 덜 안전하게 되어갔다. 여러 사회 역사학자들(Schmotter, 1973; Youngs, 1976; Harlan, 1980)이 이런 변화들에 대한 응답들을 분석하였다. 성직자 주에는 자신들을 평신도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교회 귀족으로,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전문인 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중부 식민지의 반 부흥운동의 성직자들과 그들과 동조하는 뉴 잉글랜드의 성직자들 모두 자기들의 전문직에 필요한 장기간의 힘든 준비 과정에 기초한 특별한 기술적인 지식을 상당히 강조했다. 챨스 초운시(Charles Chauncey)의 평가에 따르면, 그러한 전문성은 단순히 하나님의 인도로 올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목사들은 "그들이 성취해야할 어려운 사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최고의 배웅과 교육을 받아야" 했다(Harlan, 1980:34). 역시 구별된 전문직으로서의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시도로, 어떤 마사츄세츠의 목사들은 성직자의 선택과 안수의 권한을 교회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교회 회의로부터 빼앗아 그 기능을 목사 협의회의에서 장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어떤이들이 치리 장로의 직(교회와 목사사이에 서서 교회 치리에 목사를 협력하는 평신도 직원)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많은 목사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이런 노력들을 반대하였다. 데이비드 할란(David Harlan, 1980:45)은 특별히 1698∼1752년까지 마사츄세츠 주 렉싱톤에 있는 제일교회의 목사로 시무했던 죤 행칵(John Hancock)의 목사의 흥미로운 응답을 인용했다. 그의 교회 교인들이 2명의 치리 장로를 세우자고 그에게 요구했을 때에, 그는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고 그 새로운 직원이 해야할 것이 무엇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장로들 중 한 사람을 주일 예배 전에 나의 집으로 불러서 마굿간에서 내말을 끌어내어 안장을 얹고 내 문앞에까지 끌고 와서 내가 말을 타는 동안에 말이 움직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로는 교회앞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내리는 동안에 그 말을 붙들게 할 것이고, 예배가 끝나면 그는 다시 말을 끌고 와서 계단 앞에 세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치리 장로를 세웠을 때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그에게 시킬 모든 것입니다.

할란은 바로 그 시점에서 그 문제를 철회되었고 더 이상 치리 장로를 세우는 일이 없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평신도들에게 지위를 주지 않으려는 뉴 잉글랜드의 다수의 목사들의 노력을 시사하고 있다. 영스(1976:91)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안수 교역과 함께 교회는 진정한 정체성울 가진다고 믿었다. "산위에 세운 동네"라는 구절을 죤 윈드鶼(John Winthrop)은 전 뉴 잉글랜드를 지칭하여 사용하였는데, 토마스 폭스 크로프트(Thomas Foxcroft)는 1726년 안수식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목사들은 (가정의 부모와 같이) 다소간의 고상하고 눈에 잘 띄는 기도처입니다. 그들은 산위에 세운 동네로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에 직면하여 목사의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시도한 이와같은 노력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수 많은 목사들 자신들의 반대를 주장하면서 보스톤의 벤자민 콜만(Benjamin Colman)은 이렇게 말했다."[목사들은]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 그들이 교회를 구성하거나 목사들을 위하여 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Harlan,1980:41), 더나아가서 평신도들은 목사들의 신분 열망의 직면하여 힘없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많은 평신도들이 우쭐거리는 목사들을 깊이있게 비판했으며, 자기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려는 목사들의 노력에 반대했다. 영스(1976:102)는 보스톤의 천연두 전염에 목사들이 개입을 선언한 뉴 잉글랜드 코란트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인용했다. 편집자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은 목사들의 행동과 선언을 무모한 목사의 인격에 기초한 것을 비판했다 :"종교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권위를 도출하여야 한다. 종교는 어떤 인간의 힘에 의거하여 인간의 양심안에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평신도들도 지교회에 목사를 초청하는 과정과 목사의 신수비를 책정하는 데서 자기들의 힘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목사를 내어보내는 힘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목사가 한 교회에서 평생동안 목회하는 것이 관행화 되었던 이 당시에, 이것은 목사들의 경력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평신도의 영향력은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상당히 향상되었다. 대각성운동은 평신도들이 자신의 영적인 능력에 새로운 의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동시에 목사들도 적법성의 갱신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엘리트 직책의 신분회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목회와 지도력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서 기인되었다. 대각성 운동은 목사들에게 이런 것들의 필수적임을 일깨워 주었다. 영스(1976:136)는 논평과 같이 대각성 운동은,

교회 목사들에게 더 세상적이면서도 더 안전한 힘의 근원으로 평신도와 함께 일하는 능력을 새로이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신앙부흥사들(죠지힛필드와 같은 순례 부흥사)의 활동이 부흥 운동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들을 일으켰지만 교회 교인들을 부흥회로 인도하고 신앙 각성을 체험한 사람들을 상담한 것은 일반적으로 그지역 목사들이었다. 맹렬한 부흥운동의 열정이 가라앉았을 때, 그 목사들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남아서 세속세계 가운데서 종교적 깨달음을 양육하는 일을 계속 하였다.

앞장에서 제시한 범주들 가운데서, 목사들은 영향력 있는 목회에 기초한 인격적인 권위가 직책의 권위보다도 자기들의 적법성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할란(Harlan)도 성직자협회에 대해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많은 목사들은 평신도를 배제한 그러한 협회가 여러가지 교인들에게서 목사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지원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즉 그것은 목사들이 고립을 극복하게 해주고, 신학적인 논쟁점들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고, 목회와 치리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는 전략들을 개발 하는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의들이 목사의 직책의 권위도 향상되었다.

불행스럽게도 대각성운동이 불러일으킨 좀 더 균형적인 관계에로의 이런 추진운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도날드 스코트(Donald Scott)는 1750년에서부터 1850까지를 분석하였는데, 이 기간은 제 1차각성과 곧 이은 새 국가의 탄생 그리고 제 2차 대각성운동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나는 그의 논점을 여기서 요약하지 않고 다만 18세기 초반이 지나가면서 뉴잉글랜드 목사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위치가 서서히 훼손되어간 그 변화들만 언급하고자 한다. 교회의 역할-특히 목사들의 역할-에 관하여 공공생활에서 긴장들이 유발되었다. 제 1차 각성운동에 의하여 일어나고 제2차 각성운동에 의하여 다시 불붙은 복음주의적 경건은 어떤 이들이 "대 반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끌어서, "공적"개신교와 "사적"개신교(Marty,1970 과 Moberg ,1972를 보라)사이에 분열을 가져왔다. 목사의 역할에 대한 평신도의 기대들은 점차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심방과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을 통하여 평신도의 필요들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갔다. 교회와 목사들이 공적인 논쟁점들, 특히 노예제도폐지등에의 개입은 강력한 방해를 받았으며, 여러 가지 갈등요인들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급격한 교회성장의 욕구와 새로운 목회 지원자들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농촌지역에서 왔다. 그들은 과거의 목사들의 탄생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신분이 없었다.

이러한 것들과 또 다른 변화들의 결과는 목사의 권위를 직책의 권위보다도 인격의 권위로 만들었으며, 인격적인 권위는 항상 스스로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더 취약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어 갔다. 목사는 자기의 위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자신들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들이 평신도와의 관계는 힘의 균형을 장악한 평신도와 함께 반대방향에서 불균형이 되어갔다. 평신도는 이제 목사의 고객이 되었고, 목사들은 자주 자기들이 단순한 고용인으로 전략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실제로 어떤 평신도들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 1장에서 언급한 목사는 고용된 일손이라고 했던 프랑스 철학자Crevecoeur에게 보냔 농부의 비평을 회상해 보라

전문인으로서 목사의 현대적 이미지가 개발된 것은 바로 이러한 풍조 아래서이다. 새롭고 자각적인 방법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복음주의적인 목사들은 자신들을 전문인(의사와 변호사와 상응하는)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스코트91978:128)지적한대로 이 시기에 특별히 설립된 새로운 신학교에서 특수하고 종교적인 공식적 훈련을

요하는 특정분야의 전문성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코트에 따르면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덕을 세우는 일(edification)이 목사의 근본적인 업무요, 목사와 자기 교인간의 연결고리로서 고객중심의 아이디어를 목사와 평신도가 동시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128). 사회참여, 영감을 받지 않는자의 신학교육자격문제, 옛신학교와 새로운 신학교 사이에 일어난 교리논쟁으로 인한 분열등은 더 이상 목회책임의 범위안에서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목사가 사회적 논쟁에 참여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개인적으로 한것이지, 목사직책의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설교했을 때, 그는 평신도들의 실제적인 행위 실천을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는 "종교에대해서 설교한 것이 아니다 종교를 설교한 것이다."(scot, 1978 : 129). 그리고 목사들은 교리적인 논쟁들을 새로이 설립된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떠 넘겨 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목사들을 그들의 전임자들로부터 상당한 거리감이 있게 만들었지만, 목회자의 역할의 새로운 개념은 어느정도의 목회적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것은 두가지 차원을 가졌다. : 특정한 삶의 영역에서의 전문성과 분명한 기독교적 경건 및 예의가 그것이다. 다시한번 스코트를 인용하고자 한다.(131): "어떠한 평신도도 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배우든간에) 방법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적 성서적 과학들을 공식적으로 교육받은 자들로서, 법조인들과 의사들이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들의 전문적인 필수적인 과학을 소유하는 꼭 같은 방식으로, 목사들도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소유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평신도와 비교해서 분명히 구별되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본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에드워드 챺의 인용문에서 분명하다. 더구나 새로운 성직자 전문인들은 진정한 목사로서 품질보증의 도장을 찍은 사람으로 행동하였다. 이것은 "성직자에게 기대되는 도덕과 그리스도의 가슴에 있는 삶을 소유한 자의 평안을 가진 자로"자처했다는 것이다.(131)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1978 : 132):

새로운 목사의 개념은 전문인의 전문성과 기독교적 성품의 광채를 가진 교역자라는 데에 모아졌다. 이것은 주의 깊게 규정된 전문 영역에 관한한 목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 이다. 이것은 목사의 입지를 위태하게 할 지역공동체의 일상적인 일에 연루되어 목사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데서부터 목사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리고 한 때 단순히 목 사의 직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제공해주던 일종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목사와 평신도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약간장황한 실예는 일차적으로 어떻게 함의 균형이 앞뒤로 움직이면서 양쪽방향에서 모두 불균형을 창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예이다. 그러한 추이는,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일어났다. 일장에서 기록한 목사의 권위에 대한 수많은 긴장들이 여기서 인용한 실예들 가운데서도 꼭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 이 시대에 긴장을 일으키는 많은 씨앗들이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변화에서 심겨졌다. 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논술해온 전문인 주의가 , 초기의 변형이든지 아니면 최근의 변형이든지간에 , 목사들이 변화에 대응하고 자기들의 입지를 높이려고 시도했던 아주 중요한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였기를 희망한다. 독자들은 19세기 목사들이 자기들의 권위의 기초로 택했던 두가지 전략들이 즉 전문성과 경건이 제 2장에서 논술한 권위의 부차적 기초와 같은 이야기 임을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한 실예들중 다수가 전문가 모델의 부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다루고 있다면, 실제로 이것은 전문가 모델의 전반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것인가? 전문가 모델은 19세기 목사들이 강조하였던 권위의 두가지 기초들을 합당하게 재규정할 때, 권장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권위의 중요한 기초로서 전문성과 모범적 경건에 대한 19세기 목사들이 강조하였던 권위의 두가지 기초들을 합당하게 재규정할 때, 권장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권위의 중요한 기초로서 전문성과 모범적 경건에 대한 19세기 해석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것은 평신도를 희생양으로 삼아 목사의 위상을 높이는 무기로 이런 기초들 중 한가지나 두가지 모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논술은 뒤에 할 것이다. 우선 균형적인 권위관계를 먼저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균형적 관계들

균형적 권위 관계에서 교회와 같은 하나의 기관이 가지고 있는 힘은 원리상 모든 회원이 가질 수 있다. 극단의 경우에는 어느 한 회원도 다른 회원위에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모든 회원은 힘에서 동등하며 그것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거기에는 지도자 따르는자 또는 성직자-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 그렇게 완전히 균형적 관계불균형적 관계보다도 조직상으로는 훨씬 드물게 존재하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공식적 지도자역할이 발달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균형적인 관계의 극단에서 멀어지게 만들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이긴 하지만 균형적 관계를 가진 교회기관들과 구조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 이러한 균형적 관계는 단순히 지도자와 따르는자 또는 목사와 평신도 간의 힘의 교착상태를 의미하는 힘의 균형일수 있다. 그러나, 더 적극적으로,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별이 실질적인 힘의 불평등이라기 보다는 기능적인 구별에 불과한 교회기관들도 있다. 각자는 기관안에서 다른 이를 보완하며 보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쌍방은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한다. 어느 편도 프로이트가 우려했듯이 다른 편을 종속시키는 데에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관계들을 포함해서 균형적인 관계들은 특히 덜레스(1978)가 교회의 공동체 모델 -"신비적인 교제"로서 교회-이라고 부른 교회들 가운데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생겨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교제로서 관심과 협조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들은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공동체모델을 포착하고 있다. 레티 러셀(Letty Russell)이 그녀의 저서 Household of Freedom에서 개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교회는 또 다른 각도에서 교회의 공동체 모델과 파트너쉽 및 균형적 관계의 상호의존적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987) ⑥러셀과 같은 여성학자의 해석은 덜레스의 다섯 번째 모델인 종의 모델과 유사성이 있다. 이 모델 역시 균형적 관계들을 강조하고 있으며, 교회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밖에서의 상호성, 특히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과 눌린자들과 교회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많은 경우에 자기가 설립한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려고 애쓰는 바울의 교회의 비전은 지도력에 관한 한에서는 균형적인 강조를 반영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관계등에서 계층적 견해가 지배되고 있던 그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에 잡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3: 27-28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이해와 지도력이해에서 균형적 관계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여자나 남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언한다.

바울이 세운교회안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은혜에 근거해서 역할에서 구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식적인 직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특별한 지도자역할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능력인 은혜를 동등하게 나누어 가졌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설명하는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2장은 서로 다른지체들이 전체의 유익에 기여한다고 가르치므로서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지도력의 역할은 사랑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나뉘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1:1-16) 저자도 바울과 꼭 같은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더 균형적 관계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받은 초대기독교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에드와드 슈바이저(Edward Schweiger ,1961) 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요한은 철저하게 카리스마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으로 거듭나며 , 예수그리스도와 직접적이요 완전한 합일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의 내적 외적 생활을 인도하는 계속적인 선물이다. 어떤 특별한 교역도 필요없으며, 각자에게 나눠 주시는 성령의 선물에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에 나타나는 유일한 직제는 적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현현이라고 기록되었다. 초대교회가 점점 복잡해져가는 상황 이단적인 운동의 위협에 직면 해서 공식적인 지도력을 세워야 했을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능적이 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균형적이었다. 에드워드 쉴레베커(Eduare Schillebeeck,1981:46)가 처음 3세기 동안의 교회생활에서 기록한 바와 같다.:"이모든 다양한 형태에 대응하여 교회의 교역은 근본적으로 집단성, 즉 다양한 교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연대성이다. " 얼마후에 , 아마도 늦게는 4세기에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이는 존재론적 성격 또는 질적 차이로 보게 되었다. 나는 초대교회에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으며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도 불균형적 관계를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베드로, 바울, 야고보 등은 아주 중요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속사도시대의 지도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등의 목회서신들은 좀더 계층구조적인 교역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계속해서 교역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보았다. 아무리 불균형적으로 보이는 관계에서도 그 당시의 권위의 차이들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에서 기능적인 것이었다.

이전 초대교회의 권위형태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개신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은 목사와 평신도사이의 기능적인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섬김의 교회교역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좌파, 특히 쾌이커 교도들은 목사의 직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이 성령의 능력과 인도에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재세레파는 권위가 전체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과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적법성은 공동체의 인정에 달렸으며, 최종적인 권위는 공동체에 있었다.

이 비슷한 상황이 칠레에 있는 현대 오순절 종파들의 연구에서 나타났다.(Willems,1967). 어떤 종파들은 영적인 능력이 공동체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균형적 관계의 실례들을 보여준다. 지도자들은 특별한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교회성도들은 그 지도자에 도전할 수 있고 새로운 영광을 받은 것이 인정되면 그 도전은 받아들여지고, 지도자의 역할은 바꾸어질 수도 있고, 새로운 분파가 생겨날수도 있게 된다. 재세례파에서와 같이, 라틴 아메리카의 종파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계층질서에 반대하고 천주교인 전통적제도적인 모델에 반대하여 평등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의 권위 관계들

위에서 언급한 권위관계형태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오늘 어느 지점에 있을까? 내가 이미지적한 바와 같이 개신교와 천주교모두는 실제에서는 그렇지 못하지만 성직자 평신도 권위관계에서 균형적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제2바티칸 공의회의에서 "하나님의 백성"강조, 여러형태의 해방신학에서의 강력한 평등주의 강조, 또는 수많은 교단에서 강조하는 상호교역 또는 공동교역을 고려할때에 사실인듯한다. 천주교 교구에 대한 연구를 반영하면서 리즈(Leege,1986:1)는 "지도력"은 복수명사라고 결론짓는다. 성직자는 아직도 지도력이해의 중심이지만 교구의 방향서의 책임을 함께 지는 또 다른 영향력있고 힘이있는 지도자들이 평신도들 가운데에도 많이 있다. 흑인 교회들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바 와 같이, 흑인교회의 권위관계는 전통적으로 불균형적인 것으로, 목사가 상당한 힘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권위관계는 균형적인 관계로 지금 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육수준 의 향상과 안정된 흑인 종류계층의 성장으로 결정과정에의 평신도의 참여를 요구하는 강력한 압력이 평신도들에게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어떠한 신학적인 이유에서 떠나서, 교회가 서 있는 더 큰 문화는 평등주의적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시대의 풍조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 는 슬로건을 내걸도록 요구하고 있다.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다 같이 우리는 교회안에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하여서 이런 사실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인 요구와 별도로,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적인 가르침도 균형적인 방향을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다. 다음장에서 논술하겠지만 교회는 차별화된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평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섬기는 지도력의 실예(예, 요13:1-16)와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고전12)의 유기적 이미지는 모두 비계층적 균형적 관점을 반영한다. 이 관점은 복음이 가르치는 지도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맥락이 아니라 복음이 균형적 권위 관계를 지향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체 백성이 각자가 받은 은사로 상호보완적인 목회를 하도록 부르고 있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의 여러 장들에서 나는 이것을 성취하는 몇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4장 권위와 교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한 부분이라" -고전 12:27-

"전쟁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장군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죠지 클레멘쇼-

지금까지 나는 교역의 권위, 특히 안수교역자의 권위에 대한 관점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권위들, 특별히 성직자의 권위들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많은 도전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나는 사회학적인 시각에서의 권위이해를 시도하였으며, 교회사에서 권위가 얼마나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석되고 행사되어 왔는지를 보여 주려고 여러 가지 실례들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기초하여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에 역점을 두고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의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2장에서 제시한 바 있는 교회에서의 권위에 대한 논점은 권위가 필요한 것인가 아닌가? 또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권위인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지도자들이어야 하는가? 이다. 내가 "성찰하는 지도자"(reflective leadership)라고 하는 것이 곧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본 장과 다음 장에서 나는 나의 재해석의 기초를 설정하고 싶다. 먼저 본 장에서는 교회와 교역에 대한 몇 가지 규범적인 가정들을 좀 광범위하게 제시할 것이요, 다음으로 다음 장에서는 교회가 요구하는 핵심적인 지도력의 과제들을 기술하고자 한다.

교회의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이야기

바울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을 때,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한 몸 안에 있는 여러 다른 지체들간의 유기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이 비유는 교회의 성격과 사명도 설명해 준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성격과 사명 -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의 성격과 사명 - 은 예수님의 이야기, 즉 그분의 삶과 사명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이야기로 규정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내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이야기한 바와 같이(Carroll,1989:59), 이 말의 핵심은 교회가 말씀의 계속적인 성육신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성육신 가운데서 말씀이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로서, 제1세기 팔레스틴의 나사렛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그 시대와 그 장소의 독특한 문화, 즉 1세기 중동문화와 사회의 특정한 문화 속에서, 그 문화의 특정한 언어와 사고 패턴을 가진 독특한 한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육체화 되었다. 이것은 분명한 말씀의 성육신이요, 계속적으로 미래에 구체적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구체적인 성육신, 다른 말로 하면 구체적인 문화라는 그런 특정한 장소, 문화, 그리고 사회가 부여하는 기회들과 제한들을 말씀이신 예수님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말씀에 제한을 부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그 말씀이 들려지고, 이해되고, 역사성의 제한 속에 살고 있는 혈육 있는 남자와 여자들의 응답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 보편적이 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해방시키지 않고 부활은 여러 다른 시대와 여러 다른 역사적 상황하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듭하여 구체적으로 성육신 하도록 그 말씀을 해방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제 1세기 에베소, 고린도, 또는 로마뿐만 아니라 20세기 라고스, 보스톤, 불룸필드, 또는 에섹스 졍션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육체화 된다. 신약성경의 공동체에서 시작된 교회의 역사는 구체적인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그들의 살고 있는 무수한 문화들과 사회에 합당한 방식으로 자기 집단과 자기개인의 삶속에서 말씀을 육체화하려고 발버둥치며,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 투쟁의 역사이다.

시대마다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은 예수님의 교역, 죽음, 그리고 부활을 근본적으로 육체화하고 있느냐 하는 형태로 발견되어진다. 이것을 프락시스(praxis)라고 하는데, 그것은 곧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충실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발자국 하나 하나를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실천은 정확히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의 내용을 따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를 형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데이빗 켈시의 용어대로(1975:192f) 우리자신의 교회의 모습과 실천이 정말로 기독교적 경향성이 있는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약간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개인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알라스테어 맥킨타이어(Alastair Macintyre,1981:201)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를 대답하기 전에 '내가 어떤 이야기 또는 이야기들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가?'를 대답할 수 있을 때에라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 중요한 사건의 앞과 뒤에 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조명해 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처한 끊임없이 변하는 복잡한 환경의 이야기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우리의 삶을 조명하고 판단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교회의 성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몇 가지 특성들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영들을 시험해야 하는" 우리의 필요를 감소시켜서는 원리들의 목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조심하면서 그렇게 하고자 한다. 나는 또한 다른 이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그것들을 약간 다른 뉴앙스를 가지고 이해할 것이라는 사실도 안다. 우리들 각자는, 내가 7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자신의 교역의 비젼을 얻기 위하여 우리 나름대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의 과제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중심적인 경향성을 나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교역은 하나님과의 새롭고 해방시키는 관계에로 모든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교역의 시작에서부터 분명히 보여준 바 있는 예수님의 가난한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의 동일시, 치료와 섬김의 실천에서 표현된 그분의 사랑, 억압구조들에 대한 반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가르침 - 이 모든 일들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해방시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참여시키고,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들의 가치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하셨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하나님이 가져올 하나님의 나라 또는 평화의 나리에 참여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고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남자들과 여자들을 부르시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쳤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가져올 하나님이 나라는 사랑(용서, 서로사랑, 이웃에 대한 적극적 관심)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불평등과 억압을 영구화시키려는 전통적인 구조들과 관계의 패턴들에 도전하고 그것들을 상대화시키는 나라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불러 능력을 배양시키고 자기의 교역에 동참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서로와 맺은 새로운 관계를 증거하며, 다른 사람들도 불러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에 참여시키고자 하신다. 그들을 따르는 공동체에게는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 자신의 교역을 계속 할 수 있게 은사와 자원들을 나누어 주시고 있다.

이 세 가지 중심적인 경향들은 바울이 말씀한대로, 예수님의 생애와 교역의 요지를 요약한 것이다,"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이 세 가지는 구체적인 행동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형체화 시켜야 한다고 암시한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시는 여러 다른 측면의 활동들을 시사하며, 그것은 여러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하에서 우리의 실천들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도록 조장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웃을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고 깊이 있는 관심을 가지게 하는 새로운 공동체에의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힘을 배양시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인가?

의미, 소속, 그리고 능력향상

우리는 구체적인 실제상황 가운데서 계속적인 예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스스로 발견해내지 않으면 안되지만, 나는 교회가 의미, 소속, 그리고 능력배양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두 번째 가정을 제안한다. 이 기능적 범주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연관된 교회의 과제를 상기시켜 준다. 물론 다른 공동체들도 자기회원들에게 의미와 소속감을 주고 능력을 배양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족공동체나 알콜중독자 치유협회의 테크닉을 활용하는 수 많은 "12단계"그룹들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기능적 범주는 교회가 예수님의 이야기에 참여할 때에 그 교회생활에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는 교회가 제공하는 의미를 규정한다. 그것은 교인들이 참여하는 교회의 소속구조에 형체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인들에게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능력을 배양시키고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과제를 설명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좀 더 자세하게 이것들을 설명하고 싶다.

의미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우리가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 특히 예수그리스도의 이야기의 빛 안에서 우리의 삶과 경험을 이해할 수 없고 혼란스럽고 모순되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발달 순환주기로 말미암아 발생되는 위기들, 질병, 고통, 죽음의 경험들, 어려운 가치 선택들, 부부와 가족 긴장, 직업과 소명의 위기, 부정의와 억압의 문제, 국제적인 긴장과 갈등, 환경문제 등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온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타조와 같이 파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개인적 집단적 도전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적인 과제들 중의 하나는 우리 존재의 근본구조를 위협하는 이런 위기들과 도전들에 맞서서 그에 대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의미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공동의 기억들(오랜 세월을 내려온 이스라엘의 이야기들, 예수님의 이야기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들)과 공동의 희망(정의와 평화로 하나님이 통치하심)의 빛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들과 경험들을 해석할 수 있게 우리를 도와주는 하나의 컨텍스트를 제공해 준다. 이 기억과 비전의 빛 안에서 우리의 경험들을 해석할 때 그것은 초월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며 그것이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우리 인생의 일상적인 경우들과 특별한 경우들 모두에서 교역의 기회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이유로 생동력있는 예언적 설교와 교육과 목회지도가 모이는 것이 교회의 생활에 그처럼 핵심적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우리가 소속한 공동체로서 우리가 의미의 잇슈를 다룰 때에 수용과 돌봄과 지원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관계들과 구조들을 제공해 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발견하게 해준다. 이것이 종교란 단어 religious, 즉 '함께 묶어준다'는 뜻 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묶어준다" 임무는 하나님의 나라에 개인들을 소속시켜 주므로서(예를 들면 세례로) 오늘 이 시대의 개인주의와 고립에 반대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갈라놓는 분리의 장벽을 깨뜨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간의 관계에 새로운 깊이를 더해 주며(예를 들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덕, 즉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기록한 성령의 열매들로 양육해 준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비유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싶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 나의 어머니는 하지 말라와 하라의 긴 목록을 주는 대신에 "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기억하라"는 단 한마디 충고만 나에게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의 성격으로 상징되는 내가 속한 가족의 성격을 나에게 회상시켜 주며, 그것에 충실하라고 나에게 요구란 것이다. 주말에 가정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과 친구들과 기쁘게 재결합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수용과 돌봄과 지원을 경험하며, 다시 한번 나의 가족이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세워야 하는지를 기억나게 해주는 기회이었다.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도 비슷한 기능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를 함께 묶어 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지만, 믿음의 의미 개연성을 강화시킨다. 이런 핵심적인 임무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 - 성만찬, 상담목회, 친교의 기회, 지도력과 행정, 갈등조정 - 의 여러 가지 국면들의 중요성을 더해준다.

교회의 공동생활에 특성을 부여하는 처음 두 가지 과제들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제들은 교회의 세 번째 핵심과제인 능력배양의 공동체에 공헌하는 수단들이다. 종교를 그 기능의 각도에서 해석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크하임(Emile Durkheim)은 신념이나 의미에 대조해서 종교의 소속기능에 특별한 강조를 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신앙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신자들은…종교의 기능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의 지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행동하게 하고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느낀 다. 자기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신자는 단순히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진리 를 깨닫는 자만이 아니라, 더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실존의 고난을 견디 어내는 것이든지 또는 그것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든지 더욱 큰 힘이 자기 속에 있 다고 느낀다. ( 1915:463-464 )

뒤르크하임의 기능적 관점을 기독교적인 범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교회의 공동생활에서 지원을 받으며 양육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이야기와 비전으로 우리의 경험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을 때에, 우리는 또한 우리의 나날의 삶 - 일하고, 놀이하고, 가족생활을 하고, 공동체생활과 국가적, 우주적인 일을 하는 동안에 - 을 통하여 예수님의 계속적인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향상을 받는다. 모여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맥락이 하나님이 우리를 교역으로 부르시는 우선적인 상황들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의미를 발견하고 소속감을 즐거워하는 공동체만이 아니다. 교회는 또한 참여자들이 교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 받는 공동체이다.

에스겔서 47장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루어 광야를 지나서 바다에까지 이른다. 그 강물이 어디로 흐르든지 그곳에 생명을 일으키는 역사가 나타난다. 그 강물은 광야를 기름진 밭으로 만들고 거기에 짐승들이 살며 열매맺는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 그 물은 사해의 죽음의 바다를 물고기로 가득한 바다로 만든다. 그 비전은 성전의 생활과 활동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성전은 갱신과 능력배양이 시작되는 장소일 뿐이다. 성전에서의 공동생활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한다. 성전에서 중생하고 능력배양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 속에 흩어져 살면서 그곳에서 갱신과 능력배양의 대리인들이 된다. 그러므로 모임과 흩어짐은 기독교생활의 필수적인 리듬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을 추론하는 방식은 안수교역자의 독특한 역할을 규명하는 방식을 제공해준다. 의미의 해석자로서, 공동체를 세우는 자로서, 그리고 대중교역의 지원자로서 안수 교역자는 독특한 사명을 갖는다. 나는 다음 장에서 안수교역자의 이 세 가지 역할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교역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봉사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교회에 대한 세 번째 가정은 교역은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불러 참여시키려고 하는 섬김(service)이라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자기의 독특한 은사들을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바로 클레멘쇼의 금언 "전쟁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장군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만은 없다" 진리를 교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와 로마카톨릭을 망라해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합의에 도달한 한가지는 바로 이러한 포괄적인 교역개념이다. 안수교역자의 지도력에 관하여 아직도 심각한 불일치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역(ministry)이 하나님의 전체 백성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서는 광범위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제2바티칸공의회의 초점일 뿐 아니라,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서, 세례, 성만찬 그리고 교역도 비슷한 것을 선언하고 있다."광의의 교역은 하나님께서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 - 개인이든지, 지교회든지, 보편적인 교회든지 간에 - 을 불러 참여시키려는 섬김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실예로 최근에 발표한 루터파 교회의 교역선언(미국루터교회,1984:15)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교역은 이 세상의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한시는 사역이다."고 선포하고 있다.

루터교회의 선언은 교역의 장으로서 세상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는데서 특별한 의의를 가진다. 교역이 오직 목사가 최우선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는 모이는 공동체와 동일시한다면, 평신도는 목사가 하는 것과 교역을 동일시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목사는 자주 이런 동일시를 하도록 평신도를 도와주고 부추겨 왔다. 어느 성공회목사가 표현한대로, "우리목사들은 목사의 일 - 교회를 돌보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 - 에 너무 중독이 되어서 평신도의 교역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 결과로 평신도는 기껏해야 지원계급이 될 뿐이요, 최악의 경우에는 스타 - "진짜"목사가 공연하고 훈도하는 것을 관람하는 청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물론, 자기들 자신이 그런 공연을 원치 않을 때에는 언제나 새로운 배우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성 있는 교역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하여 행하시는 역사"라는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매우 다른 드라마(극장의 비유를 그대로 사용한다면)가 연출될 것이다. 주연 배우들은 목사가 아니라 평신도들이고, 교역의 무대는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즉 평신도 교역자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모든 장소들, 가족, 지역사회, 직장,

정치 등이 될 것이다.

먼저 이야기한 에스겔의 성전이미지는 교회생활의 리듬을 고려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성전해석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신약성경의 시각에서 본 평신도에 대한 충격적인 성서연구에서, 토마스 길레스피(Thomas Gillesper,1978:13-33)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어떻게 유대주의의 성전의 상을 변화시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빌딩이나 거룩한 장소를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성전은 거룩한 백성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새로운 성전의 제사장들은 목사만이 아니라 전체 하나님의 백성 모두이다. 길레스피는 자기의 분석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하나님이 이 세사에 거하심은 건물안에라기 보다는 사람들 가운데이며, 분리된 장소 에서 소중히 보호받는 백성이 아니라 세상으로 사명을 수행하라고 보냄을 받은 백성 이요, 생활의 어려움과 책임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틈새에서 구원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백성이요, 거룩한 곳과 세속적인 곳을 오가며 분열된

이중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앞에 성실하게 살아가 는 백성을 의미한다.

평신도 교역을 이야기하면서 한 사람의 평신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상이 우리의 제단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무실은 성전이요, 우리의 동료 직장인들은 함께 축제를 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러면 우리의 직장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로 변한 것이다."

길레스피는 공동교역의 비전이 "평신도들의 능력이 배양되고, 목사들이 기꺼이 동역 하려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나아가려고 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32). 이 말은 이 비전실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암시래 주고 있다. 나는 독자들이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데이빗 슐러와 그의 동료들의 광범위한 평신도 연구조사의 결론(1975:73)을 기억하고 있을 줄로 믿는다,"최근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교역이 그처럼 강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역이 참여하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들이라고 보기보다는 단순히 방관자로 여기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평신도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나의 교회에서의 임무는 나타나서 자리에 앉고 헌금을 바치고 입을 닫아 잠그는 것이다"(로마카톨릭 신자들은 "기도하고, 헌금하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이것을 약간 바꾸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도전이 아직도 평신도에게 교역에의 소명과 권위를 깨닫게 하고, 지도를 받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대로 하나님의 교역을 수행하도록 평신도들을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이와 똑같은 무게의 도전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특별한 역할을 행사하며 평신도교역을 지도하고 지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목사는 이것을 지기의 권위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자기들이 받은 독특한 소명의 핵심으로 보아야 한다.

한 교역, 다양한 은사들

교회에 대한 네 번째 가정은 공동교역은 기능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의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비유는 현대적 의미의 목사-평신도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목사가 없었다. 동시에 그 비유는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해서 몸 안에 여러 가지 다른 기능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이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한 기능은 다른 기능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몸의 유기체의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는 지혜는 각 지체는 서로 다른 지체들을 지원해야 하며, 몸의 목적, 즉 해방과 화해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교역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의 완성을 위해 공헌한다는 것이다.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들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평신도교역의 최우선의 장은 모여있는 공동체가 아니다. 셀리아 한(Celia Hahn)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1985:50), "세상의 소금이 소금그릇에 들러 붙어버린다면, 우리는 모두 곤란하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이 모이는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한 교역의 은사들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이 없이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의 평신도의 최우선적인 역할들에 비해서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목사가 교역을 실천할 최우선의 장은 모이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의 교역이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목사를 사적인 영역의 목회자로 만들므로서 19세기의 목사와 같이 공적 역할의 단축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목사가 모이는 공동체안에서 우선적인 지도력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는다. 서로 다른 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는 열쇠는 상호협조와 상호의존이다. 즉 각자는 다른 사람이 받은 교역에의 소명과 권위를 존중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교역이요, 언약적 관계로 목사와 평신도는 이것을 위해 부름받았다.

이 책은 우선적으로 목사를 위하여 그리고 목사에 대하여 저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들의 대부분은 새롭고 의미있게 목사의 권위와 책임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 있다. 목사가 교역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신도들도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받은 역할과 책임들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권위의 기초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즉 그들이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다를 지라도 형식에 있어서는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 내용들은 그들이 실천하는 구체적인 역할과 환경에 따라서 다르고, 모이는 교회 안에서냐 또는 밖에서냐에 따라서도 다를 것이다. 2장에서 토의한 권위의 기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거기에서는 특히 목사의 권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평신도 교역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앞서의 토의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교회에서의 권위의 궁극적인 기초는, 그것이 안수교역이든지 평신도 교역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힘에 동참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은사들의 궁극적인 기초로서, 그리고 그 은사들을 사용하여 실천하는 교역의 성격들을 규정하는 데에 이 힘을 공유한다. 이 말은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에 생동력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은 전체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단순히 안수받은 목사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권위의 두 가지 부차적인 기초들, 즉 전문성과 신성불가침과의 관계는 또한 평신도 교역을 위한 권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목사의 권위가 부분적으로 자기의 특별한 역할에 대한 전문성에 기초하는 것과 같이, 평신도들이라고 해서 자기들의 특별한 교역에 전문성이 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이라는 용어는 자기의 신앙과 자기들의 특수한 교역영역과 그 신앙과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의미공동체라고 이해하

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평신도의 권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베르나 도치어(Verna Dozier,

1982:9f.)는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직업분야와 신학에서 모두 전문가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평 신도는 실제로 안수교역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을 행하 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훈련을 알아야 한다. 목사들은 다른 분 야의 전문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러나 목사가 그런 분야에서까지 전 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목사들이 자기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신앙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서 알게 하는 것은 분명히 목사들의 과제이다. 목사는 랍비(선생)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랍비는 교인들보다도 어떤 의미로서도 더 영적으로 천재성을 가졌다고 고백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학식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평신도들이 필요로 하는 학 식은 실제로 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어떠한 평신도도 헬라어나 교회의 역사나 교회교

부들이 제기하였던 논증들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복음의 이야기를 알 아야 한다. 목사가 받은 훈련은 평신도에게 그 이야기, 즉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를 알게 도와줄 수 있는 수단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목사는 또한 기독교이 이야기와 평신도의 구체적인 직업영역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평신도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평신도 권위도 두 번째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 즉 신성불가침과의 진정성있는 관계에 기초하여야 한다. 2장에서 우리는 실제로 목사의 영성과 평신도의 영성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우리는 목사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사물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다. 목사의 직제의 권위는, 특별한 복장에 의해 상징되듯이, 그런 인식을 높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역사적 발달과정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요, 적어도 교역에 대한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는 평신도들 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운반하는 자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8장에서 약간 자세히 설명할 것이지만, 목사는 모이는 공동체에서, 거룩함의 선물의 상징 또는 그 선물을 기억나게 해주는 한 사람의 특별한 대표적 역할을 가졌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선물을 공유하며, 모두가 그것을 대변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먼저 내가 사용했던 가족비유를 생각해 보라. 내가 이미 지적했던 대로 나의 가족은 나의 소속감의 쎈타로 나의 어머니가 바랐던 것은 내가 집을 떠나 대학에 가 있을 때에도 가족이 나의 가치를 형성하고 나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나의 부모님, 특히 나의 아버지는 우리가족의 가치를 상징하고 있었으며, 나 자신도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에 못지 않게 나의 아버지와 내가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는 단순히 내가 하여야 하는 바의 모델이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에게 모종의 도덕적인 권위를 주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의 선물을 기억나게 하는 자로서 목사의 상징적 역할은 우리가 본바와 같이 목사의 권위의 하나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사를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틴 루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며, 그들의 이웃에게 "작은 그리스도"가 되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이 부르심은 복음과 "작은 그리스도"가 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실현할 다양한 교역상황과의 관계를 분별하는 능력(전문성)과 함께 교역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권위의 기초이다. 이런 평신도의 권위의 기초는 외형적으로 목사의 권위의 기초와 유사하지만, 이 양자는 그 내용과 표현에서 차이가 있다. 이 권위는 교회교역의 질서 가운데서 평신도와 목사의 독특한 역할을 반영하며, 목사의 역할은 우선적으로, 물론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모여있는 공동체에 있고, 평신도의 1차적인 역할은 흩어지는 교회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는 서로간에 지원해 주는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평신도와 안수 교역자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얻는 것은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자주 목사와 평신도들에게 서로 다른 집단에서 그들 자신의 권위와 다른 이들의 권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해 보았다. 목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1) 나는 안수교역자로서 나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2) 교회의 평신도들은 안수교역자로서 나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나는 교역자로서의 평신도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4) 평신도들은 교역을 위한 자기들의 권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평신도들은 같은 질문을 약간 바꾸어서 대답하게 한다:(1) 나는 평신도로서 나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2) 나의 목사는 나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3) 나는 나의 목사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4) 나의 목사는 자기의 교역의 권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가? 그들이 그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나는 그들에게 그 결과를 서로 나누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게 하고, 방해요소를 나누게 하고, 더 효과적으로 공동목회를 할 수 있게 서로간에 협력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강한 지도력과 균형

본 장을 끝마치기 전에 마지막 가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목사와 평신도간의 공동목회와 균형적 상호 의존적 관계는 강한 지도력과 양립할 수 있다.

공동교역의 강조에서 가장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공동목회가 강한 목회적 평신도 지도력과 서로 모순된다는 가정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실시되었던 수 많은 교회의 사회학적 연구조사의 요약에서, 폴 다글라스(H. Paul Douglass)와 에드문드 부루너(Edmund S.Brunner,1935:254)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의 외적인 환경의 운명에 의하여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웃이 가는대로 교회도 따라간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환경을 뛰어 넘어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실패하는 상황에서 성공한 교회들" 대부분의 특성은 뛰어난 지도력에 있었다(1935:254)고 결론지었다. 더 최근에, 교인들의 계층적인 관심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사회봉사교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을 조사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참여의 결정적인 요인은 강력한 예언적인 지도력이다. 목사들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하였을 때, 그 교회와 교인들은 우리시대의 사회적인 문제에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Mods, Davidson, and Johnson,

1991:101)

나 자신의 큰 교회들과 작은 교회들 모두에 참여하고 연구한 경험도 이러한 일반화를 뒷받침한다. 강한 지도력은 교회활성화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강한 지도력은 공동목회를 희생하면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지도력의 한 가지 열쇠는 교회의 힘이, 게임이론가들이 말하는 제로섬게임(플레이어들의 득실의 합계가 항상 0이 되는 게임)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제로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힘은 한정이 있는 상품이라'고 가정한다. 어떠한 힘이든지 내가 그것을 너와 나누게 되면 그만큼 나의 힘은 감소된다. 그러므로 나는 방심하지 않고 나의 자원들을 비축하고 너를 나에게 종속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너도 같은 방식으로 응답한다. 만약 내가 너에게 준다면, 전제적인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것 같이 하고 아직도 너를 종속적인 관계에 메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교회의 힘은 제로섬관계가 될 필요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그 힘의 근원이 되신 성령님의 힘을 나누어 갖는다고 이해하였다. 모든 지체들은 같은 힘의 근원으로부터 서로 다른 선물들을 받아서 (은사들) 전체의 유익을 위한다. 힘을 행사하는 비밀은 자기의 힘을 비축하거나 가족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로의 은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다른 지체들을 강화시키고 지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한다.

힘은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동목회를 믿는 목사는 권위주의적 그리고 가부장적이 됨이 없이, 즉 평신도들을 종속시키려 하고 2차적인 역할에 묶어두려고 함이 없이 강력한 지도자가 된다. 오히려 그러한 목사들은 평신도들의 은사와 지혜를 인정하고 그들이 필요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고, 그들의 은사와 지혜를 사용하도록 격려한다. 목사는 공동목회를 위하여 비지시적이요, 불간섭주의적인 촉진자 - 매우 무기력한 교역의 이미지 - 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목사는 자기의 훈련과 분별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개인들과 전체로서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에 당면한 잇슈들과 그들에게 열려진 대안들을 검토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이때에 목사는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기억)와 어째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해야하는가(희망)의 빛 안에서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들을 검토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목사는 교인들의 통찰과 비전을 실현하는 교역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은사들을 사용하도록 교인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영감을 주어야 할 것이다. 데이빗 멕클리랜드(David McClelland,1975:262)는 힘과 지도력의 연구에서, 이런 유형의 힘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적극적인…힘의 면모는 그룹의 목적달성을 위한 관심, 즉 삶들을 추진해 나갈 그런 목표들을 발견하며, 그룹을 그런 목표들을 위하여 조직하게 하며, 그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을 제공하는데 앞장서며, 그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할 수 있는 자신감을 그룹회원들에게 제공하는 등의 관심으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에 열거한 5가지 가정들이 합당한 교회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을 결코 하지 않는 반면에, 그것들이 다음에 이야기할 권위와 지도력의 재해석에 기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을 포함하여 교회의 실천이 판단되고 형성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균형적이면서도 그리스도의 몸의 질서 안에서 목사와 평신도의 구별된 역할을 존중하는 권위관계를 암시한다.













제5장 교회지도력의 중심과제들

교역은 끊임없이 변화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특별한 관심과 관계가 있다.

-에드워드 쉴레베크-

본 장의 초점은 교회지도력의 핵심과제들에 관한 것이다.⸁ 누구든지 교회지도력의 권위를 재고하거나 시정하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이 수행하여야 할 과제들을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목적은 "성찰적인 실천가"로서 지도자가 해야할 핵심과제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찰적인 실천가"는 다음 장들에서 상술하게 될 열쇠가 되는 개념이다.

제1차적인 과제: 기독교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

제4장에서 우리는 여러 다른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합당한 형태와 표현으로 말씀의 계속적인 성육화라고 교회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동일성을 시사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Barth,1962:739)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교회의㈝ 사회학은 어디에서도 존재한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이든지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이것을 미리 배제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교역은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하에서 공동체의 기독교적 정체성의 보존을 위한 특별관심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에드워드 쉴레베크의 교회지도력의 제1차적인 과제에 대한 간결하고도 유익한 설명이다. 나는 "기독교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용어보다는 기독교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그것은 더 역동성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현재의 존재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과정가운데 있는 교회의 정체성도 의미한다. 어떻든지 간에 1차적인 과제는 서로 다른 변화하는 컨텍스트에 합당한 방법으로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행사할 때 특정한 지교회의 문화와 정체성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룰 것이다. 사람들은 그 교회의 독특한 문화를 "읽고", 그것을 존중하며,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교회를 지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데 있어서, 안수교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일차적인 과제는 그 교회의 특정한 문화와 컨텍스트에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그 교회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회중이 교회가 되도록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그 교회의 특정한 정체성은 또한 그 교회의 기독교 정체성을 표현해야만 한다.

핵심과제의 여러 가지 측면들

지도력에 관한 중요한 연구에서 필龼 셀즈니크(Philip Selznick,1957)는 3중의 지도자의 과제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기관의 사명과 역할을 규정하는 것, 그 목적을 기관의 생활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그리고 기관과 기관의 회원들에게 안으로부터 그리고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에 직면하여 자기들의 독특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이 세 가지 지도력의 요소는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전하는 제일차적인 과제의 여러 다른 차원들을 지적해 준다. 이것들은 또한 앞장에서 설명한 교회의 기능적 범주들, 즉 의미, 소속감, 그리고 능력배양과 병행하여 재설정할 수도 있다. 이 범주를 사용하여 다시 설명하면, 지도력의 과제는 첫째, 의미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을 명료화하는 것이요, 두 번째, 공동체 형성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관의 구조들과 관계들을 세우는 것이요, 세 번째, 교회의 공적 교역의 지원으로 교회와 교인들을 도와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능들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는 한 가지 단일 과제를 세 가지로 상호 연계시켜 설명한 것이다. 이것들은 다이아몬드를 짤라낸 면에 비유하여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하나이지만, 그 다이아몬드를 바라볼 수 있는 면들이 여러 개 있다. 각 면에서 독자적인 각도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전체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나의 면은 완전하게 그 다이아몬드에 속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 가지 지도력의 기능 하나 하나는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의 핵심적인 교역의 과제 안에서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삶 속에서 그것들 하나 하나를 따로 분리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도력 특히 목사의 지도력을 특성화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할 때에, 전통적인 역할설명이 - 가끔 서로 분리되고 연결되지 않는 과제들처럼 설명하므로 - 애매하여 불분명하던 것을, 새롭게 연결시킬 수 있으며,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 세 측면들을 하나 하나 설명하고 실예를 통하여 그것들의 의미와 상호의존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의미 해석

첫째로, 목사의 기능은 의미의 해석자이다. 목사가 구체적인 목회를 통하여 수행하는 것들 - 설교, 예배를 계획하고 인도하는 일, 교육, 상담, 조직의 지도력 - 의 대부분은 교회와 교인들을 도와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보여 준 하나님의 목적의 빛 안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기들의 삶을 성찰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들은 희망, 두려움, 좌절, 실망, 도덕적인 딜레마, 인생의 변화, 그리고 인생의 위기에 부딛치며, 그때마다 우리는 궁극적인 인생의 의미와 함께 의미의 문제에 부딛치게 된다. 인생의 전기들 - 자녀탄생, 사춘기, 결혼, 이혼, 퇴직, 죽음 등 - 도 특별히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순간들이며, 새롭고 가끔은 예기치 않은 경험으로 의미의 구조를 깨뜨려 버리려고 위협한다.

교회도 의미의 위기들을 경험한다. 미래에 대한 결정, 특정한 프로그램에 대한 갈등, 제한된 자원들 사용하는 방법문제의 딜레마, 대인관계 및 집단간의 갈등, 그 외에 수 많은 그런 잇슈들이 생겨나 성찰과 해석과 결단을 촉구한다.

목회과제는 이런 경험을 하는 개인들이나 집단 유기체로서의 교회회중들 곁에 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위기와 마주설 수 있게 도우며, 복음의 빛 안에서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목사는 교인들이 이런 경험들을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며, 복음 안에서 그 경험들을 조직하고 재조직(reframing)하여 기독교적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게 그 경험에 대응하도록 협력한다. 약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목회과제는 교인들에게 전통의 상징들을 열어주어서 그 상징들 속에 숨겨진 의미로 구체적이요, 가끔은 개인적, 사회적인 생활을 위협하는잇슈들을 신선하고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조명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의 실예를 제공해 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굉장히 혼란스런 경험이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자들(예,Festinger,1957)이 인식부조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은 의미의 위기로 우리의 기대들 또는 신념들이 모순과 같이 보이는 객관적인 사건들이나 다른 신념들에 의해서 도전을 받을 때에 생겨난다. 십자가는 어리석음이요, 하나님의 약함이로되 세상의 지혜보다 더욱 지혜롭다는 바울의 재해석(reframing)과 기독교 경험의 중심상징으로서 십자가 - 부활 주제의 사용은 의미해석의 강력한 실예이다. 이런 의미해석은 초대교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즐거워할 수 있게 했으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앙 안에서 자기들의 삶의 경험들을 재조직하여 사명에 헌신할 수 있는 힘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우리는 진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가르침과 상징들이 불분명하고 자신들의 경험과 접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 소년이 기숙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그 학교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이런 편지를 집으로 보낸 것과 같다,"그 예배당은 하나님의 시대에 유명했던 사람들의 그림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멋진 스테인 글라스로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자주 우리는 신앙의 가르침들과 상징들이 "하나님의 시대"에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존중하여 모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식별해 내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다. 장로교 목사로서 웰레이스 알스톤(Waldce Alston,1970)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신앙의 언어들을 부활이 없는 죽음으로 보내고 있다."

목사인 우리들도 그러한 식별이 어려움을 발견한다. 토마스 케닐리(Thomas Keneally)의 소설 Three Cheers for the Paraclete(1968:119-120)에서, 한사람의 제사장은 설교의 말씀들과 기도들과 예전이 신성을 빼앗긴 성체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걱정한다, "자기 속에 잘못이 있는 것일까?" 케닐리의 제사장은 직접적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간접적으로 정통을 위하여 정통의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대답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목사의 권위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목사가 전통의 언어들을 단순하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권위있게 설교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설교준비를 하면서 설교본문 옆에 "이것은 취약점, 지옥같이 소리지르라"고 표시한대로 힘을 다해 큰 소리로 외칠지라도 그 설교는 권위가 없을 것이다. 알스톤(1970:4)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필요한 것은 목사들이 갈등으로 가득한 지교회에 기꺼이 머물면서, 교회의 전통에 충 실할 뿐 아니라, 현금의 순간의 역사적 정황에도 합당한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를 위 해 씨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추어 정신과의사나 아마추어 사회학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기꺼이 거절하고 자기들이 훈련을 받은 대로 안수 받을 때에 위임받은 대로, 즉, 믿음의 공동체인 지교회의 컨텍스트에서 신학자가 되려고 하는 목사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의미해석자 또는 신학자로서의 목사의 역할을 중요시하지 아니하는 시대를 거쳐 왔다. 신학교육자들은 학생들이 교과목 가운데서 실천적인 과목들을 선택하지 않고 실천을 뒷받침하는 기초과목들을 거절한다고 불평한다. 동시에 어떤 신학교들은 설교학을 선택과목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의미해석무시를 조장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의 목사계속교육은 교회운영을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개발을 포함하여 목사의 해석적인 역할보다는 조직개발과 갈등조정에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동안 평신도들은 자기들의 삶에 대한 신앙의 의미를 분별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갈망하며 계속하여 신호를 보내고 있다. 거듭되는 지교회 연구조사에서 교인들은 교회가 자기들의, 영적인 삶을 깊이 있게 하는데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희망(그리고 그 희망이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최근의 전국적인 연구조사에서, 천주교회들과 개신교회들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꼭 같은 잇슈들에 대한 현재의 성직자지도력에 비슷한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Hoge, Carrol, and Scheets,1989). “자기들의 영적인 삶을 깊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여러 가지의 것들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 중심에 그것은 평신도들의 기대를 전달하는 것으로 그들의 목사가 그들의 자신의 이야기들 - 개인적인 이야기들과 교회의 이야기들 - 을 자기들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수 있게 기독교신앙의 이야기들과 상징들과 연결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목사가 알스톤이 이야기하는 바대로 교회회중을 위한 신학자가 되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우리는 초기 뉴잉글랜드 교회생활에서 유래한 관행으로 이런 기대를 상징화한다. 그것은 평신도가 성찬상에서 성경을 취하여 설교시간에 목사에게 그것을 드리는 관행이다. 설교가 끝나면 목사는 성경을 회중들에게 돌려주고, 그것을 다시 성찬상 위에 놓게 한다. 우리가 이런 관행을 통하여, 상징하는 것은 우리는 말씀의 권위아래서 살고 있으며, 우리는 목사에게 그 말씀을 해석해 주도록 요구하며, 성만찬에서 빵을 쪼개는 것처럼 목사는 전통을 쪼개어 그 속에서 우리의 경험들에 의미를 제공해주는, 진리를 해석해 줄 것에 대한 확신이다. 그 성경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끝내고 우리에게 교역을 행하도록 부르시는 그 여러 현장으로 흩어져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성을 우리에게 회상시켜 주는 것이다. 목사도 교회회중들도 항상 그 예전의 기대를 따라서 완전히 성공적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을 주일마다 기억나게 해주는 강력한 권면이다.

의미해석은 마치 일차적으로 언어적이요 인식적인 일이라고 들리겠지만, 사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은 추론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 즉 우리는 느끼고, 보고 냄새맡고, 듣는 등의 일을 한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고 개념화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어려움을 느낀다. 아나 파블로바에게 어떤 질문자가 "당신이 춤출 때 무엇을 이야기합니까?"하는 질문에 대답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내가 만약 그 대답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춤을 추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파블로바의 대답을 반영하면서 오린 클鲜(Orin Klapp,1969:19-20)은 이것과 또다른 비추론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비술"(mystique)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사람이 말로 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깨달아 아는 전체의미이다. 교회가 하는 대부분의 의미해석은 이와 같이 비추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배를 통해서, 음악에서, 성례전에서, 예배장소의 상징에서, 교회예산의 우선 순위결정에서 상징화되는 것들에서, 친교시간의 커피와 도우넛에서, 상을 당한 가족을 찾아가 묵묵히 함께 앉아 주는 데에서 우리는 항상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들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자로서 행동하면서, 목사들은 내가 제2장에서 문화적(사회적인 것과 구별하여)권위라고 부른 것을 행사한다. 그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방법을 통제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실재에 대한 정의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다. 목사는 불일치를 다룰 수 있게 도와주며, 이런 자원들과 그들의 경험사이에 연결을 지어주려고 한다. 그 언어와 상징과 예전과 믿음의 이야기들은 그들의 이야기가 되며, 그들의 경험들은 새로운 가능성들과 새로운 희망에 열려지게 된다.

공동체 형성

교회는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는 소속공동체로 고독과 고립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다른 사람들과 돌봄과 자원의 관계를 맺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나누게 하는 곳이다. 교회는 기독교생활의 덕으로 교인들을 양육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런 공동체생활의 특성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의 통치의 표지로서 정의와 화해의 의미를 증거한다. 이것은 두 번째 지도력의 과제, 즉 공동체형성을 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 과제와 의미해석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각각의 과제는 서로 강화하면서 기독교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해준다. 복음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기독교공동체의 성격과 윤곽을 정의하도록 돕는다. 복음의 의미는 친교를 제공하며, 돌봄과 지원을 표현하며, 정의로운 공동체에 참여할 때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반대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이야기들까지도 천박한 정신을 가진 불공정한 공동체에서는 실현이 어려움을 가질 것이다.

생명력이 있는 기독교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교회와 같은 제1차적 공동체들은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1967)이 "실현촉진 구조들"(Plausibility Structures)이라고 칭하는 것들의 실예이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대화를 통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상징적 예전적 표현들을 통하여 독특한 실제이해의 실천을 촉진하여 신뢰성을 유지한다. 피터 버거는 이렇게 주장했다(Peter Berger,1967:46-47),"모든 종교적 전통들은, 여러 가지 교회론들을 개발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계속적인 실현촉진(Plausibility)을 위해서 구체적인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그는 이것이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금언의 한 가지 일반적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실현촉진구조가 약하면, "기독교세계도 흔들리고 기독교의 실재도 자명한 진리로서 ㈛개인들에게㈝ 교회의 짐을 함께 지고 갈 수 있게 만들 수 없다. 실현촉진구조들이 견고하면 할수록, 그것에 기초한 세계도 견고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의 소속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기독교이야기의 해석은 더 가능성이 있고 생동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유로 해서, 교회에의 소속차원은 선택항목이 아니다. 공동체형성은 제1차적인 지도력의 과제이다. 목사들은 모이는 공동체의 관계들과 구조들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도와야한다. 에베소서 저자의 가르침대로,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엡4:13).

목사가 공동체를 형성하는 한 가지 길은 세례를 통해 개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성찬상 주위로 사람들을 불러 교제하는 성례를 집례하는 것이다. 지금 설명한 해석적인 역할, 특히 비추론적 요소들 중 어떤 것들과는 분명한 중복이 있다. 성서신학자 웨인 미크스(Wayne Meeks,1983)는 바울이 세운 교회들에 대한 멋진 분석에서 사회학의 수단을 사용하여 이런 연관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공동체형성의 강력한 상징적 수단 일뿐 아니라 인식 불일치에 직면하여 의미를 해석해 주는 강력한 상징적 수단을 창출한다. 교회에로 개종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특히 부유한 여인들), 예술가들, 장사꾼들, 주인들, 노예들 등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공통된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 상위하는 신분들, 즉 제1세기 사회에서 부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부분적으로 무시당하는 신분들이었다. 그들의 예전, 특히 세례와 성만찬은 새로운 실재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하는 강력한 비언어적 상징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 공동체에로의 가입은 사회에서 그들을 규정하던 옛 신분에 대한 죽음이요,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성도들 서로와 교제하는 새로운 의미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새로운 가입자들이 자기들의 옛 정체성을 벗어버리고(가끔 문자 그대로 그들의 입었던 옷을 벗어버림)과거를 씻어버리며, 그리스도와 다른 성도들과 새로운 교제로 일으켜 세움을 받는 드라마를 경험케함으로 이것을 비언어적으로 상징하였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을 새로운 공동체와 일체가 되게 하며 연대성을 향상시키며, 독특한 기독교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도왔다.

이런 성례전은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적인 비추론적인 수단으로 계속되었다: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가입시키며,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역에로 부르시는 사건이요,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며,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로간의 교제를 새롭게 하며, 깨어진 삶을 살아가는 자를 위해 교역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냄을 받아 종의 교역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회상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들과 다른 예전들은 공동체형성을 위한 목사들의 역할의 중심이었다.

공동체형성은 또한 공동체의 본질과 기능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신학적 사회학적 통찰들을 필요로 했다. 즉 공동체형성에는 공동체와 그 역동성을 이해하는 능력, 경영과 행정기술들, 그룹 관계와 갈등조정의 기술들, 또한 정치적 설득적 능력들이 필요하다. 그 목적은 공동체의 구조들과 과정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에 충실하고, 회중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 그 크기, 자원들, 정황들 - 에 합당한 공동체의 생활을 창출하는 것이다.

목사계속교육의 기회에 조직개발과 갈등조정 등에 대한 강조가 많아지고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목사도 신학교육자들도 항상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서 경영과 행정의 역할을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또는 신학적 근거를 가져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1950년대의 사무엘 블리자드의 연구(Samuel Blizzard,1956)들은 이렇게 세속적인 일같이 보이는 행정적 역할과 조직관리 역할들은 최소의 만족을 주고 있으며, 규범적인 관점에서 최소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블리자드의 연구는 30년 이상 지난 오래된 것이지만, 그 발견들은 아직도 교역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실시한 목회학 박사 프로그램연구에서 (Carroll and Wheeler,1987), 광범위한 교단 배경을 가진 2400여명의 목사들을 조사하였다. 목사들에게 지교회 담임목사의 여러 가지 역할이미지를 설명하는 항목들을 주고, 하나 하나의 항목을 자기 묘사에 적합한 순으로 등급을 매기라고 요구하였을 때, 응답자들은 압도적으로 "말씀의 교역자/교회회중의 교사"를 자기이미지로 선택하였다. 물론 이것은 의미해석과제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세 가지 공동체를 세우는 자의 이미지들 - 집례자/예전집례 제사장, 조력자/촉진자, 그리고 특히 교회행정가 - 은 자기묘사 이미지로 상당히 낮게 평가되었다.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1956)가 안수교역자에게 적절한 이미지로 "목회지도자"를 제안했을 때에, 비평가들은 이것을 "대경영자", 목사에 대한 경영지향적 비신화적 견해라고 비난했다. 휴와 갚(Hough & Cobb,1985)은 이것을 목회의 경영자모델이라고 칭했다. "목회지도자"는 물론 이런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니버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니버는 이 모델을 수도원전통에서 빌려왔으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지도자로서의 목사상의 의도했다. 니버가 지적한대로 그러한 역할은 교회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 아니라 초대교회 감독(episcopos)의 역할과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갖는다. 초대교회 감독은 한 교회나 더 많은 교회의 관리가로서, 성례전을 집례하며 모여있는 공동체생활에 목회지도(행정을 포함하여)를 하였다. 교회는 변화하는 환경가운데서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한 지도력을 계속 필요로 하고 있다.

공적 교역능력을 배양하기

세 번째 목회과제는 능력배양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을 반영한다. 그 목적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인들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이다. 약간 더 곻부르게 그것을 설명한다면 이 과제는 모이는 교회생활과 흩어지는 교회생활의 상호작용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목회과제는 공동체개발사역자들이 하이티에서 창출했던 역할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생기를 불어넣는 자"(animateurs)라고 부르는 지도자들이다. 즉 자기들의 처한 상황에 건설적으로 대응하며, 자기집단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집단형성 및 활성화 테크닉들을 훈련받은 자들이다. 이 추진자(animateur)들은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며, 해결책을 실제로 수행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자기 그룹을 지원하는데 테크닉을 훈련받았다. 한 분의 저자(Hollar,1988)는 다음과 같이 그 목표를 설명했다,"열쇠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그룹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요, 밖에서부터 그들의 결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역할이 목사들에게도 요구되고 있다. 목사들은 교회의 벽을 뛰어 넘어서 세상속에서 섬기는 집단과 개인교역자들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추진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과제도 쉬운 과제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 사회환경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에 일치하는 신앙적인 언어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그러한 세속사회는 말이나 또는 행동을 통하여 공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을 기껏해야 단순히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역겨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신앙적인 언어와 행동의 적절성을 무시하려는 상황에서 신앙의 능력과 적절성을 주장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한 과제가 아니다. 어떤 때에 이것은 자기신앙과 그 의미를 담대하고 분명하게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도 방어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증거와 더불어 다른 관점을 가진 자들과 기꺼이 대화하고자하며,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신방법을 가진 자처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겸손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뜻이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고 저런 경우에는 무엇인지에 불분명할 때에 특별히 중요하다. 나는 한번 나의 동료교역자에게 자기와 자기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가서 자기가 신청한 켐퍼스밖에 있는 커피점에서 맥주 파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증심사에 동행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목사는 그것을 자기 사역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 커피점 가까이에 있는 장의사의 주인이 그의 신청에 의의를 걸었다. 그 장의사는 자기입장을 지지해 달라고 자기교회목사를 데리고 왔다. 사회를 맡은 심사관은 놀랍고 혼동이 된다고 고백했다:"나는 목사님을 한쪽 테이블에 모셔 본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양쪽 편 모두에 목사님을 모시고 온 경우는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덕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것일 수 있다. 임신중절권, 차별철폐를 통하여 과거의 부정의에 새로운 옷을 입히려는 노력, 학교군의 설정에 인종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 등 몇 가지만 보더라도 이와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잇슈들에서 이것은 얼마나 옳은 말인가. 그러나 가끔 요구되는 것은 궁극적인 자세보다는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1955:84ff)가 부차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적 확신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확신을 살아가는 부차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것으로, 우리와 같은 궁극적인 확신을 갖지 못한 세상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가는 나날의 실제생활을 존중하면서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공동선을 위하여, 즉 일터에서나 지역사회나 국가생활에서 발생하는 잇슈들에 더 인도적이요 공정하고 또는 정의로운 해결을 시도하고자하

는 사람들과 공동의 장을 찾는 것이 포함된다. 본 훼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부차적인 것에 남아 있으므로서 훨씬 순수하게 궁극 적인 것 즉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이것은 거듭하여 부차적인 것이 정확히 궁극적인 것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 는 것이며, 그것은 무거운 양심이 아니라 분명한 양심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 가운데서 능력을 배양하는 역할이 실제로 의미해석과 공동체형성 역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만약 목사의 의미해석자로서의 역할이 가족, 직장, 또는 공적생활의 구체적인 잇슈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명을 발견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그 목사는 이미 능력배양의 역할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목사가 교회의 공동체형성에 참여하면서 개인들을 치료하고, 새 힘을 얻게 하며, 지탱하고, 기독교생활의 참의미를 따라 양육하고 있다면, 그 목사는 이 사람들의 공적인 생활을 지원하는 일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 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수행할 수 있다. 첫째로, 모이는 교회생활에서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이는 교회에서 공적 지원과제를 강조하는 것은 공적교역의 제1차적인 장으로서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목사도 laos,즉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다. 목사들이 모이는 교회생활에 제1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공공생활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모델을 보이고, 공적인 사건에서 종교의 상징적 대변자로 행동하므로서 더 넓은 사회에서 중요하고 생생한 역할들을 수행해야 한다. 나는 19세기의 주장과 같이 목사의 역할을 교회의 내적인 생활에 제한시키거나 아니면 오늘날 아주 널리 퍼진 바와 같이 교인들의 역할들(목사와 평신도)을 사적인 영역에 제한시키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여러 해전에 나는 두 사람의 동료교수와 함께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드 시의 공적인 생활과 종교와의 관계를 연구한 바 있다(Mckinney, Roozen, and Carroll,1983; Mckinney and Carroll,1984). 제1차적인 발견은 교회회중이 어떻게 공적인 생활 - 그것이 전도하여 새신자를 얻는 것이든, 사회봉사를 제공하는 것이든, 사회개혁에 참여하는 것이든 간에 - 과 관계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 목회지도력이 규정하고 해석하는가 하는 것과 목사가 직접 공적생활에 참여하여 그 역할을 어떻게 실제모범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교회회중이 공적생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참여하는가(또는 참여하지 않는가)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여기에 첨가해서 우리는 지역사회 지도자들에게 종교와 종교전문인들과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목사들과 신부들과 랍비들이 공적인 사건들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면, 종교자체의 부재로 본다.

공동목회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견해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공적세계의 제도들 속에서 날마다 일하는 사람들은 바로 평신도들이다. 그리고 평신도의 제1차적인 사명은 이곳에서 자기가 담당한 교역들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이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한다. 종교기관의 대표자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넘어서, 목사들은 교회-사회 컨텍스트 상호작용의 수단에 대한 전문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지역사회의 다이나믹스와 공적인 잇슈들을 분석하는 능력, 그 잇슈들의 부차적인 성격과 그 잇슈들의 기독교 이야기와의 관계의 이해, 그리고 그런 잇슈들에 대한 성찰과 참여에서 타인들과 함께 협력하려는 (교회안에서와 교회밖에서)자발성 등이 포함된다.

세 가지 과제들의 종합: 실예

이 세 가지 교역의 핵심과제들 하나 하나는 설교, 교육, 조직관리, 사회분석 등의 역할에서 그에 합당한 특수한 방법들과 기술들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는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필요조건을 공유한다. 하나 하나의 과제는 성찰에서 타인들을 지도할 능력을 필요로 한다. 즉 이 세 가지 과제는 모두 상황들을 분석하고, 그 상황들의 기독교이야기와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리고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그 상황에 대응하는 방안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한다. 이것은 다음에 내가 상술하고자하는 성찰적인 지도력을 가장 짧게 설명한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력에 대해 상술하기 전에 한 가지 실예를 통하여 이 세 가지 과제들의 토의를 종결짓고자 한다. 앞서 나는 이 세 가지 과제들을 하나의 돌의 세가지 면, 즉 하나 하나는 구별되면서도 전체의 부분이라는 비유로 설명하였다. 나는 상호관계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하고자 한다. 기독교 정체성에 관련된 의미들은 소속감에 초점과 목적을 제공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소속을 위하여 소속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속하고 있다. 소속은 다시 상호커뮤니케이션과 예전적 행위를 통하여 의미를 탐구하고, 훈련하고 지탱하는 컨텍스트 - 실천구조들 - 을 제공해준다. 의미와 소속 모두는 다시 공적생활에서의 교회교역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수적이다. 공적생활에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다시 의미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생겨나게 하고 지원적이며 지탱적인 공동체의 필요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세 가지 핵심과제들을 사고할 때, 우리는 다음의 실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의 생활과 사명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들의 역할들에 대해서 통전적으로 볼 수 있다.

콜체스터 연합교회

콜체스터 연합교회⸅(연합 그리스도교회와 미국 침례교회연합)는 최근까지 도시화과정 때문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코네티커트 주의 조그만 시골교회이다. 1970년대에 주일 낮 예배에 대략 50여명이 출석하는 이 교회는 주로 농부들, 사무직과 생산직근로자들 그리고 조그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들은 성실하고 충성된 교인들이었으나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어서 그 동네와 교회에는 특히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이 이사와서 교회에 출석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증가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들어와서 변화의 누룩이 되었다. 1980년에 그 교회는 다비다 포이 크랩트리라는 새 목사를 청빙하였다. 그녀의 지도하에 그 교회의 교인수도 증가되었고 교인들의 참여도도 높아졌다. 1988년에 평균 출석율은 대략 150명이었다. 더 중요하게 이 교회는 공적인 생활과 사명을 실천하는 데에서도 상당히 성장하였다.

크랩트리목사는 그 교회에 부임하자 더 넓은 교회전통에서 평신도 교역의 비전을 보고 그것을 자기목회와 조직의 지도력을 지도하는 이미지로 삼았다. 교인들 가운데 소수가 그녀의 비전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교인들의 대부분은 많은 개신교도들이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듯이 형식적으로만 그 비전을 수긍하였다. 그 비전은 교인들이 가져야 할 더 광범위한 기독교정체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역을 목사의 교역으로 제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는 교회교인들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적으로 그 목사는 자기가 주도할 수 있는 설교와 교육의 기회에 일차적으로 그 비전을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그녀는 교회수양회에서 ("우리가 받은 은사들을 발견합시다"는 제목으로), 그리고 특별강좌 등에서 ("주일 그리스도인을 뛰어넘자"는 제목으로) 먼저 그 비전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획과정을 지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 교회가 경험한 최초의 공식적 계획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회학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공동 교역을 중심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동목회방안을 온 교회가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의 성공적인 돌파구는 1986년에 지금까지 해온 수양회나 신앙강좌들이 대학교육을 받은 전문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언어능력이 약간 낮은 근로자들이 대부분인 그 교회교인들에게는 낮서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왔다. 그래서 그녀는 세 사람의 평신도팀(한 사람은 기술자, 한 사람은 임원, 그리고 또한 사람은 자료분석가였다)을 만들고, 직업종사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이야기하면서 하루 저녁을 보냈다. 목사는 조용히 관찰자로 남았다. 사람들 - 교사들, 사무원들, 그리고 생산직 근로자들 - 에게 그들 자신이 경험한대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 만족했던 일들과 좌절을 느꼈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변함없이 다음의 질문을 하였다,"당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당신의 직업에 어떠한 차이를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일이긴 했으나 피이드백은 그 경험이 그들에게 긍정적인 것이었고 어떤 이들은 거기에서 좀 더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음 단계는 12명으로 언약그룹을 만들고 신앙과 직업에 관한 잇슈들을 깊이 있게 나누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담임목사와 새로 부임한 부목사도 참여하였는데, 이것은 중요성에 대한 상징으로 두분 목사가 다 참여할 만큼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 성경공부, 직업상황에 대한 사례연구, 독서, 그리고 직업경험 나누기 등 - 그룹멤버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그 신앙이 자기들의 직업과 다른 국면의 생활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능력들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그들 대부분에게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예를 들면 약간 신비적인 성경의 개념들인 "정사와 권세"는 자기들의 직업상황과 교회실천의 구조적인 요소들이 그것들 자체의 생명을 가진 것 같고, 자주 사람들을 속박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탐구하면서 그들에게 새롭게 와 닿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해방자 그리스도 - 그 목사의 중심신학 - 의 의미도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룹멤버들은 또한 그룹 안에서 서로에게서부터 의미있는 돌봄과 지원을 경험했다. 그들은 나날의 생활에서 그들 자신의 교역수행을 서로 권면하고 서로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다른 언약 그룹들이 처음 그룹의 방식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더 많은 교인들을 언약 그룹들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목사는 새로운 컨퍼런스와 신앙강좌 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그 그룹들의 도움을 얻어 목사는 주일예배시에 특별소명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룹회원들은 기도의 내용을 도웁기 위하여 자기들의 실제 직업현장의 경험들 가운데서 얻은 통찰들을 제공하였다. 각기 다른 직업들을 기억나게 하는 것들을 매주일 예배시마다 한 가지씩 십자가 앞에 놓인 성찬상위에 장식하여 교인들에게 직업소명을 회상하게 하였다. 준비한 소명기도는 그 직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드리게 하였다. 예를 들면 전기공들이 그 날 예배의 초점이었으면, 전기선들과 전기기구들 몇 가지를 성찬상위에 장치하고 다음과 같은 기도를 전기공들이 함께 드렸다:

창조주 하나님이시여, 주님은 모든 에너지와 힘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위험스 러운 에너지를 선한 힘으로 방향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전환시키려고 애쓰는, 전기 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소 서. 근원을 추적하는 문제들을 인내로 견디게 하시고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하게 도 우소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만드는 일에서, 더 나은 봉사를 위해 노력하는데서, 그리고 사람들을 대우하는 과정에서 주님의 교역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소 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Crabtree,1989:6)

다른 한편, 과목 숙제의 하나로 그 목사는 직장에서 일하는 자기교회 교인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즉, 그녀는 그들의 작업현장 경험을 관찰하면서 그들과 함께 작업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이것이 목회에 중요한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교인들의 일하는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만나고 있다.

직업현장에서의 교역에 대한 강조가 발전하면서 목사와 지도자들 몇 사람은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지속적이 되려고 한다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한가지 더 깊은 잇슈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곧 우선적으로 교인들을 교회당에 데리고 오는 것과 모이는 교회생활을 지원하는 데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의 교역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은 "세상으로 나가는"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다음의 사실을 깨달았다(Crabtree,1988:18),"교회가 교인 자신들의 교역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실천할 수 있게, 교인들을 진실하게 지원하려고 한다면, 교회생활의 제도속에서 그 지원을 육체화할 수 있게 준비시켜야 한다." 이것을 위해 그녀는 일단의 질문들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치리회와 위원회들을 초청하여 교회안에서와 특히 교회밖에서 평신도들의 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사역을 어떻게 갱신할 수 있을까를 심사숙고하게 하였다. 그녀는 평신도 교역의 능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배양시키기 위하여 소위 "경영시스템" 이라는 교회구조의 개요를 구체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역의 의미에 대하여 집사들과 토의하면서 더 큰 확신을 얻었다. 그 후에 그녀는 강화받은 후에 경영시스템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집사의 지도아래 "세상으로 나가는" 구조로서 교회를 재구조화하는 계획을 개발하기 위하여 특별 단기 위원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지금 진행중이요, 이를 통해서 수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자기 목사의 비전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도 그런 비전을 갖지 못하고 더 전통적인 기대를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그들은 이런 교인들이 거절당하고 있다는 감정이나 배제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관심을 쏟았다.

나는 여기에서 부분적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것은 매우 놀랍고 고무적인 이야기이다. 이것은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이다. 진정한 시험은 현재의 목사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공동교역에 관한 강조를 지탱하고 성장시킬 능력이 그 교회에 있을까에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교역의 세 가지 핵심과제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성의 분명한 실예이기 때문이다.

목사의 최초의 초점은 세 번째 과제, 즉 직장생활에서 평신도들의 공적교역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설교와 교육, 즉 의미해석에서 강화되었으며, 그녀는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평신도들의 교역에의 소명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후에 교인들이 소명은 소명기도를 통해서 예전과 상징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해석의 과제를 그만두었다면, 그녀의 비전이 교인들의 의식속에 심겨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예배의식에 첨가하여, 언약그룹 경험은 아주 중요한 "실현촉진구조"를 제공하였고 소속감의 센타가 되어서 신앙과 매일의 경험을 솔직하게 지탱적이요 돌봄의 환경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그룹들은 실현촉진구조 뿐만 아니라 책임성 있는 구조가 되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확신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 확신을 따라 살아가도록 서로에게 책임을 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 비전이 교회의 정체성과 성격의 한 부분으로 구체화되고 육체화되고자 한다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그것은 제도화되어야 했으며, 그래서 경영시스템에 대한 강조는 아직도 그 교회에서 진행중이다. 그런 재구조화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는 늘 해오던 것보다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인지 하는 점은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지도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형성이라는 중대한 과제이다.

나는 다른 교회도 이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많은 교회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비전의 구체적인 표현은 그 교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기들의 교회의 정체성을 독특한 문화와 상황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교회의 비전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그것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서 해석되고, 예전적으로 집례되어서, 교인들이 자기들 자신의 경험들과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목사의 해석의 빛 안에서 교회의 이야기들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지탱되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에서 대화와 나눔과 지원을 통해서 현실화되고 그 공동체는 비전의 육체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은 흩어지는 교회생활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비전을 따라 살아가도록 지원 받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강력한 지도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의미해석자요, 공동체를 세우는 자요, 공적교역의 능력배양자로서 기능을 하는 목사의 지도력은 필수적이다. 이런 역할을 권위있게 행사할 수 있는 지도력의 특성을 나는 "성찰적인 지도자"라는 용어로 부르고 싶다

제6장 권위있는 지도자: 성찰하는 지도력의 역동성

경영자들은 서로 독립된 하나 하나의 문제들과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인 문제상황들과 부딪친다. 나는 그런 상황들을 메스 (mess)라고 부른다. 문제들이란 분석을 통해서 그런 메스로부터 추출한 추상개념들이 다… 경영자들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메스를 조정하는 것이다.

-럿셀 아코프-

목사들이 의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교회를 지도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고, 공적 교역을 실천할 수 있게 능력을 배양시킬 때에, 그들은 여러 가지 수준의 복잡성에 부딪친다. 어떤 잇슈들은 평범하여 어려움이나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과거에 사용했던 방법들과 실천 테크닉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평범하고 문제성이 없는 상황들은 여기에서 나의 관심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초점은 더 복잡하고 보통이 아닌 잇슈들, 즉 목사들과 평신도들의 능력에 도전하고 권위의 질문을 제기하는 잇슈들이다. 우리는 조그맣고 평범한 문제들을 훨씬 많이 만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만, 또한 우리는 럿셀 아코프(Russel Ackoff)가 메스라고 부른 복잡하고 역동적인 문제덩어리들, 제대로 규정되지도 않고, 구조화도 되지 않고, 끝이 없는 문제군들도 만난다. 10대 청소년들이 사고로 죽은 후에 의미있는 목회적 대응을 하는 것이든, 어려운 설교본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든, 예산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든, 직원들간의 갈등을 처리하는 것이든, 논쟁 중에 있는 사회적 잇슈에 어느 편을 드는 것이든 간에 - 이것들은 몇 가지 실예들에 불과하지만 - 그러한 잇슈들은 거의 평범한 상황으로 끝나지 않고 교과서적 해결도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합당한 대응방법에서도 의견일치를 보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존경하는 목사들 가운데 한 분인 카릴 마니(Carlyle Marney)가 한번 아주 냉소적으로 이야기한 바로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이생은 누구에게나 결코 가만히 누워 있지도 않으며 오래 있어주지도 않는다"(Kratt,1979:89).

하나님의 백성들의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해야 할 도전은 그들에게 부딪쳐오는 구체적인 메스들 가운데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메스에 대응할 자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 도전은 잘못된 위험이 있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 때에라도 기독교적 정체성을 존중하며 대응할 수 있는 자원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의 해석자요, 공동체를 세우는 자요, 그리고 공적 교역능력을 향상시키는 자인 목사들의 특별한 도전은 개인들과 교회가 기독교적 적절성을 가지고 대응할 수 있도록 지도력의 권위를 행사라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도전에 대응하는 방법이 본 장과 나머지 2장의 주제이다. 이 3장들은 2장에서 개발한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에 근거하였다. 특별히 2장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부차적인 목사권위의 기초들, 즉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회상해 보라. 또한 개인적인 권위와 제도상의 (직위의)권위의 구별을 회상해 보라. 나는 또한 인격적인 권위가 의미있게 중시되고 있으며 그것은 계속적인 경향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 두 가지 부차적인 권위의 기초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를 원하며, 목사가 메스의 상황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에 부딪치는 도전에 합당한 대응방법으로서 이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 필요한 전문성에 대해서 본 장과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그러한 전문성은 안수식에서 공인 받을 수 있다(직위와 권위). 그러나 그것은 실천에서 증명되어야 한다(인격적 권위). 마지막 장에서 나는 필요한 전문성이 어떻게 신성성과 관계가 있는지를 검토하겠다.

메타 교역 방법론

목사들이 권위있게 역할을 실천하려면 어떤 종류의 전문성이 필요할까? 신학교 교과과정의 구성에서 보여주는 것은 안수교역과 교회의 여러 가지 역할에 합당한 다양한 지도력 이론들과 테크닉, 그룹 다이나믹스, 성경, 신학, 교회역사, 윤리 등에 대한 실천적 지식이 목사의 전문성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나 교역상황에서 부딪치는 의미, 소속감, 능력향상에 대한 잇슈들을 건설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제들을 신학교에서 숙달한다. 이것이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고 끝날 수 있을까?

성경의 이야기들, 교회의 역사, 신학, 그리고 교역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은 배우는 것은 하나이고 이러한 자원들을 창조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실천에서 사용하며 특히 새로운 자원들을 발굴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특히 현대세계가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복잡한 실천의 "메스"에 부딪칠 때는 더욱 그렇다. 목사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전문성은 구체적인 지식과 실천에서 그 지식을 성찰하면서 활용하는 능력의 결합이다. 이 양자는 모두 필수적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교역에 대한 일종의 포괄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메타 방법론으로 목사가 활동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역할들과 변화하는 컨텍스트에 자기의 지식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목사들에게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방법을 의미하는 말로 메타 방법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이 방법론은 예를 들어 설교, 목회상담, 그리고 갈등조정 등의 목사의 특정한 역할들과 연관된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과 테크닉들이다. 내가 다음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들은 그러한 메타방법론이다.

도날드 쉔(Donald Schoen,1983,1987)의 최근의 저작들에 의하면 이 메타 방법론은 "성찰적인 지도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의 의미는 교역의 실천상황에서 복음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절하게 교회를 지도하는 능력이다. 성찰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일종의 실천의 해석학이다. 그것은 상황을 "읽는"능력이며, 상황을 읽는 동안에 복음에 충실하고 상황에 적절한 대응을 위하여 지식, 경험, 그리고 기술자원들을 이끌어내고 필요한 경우에는 새로운 자원들을 창출해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한 자기와 함께 교역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뢰와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인격적 스타일과 정체성을 의미한다(나는 이것을 7장에서 성찰적인 지도력이라는 제목으로 다룰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목사들은 평신도와 상하관계의 불균형적인 방식이 아니라 파트너쉽 관계에서 권위를 행사한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다이나믹스를 상술하기 전에 내가 왜 메타 방법론이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싶다.

신학교육에 대한 한가지 계속적인 불평은 그것이 목회현장의 "현실세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과 이론들은 목회현장의 구체적인 상황들과 거리감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신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자기들이 교실에서 배운 것과 교회에서 자기들에게 부딪쳐오는 구체적인 교역의 잇슈들과 연관시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자주 불평한다. 이런 불평을 표현하는 한가지 투박스런 말은 "모든 이론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한다면, 프란시스 베이컨의 철학자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가상적인 행복을 위해 가상적인 법칙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높기 때문에 거의 빛을 비출 수 없는 별들과 같다"(Wood,1985:64f에서 인용).

교단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자주 이 비슷한 발언을 하는데 특히 최근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에게 불평을 토로한다, "그들은 교역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목회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들은 별로 없다. 그들은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이론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훌륭하지만 어떻게 실천에 옮길까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반대로 많은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 졸업생들의 실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에 당황하여 고개를 흔든다. "우리는 어디에서 잘못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목회적 역할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보다 더 많은 성경적 신학적 기초들을 교육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비전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교역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능력도 상실하지 않았는가?" 평신도들도 비슷한 불평을 하고 있다. 제1장에서 소개한 목회삽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신도들은 가끔 그룹을 지도하는 능력, 최근의 재정관리지식, 교회성장전략, 공적인 발언능력 등등에서 목사의 교역능력을 찬탄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들 자신이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모자라다고 느끼고 있다. 목사는 "영적인 깊이가 없다." 목사는 평신도들의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들과 잇슈들과 복음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목사는 더 광범위하고 도전적인 관점에서 예산을 사용하고, 새로운 교인들을 전도하고, 여러 가지 교회프로그램들을 만들고, 활동하게 만드는 교회의 목적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 불평들은 서로 모순이 된다: 어떤 이는 실천적인 능력이 모자란다고 불평한다. 다른 이들은 신학적 지식과 사고가 교역실천을 지도할 만큼 준비되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불평자들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같은 하나의 문제를 다른 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론과 실천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한 집단은 성서연구, 역사연구, 신학과 윤리학, 실천의 여러 가지 측면들에 대한 이론들을 포함하여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실제적인 교역과제수행에 부적합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거리가 먼 것이라고 불평한다. 교역실천에 대한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이들은 단순히 이론-실천잇슈의 또 다른 면을 지적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단순히 목사들이 실천에서 경험을 쌓고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을 적용하는 법들을 발견한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소망사항에 불과 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실천적 지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생동안 진흙탕을 헤메이며, 신속한 해결을 약속하는 테크닉을 찾아 여기 저기 방황한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성찰적인 지도력이다. 성경적인 비유를 사용한다면, 그들은 마른 뼈들이 어떠한 형태를 입을 수 있는 지를 비전으로 볼 수 있는 능력과 성령께서 그 뼈다귀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 모두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능력이 부족하므로서 그들은 또한 교역실천의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력: 정밀검토

신학교육에 관한 최근의 저작에서 찰스 우드(Charles Wood,1985)는 신학교육의 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전과 식별이라는 두 가지 시각적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헬라의 시인 아킬로쿠스(Archilocus)로부터 한가지 이미지를 빌려온다:"여우는 많은 것들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만을 안다"(68). 고슴도치는 사물에 대한 응집력 있는 비전을 개발하는 능력을 비유하다. 반면에 여우는 모든 복잡한 것들 가운데서 구체적인 것을 보는 능력을 대변한다. 우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능력으로 여우의 능력을 가지든지 아니면 고슴도치의 능력을 가지든지 둘 가운데 하나이지, 두 가지 능력은 다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드는 한 사람이 이 두 가지 능력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즉, 우리는 전체로서 기독교 복음을 응집력 있게 이해할 수 있으며(비전), 동시에 기독교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의 성격을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다(식별)(Wood,1985:69,73).

그는 신학교육의 핵심과제가 이 두 가지 능력을 개발할 수 있게 학생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드의 초점은 신학교육의 구조와 실제에서 비전과 식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비전과 식별이라는 그의 비유는 성찰적인 지도력의 핵심요소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익한 방법이다. 비전이 없이 우리는 교회성도들을 현상을 뛰어넘게 지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식별이 없이는, 즉 구체적인 현실상황에서 실천하는 정확한 그림이 없으면 비전은 실현될 수 없고 오히려 창조력보다 냉소주의를 더 조장시키게 될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들이 물어야 할 결정적인 질문의 의미를 정의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능력을 배양시키는 과제를 수행하려고 할 때 어떻게 비전과 식별을 함께 얻을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질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존재의 비전은 어떤 방법으로 구체적인 상황들과 장소를 적절하게 육체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실천의 요구에 더 가깝게 연결된 이론들을 개발하는 일일까? 그것은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는 더 좋은 테크닉을 배우는 일일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모두 불충분한 것일까?

이런 문제들을 심사숙고하는데에 도날드 쉔의 저작은 특별히 자극제가 되고 유익하다. 쉔은 MIT 대학교의 도시연구와 교육담당교수이다. 최근에 발표한 두 권의 저서(Schoen,1983,1987)에서 그는 "성찰적인 실천"이라는 죤 듀이(John Dewey)의 초기 아이디어를 확장시키고(1933), 그것을 전문실천에 적용시켰다. 쉔은 "성찰적인 실천"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시키면서, 이론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시키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들을 비평하고, 실천의 성격에 대한 건설적인 설명을 제사하였다. 내가 이제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관점은 신학교육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첫째로 나는 성찰적인 실천에 대한 쉔의 주요통찰들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것을 사용하여 두 가지 교역실천 사례를 해석 할 것이다.

성찰적인 실천가

전문인들의 실천을 광범위하게 관찰한 후 쉔은 전문직업인들의 실천에서 이론-실천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이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가정은 일종의 "기술적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으로 도출된 이론과 일련의 기술들에 하나의 표준체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문직업인들이 실제문제에 부딪칠 때, 그들은 분명한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이런 이론들과 테크닉들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있어 그 목적은 건강이요, 변호사에게는 성공적인 법정소송이요, 사업경영자에게는 이익이다(쉔,1987:33).

이런 기술적 합리성모델이 목사의 직에 적용될 때, 그것은 다른 전문직에서 보는 바와 같은 이론에서 실천으로 향하는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학문적 규범에 따라서 엄격한 학문성을 갖춘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신학교로 간다. 예를 들면, 성경과 성서비평에 근거한 원리들, 교회역사, 신학과 윤리학 등의 지식을 배우고, 교역실천의 기술들을 배우러 신학교에 다닌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이론들을 적용하는데 필요한 방법들과 기술들을 배운다. 예를 들면, 설교 또는 상담의 기술, 또는 교회성장의 테크닉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운이 따른다면 그것을 개인구원이라는 용어로 정의하든지 또는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라고 정의하든지 간에 교역의 목적 또는 목표에 대한 비전을 개발할 것이다. 졸업에 즈음하여, 우리는 지교회나 다른 교역상황에서 부딪치는 구체적인 잇슈들,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과 테크닉을 적용하여 성공적으로 목회 할 수 있을 것이며, 공식적인 계속교육과정을 통해 신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들의 공백을 메우고 새로 개발되는 실천이론들과 기술들을 보충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권위는 우리가 가진 - 그러나 평신도는 갖지 못한 - 전문성에 있으며, 교역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학과 이론들을 적용할 때 권위는 저절로 생겨날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이론들이 예를 들어 의학이론들보다 덜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교역실천의 목표에 대한 정확한 의미 - 예를 들면 구원이든지 해방이든지 - 도 역시 건강의 경우에서보다도 더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목사가 주어진 상황에 실제로 적용하려는 수단들은 더욱 논쟁의 소지가 많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사의 실천에서도 일반적으로 기술적 합리성의 모델에 유사한 '이론에서 실천에로'의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참으로 19세기말에 시작된 교역의 전문화와 신학교육에 대한 강조는 신학교육을 교역실천의 요구들과 더 밀접하게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더 기술적으로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수단들을 목적에 맞추므로서 더 과학적이 되게 하려고 했다.⸂ 폴 더글라스(H.Paul Dougas)는, 20세기초의 중요한 교회생활 사회학자로, "과학적인 교인화"의 개발을 촉구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은 누구나 교회와 목사들이 당면한 문제들에 과학적으로 결정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전문직들도 그 당시에 더 과학적이요, 더 기술적으로 합리적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쉔의 저작들은 이러한 전문교육 실천모델들과 그것에 근거한 전문적인 권위에 대한 가정에 결정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전문직들과 전문학교들이 자기 회원들에게 깊이 있게 가르치고자했던 가치들과 규범들의 중요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합당한 전문직의 실천행동을 지도하고 한계를 설정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또한 쉔은 꼭 배우지 않으면 안될 전문지식의 실체 - 이론들과 테크닉들 - 의 중요성도 거부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도전한 것은 가치나 규범 - 나의 용어로 비전요소 - 이나 또는 이론들과 테크닉들이 기술적 합리성의 방법으로 구체적인 사례의 실천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오히려 그는 전문직업인들이 부딛치는 실천문제들 중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부분들이 평범한 것이 아닌 것들로 불확실성, 불안정, 유일성, 그리고 목적과 합당한 수단들에 대한 가치갈등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는 실천에 대한 기술적 합리성의 가정들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론들을 적용하는 한 가지 최선의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실천의 목적(들)도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쉔은 전문직업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안정된 교과서적 해결책이 통하지 않는 "메스들을 조정하면서" 보낸다는 아코프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실천의 수단뿐 아니라 목적까지도 불분명하다. 그 상황과 성찰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만 그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교회에 대한 상황적 관점은 앞서(4장) 언급한 바 있다. 거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사들과 평신도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실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하여 씨름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거기에서 교역실천에 대한 교과서적 해결책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 하나의 교역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최선의 방법은 없다. 어떤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냐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사명에 충실하려는 노력가운데서, 여러 가지 다양한 자원들과 관점들을 종합해 나가는 성찰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일들이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성찰하는 행위는 필수적이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화하는 암시를 발견한다.

나날의 삶을 성찰하면서 그리고 특히 전문직업인들의 실천을 관찰하면서 쉔은 유능한 직업인들이 실제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성찰적인 실천모델을 제안하였다. 그는 또한 성찰적인 실천모델을 사용하는 전문교육 접근방법을 제안하였다. 쉔의 주장에 따르면 가장 통상적인 상황들을 제외했을 때 전문인들은 "행동과 성찰"(reflection-in-action)이라고 부르는 과정, 즉 전문가의 입장에서 예술적 기교와 직관에 상당한 양의 시간들을 투여하고 있다. 이론들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행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아는 복잡한 방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유능한 전문인들은 특별하고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면, 그것들을 교과서적 사례로 취급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할 특수한 상황으로 보고 처리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치와 최초에 파악한 대로 그 문제를 둘러싼 상황들에 상응하여 그 문제의 틀과 그 문제에서 자기들의 역할의 틀을 만들면서 시작한다. 즉, 그들은 관점에 따라 한 부분씩 차근차근 틀에 맞추어 나가면서 그 문제에 대한 최초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 문제가 자기네들이 경험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나 경험에서 발견하는 다른 문제들과 유사한지를 묻기도 한다. 그것은 이것과 같은가? 아니면 저것과 더 유사한가? 그러나 그 잇슈에 대한 최초의 틀을 포함해서 그 문제를 검토하면서 사용하는 '행동하면서 깨달아가는 방법'은 쉔(Michael Polany:(1958)을 이어서)이 "암묵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것은 우리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는 얼굴을 인식하거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에 하는 것과 같이 간접적인 추론이 없이 은연중에 깨달아 아는 지식이다.

암묵적 지식과 추론적 지식들을 모두 사용하여, 성찰적인 실천가들은 상황을 경험하면서 최초에 내린 해석이 암시하는 문제에 대응하려고 몇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쉔은 이것을 "골격만들기 실험과제"(frame experiment)라 부른다. 그것은 탐험적인 시도일 수도 있다. 성공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나 기대없이 그 상황에 파고 들어가는 탐험작업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을 탐구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해낼 수 있다면 탐험적 시도는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Schoen,1983:145). 그것은 마음가운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신중하게 시험하는 시험추진(move-testing)실험일 수도 있다. 이 때에 기대하던 목적이 나오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실패한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어느 경우에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들이 생겨날 때가 자주 있는데, 그것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러 저러한 대응책들을 시험하면서 더 효과적인 대응책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대응책이 자기의 목표에 가장 효과적일까를 결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과 그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한 실험과제들을 실천하고 성찰하면서(reflect-in-action), 성찰적인 실천가들은 여러 가지 대응책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선택한 진로를 따라 계속 나아갈 수 있다. 특히 무언가 될 것 같을 때 그렇게 한다. 그들은 다른 해결책들을 시험하면서 그 문제와의 관련성을 평가한다. 또는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처음의 이해를 재평가하고 그 문제의 틀을 재구성하고 또 다른 즉석 실험을 할 수도 있다. 틀을 구성하고 실험하고, 틀을 재구성하고 다시 실험하는 과정은 어떤 해결책이 발견되거나 아니면 현재로 이 문제는 처리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계속된다. 그 과정의 성공과 실패는 전문가의 경험과 암묵적인 지식의 일부가 되며 이것은 미래 실천의 본보기가 된다. 잇슈에 따라서 실천-성찰의 연속성은 단번으로 끝날 수도 있고 더 많은 시간과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다음은 쉔이 관찰한 이 과정의 요약이다:

하나 하나의 경우마다, 전문인들은 불확실한 것들이나 독특한 것들을 발견하면 놀라 거나 의문에 빠지거나 혼란을 경험한다. 그는 자기 앞에 당면한 현상들과 자기 행위 에 암시된 전 이해들을 성찰한다. 그는 시험을 하면서 그 상황에 새로운 이해를 얻을 뿐 아니라 그 상황의 변화를 창출하려고 한다.

누군가 '실천-성찰'에 참여한다면 그는 실천의 컨텍스트의 연구자가 된다. 그는 이 미 확증된 이론과 테크닉의 범주에 의지하지 않고 그 독특한 사례에 대한 새로운 이 론을 창출한다. 그의 탐구는 이미 동의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들을 연구하는 데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그는 수단들과 목적들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자기가 만든 문제상 황의 틀에 따라 이 양자를 대화식으로 정의한다. 그는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나누지 않는다. 그는 결정방법을 추론하면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가 지금 시험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실천행동이기 때문에, 실행은 그 탐구의 기초 위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불확실하거나 독특한 상황에서까지도 실천성찰은 계속 진 행된다. 그 이유는 이 방법이 기술적 합리성처럼 양분된 이중구조가 아니기 때문이 다.

나는 쉔이 설명하는 방법론의 여러 측면들을 실예로 보여 주기 위하여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 전에 성찰적 실천에 대하여 두 가지 점들을 첨가하여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찰적 실천의 과정은 그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여러 전문직업들 사이에 충분한 유사성이 있지만, 쉔은 성찰적인 전문인들이 같은 문제에 접근할 때에도 직업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같은 직업 안에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쉔의 주장에 따르면(Schoen,1983:274ff), 그 차이들은 전문인들이 실천성찰에 가지고 들어오는 적어도 네 가지 요소들의 차이들 때문이다:

전문인들이 실재를 설명하고 자기들의 실험을 수행하는 매체, 언어, 그리고 레파토리 의 차이들(예, 건축가는 스케치 페드를 사용하고, 엔지니어들은 모델들과 실험도면을 사용하고, 목사나 사회봉사직들은 대화와 상호관계를 사용하고 있다);

전문인들이 그 상황과 정찰적인 대화에 가지고 오며, 그 상황의 틀을 만들기 위해 서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합당한 목적과 수단의 한계를 정하며, 결과를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가치들(쉔은 이것을 "식별 체계"라고 함)의 차이들;

전문직업인들이 현상들에 의미를 만들어가는 포괄적인 이론들의 차이(이론들은 문 제들에 구체적인 해결을 제공하지 않고 그 문제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언어를 제공한 다);

자기들의 과제들을 설정한 역할 구조들의 차이

첫 번째 차이는 우선적으로 직업들간의 차이에서 볼 수 있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같은 직업 안에서의 차이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성찰적인 지도력의 비전화 차원과도 중요한 관계다 있다. 참으로 전문인으로서 목사의 가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비전과 교회의 목적의 이해를 형성하는 데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첨가하여, 목사가 배운 지식과 이론들 - 성경과 전통, 신학연구, 사회과학들과 다른 여러 가지로부터 얻은 것들 - 은 그가 당면하고 있는 현상에 의미를 만들어주는 언어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목사가 자기의 최우선적인 과제 - 예를 들면, 전도자, 예언자, 교사, 목회자, 또는 행정가로서 - 를 어떻게 구성하느냐하는 점은 교회의 비전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실천-성찰이나 식별에 참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나는 이 잇슈를 다음 장에 다시 다룰 것이다.

쉔이 지적한 또 다른 요점은 관계적 차원에서의 권위의 적절성이다. 성찰적으로 일하는 전문인들을 관찰한 바에 따라, 그는 성찰적인 전문인들의 권위가 전통적인 전문가 권위 모델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찰적인 전문가들도 권위를 가지지만 그 권위는 전문인들의 전문성을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거나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가 아니다. 오히려 전문인과 고객(목사들은 고객을 교회성도들로 읽으라)이 "성찰적인 계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Schoen,1983:298f). 그들은 함께 참여하여 고객이 당면한 잇슈들을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고객은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전문인과 함께 직면하고, 효과적으로 판단하기 위하여 기준을 공적으로 만들며, 적절한 성취를 지원하고, 보상하고, 표현하기로 동의한다. 전문인은 자기가 가진 특수한 지식과 성찰적인 전문성을 그 관계에 가져오며, 고객의 유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한다. 전문인과 고객 쌍방은 상대방을 종속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통찰과 은사들과 성찰능력을 그 상황에 가져오는 사람으로 존중한다. 전문인들은 고객의 질문과 비판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들의 권면과 상담의 의미를 공적으로 성찰하려고 기꺼이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는 쉔이 지적한 대로 (1983:299),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성찰적인 전문인은 무조건적인 권위의 보상, 즉 자기의 능력에 도전 받지 않고 실천 하는 자유, 상대적이지만 취약성이 없다는 위로, 복종의 기쁨 등을 포기한다. 그에게 열려진 새로운 만족은 대체로 고객에게 해준 자기의 충고의 의미, 자기의 실천적인 지식,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발견에서 온다.

간단히 말해서, 성찰적인 실천가는 지금까지 비난받아 온 전문모델인 불균형적인 권위관계를 상대적이긴 하지만 균형적인 모델로 바꾸어서, 실천상황의 메스 잇슈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당한 상호존중과 나눔과 합심노력을 행사한다.

이제 위에서 설명한 약간 추상적인 토의를 교역실천의 두 가지 구체적인 실예를 사용하여 지상으로 가져가 보자.

다시한번 콜체스터 교회의 실예를 사용하자.

앞장에서 소개했던 콜체스터 교회를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그 교회는 특별히 비전과 식별의 상호작용의 좋은 실례일 뿐 아니라 실천-성찰의 많은 특성들을 교역상황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비다 크렙트리가 콜체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았을 때에, 그녀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의 교역을 강조하는 교회의 비전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다. 기술적 합리성의 모델을 사용했다면, 그녀의 첫 번째 단계는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들을 발견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워싱턴 DC에 소재한 구세주 교회의 모델과 같은 평신도 교역 활성화 모델을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콜체스터 교회에 그대로 본 받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많은 목사들은 최근에 나온 교회성장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배워서 곧바로 그것을 자기교회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시작했다면, 구세주 교회나 또는 다른 뛰어난 교회의 모델을 자기 교회상황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던 많은 교회들처럼, 그녀도 아마 아주 고약하게 실패했을 것이다. 공동교역을 해야 한다는 그녀의 비전과 콜체스터 교회의 실제상황은 새로운 교회에 부임했을 때 대부분의 목사들이 경험하는 것처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 과정은 매우 느리지만, 그녀는 실천-성찰의 방법론에 아주 가까운 과정을 택하고 문제의 틀을 구성하고 다시 구성하는 여러차례의 절차들을 사용했다.

첫 몇 달 동안에 그녀는 쉔이 이야기하는 탐구적 실험과정에 가까운 일들을 했다. 그녀는 교회와 그 지역의 평신도들을 이해하고, 가능성이 있는 출발지점을 찾아보고, 그 비전을 실현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애물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요약하면, 그녀는 콜체스터 교회에 적절하게 공동교역을 실천하려고 할 때에 그녀와 교회가 직면하게 될 문제의 틀을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비전의 실현은 가능한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비전은 다만 목사의 소망 사망에 불과한 것일까?

예를 들어, 그녀는 이전에 있었던 교회의 분쟁으로 교회가 갈라져서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서 좀 더 복음적인 교회를 세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때문에 남아있는 교인들은 누구에게든지 상처를 입힐까 보아서 신앙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히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농사를 짓거나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는 나이 많고 오래된 교인들로부터 인근도시의 생산직 근로자나 경영자로 일하는 젊고 새로운 교인들까지 다양한 수준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서로 대조적인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쉽지 않은 처지였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다른 많은 교회들과 같이 콜체스터 교회도 자기들의 직장생활을 포함해서 공적생활에 개입하지 않아야 된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초기의 교회의 반응조사는 그녀가 교회를 지도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잇슈의 틀을 구성하기 위한 그녀의 처음 노력들은 그녀와 그녀의 공동교역의 비전을 지지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프로그램식 대응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평신도 교역에 대한 설교,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은사의 발견" 이라는 주제의 수양회, 그리고 평신도교역에 대한 컨퍼런스 등이 포함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아이디어들과 재료들 중 얼마는 과거의 경험과 평신도교역의 잇슈들을 다룬 다른 사람들의 재료들이었다. 처음에 교인들 중 상당부분에게 의식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녀는 여러 지점에서 저항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다시 성찰하면서 그 잇슈에 관한 틀을 재구성하여야 했다. 그녀는 수양회와 컨퍼런스가 중류층과 경영스타일의 교인들에게 더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양회와 컨퍼런스로는 중하류게층과 근로자들에 덜 효과적이며 이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그 프로그램들에 벌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로 목사와 그녀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은 새로운 전략들을 세웠다. 그 결과로 목사와 그녀의 평신도 지도자 그룹은 새로운 전략들을 세웠다. 여기에는 청취팀 운영, 언약그룹, 교인들의 직업현장에 목사가 찾아가는 "그림자 전략", 신앙과 매일의 삶을 연결시키는 계획적인 주일 예배시간운용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전략들이 열매를 맺었지만, 그녀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더 깊은 문제를 깨닫고, 그 잇슈에 대한 또 새로운 틀을 구성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 비전을 실천하기 위한 여려가지 프로그램들에 새로이 첨가시켜야 할 것들, 즉 보통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첨가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지속적인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것들을 제도화시켜야만 했다. 새로운 제도화는 곧바로 끝나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교회운영에 있어서 교인들의 은사와 자원들을 사용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구조보다도 "교회로 들어오는"구조인 모이는 교회구조를 더 크게 강조하여야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러므로 새로이 그 잇슈의 틀을 재구성하면서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그 상황이 단순히 새로운 프로그렘을 개발하여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는 그 비전을 지원할 수 있게 구조들과 과정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 이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교회의 새로운 경영구조를 개발하고 실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목사와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 모두가 실천성찰을 계속해 나가는 지속적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 외부의 컨설탄트를 사용하여 그들의 비전실현이 어느 정도까지 와 있으며 다음 과정을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인가를 평가하는 것을 포함한다.

성찰적인 지도력에 대한 이 구체적인 실예는 여러 해의 기간을 거쳐 일어났다. 그러나 성찰적인 지도력의 모델은 또한 훨씬 시간제한을 받는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목회 상담기간, 당회나 위원회의 중에 일어나는 잇슈, 매 주 해야하는 설교작성과 같이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과제들에도 이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 소요는 콜체스터 교회에서보다 훨씬 짧지만, 실천성찰을 통해 행사되는 기본적인 권위의 활용은 거의 비슷하다. 콜체스터 교회의 사례와 달리,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경우도 있다. 다음의 사례는 단기간에 시행되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한 교인과의 좌절감을 안겨 준 만남

이 사례는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례는 교인과의 만남의 과정에서 어떻게 실천성찰의 모델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그 목사의 사례 재구성에서 그녀는 아기리스와 쉔(Argyris & Schon, 1974:41)이 제안한 실천사례 성찰방법을 사용했다.⸄ "마르다"목사는 큰 도시에 있는 오래되고 명성있는 미국연합 그리스도교회의 담임목사이다. 다른 도시교회가 경험하는 것처럼 상당한 교인 감소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그 교회는 사회정의의 잇슈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그 활동을 하고 있다. 그 교회는 또한 교역과 선교를 지원하기 위한 상당한 기본재산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대화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교회는 교회의 기본재산의 투자를 감독하는 재정위원회에게 투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 교회의 입장을 보고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특별히 남아프리카와 방위비지원 잇슈에 대하여 이것을 요구하였다. 그 위원회의 의장인 "앨리슨"은 나이 많은 여인으로 또 다른 동년배와 한 사람과 함께 그 위원회에 오랜 동안 참여해왔다. 그녀는 교회의 요구를 처리하는 일에 반대하고 투자회수에 중요한 의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앨리슨과 마르다는 그녀가 그 교회목사로 시무해 온 2년 반 동안에 순탄치 않는 관계를 가져왔다. 앨리슨은 마르다가 그 교회의 청빙을 받을 때 그녀를 후보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었고, 투자회수잇슈 이전에도 이 둘 사이에 다른 갈등들이 있어왔다.

앨리슨은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살고있고 교회의 매일 매일의 생활에 참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거동이 불편한 앨리슨에게 편의를 도모하려고 모든 다른 회의는 교회에서 했으나 재정위원회만은 앨리슨의 아파트에서 모였다. 그 아파트는 좁고 어둡고 너무 더웠다. 충분한 의자들도 없었다. 위원들 중에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그 모임의 환경이 불편하고, 앨리슨 혼자 독주하는 지리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가끔 적대적인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목사에게 털어놓았다. 마르다는 이런 태도를 들었으나 그녀자신도 양극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앨리슨과 더 긍정적 관계를 맺고 싶었고 교회가 고민을 더하게 하는 제도가 아니라 위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고 그녀를 잘 섬기고 싶었다.

재정위원회가 모이는 날, 마르다는 자기 스케쥴이 중복되어서 그 회의에 출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 딜레마를 알려주려고 앨리슨에게 전화했다.

상담 내용 목사의 자기성찰

마르다:안녕하세요,앨리슨.저는 마르다입니다.

오늘은 어떠세요.

앨리슨:그렇고 그렇지요.

마르다:별로 나아진 게 없는 모양이지요? 앨리슨은 자기의 상태에 대해서 사실대 로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이다.과 거에 그녀는 예전의 고통이 재발했다고 넌지시 이야기했지. 그것이 그녀가 이 야기한 모든 것이다. 나는 자세히 이야 기한 것을 후회한다.

앨리슨:말하기가 어렵군요. 이건 오래 되었지요.

그러나 나는 목사님이 알다시피 투사입니

다.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구요.

마르다:지난 번 회의에서 당신은 "그저 그렇지요" 우리는 인생을 위협하는 어떤것,불편을 라고 이야기했어요.더 나아지지 않았다니 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 않

실망스럽군요. 는가? 그러나 그녀는 나를 신뢰하고 있

지 않아.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앨리슨:물론 실망스럽지요, 그러나 나는 밝은 면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것이 내 성격

아니겠어요?

오늘 어떠세요. 목사님은 요새 아주 좋아

보입니다만.

마르다:글쎄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쁘네요!나는 아마도 내가 약간의 약점을 내보이고,

기분이 좋군요. 사실은 좀더 나아졌어요. 몇 그녀로 하여금 나의 인생속에 약간 끼

가지 이유로 9월에는 우울했었거든요. 어 들어오게 한다면 그녀도 나를 자기

그러나 이제 나의 에너지가 돌아오는 것 같 의 인생속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군요.그리고 내정신도 더 낙관적이 되었어요. 나는 먼저 그녀로 하여금 나를 위한

나는 얼마동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버 교역자가 되게 하여야겠다.

지 기일에 너무 마음을 빼앗겼나봐요.

앨리슨:그런 상실에서 회복되는데는 오래 걸리지요.

나는 알아요. 나는 목사님이 너무 빨리 돌아

왔다고 생각해요.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내지 않는 것 같아요.

마르다:그게 사실일거예요. 나는 나에게 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부드러운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하는 것이 나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요.어떤 의미에서 나의 일은 그점에서 나의 여기에서 나는 변명하고 있다고 느

슬픔이에요.나는 그것을 통합하면서 살지 않으 낀다. 사실 앨리슨은 내가 일주일간

면 안 되었어요.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떠나 있었던 것을 불평하는 한 사람

있어요. 나는 그것을 위해서 더 나은 목사가 이었다. 나는 마치 나의 신뢰성을

되고 싶어요. 회복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나는

나는 인간의 과정이나 느낌들을 존중하지 그녀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

아니하는 은행이나 어떤 장소에서 일하는 것 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

같지 않아요. 그리고 교회는 멋진 곳이에요. 려주고 싶어요.

우리 사회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가끔 우리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마음의 아픔을 지고 있

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요.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기로 아마도 나는 여기에서 약간의 교육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우리자신을 을 할 수 있을 것이다."언약"은 앨

있는 그대로 내어놓고 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리슨에게 의미있는 단어이다.그녀는

우리마음의 무거운 짐을 나누는 곳이 교회에요. 조합교회주의에 헌신하고 있지.나는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마음을 열기 만하면, 교회는 그녀에게 무엇이 잘 (침 묵) 못되었든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암 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마르다:앨리슨, 이런 때에 나나 교회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고

싶습니다. 교통이 필요하십니까?

마케팅에 도움을 원하십니까?

앨리슨:감사해요.그것은 내가 해결 해야하는 문제에요.

그것은 쉽지 않아요.나는 감사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있어요.

마르다:나는 당신의 사생활을 존중해요,앨리슨. 나는 나는 나를 원하지 않는 곳에는 가고

다만 내가 당신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으며,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당신을 돕고 싶다는 것을 당신이 알아주었으면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해요. 차 한잔을 나누면서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이라도 말이에요.

(침 묵)

마르다:앨리슨, 나는 재정위원회에 대해서 당신과 이 그녀는 미쳐 날뛸거야!그러나 내가

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나에게 이미 약속된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그녀도 이해

스케쥴이 있어서 당신이 도와주었으면 하네요. 하고 존중해줄거야. 내가 당회의 의

교회 인근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약 거래 견을 존중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문제로 지역사회 특별위원회가 있어요. 그녀도 분명한 증거도 있고 하니 호

나는 그 회의에 참석하고 싶어요. 특히 당회가 의적으로 응답할 거야.

교회 밖에서의 활동을 강력히 권하고 있어요.

앨리슨:이번 재정위원회는 아주 중요한 회의인데요! 회의가 무슨 소용이 있어.아젠다를

마르다:중요하지요. 재정위원회 자체가 얼마나 복사해서 회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

중요해요.그러기 때문에 제가 전화드리는 는 것은 혼자서 독제하려는 뜻이지.

겁니다.오늘 저녁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그러니 무슨 대단한 것이 결정되겠

대충 결정할수 있게 오늘 재정위원회아젠다를 어.투자상담자들은 화가 날 것이고,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앨리슨이 세세한 것을 소화 못하고

더 큰 재정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 고 있으니 모든 회원들이 실망할거 야.

앨리슨;목사님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은 JR과 PL이 JR과 PL과 같이 투자상담회사의 고

이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며, 우리가 그들과 위층이 이런 지저분한 교인과의 갈

함께 모이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그들이 회의 등문제와 관리은행선정과 같은 교회

에 참석하겠지만 우리는 투자목표들을 토의할 내부문제를 토의하는 회의에 참여한

것이고,그들도 가장 최근에 있는 (은행이름) 다면 걱정되는데….

의 큰 실수에 대하여 몇 가지 정보를 줄 예정 사실 투자문제와 자기들이 거기에

이에요.나는 관리은행문제를 매듭짓고 싶어요. 관련되지 않았다면 메어리도 앨리슨

목사님도 아시지요 않아요. 메어리가 이 모든 도 교회일에 이처럼 깊이 끼어들지

일을 시작해 놓고서는 그것을 해결하는데 않았을거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야.

협조하지 않고 있어요.

마르다:내가 알기로는 관리은행을 바꾸는 일의 손익

계산을 다해 본 후에 메어리는 자기의 본래의

입장을 재고했고, 이 지점에서 바꾸는 것은

교회에 꼭 이익이 된다는 확신이 없다는 거예요.

나는 이 모든 것 때문에 당신이 실망하는 것과

같이 메어리도 실망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목표에 대한 토의를 이야기해 봐요. 거기에는 앨리슨은 재정위원회가 회의때마다

사회책임과 예산필요에 대한 토의가 있어야해 아젠다로 우리의 투자에 대한 사회

요. 또 다른게 있어요? 적책임에 관해서 보고해야한다는 교 회의 요구를 수행해야 해. 그러나 그녀는 다음회의 일정조정과 같은 일에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우 리는 아마 그 보고서를 결코 받을 수 없을 거야!

앨리슨:없어요. 회의의 내용에 관한 것인데. 그러나

나는 바꾸는 데 있어서 투자의 적극적인 면을

약간 이야기했으면 해요.

마르다:무슨 말씀인데요?

앨리슨:나는 남아프리카에 대한 이 모든 비난들에 앨리슨과 이 위원회의 딱 한사람이

대해서 속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요! 이 모든 남아프리카에 대한 투자철회문제를

것은 부정적인 이야기라구요! 우리가 하고있는 거부하고 있어. 그리고 그 두사람의

것 가운데 좋은 일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 주장과 태도는 다른 회원들의 혐오

해야 한다구요. 를 사고있어. 그러나 여기에 앨리슨 이 그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구멍이 있는 것 같애.

마르다:위원회가 투자정책에서 인준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지역사회개발 프로젝트들이나 의료연구

프로젝트들, 예를 들면 아직도 재정적인

지원을 못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에 대해서

심사숙고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거예요.

앨리슨,당신은 이 지역의 예언자적지도력에

지원할 수도 있겠어요. 이 자원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교회는 모든 활동가운데

서 생명을 존중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앨리슨:그렇지요. 그러나 그것은 유치한 짓이예요.재정 나는 이길 수 없겠네!사례를 가지고

책임에는 엄격해야 한다구요. 다투는 것은 과거에도 제대로 안됐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IBM에서 돈을 빼내어서 어.하나 하나 잇슈를 토의하는 것은

파산할 조그만 일에 투자할 수 없어요! 불가능해.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당신 같은 사람들은 여기에 숨어 있는 모든 일은 어떤 긍정적인 진전이 있으면

잇슈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것을 격려하고 그녀를 오래 참는 것 뿐이야.

마르다:앨리슨,나는 다만 당신이 하고 있는 적극적인

투자 잇슈에 대해서 당신의 지도력을 격려해

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재정위원회의 사업에

대하여 심사숙고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지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앨리슨의 입장

이 나를 깨우치거나 또는 이것이 자

당신이 알고 있듯이, 내 생각에는 최고의 유교회정책의 긍정적인 사례라고 믿

이익을 남기는 것이나 안전한 투자보다 더 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중요한 다른 잇슈들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때문에 앨리슨과 싸우고 싶지도

위원회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게다가 언권회원 않다. 나는 얼마전에 그녀의 목회자

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교회가 나아갈 가 되고 이와같은 일에 그녀를 괴롭

아주 특별한 차원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통찰을 히는 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더하고 나는 나의 것을 더하고,성령께서 원하는 만약 내가 이 위원회에서 그와 하

대로, 그 과정에서 아마도 약간의 진리의 빛이 나가 된다면,그것이 교회의 아젠다

우리모두에게 비추이겠지요.나는 당신이 몇가지 가 아닐지라도 나의 아젠다를 사용

투자의 대안들을 심사숙고하려고 열려져있다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을 알고 기뻐요.나는 오늘 재정위원회모임에

참석지 못해서 미안해요.그러나 나는 오늘저녁의

대화가 다음달에도 계속될 것을 믿어요.

앨리슨:목사님은 오늘 저녁에 참석지 않기로 작정하셨어

요?

마르다:당신은 아젠다를 당신의 손에 꽉잡고 있는 것같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이처럼 중요

이 들리네요.나는 오늘저녁 지역사회 마약모임에 한 교회일에서 앨리슨의 지도력과

참석하려고 해요. 아마도 나는 거기에서 약간의 나와 그의 이런 관계 때문에 무척

기여를 하고 뭔가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 낙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같아요. 내가 내자신의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도 사회적 갈등위기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은 저주받을 소리 다.

이 사례의 형태는 성찰적인 과정으로 들어가는 창문의 역할(또는 적어도 성찰적 과정의 재구성)을 할 것이다. 이 사례는 콜체스터 교회의 사례에 비해서 초점, 시간구성, 그리고 결과 등에서 현저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슷한 실천-성찰모델의 요소들을 볼 수 있다.

마르다는 잇슈의 틀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 만남에 가지고 들어왔다. 앨리슨과의 과거경험들의 역사가 있었고 이것은 마르다의 양극감정을 조장했다. 그녀는 이번 전화가 어려울 것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다는 또한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목사로서 자기의 역할에 관해서 두 가지 가정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그녀가 어떻게 해야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데에 양극감정을 조장시켰다. 한편으로 그녀는 앨리슨에게,"교회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지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고 이야기한다. 이 견해는 그녀의 교역의 비전을 표현하고 있으며, 정의와 화해의 잇슈에 참여해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 특정한 교회의 정체성과도 일치한다. 그것은 또한 지역사회의 활동들에 참여해야한다는 그녀의 역할구성에도 도움을 주었다. 참으로 그 교회당회는 이런 역할을 권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위로와 용기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다의 역할은 그녀의 고집스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앨리슨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목사의 일이다. 이 두 가지 이미지들은 원리적으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어떤 이는 교회 의 공적 교역을 더 강조하고, 다른 이는 소속과 지원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 특정한 사례에서, 이 양자는 갈등하고 있으며, 마르다에게 역할 갈등을 조성하고 있다.

앨리슨도 역시 그 잇슈의 틀을 만들고 있다(우리는 그녀의 실천-성찰을 은밀히 관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믿든지, 그녀도 역시 책임적으로 기능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비록 신중하고 실용주의적 재정책임을 강조하며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투자의 촉구와 상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행동과 지배욕구는 재정책임의 정의와 모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의 틀을 구성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목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미에서 틀을 만들고 있다. 목사는 교회의 재정문제에 대해서 실증주의적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래서 앨리슨은 사회적으로 책임성 있는 투자를 촉구하고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을 "유치하다"고 본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여기에 숨겨진 모든 잇슈들을 이해하지 못해요!"

전화의 목적은 앨리슨에게 자기가 그 위원회모임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지만, 마르다는 먼저 그 상황과 자기역할에 대해서 목회적인 용어로 틀을 구성한다. 이것은 예상되는 갈등을 "부드럽게 하는"방식이지만, 그것은 또한 앨리슨을 목회하려는 그녀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녀의 목회적 틀에서, 그녀는 자기의 틀을 시험한다: 그녀는 자기의 약함을 내보임으로 이것이 상호 돌봄을 일으킬 것을 희망한다. 그것이 자기의 생각대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때, 그녀는 다른 방식을 시험한다. 그녀는 그 교회전통을 인용하여 언약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상호작용을 조장하려고 노력한다. 이것도 역시 일종의 실험추진(move-taking)시험이다.

다시 한번 목회적 틀로 아무런 진척이 없을 때에 마르다는 재정위원회 회의로 대화를 바꾸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사회정의책임과 지역사회참여자로서 그녀의 역할이 전면에 등장하였고 그녀에게 잇슈의 틀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자기의 스케쥴상의 중복을 이야기하고 그녀가 지역사회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는 당회의 요구를 앨리슨에게 회상시켰다. 앨리슨이 반대하면서 그 위원회회의의 중요성을 주장했을 때, 마르다의 성찰은 자기의 좌절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또 다른 틀을 시험하였다 - 이번에는 사회정의 틀이었다. 그녀는 재정위원회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사회책임에 관한 교회의 요구를 앨리슨에게 기억나게 했다. 그녀는 또한 앨리슨에게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그녀의 역할가운데 예언적 지도력의 가능성을 보도록 격려했다. 그러나 앨리슨은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계속되는 좌절가운데서 마르다는 자기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모두가 이기는 방식으로 그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앨리슨에게 있어서 한쪽 편은 반드시 져야만 하는 이기느냐 지느냐의 게임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천사의 축복을 받은 야곱과 달리 마르다는 결정에 있어서도 사회책임 제안에서도 앨리슨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만남의 틀을 다시 한번 재구성하여 목회적 틀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그녀는 목회적으로 앨리슨을 존중하려는 노력으로 그 교회의 전통을 끌어들였다:"당신은 당신의 통찰을 더하고, 나는 나의 것을 더하여, 성령께서 원하시면, 아마도 약간 더 진리의 빛이 비취게 될 것입니다…"

마르다(그리고 우리)는 이 만남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다음은 그녀가 배운점을 그녀 스스로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가장 파괴적이요 신랄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마저 신뢰를 개발할 수 있다. 즉 싸우면서라도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반드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건 전한 가정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으로부터 이런 관계를 성취하려고 했다. 앨리 슨은 나에게 올가미를 씌우려했다. 그녀는 나를 위협했다. 나는 그녀의 인정과 감사 를 원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보류하는 것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우리는 교역을 시작할 때에 하나의 역사를 물려받으며, 그 역사는 인간의 약점들로 가득하다. 앨리슨은 내가 밀어내고 있으며 위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조직에서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감정적 거리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방법은 그녀를 고립 시키지 않고 오히려 교역파트너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하나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린다. 나는 인간생명이 다른 어떤 잇슈보다도 더 소중하며 그녀의 지배욕은 아주 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이것을 얻으려 고 교회의 아주 불건전한 패턴들과 결탁했으며, 제도와 타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그녀를 오래 참기로 결정했으며 얼마동안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교회목회는 세상에서 가장 좌절을 주고 굴욕적이요 화나게 하는 사역이다. 관계의 복잡한 모자이크들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도 느리게 일어난다.

돈은 힘이다. 정보는 힘이다. 누구든 이런 것들을 지배하는 자는 교회에서까지 많은 것을 지배한다.

이상은 사건 이후에 행한 솔직하고 유익한 실천성찰이다. 대체로 이것은 성서적이거나 특히 신학적 범주로 진술하지 않았다. 더 명백하게 그렇게 시도하였다면 마르다는 자기 내면깊이에 간직하고 있는 교역의 비전과 앨리슨과 자기의 역할의 틀에서 생겨나는 긴장들을 더 완전히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어도 그녀 자신의 실천성찰과 클래스에서 그 실례를 제출했을 때 그녀의 동료들로부터 받은 통찰들은 미래 실천의 이론과 실제에서 그녀의 레파토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녀는 이 사례에서 자기와 교회의 교역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지도력을 행사하려는 그녀의 노력은 성찰적 과정에 유익한 창문을 제공했다. 우리는 기술적 합리성의 모델에서 보는 대로 직선적으로 이론에서 실천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행동하면서 성찰하고 엄격함과 자기 훈련이 있는 예술적 기교들과 함께 비전과 식별을 동시에 행하면서 지도하고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훈련은 일련의 과정이나 적용할 수 있는 공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합리성을 뒤집는 것이다. 목사가 성찰적인 지도력의 능력을 개발하고 싶거나 신학교가 성찰적인 지도자가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좀더 조직적으로 설명하고자한다.


















제7장 성찰하는 지도력의 구조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 - 고전 13:12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롬 8:26

모든 목사들이 콜체스터교회 목사와 같이 그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까? 모든 목사가 다비다 크랩트리와 같이 대응할 수 있을까? 앨리슨을 상담하라면 마르다와 같이 끝나지 않을까?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 일 것이다. 목사마다 (또는 평신도마다)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하여 언급할만한 가치조차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두 그렇다고 인정하기 전에, 나는 목회실천에서 이런 자명해 보이는 가정을 좀 더 깊이 고찰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나는 우리가 성찰적으로 지도하려고 할 때에 얻을 수 있는 주요 자원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실천에 대한 구조주의자의 견해

기술적 합리성에 기초한 실천과 실천-성찰에 기초한 실천을 대조하면서, 도날드 쉔은 이 두 가지 실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서로 다른 현실에 대한 가정들을 대조시킨다.① 기술적 합리성은 현실에 대한 객관주의적 견해에 근거한다. 전문직업인들은 이 모델에 근거하여 현실을 파악한다. 성찰하는 지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천-성찰모델은 구조주의적 견해를 갖는다. 현실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들은 목회실천에도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는 양극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주의적 견해에서 시작하여 구조주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전체 스펙트럼을 간단히 요약적으로 이해하려면 내가 1장에서 소개한 세 사람의 야구심판을 회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 번째 심판은 "그 볼이 틀림없이 스트라이크이기 때문에 내가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서, 분명하게 객관주의적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 두 번째 심판은 "내가 볼 때 그 볼이 스트라이크로 보이기 때문에 나는 스트라이크라고 선언했다"라고 함으로서, 온건한 구조주의자 또는 관점주의자에 속한다. 그러나 세 번째 심판은 "내가 그 공을 스트라이크나 볼로 선언하기까지 그 공은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아주 급진적 구조주의자를 대변한다. 너무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이 양극단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객관주의자는 자기의 직업에서 실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으며 전문직업인들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바로 거기에 실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발견해 내고 적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그것이 당연히 스트라이크이기 때문에 스트라이크라고 판정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실천과정에서 그들은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발견하고 이 진리를 여러 가지 실천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다. 전문직업인들 사이에 서로간의 불일치가 생기면, 이 지식체계에 근거하여 판정을 내리거나 아니면 사실자체에 대한 이해를 더 정확히 하여 서로 일치한 의견에 도달하려고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전문교육 - 의학, 법률, 신학, 또 다른 전문직 - 의 목적은 전문직을 지망하는 자들에게 현재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과학적이요 객관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목표는 자기의 전문실천의 목적 - 그것이 건강이든, 정의든, 구원이든 간에 - 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전문성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전문인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조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실재는 항상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우리자신에 의하여 어느 정도 구조화된다는 것이다. 인식하는 자와 그 인식의 대상은 아주 밀접하게 그리고 불가피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극단적인 구조주의자는 인식하는 자와 별개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는 아무 것도 없다고 가정한다:"내가 그 볼을 스트라이크나 볼로 부르기 전까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재와 진리는 항상 인식자와 - 인식자가 개인이든지 또는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는 집단이든지 간에 - 종속관계에 있다.

좀 더 온건한 입장에서도 구조주의자들은 고도로 관점주의적이다: 나는 그것을 스트라이크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스트라이크로 선언한다." 우리는 상황을 볼 때 항상 특별히 유리한 위치에 서서 보며, 이것이 우리가 보는 것의 형태와 색상과 틀을 구성하는 데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틀을 감사함으로 검토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 우리 자신의 관점보다 그 일에 더 의미를 준다고 생각 할 때, 우리 자신의 관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일 수 도 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구조주의는 모두 1장에서 설명한 지식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전문지식과 실천도 구조적 견해에 따르면, 역시 관점적, 즉 그 상황을 보기 위하여 우리가 착용하는 안경에 따라서 다르게 구조된다. 우리는 실천의 목적에 관해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관해서 서로 다른 관점들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기본적인 가정들이나 우리가 선호하는 전통들이나 또는 다른 이론들과 발견들에 근거하여 목적이나 수단들의 공정성, 적합성, 또는 효과들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은 상대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실천성찰을 해 나갈 때에,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구조들이다.

우리의 구조들은 위의 설명가운데서 암시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바 단순히 주관주의와 원자론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사회나 종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문화를 공유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교회를 포함하여 우리의 종교전통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문화를 공유한다. 이런 공유하고 있는 문화들이 우리에게 언어와 상징들을 제공하고, 우리의 세계관과 지각들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주고, 서로간에 커뮤니케이트 할 수 있게 해준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특정한 문화가 우리에게 보게 하고 알게 해 주는 그것들을 보고 안다.

두 번째로, 또 다른 종류의 상호작용, 즉 인식자와 인식대상간의 상호작용이 주관주의와 원자론적 인식에서 성찰하는 지도력을 구출해 준다. 진리는 인식하는자와 관계없이"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완전히 주관주의적으로 "여기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식하는 자와 인식대상의 - 그 인식대상이 또 다른 자기이든지 아니면 물질세계이든지 간에 - 사이에 있다. 영성과 교육의 관계를 쓰면서 파커 파머(Parker Palmer,1990:55f)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진리는 우리들 사이에, 즉 독립적이요 책임적이라고 이해되는 인식자들과 인식대상과 의 대화에서 발견되는 관계 속에 있다. 이 대화는 인격적 진리를 주관주의로부터 구 해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나의 지각과 욕구에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진정성 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찰적인 지도자가 행사하는 권위는 상대적으로 균형적이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또 다른 말이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성찰적인 대화 가운데서 진리가 발견된다는 상호작용에 기초한 것으로 그 대화는 그 상황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포함시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어떤 방법으로 교회의 지도력에 적용할 것인가? 우리가 권위를 객관주의적으로 행사하느냐 아니면 구조주의적으로 행사하느냐 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할까? 물론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가볍게 지나가서는 안되는 잇슈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목사다. 특정한 상황들에 따라서 다르게 접근할 것이요 이것은 목회실천에서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변수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객관주의자들에게는 의미를 해석하거나 공동체를 세우거나 또는 교회의 공적교역의 능력을 배양시키는 일을 하거나 상관없이 주어진 목회상황에 대응하는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다. 합리적 실천접근 방법은 목적들과 수단들이 상대적으로 분명한 곳에 실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의 실제응답들 가운데 상당한 차이들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나쁘게 말하면 그들이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이다.

어떤 객관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진리를 발견한다. 이것은 성경 무오론자들의 방식이다. 그들은 성경이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께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든지 그 상황에 적절한 말씀을 발견하게 하고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게 인도한다.② 또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전통에 엄격히 근거해서 진리를 발견하며, 특히 교황과 같은 최고의 권위의 무오성 또는 그 뒤에 있는 교회공의회의 무게와 같은 신앙과 실천에 속한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전통 속의 진리를 주장한다. 근간의 로마카톨릭 신앙에서 일어난 중요한 고투가운데 하나는 교황 요한 바울 Ⅱ세가 로마카톨릭 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카톨릭 신자들에게 고수하라고 촉구한 점증하는 객관주의자 입장에 대해서다.

성경문자주의자들과 로마 카톨릭 전통주의자들 외에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아직도 또 다른 객관주의자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5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폴 더글라스(H,Paul Douglas)의 과학적 교인화의 개념은 교회가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에 관한 법칙들을 발견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은, 더글라스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비슷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한 가지 예로 어떤 목사들은 교회 컨설런트와 연구자들의 발견과 이론들을 복음의 진리와 같이 보편적인 적용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자주 어떤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예를 들어 라일 샬러(Lyle Schaller)와 같은 컨설런트의 글을 - 나는 그의 통찰을 상당히 존중하지만 -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존중하는 것처럼 그렇게 존중스럽게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한다.

구조주의자 - 물론 나는 성찰적인 지도자를 이 유형에 포함시킨다 - 는 목회실천상황에 대응할 최선의 한가지 방법이 있다는 사실에 덜 확신을 가지고 접근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대응책들을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상대주의적 가정을 시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장에서 설명한바 있는 성찰적인 지도자와 상당히 비슷하게 기능할 것이다. 우리는 4장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교역에서 도출한 기준들과 같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확신들이 우리를 지도하는 지침이 될 것이다. 이런 확신들은 성경과 여러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인 교회전통에 의하여 전달받는다. 우리는 또한 사회과학자들과 현대교회 실천연구가들의 이론들과 통찰에도 의지하고 또한 다른 상황들에서의 경험에도 의지한다. 그러나 각각의 교역상황과의 성찰적인 대화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당한 응답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상황에서 자기의 복음의 이해에 충실하고, 특정한 상황의 독특한 성격과 다이나믹스에 합당한 응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한" 그런 상황에서 교역실천을 구조화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이다.

이것은 권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객관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 성경이든지, 전통이든지, 또는 과학적인 교인화든지 간에 - 한사람의 지도자로서 자기의 권위에 대한 더 안전한 기초를 갖는다. 특히 그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이나 전통이나 또는 교회실천의 법칙에 대해서 비슷한 확신을 공유할 때에 더욱 그렇다. 지도자는 단순히 성경의 장절을 인용하거나 전통을 인용하거나 또는 교역실천의 법칙을 인용하여, 이 객관적인 진리들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1장에서 논의한 이유들 때문에 그러한 객관주의적 접근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중의 많은 사람들에게 실행이 불가능하다. 권위있는 지도자는 지금도 많이 요구된다. 그러나 지도자의 권위는 기독교 존재의 비전을 형성하고 그 비전에 충실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교역상황에 합당한 대응을 구조화할 수 있도록 교역의 파트너를 돕는 능력에 있다. 그러한 상황들은 거의 단순하고 분명한 대답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천을 구조화하기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주요 자원들 몇 가지를 고찰해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또 하나의 교역실천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목적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역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죤은 중간정도 크기의 도시에 있는 도심지의 루터교회에 시무하고 있다. 그 도시는 부유한 교외지역과 빈곤한 도시중심 지역간의 뚜렷한 불균형으로 특성화될 수 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대략 250명으로 대부분이 중류층과 중하류층의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년이나 그 이상의 나이든 교인들이 많으며, 교외에서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도 약간 있다. 다음의 토의가 시작된 시점에서 대략 교인의 17%가 흑인들이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주변에 살고 있다.

캠퍼스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죤은 그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 교회를 위해서 도시 목회의 가능성을 보고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훈련, 전문성, 그리고 신학적 입장은 도심지에서의 교회교역에 대해서 역동적인 비전을 갖게 했으며 목사로서 자기의 역할을 분명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나는 나 자신과 교인들이 함께 도시의 미해결의 잇슈들에 참가하고 짓밟히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희망의 틕불을 비쳐주는 기대감을 가졌다…‥"

캠퍼스 교역을 하면서 그는 일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과 대학교와 관련은 없지만 대학교회에 매력을 느끼고 출석하는 안정된 교인들이 연합된 교회를 경험하였다. 새로운 교회에 부임하면서, 그는 이 모델이 비유적으로 새 교회 개발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는 이 교회가 일시적인 학생교인에 비유할 수 있는 교회주위의 저임금의 교인들과 "교외에 살면서도 도심지교회의 생동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6-7개 교회를 지나서 이 교회로 출석하는 교외지역의 안정된 핵심교인들의" 혼합된 교회일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 교회에 부임한 이래 5년간에 그는 이 비전가운데 일부를 실현하였다. 그는 이 도시 안에서 두드러지고 상당히 유능한 목사로서 도시 생활의 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기관들과 협력할 수 있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역할을 맡은 그를 인정하고 지원했다. 교인들은 특별히 교회에서의 설교와 예배에서의 그의 지도력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가 교회를 대표해서 그 도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 흑인 부목사를 초청하자는 그의 제의를 교회가 받아들였다.

죤과 여러 목사동료들이 나눔과 지원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비공식적 조찬모임에서 죤은 자기를 고민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잇슈들을 내놓았다. 그는 도시참여교역의 대부분이 자기 개인의 사역이요, 그의 교인들의 교역이 아니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교회는 그의 노력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이 교역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해서 목사가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는 또한 여러 영역의 도시생활에서의 자기의 교역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자기가 지금하고 있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내적생활의 필요들을 채우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하고 있다. 그는 소위 "하부구조들"(infrastructure)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무시해왔다. 예배당건물은 페인트칠부터 변소고치는 것까지 실질적으로 수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음악프로그램과 교회학교는 "위기상태"에 있다. 당회와 위원회들이 계획을 세우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는데 교인들은 그러한 활동이 자기네 스타일과 맞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개발되어야 하지만, 콜체스터교회와 꼭 같은 이유로 훈련 뚺겼과 수양회에 거의 열정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는 특별히 중요한 새신자들에게 교회가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집중했다. 교회의 주위에 있는 이웃들 - 주로 낮은 수입의 흑인들 - 가운데서도 새신자가 약간 있었으나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일시적인 교인들에 불과했다. "그것은 마치 회전문과 같아요"하고 그는 이야기했다. 교외에서 차를 운전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새신자들도 얼마 되지 않았다. 새신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루터교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전혀 믿음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이 모든 잇슈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자기가 마치 제방을 자기 손가락으로 막은 네델란드 소년"같다고 느꼈다. 이러한 잇슈들에 필요한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도시문제에 참여하려는 자기의 헌신과 서로 충돌했다.

그 토론은 교회성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앤디"가 죤의 하부구조문제와 새신자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회성장운동의 전략을 사용하는 교회성장 아젠다의 채용을 제의했을 때에 아주 활기를 띄게 되었다. 앤디는 자기가 자기교회에 부임했을 때 자기는 교회의 교인들을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이해하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교회성장이론들과 기술들을 배워야했다. 그것들은 죤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앤디는 "이것들은 실제로 효과가 당장 나타나는 테크닉들이요, 그것을 사용하면 새신자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앤디는 죤이 걱정하는 하부구조 잇슈들을 처리해본 경험을 가진 중류계층교인들이 성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앤디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이 여러 가지 형태의 억압을 경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교역을 배제시킬 필요는 없지만, 죤은 자기와 함께 공동으로 교역할 수 중류계층 교인들의 조직경영과 기술들이 필요하다. 앤디는 이렇게 계속 이야기한다,"이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어요. 당신이 만약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요. 당신이 그것을 하지 못하면 당신은 성장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의 교역의 질을 반드시 향상시켜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 점에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 다른 것들은 진짜로 필수적입니다… 그것들은 시행할 수 있는 단순한 것들이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들이 그 잇슈를 토론하는 동안에 앤디의 비전과 전략들을 통합하는데 필요한 희생이 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특별히 그는 중류층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우선적인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이런 자기감정을 토로했다,"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안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여자도 남자도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주옥과같은 교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성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 하나의 영감입니다. 나는 그것이 매우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교회의 성격을 바꾸어야하는 어떤 방향을 택하기 싫습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교회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그 가운데 약간만 소개했지만 이 토론은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죤은 약간의 교회성장이론들과 테크닉들, 그리고 다른 전략들을 사용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겠다고 동의했다. 자기의 포괄적인 교회의 비전이나 생동적인 도시교역의 비전이나 루터교회의 말씀과 성례의 중심성에 대한 그의 의식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는 또한 그가 발견한 다른 하부구조의 잇슈들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자기의 상황을 재검토한 몇 달 후에 죤은 하부구조 잇슈들을 심각하게 강조했으며 긍정적인 몇 가지 결과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생동적인 도시교역에의 헌신이나 교회의 포괄성이나 말씀과 성례의 중심성을 희생함이 없이 이것을 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빌딩수리와 유지에 대한 관심집중은 교회건물유지와 외형적 매력이 도시교회에, 폴 틸리히가 말하는 상징으로서의 중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였다. 빌딩은 그 자체의 의미를 뛰어넘어서 교회가 증거하는 하나님나라의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흑인부목사 청빙의 성공은 도시복음 증거에 열매를 가져왔으며, 교회주위에 있는 수 많은 지역사회 지도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제 죤과 그의 부목사가 도시목회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비백인교인들이 30%로 증가된 반면, 교외지역 교인들에 대한 교회의 매력은 감소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다른 하부구조의 잇슈들과의 고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요소들

우리는 상황과의 성찰적인 대화 중에 우리의 실천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런 짧은 이야기들과 교역사례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위의 사례는 두 가지 유형의 일차적인 자원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더 좋은 명칭이 없으므로 나는 그것을 "배경"(Background)자원과 "전경"(前景)자원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배경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더 지속적인 부분들과 배경구조를 의미한다. 그것들은 명시적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인 것들이다. 이에 반해 전경자원들은 좀 더 상황적이요 구체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좀 더 명시적으로 활동하는 것들이다.③

죤의 사례에서 배경자원은 죤 자신과 교회의 과거경험들이다. 죤은 자기가 가진 특수한 목회은사들 뿐만 아니라 아주 잘 준비되고 분명한 교역신학을 실천-성찰에 가져왔다. 그는 또한 그의 과거 경험들 - 예를 들면 켐퍼스 교역모델 - 을 가지고 왔으며, 이것은 생동하는 도시교회의 비전을 형성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자기의 새로운 역할을 구상하면서, 그는 그 교회를 자기가 원하는 교역의 씨나리오이면 무엇이든지 쓸 수 있는 백지설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그 자체의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정체성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주조되고, 과거의 평신도들과 목사들에 의하여 구체화되었으며, 현재의 교인들과 컨텍스트위에 투영되는 것이다. 죤이 발견한 하부구조 잇슈들 중 몇 가지는 소수의 중류층과 중하류층의 약간 노화된 교회로서의 그 교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예를 들면, 그 교회는 그런 특성 때문에 계획과 목표설정에 반대하거나 또는 지도력개발의 공식적인 노력을 거부하였다. 그와 그의 교회는 루터파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관계와 교역이해에 영향을 주고 있었으나 새로운 교인들은 이런 배경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특별히 루터교회 전통을 가질 수 있게 해야한다. 이 교회는 또한 중소도시의 도심지교회로서 도심지교인들과 교외교인들 사이에 상당한 불균형을 노출하는 하나의 특정한 컨텍스트를 가진 교회이다. 이것도 역시 이 교회의 정체성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전경요소들도 죤과 그의 동료들간의 토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료들, 특히 앤디는 하부구조 잇슈들의 몇 가지를 처리하는 방안으로 그들 자신의 경험들과 교회성장의 여러 가지 이론들과 테크닉들에서 얻은 자원들을 제공했다. 그 자원들의 적합성을 성찰하면서, 죤은 루터교회 전통에서 받은 성경적 신학적 자원들과 통찰들을 사용하였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또한 교회의 교인들과 새신자 성장잠재력에 영향을 주는 교회의 사회적 컨텍스트의 구체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한마디로 해서 배경자원들과 전경자원들은 상황에 대한 성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배경 요소들

그의 책 After Virtue 에서 알라스 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1981:194)는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배경요소들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명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묵시적으로 두 종류의 컨텍스트에 근거하여 하나의 특정한 행동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 행동의 주제가 어떠한 과거를 가졌으며 과거에 인과적으로 정리하면서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속한 배경의 역사속에서 그의 역할을 검토하고 현재 그 배경가운데서 맡고 있는 역할을 검토하면서 그의 진정한 계획을 발견한다." 우리는 계획들과 행동들은 자동적인 단위도 아니고, 주어진 상황에서 명시적으로 도출되는 자원들의 산물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복잡한 이야기들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활동하는 환경의 이야기와 우리의 개인적 이야기로 그것들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연극에 비유하여 생각해보자. 목사는 계속되는 교회의 드라마에서 목회적 역할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연출하는 한 사람의 배우이다. 교회의 드라마는 이 특정한 목사가 자기의 역할을 연출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그 목사가 그 장면에서 사라진 후에도 다른 목회 배우들과 함께 계속될 것이다. 그 목사가 교회에 들어올 때 각본은 목사나 교회 어느 일방의 독단으로 결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교회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들과 목사와 교회가 각기 어떻게 드라마의 비전을 만들어 내느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지금 얽혀 있는 줄거리의 회전과 반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이냐에 대한 한계를 지정하고 방향을 지도할 것이다.

목사의 이야기

교회의 지도력을 맡거나 어떤 형태이든 환경에서 활동하는 목사들은 역사도 없고 형체도 없는 인간으로 이 상황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것은 평신도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각기 자기의 역사를 가지고 온다.

부분적으로 그 역사에는 명백하거나 (죤의 경우처럼) 또는 좀 더 함축적인 신학적 관점, 즉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과 삶의 비전이 포함된다. 여러 가지 학문적인 신학들이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특정한 순간의 목회실천을 성찰하는데 조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학문적인 훈련으로서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신앙의 관점에서 인생을 추론하는 근본적인 방식을 의미한다.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1983:35f)는 체질(habitus)이라고 이것을 명명했다: 즉 체질화된 일종의 습관으로서의 신학, 즉 영혼의 지속적인 방향성과 능숙성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인격적 지식으로서 신앙의 삶, 자신의 인생, 그리고 교회와 자기 교역의 목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만들어준다. 그 자체로 체질(habitas)은 단순히 목사의 전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본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또한 목사의 또 다른 부차적 권위의 기초인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와 연관성이 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체질이란 의미에서의 신학은 성찰적인 지도자가 참여하는 상황과의 대화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지도자의 실천목적을 결정하며, 특정한 잇슈들을 구조화하고 그 상황에서 자기의 역할을 결정하는데 기여한다. 그것은 또한 그 상황에 대응하는데 필요한 합당한 방식들과 부적절한 방식들에 대한 한계를 설정해 준다. 우리는 체질로서 신학이 존의 우선순위 결정을 위한 성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았다. 그리고 다비다 크랩트리가 콜체스터교회의 목회실천을 구조화하고 재구조화할 때에 신학이 어떻게 그녀를 지도했으며, 앨리슨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역할을 정의하려는 마르다의 고투에 신학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았다. 그들의 하비투스(체질로서의 신학)는 어떤 결정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적용해야할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상황과 성찰적으로 대화하는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3장에서 애써 설명한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들은 내 자신의 교역비전에서 자라난 것이며, 내가 교회실천에 대하여 심사숙고한 바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한 기본적인 기독교신앙과 생활에 대한 비전이 없이는,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때에라도, 비 신학적인 교역접근을 초래한다. 다른 가치들 - 예를 들면, 성공, 성장을 위한 성장, 효과, 동질성 등 - 이 우선권을 취한다. 1장에 언급한 여러 개의 목회삽화들은 이런 문제를 반영한다: 자신은 교회가 잘되어가고 있다고 프라이드를 가졌는데 평신도들은 비전이 없고 영적인 깊이가 없다고 불평하는 교회, 회의에서 회의로 바쁘게 뛰어 다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고있지?" 하고 자문하는 목사 등.

자기의 하비투스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 그것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 - 안수교역자로서 자기의 역할을 구성하는 특수한 자기의 방식이다. 구체적인 역할의 틀은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기 자신을 보며 자기의 목회를 실천하는 최우선적인 틀(구조) - 예를 들어 죤의 자기이미지는 도시목회자 - 을 가지고 있다.

사무엘 블리자드(Samuel Blizzard,1985)는 이러한 역할구조를 "통합적 역할"이라고 칭하였다. 통합적 역할이란 목표지향적인 이미지로 자기가 교인들과 교회협력자들과 지역사회집단들과 그리고 일반대중들과 전문인으로서의 관계에서 최우선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면, 어떤 목사들은 목사로서 최우선적인 역할을 교회의 영적지도자로 틀을 정하고, 교인들의 영적 순례과정에서 교훈과 모범으로 교인들을 지도하고자 한다. 어떤 목사들은 자기들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말씀의 종으로 틀을 정하고 설교와 가르침을 중심으로 자기의 교역의 초점을 집중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목사로서 자기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제사장으로 생각하고 성례전적 인격으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인간과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에 초점을 모은다. 또 다른 목사의 최우선적인 통합적 역할은 목사 또는 목자 또는 더 최근의 용어를 사용하여 목회상담자이다. 또 다른 목사는 경영학적인 용어로 자신을 정의하여 교회개발행정가로 최우선적인 틀을 정하고 영향력이 있고 생동적인 교회기관을 개발하고 조직하며 경영하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의 최우선적인 과제를 전도자 또는 증인으로 이해하며 또 다른 이들은 자기의 최우선적인 역할로서 사회참여가해방자이미지를 선호한다.

블리자드는 목사마다 일반적으로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하나 이상의 통합적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통상적으로 지배적이 된다. 그것은 그 목사의 대부분의 실천 사례들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어느 목사가 상황의 틀을 구조화하는 또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하고 단지 한가지 방법을 고집하거나 또는 그가 다른 대안적인 틀을 구조화할 수 없다면 - 그들이 막다른 골목같다고 할지라도 - 그 목사는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목회실천상황을 지도할 중요한 기회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죤의 동료들은 교회발전의 시각에서 자기의 역할의 틀을 구조화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도시목사로서의 그의 최우선적인 역할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오히려 교회의 하부구조가 강화될 때에 교인들을 도시교역에 더 효과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었다.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역시 다양한 비 신학적인 요소들을 포함하며 이것들은 우리의 실천구조를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족의 영향들, 우리가 자라난 지역과 인종적 문화로부터 받은 영향들, 우리가 속한 사회계층이나 성별의 영향, 교육의 영향, 다른 교회들과 교역상황에서 과거에 경험한 그 경험의 영향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지식사회학이 밝히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이런 요소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신학적 관점들을 형성하고, 상황해석의 구조를 만들고, 그 가운데서 우리자신의 역할의 틀을 만들어 대응하는 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흑인들의 희생당함, 억압, 그리고 부정의의 경험은 그들에게 의심의 해석학을 주어서 그들의 실재와 해석의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아주 깊이 그리고 당연하게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여권운동과 특히 성 차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모두 남성과 여성이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④ 이와 같이 우리는 세대차이가 행동과 실제해석 모두에 미치는 영향을 점차 깊이 인식해가고 있다. 예를 들면, 베이비 붐 세대는 대공황시기에 성장한 사람들보다 형성시기에 상당히 다른 경험들을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특정한 세대가 실제를 구조화하는 사고의 틀을 아주 다르게 만들었다.⑤

우리는 목사의 역할을 맡거나 성직자 복장을 입을 때에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가 로만칼라를 하든지 제네바까운을 입든지 간에 이것들이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을 뒤에 감추지 못한다. 이것들은 우리자신들 보다 더 크신 한분으로부터 우리의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회상시키는 중요한 상징이지만, 그것들이, 에릭슨의 용어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아닌 전혀 새로운 존재"로 도망치게 놔두지 않는다(Erikson,1969:266).

요점은 이런 배경자원들을 중요치 않은 것으로 무시해서는 안되며, 그것들이 우리교역실천과 목사로서 우리의 권위에 선으로 그리고 악으로서 미치는 계속적인 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들은 우리의 실천에서 명시적이기보다는 암묵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과 그것들의 영향을 좀더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것들이 가져오는 강점들과 통찰들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조장하는 맹점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제한점들을 극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 "네 자신을 알라"가 성찰하는 지도자에게 기본이 된다.

상황 이야기

맥킨 타이어는 두 번째 배경요소에 관심을 촉구한다: 그것은 우리가 행동하는 그 상황의 이야기이다. 존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자체는 자기이 이야기를 갖는다. 교회마다 독특한 환경과 성격을 가지며,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 교회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자기를 구체화시키고자 한다. 그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즉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이야기의 표현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제임스 호프웰(James Hopewell,1987:16)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교회들은 언제 어디서나 복잡한 행동들이 얽혀있는 모임이다. 각 교회는 자기교회의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 독자성 안에서 세상적인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사명을 독창적으로 육체화하고 있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자기교회문화를 존중하여 그 문화 안에서 지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이야기에는 독특한 민족적인 역사가 강하게 가미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교회생활의 중요한 사건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그 교회의 과거와 현재의 성자들과 죄인들, 그리고 특별한 경험들이 또한 그런 역사를 만들어 낸다. 교회의 특별한 경험들은 서로에게와 자기들에게 당면한 도전들과 기회들에 응답하는 독특한 방식들을 만들어 낸다. 또 교회의 특성들 - 교회크기, 교인들의 나이, 교인들의 자원들, 그리고 교회 컨텍스트가 주는 요소들 - 도 역시 그 교회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러한 사건들, 경험들, 특성들, 그리고 특색들은 교회들이 공통된 기독교 전통과 교단의 유산을 공유하는 경우라도 서로간에 상당한 차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교회들은 특별한 교회라는 자기 이미지와 스타일 - 예를 들면 어머니교회, 제일교회 등 - 을 가지며 다른 교회들은 덜 자랑스런 자기이미지 - "산골움막교회" - 를 갖는다. 어떤 교회는 지가 교단 명칭을 자랑스럽게 달고 있다 - 칼빈장로교회, 웨슬레 기념연합 감리교회.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자기교회의 신학적 입장을 명칭에 담고 있다 - 굳건한 반석 독립침례교회, 은혜 루터교회, 불세례 오순절 성결교회. 또 다른 교회는 자기교회의 지리적 위치를 담고 있다 - 서부시장 연합감리교회. 어떤 교회는 근엄하고 격식에 따른 예배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교회는 격식이 없이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어떤 교회는 가족과 같이 서로 친밀하게 얽혀있고, 다른 교회는 같은교회 교인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개인적인 유대를 갖지 못하고 있다. 어떤 교회는 갈등이 있을 때 공개적으로 처리하지만 다른 교회는 회피하고 거절하면서 숨길려고 한다.

어떤 교회는 공격적인 전도를 하지만 다른 교회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교회 교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신들이 먼저 이니시아티브를 가지고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정식교인이 되고자 하면, 분명한 중생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교육과 점진적인 신앙성장을 강조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돈의 청지기직과 교회재정을 영적인 문제로 생각하여 목사가 설교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은 그런 잇슈를 예배시간에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 한다. 어떤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가 사회적 잇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그러한 행동을 개인들에게 맡겨야 하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그런 개인들이 행동을 결정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교회는 자기교회를 성소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어 쉼을 얻게 하고 새 삶을 살게 하려고 한다. 다른 교회는 행동주의적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공격적인 전도를 한다. 또 다른 교회는 사회정의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한다.⑥ 이상의 것들은 교회가 자기를 정의하고 자기의 특성을 표현하는 수 많은 방식들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한 것이다. 이런 차이들의 목록은 각 교회마다 자기자신의 독특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기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그 교회의 현실을 구조화하는 방법, 교인들의 상황의 틀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결정한다. 이런 것들은 앨리슨의 경우와 같이 목사와 완전히 다른 대응방법을 주장하게도 한다.

지도자들이 변화를 시도하려고 할 때, 이런 이야기의 뿌리깊은 구조들을 발견한다. 다비다 크랩트리가 평신도 교역을 활성화하려고 처음으로 시도했을 때, 그녀는 교인들이 신앙에 대한 이야기, 특히 주일예배와 월요일의 생활과의 연결문제 등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을 발견했다. 이미 지적한대로 죤의 교회는 자기나름대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지도력훈련을 위한 수양회와 뚺겼들을 싫어했다. 이런 것들은 그 교회의 문화에 낮서른 것들이었다.

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할 때만 아니라 갈등과 위기가 발생할 때도 그 교회의 독특한 성격들이 나타난다. 대예배시에 복음송가를 부를 수 있느냐의 갈등, 예배시에 거룩한 댄스를 허용할 수 있느냐의 논쟁, 목사의 도덕적 실패문제, 교회중진이 교회에서 자기 딸의 결혼식을 거행하면서 손님들에게 술을 주겠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논쟁, 교회중진이 자살한 경우 - 이런 경우에 그 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며, 투명하게 나타날 때도 있다. 강력한 회중교회전통의 뿌리를 가진 어느 연합그리스도교회의 집사들은 전통적인 회중교회가 예배드리는 중심장소로 지정한 "예배당"에 선물로 받은 십자가를 걸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3년간 거의 정기적으로 열연 공방전을 벌여왔다. 청교도의 뿌리를 가진 회중교회의 문화를 어기면서 거기에 십자가를 걸어도 좋은가?

제임스 호프웰(James Hopewell,1987:9ff)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러한 구조들을 교회안에서 발견할 때, 그것들이 너무도 인간적인 것들이라고 당혹한다. 그 이유는 너무 성스럽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교회가 존재한다고 믿도록 훈련받았다.마치 신약성경의 초대교회와 같이 완벽한 교회를 오늘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이상에 반해서 우리는 교회안에 인간적인 성격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교회의 실패로 보고 정죄한다. 그러나 호프웰은 신약성경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안에는 인간집단의 모호성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한다,"교회는 복잡하게 얽힌 모임들이지만, 위선적인 집단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인간공동체의 직접적인 성취이다"(11).

그러므로 성찰하면서 지도하고자 하는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중의 과제를 갖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이야기에 대하여 자기성찰을 하여야만 한다(그것이 실천상황에서 그들의 해석과 응답을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교역하고 있는 환경의 이야기도 이해하여야한다(상황의 틀을 만드는 그 교회의 독특한 방식).⑦ 이 두 가지 요소들은 전경요소라기 보다는 배경요소로서 빙산의 물에 잠긴 부분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잘 고려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해야할 지도력에 견고한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를 사용하면, 그것들은 좋든 나쁘든 간에 교회드라마의 계속되는 줄거리에 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전경(前景)요소들

우리가 목회실천을 구조화할 때에 전경에 속한 요소들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들은 실제로 우리가 더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원들이다. 여기에는 네 가지 특별히 설명이 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성경과 전통, 경험으로부터 얻은 이론들과 실예들(자기 것들과 다른 삶의 경험들), 환경, 또는 컨텍스트의 요소, 그리고 상황으로부터 오는 반응들이 그것이다.

기독교 이야기: 성경과 전통

성경과 전통은 함께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양자는 기독교 이야기의 규범적인 중심으로 각 교회는 기독교 이야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나는 이미 성경과 전통 어느 것도 역사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객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사실 역사성은 우리의 모든 지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도 전통도 우리에게 오늘의 잇슈에 대한 대응, 방법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청사진이나 모형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충실한 목회실천과 교회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서 성경과 전통의 역할이 감소되지 않는다. 이 양자는 광범위한 상황하에서 복음에 충실하게 응답하려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투를 반영한다.

처음부터 선한 이유로 교회는 성경에 지상권(至上塯)을 주어왔다. 처음에는 히브리백성의 역사와 증거인 구약성경에, 뒤에 예수님 탄생이후 첫 100여년 동안의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와 증거인 신약성경을 묶어 기독교 경전으로 제정되었다. 고백적인 신앙에서 출발하여 교회는 신구약성경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신앙과 실천의 권위라고 일치를 보았다. 신구약성경은 이야기들과 가르침들, 특히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자세히 얘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과 모든 피조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가장 분명히 계시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교역실천과 인생, 그리고 오늘 교회의 언어를 평가하고 구조화하는 패턴을 찾으려고 할 때, 우리를 끌어당기는 천연자석이요, 출발점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은 사도시대 이후 여러 세기 동안에 실천과 신앙의 새로운 구조에로 기독교 공동체를 인도하였다. 새롭고 이전과 다른 도전들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충실하려는 기독교인들의 그 이후의 고투를 기록한 전통은 또한 아주 중요한 실천을 위한 자원들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복수를 사용하여 전통들이라고 쓰고있다. 그것은 우리가 활용할 풍부한 유산들 속에는 다양하면서도 가끔 서로 모순되는 가르침들과 행동들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⑧

목회결단에서의 성경과 전통의 역할을 논하면서, 제임스와 에벨린 화잇헤드(James and Evelyn Whitehead,1981:14)는 최근의 신학, 특히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단번에 주신 "신앙의 저장고"로 보는 과거의 정태적 탈역사적 접근에서, 성경과 그 이후의 교회의 역사에서의 전통화과정(Process of traditioning)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에로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 새로운 강조는 역사적이요 역동적인 접근으로 변화하는 환경에서 하나님께 충실하고자 고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형성적 임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찬송가 가사와 같이, "새시대는 새의무를 가르친다." 성경에 대한 (또는 전통에 대한)역사적-비평적 접근은 더 역동적인 접근을 택하도록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더 최근에, 성경과 그 이후의 교회역사연구에 사회적인 인류학적 통찰의 사용은 전통화 과정의 역동성과 신앙과 충실성의 문제로 고투하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⑨

그러므로 성경과 그 이후교회의 사상과 실제는 목회실천을 구조화하는 핵심자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인식해왔으며, 특히 우리의 설교와 교육에서 성경의 중심성을 상당히 중시해왔다. 그러나 다른 목회실천에서는 별로 그렇지 못해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국면의 실천에 꼭 같이 중요한 자원이다. 그것들은, 데이빗 켈시(David Kelsey,1975:192)의 유익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오늘의 실천의 '기독교적 적합성'을 판단하는 패턴이나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가 계속하여 당면하게 될 그런 잇슈들을 어떻게 설명했는가의 실예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가끔 우리는 그실예들을 보면서 잘못이라거나 또는 불성실했다고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실천잇슈들의 틀을 구성하고 여러 가지 응답가능성들을 판단하는 언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것들은 또한 오늘의 교역실천 잇슈에 대한 해결책을 구조화하는 경계선과 제한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천구성에 대한 우리자신의 책임의 고리를 제거해 주지는 않는다.⑩

하나님의 교회(테네시 주, 클리블랜드 시)목사의 경험으로부터 한 가지 실례를 사용하여 이것을 설명하고 싶다(Brooms,1988). 주로 흑인들로 구성된 그 교회는 자기정체성을 시사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특색들을 가지고 있다: 즉 그 교회는 강력한 근본주의적 성경의 존중과 사회교역에 대해서 상당히 반대하면서 내면적인 영성생활과 개인적인 성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교회는 마약거래와 가난으로 찌든 도심지에 위치해 있다.

목회학 박사과정에 참여하면서, 그 목사는 자기교단과 더 넓은 의미의 오순절-성결운동의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그의 상상은 데이빗 모버그(David Moberg,1972)와 다른 사람들이 "대 반전"(the Great Revers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사로잡혔다. 즉 그것은 금세기초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악을 개선하려는 노력에서 거의 배타적으로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전환을 의미한다. 그가 오순절-성결운동의 유산들 더 많이 읽을수록, 예수님의 교역을 기록한 성경연구에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면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교회의 경향성의 부적절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역의 구조를 너무 협소하게 만들고 있었고, 성경과 자기교단전통 모두에 불성실하였다. 결과적으로 설교와 가르침에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충성하자"는 구호아래 성찰과정에 참여하고 의식의 틀을 재구성하도록 자기교회를 지도하였다. 그들은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오순절-성결운동의 전통을 검토하고, 지역사회에서 일하는 사회봉사요원을 초청하여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구체적으로 지역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문하였다. 아주 조그만 일이지만 아주 중요한 스텝으로 교회에 음식 저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역사회의 마약퇴치운동을 지원하였다.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은 자기들이 서있는 성경과 전통에 관심을 모으고 교회실천을 재 구조화하고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교역실천의 자원으로서 컨텍스트에 대한 지식의 중요성을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금은 이 목사와 교회가 복음의 이야기와 자기교단의 유산의 빛 안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특별히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자원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모델들을 제시해주며, 이 모든 것은 그 목사와 그의 교회의 근본적인 정체성에 전혀 낮서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요 자기교단의 특별한 전통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새로운 전망은 전에 불가능해 보이던 문을 열어주었다.

위의 사례에서 분명히 본 바와 같이, 성경과 교회전통은 변화의 지렛대를 제공해주며 이것은 그 교회의 정체성이나 이야기속에 명백히 드러나 있기보다는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지교회는 여러 가지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더 넓은 기독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교회는 여러 가지 작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더 넓은 이야기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의 초점은 선택적이다. 그 목사가 거절되었거나 숨겨졌던 요소들을 자기 자신과 교회의 의식속으로 가져왔을 때, 잊어버렸던 그 이야기들이 자기들의 이야기와 연결되었고, 현재의 실천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체성 위에 하나님께 충실히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신학자들은 그렇게 숨은 요소들을 "그림자 전통"이라고 불렀다. 그 전통들은 명시적으로 나타난 전통에서 떨어졌거나 거절당하였거나 무시되었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의 그림자로서 아직도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들은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지레장치로서 생명공동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특히 기독교 여성신학자들은 여성들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그림자전통을 발견해내므로서 교회생활에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경과 그 이후 역사에 널리 스며들어 왔던 가부장제도 때문에 거절되고 무시되어 왔던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으로서 자기들의 이야기가 좀 더 넓은 기독교이야기 속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숨어있던 전통들은 그림자로부터 나와서 전통과 현재의 실천모두를 비평하고 더 풍성하게 만드는 지렛대를 제공해준다.

이론, 모델, 그리고 사례들

목회실천의 잇슈에 당면했을 때 우리중 많은 사람들은 수 많은 자원들 가운데 신학적인 비전과 성경과 교회전통들을 무시하면서도 통찰들, 이론들, 모델들, 우리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사례들을 먼저 끌어들인다. 특별히 여기에는 실천신학, 사회학, 심리학, 또는 조직개발 등의 부차적인 학문들로부터 도출한 이론들, 모델들, 그리고 테크닉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실천에 적용할 수 있다고 발견한 모델들과 실천사례들, 그리고 자기가 비슷한 도전을 받았던 이전경험에서 온 해결방안들도 목회실천에 적용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목사들은 특별히 교회컨설탄트의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적용한다. 병든 교회를 치료하고 살아 있는 교회로 만드는 치료책들을 나의 동료는 새로운 형태의 지혜문서라고 불렀다. 교회지도자들은 지혜문서를 성경보다도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자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좌절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실증주의와 교역에 대한 기술적 합리적 가정의 최악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죤이 교회성장에 대한 단순한 몇 가지 원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그가 고민하는 한가지 하부구조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앤디의 통찰을 무시했다면 그와 반대의 잘못이 발생했을 것이다. 오히려 죤은 자기의 기독교 이야기의 이해와 상황의 다른 요소들과의 대화속에 앤디의 통찰을 첨가하였다. 그 대화를 통하여 그는 앤디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들을 비평적으로 사용하여 자기 자신의 대응책을 만들었다.

요점은 우리의 성찰적인 대화들은 독백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대화에는 이론들과 테크닉들과 사례들뿐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와 기독교존재의 비전이 함께 참여하여야한다. 그것들은 교역실천의 중요한 자원들이다. 이런 통찰들을 통해서 특정한 실천상황을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 상황과 다른 상황들의 관련성(차이와 유사점들)을 보게하고, 기독교 이야기에 충실한 대응책들을 구성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시험선택에 도움을 주는 모델들과 분석의 틀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아주 빈약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환 경

현장 작업 감독자들과 그들과 함께 일하는 신학생들을 위한 뚺겼에서, 우리는 하나의 특수한 상황에 어떠한 목회가능성이 있는가를 보기 위하여 하나의 사례를 검토하였다. 토론의 한 부분으로서 나는 환경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나는 참석자들 가운데 좌절감이 팽배해 가는 것을 감지했다. 드디어 한 여학생이 소리쳤다, "이 모든 사회학적 쓰레기들을 치워버립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회를 진정한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문제에 예수님을 오게 해야지 통계나부랭이를 이야기해서 되겠습니까?" 목사 한사람도 그녀의 항의에 동조하여, 그룹원들에게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성공은 가장 맛있는 닭고기를 요리하여 팔았기 때문이지 환경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무비판적으로 이론들과 테크닉들을 적용하는 것과 같이 분석의 마비증상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학생과 목사에게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그 목사에게 그의 비유는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성공한 간이 음식연쇄점은 자기의 후라이드 치킨이나 햄버그를 가장 잘 팔리는 장소를 결정하기 전에 가능성있는 장소들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교회가 시장조사에 근거하여 교역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회실천이 진공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목회실천은 목회의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제한을 주기도하는 특정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⑪ 나는 "아마도"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이유는 환경의 모든 요소가 다 교역실천의 상황마다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 분명하게 타당하냐 하는 것은 당면한 잇슈에 따라 달라진다.

환경은 시간적이다. 현재의 환경이든 과거의 환경이든지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금의 순간에 영향을 주는 한에서는 의미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경은 물리적이요 인간적인 생태학이다. 그것은 개인들과 제도들과 물리적 환경과의 특색있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환경은 또한 인구통계학적이다. 그것은 인구통계, 나이, 성, 인종적 민족적 특색, 교육수준, 수입, 그리고 직업 등을 표현한다. 인구 통계학은 다시 개인들과 집단의 사회적 세계를 통합하며, 어떻게 잇슈들과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임신중절갈등에 관한 아주 뛰어난 분석에서, 크리스틴 루커(Kristin Luker,1984)는 임신중절합법화에 반대하는 행동주의자와 임신중절합법화를 찬성하는 행동주의자의 사회적 세계를 소개한다.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각각의 집단이 "내면적으로 응집력이 있고 상호간에 공유하는 세계관을 갖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암시적이요, 결코 완전하게 명료화하지 않으며, 더 중요하게, 반대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양립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159). 그리고 그녀는 적대자들이 세계관을 특정한 인구통계학과 사회적 계층에 연결시킨다.

그러한 이해는 이런 잇슈들이나 그 비슷한 잇슈들이 합류하는 목회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목사를 포함해서 교회교인들은 다른 역할들과 네트워크들과 기관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들은 우리의 사회적 세계에 영향을 주고 우리의 충성을 촉구하는 교차적 압력을 행사한다. 마지막으로 또한 우리는 환경의 대안관계적 특색, 집단내부의 특색, 그리고 단체의 특색 등을 권력의 역동성과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다.

요점은 이러한 컨텍스트의 요소들이 과외의 것이거나 부차적인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교회의 구체적 표현을 위한 배경이요, 성찰적인 지도자는 그것들을 상황과의 대화의 한 부분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상황으로부터의 반응

마지막으로 고려할 전경자원은 상황, 특히 교역에서 우리의 파트너로 일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반응이다. 그런 반응의 중요성을 제5장에서 길게 검토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성찰적인 지도력은 균형적인 권위를 주창한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성찰적인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 참여한 타인들을 파트너로 대우하고 자기의 자비로운 전문성의 수납자로 보지 않는다. 파트너들은 각기 상황과의 성찰적 대화에 기여할 관점과 전문성을 갖는다. 그들 각자는 목사전문가나 평신도 전문가의 그늘에 숨어 있기보다는, 상호간에 상호의존적으로 탐색하면서 대부분의 실천상황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발견한다.

칼 더들리(Carl Dudley,1987)는 자기가 부활주일에 다른 도시에 사는 부부의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여러 주일전에 요구받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애기 양친가운데 한사람이 전 당회 서기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이 사실을 안 할머니는 당회소집을 급히 요구했다. 더들리는 "신학적 능변"으로 거절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응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 애가 자기의 증손녀라고 당회에 이야기했다." 당회는 투표에 들어갔다. 그들은 부활절에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달 후에, 더들리는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이 낳은 애기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 어머니가 나아왔을 때, 나는 당회서기에게 예전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와 함께 서 주기를 요구했다,"누가 이 가족편에 서기를 원하십니까?" 서기가 세례 베푸는 장 소에 도착하기 전에 할머니가 일어섰다. 그녀와 함께 몇 분의 친구가 일어서더니, 조 금 더 많은 사람이 일어서고, 조금 후에는 전교인들이 그 어머니와 애기와 함께 일어 섰다 (Dudley,1987:3).

이 사건은 더들리에게 감동을 주어, 몇 주일 후에, 부모없이 빈민가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에게 대하여 설교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그 교회는 복지프로그램의 잇슈에 응답하여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일은 그 교회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목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그 할머니의 반응에서 생겨났다. 그녀의 도움으로 그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교회는 "가족"으로서 자기들의 책임을 보고 중요한 사회적 잇슈에 참여할 수 있게 활성화되었다. 성찰적 실천의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그는 그녀의 증손녀의 세례의 잇슈에 대하여 자기방식으로 틀을 구조화하였으나 할머니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목사의 실천을 변화시켰다. 더 나아가서 그녀는 두 번째 애기의 가족의 잇슈에 대하여 다른 틀을 만들었다. 그녀의 반응은 목사와 그 교회의 새로운 응답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반응은 가끔 덜 직접적일 때가 있으나 그렇다고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니다. 다비다 크랩트리가 평신도교역을 권면할 때 보여준 교회의 반응을 회상해 보라.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도 일종의 반응이다. 교회가 보이는 미지근한 반응의 뜻이 무엇일까를 알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그녀는 그 잇슈들의 틀을 재구성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교회가 공식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우는 일에 반대하고 수양회와 세미나를 통하여 교인들을 훈련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 때 그는 틀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앨리슨의 저항적인 반응에 대응하려는 마르다의 노력은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앨리슨의 지배욕은 마르다와 양립할 수 없는 앨리슨의 교회의 비전과 교회에서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다. 그 결과로 마르다는 앨리슨의 주장을 묵묵히 따르거나 아니면 이 정체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앨리슨의 저항뒤에서 노력할 수도 있다. 이것에 실패하면 마르다는 앨리슨의 저항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성찰적인 지도자에게 하나의 자원으로서 반응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그것은 목사의 지도력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지도자의 권위를 손상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도자의 독주를 버리게 만들고 상호적이요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서 실천의 틀을 재구성하게 도와준다.

지도력의 요소들의 공동작용

성찰적인 지도자가 자기의 실천을 구조화하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조금 장황하게 소개하였는데 혹자는 어느 쪽 발을 먼저 움직일까 멈추어 생각하다가 아주 움직이지 못하게 된 속담에 나오는 지네와 같은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는 실천의 구조화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본 장을 마무리지으면서 지금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다만 앞장에서 언급한 프락시스에 기초한 실천-성찰의 과정을 다시 한번 기억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본 장에 논하는 자원들을 생각하면서 앞장을 다시 한번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짧게 그 과정을 대충 요약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의 실천을 구조화하는 최선의 한가지 길은 없지만 - 만일 있었다면 기술적 합리성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나의 메타방법론, 즉 실천의 해석학이 있다. 우리는 의미를 해석하든지, 공동체를 형성하든지, 또는 공적교역능력을 배양하든지 간에 이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다. 성찰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그 잇슈와 그 잇슈에서 우리의 역할구조를 만든다; 이것인가 아니면 저것인가? 우리는 또한 그 상황의 역동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요소가 중요한가 아니면 저 요소가 중요한가 저울질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능성있는 대응책들을 시험하면서 그 상황의 반응에 귀를 기울이고, 적절한 해결책이 발견될 때가지 계속한다. 전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자원들, 전방자원들과 후방자원들을 그 가운데 가져온다. 명시적이라기 보다는 암시적인 자원인 배경자원들이 그 잇슈를 최초로 구조화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하는데 특별히 중요하다. 배경자원들은 또한 어떤 전방자원들을 사용해야 할 것인지 또는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전방자원들은 그 상황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에게 열려진 가능한 대응책들을 알려준다. 이 전체 성찰적인 대화는 일종의 계획적인 사고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당면한 상황에 적절한 대응책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심사숙고하여야할 것은 한가지 일만이 아니다.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과 자원들도 심사숙고하고 저울질하여야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 장면 가운데서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은 실천성찰의 어려운 훈련을 피할 수 있게 해주거나 모든 다른 방법이 다 실패했을 때에 나타나는 마술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또는 우리가 실천성찰의 과정을 다 끝낸 후에 뒷처리로서 또는 일종의 하나님의 보증으로서 성령께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단계에서 성령의 질문을 제기하므로서 나는 그러한 비판을 받기 꼭 알맞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주제를 마지막까지 남겨둔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정기적인 기도와 묵상훈련은 그리스도인 삶에 결정적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것들은 우리의 교역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비전이나 하비투스를 세우는데 필수적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실천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식별을 하는데도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실천-성찰과정은 기도와 명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계획적으로 사고하는 실천과 성찰은 그 자체가 일종의 기도로서, 우리의 대응책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게 우리 자신을 열어준다. 우리가 실천-성찰을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지를 강제로 주입시키려하지 않고 상호의존적으로 거기에 참여하여 충실한 대응책을 찾아가는 것도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교회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실히 보장하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힘쓰는 그 전 과정은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장에서 제시한 일반적인 기준 자체가 그것을 시험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우리의 실천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게 하여 그들에게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제공하는 것인가? 그 실천은 용서와 상호성과 관심에 기초한 공동체를 양성하고 있는 것인가? 그 실천은 교인들로 하여금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배양해주는 것인가? 내가 믿기로는 실천의 구체적인 현장을 이 세 가지 중에 한 두 가지에는 직접적으로 목표를 두지 않고 어느 한 가지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다고 할지라도, 이 세 가지 모두와 근본적인 연결이 있어야한다. 이것들은 내가 주장한 근본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이 세 가지의 변형이라고 할 것이다.

실천-성찰의 과정은 쉽게 않다. 그것은 훈련과 고된 노력을 요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구성한 대응책들은 항상 완전하지 못하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본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알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동시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성찰적인 대화가운데 임재하여,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고, 우리에게 가용한 자원들을 얻을 수 있게 하며, 반응을 일으키고, 대응책을 세우고자 하는 우리들을 인도하여, 기독교의 이야기에 충실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실천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도우신다.

























제 8 장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성찰적인 지도자

"합리성이 인간의 모든 것은 아니다"

-막스 웨버-

Credat Emptor: 고객을 믿게 만들자.

제2장은 권위의 두 가지 부차적 기초들을 논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가 그것이다. 6장 7장에서는 성찰적인 지도자라는 용어로 전문성의 구체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 성찰적인 지도자는 복잡한 오늘의 세계 속에서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도력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성찰적인 지도력의 전문성의 차원은 일종의 메타교역방법론, 즉 우리가 교역에서 행하는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추론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복잡한 목회실천을 다루는 한가지 방법으로, 의미해석자, 공동체형성자, 그리고 공적교역 지원자로서의 목사의 지도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목사는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진정한 정체성을 충실히 구현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찰적인 지도력의 전문성은 설교나 상담목회와 같은 여러 가지 전문성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려면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또 하나의 부차적인 목사의 권위의 기초인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와 성찰적인 지도력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목사의 지도력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1장에서 소개한 목회삽화 가운데 하나에서 잘 나타나 있다. 자기 생각에는 교회를 많이 성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사의 기술을 인정하면서도 영적인 깊이가 모자란다고 불평하는 교회 이야기를 회상해 보라. 평신도가 보는 그 목사의 문제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 목사의 지도력은 전문성에 기초하였으나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권위와 전문가로서의 권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관계는 무엇인가: 본 장은 이런 질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전문성과 신성성의 대변자

내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그라함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 나오는 제사장의 이야기를 회상해 보라. 그는 경찰의 눈을 피해 한 동네에 숨어 있었는데 그 동네 교인들의 요구로 할 수 없이 미사를 집례했다. 그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신앙생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도들의 입에 하나님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문성은 거의 전무하였으나 사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또는 TV 드라마 매쉬(MASH)에 나오는 물카히 신부를 생각해 보자. 물카히 신부는 그린의 위스키 제사장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는 전문성이 어떠한 지는 잘 모르지만 순수성이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한다. 우리는 그가 설교하거나 예배를 인도하는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TV 에 나오는 다른 성직자들과 달리, 물카히 신부는 권위 있는 목회를 한다. 리차드 커크(Richard Kirk, 1983:7)는 물카히 신부의 권위의 기초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룬 가운데서도 물카히 신부는 태초의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창조하신 분의 상징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창조질서를 세운다. 한국 경찰들의 불합리한 행동 가운데서도 그는 믿음 뿐 아니라 의심을 고백할 수 있으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분을 대변하는 살아있는 표지로 서있다. 전쟁의 공포와 비극 가운데서도 그는 최악의 상황-십자가를 포함하여-에서도 선을 창조하 신 분을 기억나게 해 준다. 죽어 가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마지막 예식을 거행할 때, 그는 부활의 소망을 대변한다.

커크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것은 물카히 신부가 행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다. 그의 인생은 성례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8). 이런 의미에서 물카히 신부도 모든 것에 실패하고 있는 위스키 신부도 권위의 공동적인 기초를 공유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실예들은 예전중심교회 또는 로마 카톨릭 관점에서 온 전적인 목회관을 대변한다. 위스키 제사장은 앞서 언급한 직책의 권위의 극단적인 예이고, 물카히 신부는 자기의 성례전적인 직책과 인격적인 성품이 결합하여 자기의 권위를 높이는 실예이다. 직책의 권위를 덜 중시하거나 성례전적 해석을 중시하지 않은 교회의 전통에서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자로서의 권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1977:57-59)가 자기의 저서 Holy Firm에서 설명하는 교회예배를 실예로 하여 좀더 설명해 보자. 그녀는 주일 대예배에 20여명 정도 출석하는 작은 교회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는" 목사는 "하나님을 아는 한사람"이다:

한번은, 전세계를 중보하는 긴 목회기도 중간에-지도자들에게는 지혜의 은사를, 슬 퍼하며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는 희망과 자비를, 억압받는 자에게는 구원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기도를 멈추고는 갑자기 부르짖었다, "주여 우 리는 매 주일 이와 꼭 같은 간구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충격적인 부르짖음을 드린 후에 그는 계속해서 기도를 읽어 나갔다. 이것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좋아한다.

딜라드는 계속해서 활기 없는 예배와 교인들은 설명하면서, 이 교회와 소위 "예전중심의 기도교회들"을 비교하고 있다. 예전중심의 교회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처럼 신속하게 그리고 권위 있게 하나님 앞에 나오며, 전문성의 보장 없이도 하나님을 깨닫는다":

예전중심교회에서 성도들은 오랫동안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한 줄기의 좁은 길 을 따라가는 모호크 인디언처럼 예전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약간이라도 변경시켜 버린다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 다. 그러나 말씀중심 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59).

목사의 태도와 사람들의 기대 모두에서 신성불가침의 현존을 느끼거나 분명하게 기대하고 있다.

이 사례들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이런 교회에서 전문성은 실제로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들이 만약 성직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성직자들의 대표적 성격 또는 성례전적인 성격에 기초한 것이다. 성직자들은 곧 삶의 현장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는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성직자들이 미숙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변하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는 성례전적인 대표성만을 가지고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전문성에 관하여 토론하면서, 특별히 성찰적인 실천에 관한 토의에서, 나는 성직자의 권위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로서 전문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문적인 교역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사실이나(예, 홈즈, 1971;하우베르어스, 1989), 우리들 대부분은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이나 필요시에 도움을 베푸는 자들의 전문성을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전문성과 법적인 문제에 충고나 도움을 주는 변호사와 같은 전문성을 원한다. 그러나 전문성 그 자체로서 만은 불완전하다. 또한 전문성이 없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되는 것도 불완전하다. 이 양자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전문성은 성찰적인 지도력의 실천적 또는 도구적 측면이다. 반면에 성례전적 현존은 지도력의 존재 또는 의미의 측면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존재하며 이 둘이 분리될 때 교회의 증거는 손상을 입는다. 토마스 롱(Thomos Long)은 모세와 아굴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 점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비와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요, 아론은 모세와 같은 비전은 없으나 모세에게 부족한 대중연설의 은사를 받은 전문성의 대변자이다. 그들은 은사들을 상호보완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협력할 때 모든 것은 잘 되어 갔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 모세가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전문가 아론은 골짜기에 있을 때 아론은 하나님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의 압력을 받았다. 롱은 아주 분명하게 이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결국 아론은 백성들에게 굴복하고 하나님의 생생한 현존에서 끊어졌을 때에 목회자들 이 항상 범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위하여 물질로 신을 만들었다. 손으로 만든 신에게는 신비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오직 기계적인 방법론만이 존재 할 뿐이 다.(1)

죤 플레처(Jhon Flecher,1975)의 적극적인 탐구의 발견은 상호보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성직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기술하라고 요구하였다. 응답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요소는 소위 "종교적 진정성"(religious authenticity)이었다. 평신도들은 진정성있는 목사상을 여러 가지로 기술하였다: "머리와 가슴이 하나인 자,""복음을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자,"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사람인자," 평신도들은 목사의 전문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 진정성의 차원은 전문성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이 없이는 전문성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성찰적인 지도자의 실천에 성례전적인 현존이 독특하게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앞장에서 나는 한가지 기여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목사의 기본적인 신학적 비전에 기여한다. 즉 에드워드 팔리(Edward Farley)의 용어로 목사의 하비투스(habitus)에 기여한다. 우리의 체질(habitus)은 우리의 전문성을 대변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성도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은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목사의 권위에도 연관된다. 여기에서 나는 단순히 하비투스(체질)가 목사의 실천을 형성하고 지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여기에서 나는 성찰적인 지도력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신분이 암시하는 두가지 점을 상술하려고 한다. 첫째로 목사의 성품이나 인격적인 영성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되는 것이 목사의 실천에 미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성례전적인 현존과 제사장적인 성격과의 관계, 특히 목회관계에서 목사와 평시도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관계-수탁자 보증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잇슈이지만 분리하여 설명하여야 할만큼 중요하다. 이것은 교역에 관한 소명에 기초한 것으로 본 장의 마지막에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암시점들을 탐구하기 전에 3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는 만인 제사장직에 대한 교회의 신학적 확신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만인 제사장직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교역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제사장직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을 완전히 육체화 하였다. 세례에서, 목사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그 분의 몸에 연합되었으며, 세상에서 계속적인 성례전적 현존으로 육체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제사장직의 기초이다. 목사들이 본질적으로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것은 목사-평신도 관계의 역사에서 그처럼 치명적이 되어온 성직자의 제사장직(그리고 성례전적 현존)에 대한 제한이다. 하나님의 백성 전체는 모이고 흩어지는 삶속에서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례전적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특히 회중들과 다른 공동체적 형태에서 교회가 집단적으로 구체화 해야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다. 목사가 만약 특별히 구별되었다면 그것은 단지 동등한 자들 중에서 첫 번째 순서라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들의 특별함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특별한 지도력의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대변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교회이다. 그러나 모두가 평등한 제사장직을 갖는 제사장 공동체의 첫 번째 순서인 목사는 하나님의 신비와 가장 완전하게 동일시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의 제도적인 상징이며 대표적 인격이다. 그것을 좋아하든지 또는 싫어하든지 간에 목사의 직을 맡은 우리는 교역실천에서 우리의 인간성과 전문성 이상의 것을 가져오는 자이다. 우리의 현존으로 우리는 2장에서 언급한 어반 홈즈(Urban Holmes)의 용어대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짐을 벗어버리느냐-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짐이다- 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지도능력을 향상시켜주는 하나님이 은사로서 어떻게 이해하고 책임적으로 사용하느냐 이다.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

먼저 이러한 대표적 위치가-그것을 예전중심교회의 입장에서 해석하든지 또는 말씀 중심의 입장에서 해석하든지 간에-목사가 참여하는 여러 가지 역할에 미치는 공헌을 고찰해보자.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기능을 수행하면서 이러한 역할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수준 곧 명시적 수준과 암시적 수준에서 나타난다.

좀더 명시적인 수준에서 보면,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역할 가운데서 목사의 인격적 전문성에 성스러운 무게-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용어가 없으므로-이런 용어를 사용한다.-를 더해준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은 우리가 교역실천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에 깊이를 더해준다. 예를 들면 의미해석-설교, 예배인도, 목회상담, 가르침 등-에서 의미를 주는 자는 단순히 인간 아무개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다. 많은 성직자들이 입고 있는 까운이나 특별한 의복과 설교하면서 들고 있는 성경책은 목사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대표적 역할을 회상시키는 가시적 상징이다. 가끔, 불행스럽게도 어떤 이들은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들의 설교와 기도에 성스러운 무게를 더해 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나의 경험에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생산한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루터교 목사 존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기교회가 어떻게 자기의 설교와 가르침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 이유는 말씀의 해석자로서 그가 참여하고 있는 "성례전적 광채"(그가 이야기한 바대로)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루터교인들에 있어서, 설교는 성례전과 같이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현존을 불러일 으킨다. 그것은 단순히 설교가 아니다. 설교자의 까운과 그 역할과 함께 행하는 모든 것들이 이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존은 성실하고 순수하게 말씀을 해석해야할 상당한 책임감의 짐을 느낀다. 그러한 논리로 그는 전문성에 기초한 권위를 성례전적 인격으로서의 권위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 다른 실예를 이야기하면, 목사가 신성불가침을 대변하고 교회의 컨텍스트에서 기능한다는 사실은 심리치료와 구별되는 목회상담의 역동성을 창출한다. 양자는 모두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전문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역할과 컨텍스트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가 권위의 역동성에도 차이를 가져온다. ⸂

평신도가 목사의 가르침이나 권면에 의문을 제기 할 때 그것은 어떤 다른 형태의 불일치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이것은 "계획을 꾸미는 여인들"이라는 시사 TV 코메디의 한 프로에 나타난다. 광고방송 TV에서는 드문 일인데, 그 프로는 여성안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샬렌이라는 등장인물은 남침례교회의 평신도로 십대에 목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직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프로에서 그녀는 여성안수를 강력히 반대하는 자기교회 목사님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있다. 그룹토의 가운데서 그는 자기의 입장을 재천명한다. 그 직후 그녀는 자기 목사를 찾아가 그 교회를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밝히려 한다. 그녀는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해석하는 분이라고 믿어 왔으나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목사의 가르침이 자기의 목사직을 반대할 뿐 아니라 인류의 절반을 목사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결정에 크게 놀라고 불안해전 그 목사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는 자기들 두사람이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한 것 때문에 그녀가 교회를 떠나거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샬렌은 심각한 감정으로 대답한다, "그러나, 목사님은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당신은 나의 목사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말했다는 것은 그를 친구 이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때문에 어려움과 불일치의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인식되는 것은 복일 수도 있다. 우리가 대변하는 그분의 현존이 교인의 고통이나 죽음에 직면해서 우리가 더듬거리며 부적합하게 하는 말을 보충해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보지 않는 목사가 우리 중에 있는가? 목사로서 나는 슬픔을 당한 가족을 목회하면서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가끔 나는 내가 느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고 그들의 상실에 직면하여 의미있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묵묵히 그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도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가져다 준 위로에 감사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들의 감사는 단순히 친구가 찾아와 주었다는 감사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목사로서 내가 상징하고 있는 초월하신 그분의 위로이다. 나는 제사장공동체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전달하는 자로서 그들과 함께 앉아있는 것이다.

한 신학생은 작은 교회에서 학생전도사로서 처음으로 장례식을 집례한 것을 성찰하면서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유사한 경험을 기술하고 있다.:

교인 한사람이 돌아가셔서 나는 그의 장례식을 집례해야 했다. 나는 그의 집에서 그 가족을 만나서 그들의 불신에 찬 부르짖음을 들었다,"어째서 빌을 데려가십 니까?" "그는 더 살면서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은데, 어쩐 일입니까?" "그이 없이 어찌 나 혼자 살아가란 말입니까?" "하나님,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 까?"

나는 예배시간에 신성한 분위기에 압도당하였다. 전에 한번도 장례식을 집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 혼자 어찌 감당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우리는 모두 짙은 안 개속에서 익숙치 못한 길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나의 감각들이 나를 떠나 버리고, 맹인과 같이 바른말과 행동을 더듬거리며 찾는 것 같이 느꼈다. 그런데 이 어두움 속에서 복음의 빛으로 그들을 위로해야할 사람은 떨리고 맹인같고 그러한 고 통과 당황에 직면하여 할말을 찾지 못하는 바로 나였다. 나는 바로 거기에 그들의 고통과 우리 믿음의 소망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빛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 데 하나였다. 나는 심지어 내가 입고 있는 옷 검은 옷과 그 속에 받쳐입은 면 드레스 에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모임 가운데서 거기에 모인 교인들과 우 리 앞서가신 성도들의 지원만 받고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다. 바로 그 현장에 그 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모두를 통해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확신의 말씀을 해 주시 고 있었다-거기에 모여있는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소망과 기쁨의 소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 예배동안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 샛길을 갈 수 있 는 능력을 받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우 리는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현존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의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Dudley & Hilgert, 1987: 98).

그 학생은 신앙공동체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례전적 현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자기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의 첫 번째 대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제사장적 역할의 힘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면 드레스 위에 입은 까만 까운은 그 공동체와 그녀가 대변하는 초월하신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역할을 했다. 지도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성직자가 수행하는 상징적 역할의 힘 이외에, 자기의 경험에 대한 그녀 자신의 설명은 우리가 목회실천을 성찰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을 미래목회갱신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하는 살아있는 실예라는 사실이다.

성직자가 수행하는 대표적 역할은 모이는 공동체를 넘어서 교회의 공적교역에 까지 확장된다. 내가 강조했던 바와 같이 공적인 생활에서 제 일차적인 교역자들과 제사장들은 평신도들이지만, 목사의 상징적 위치도 공적인 영역에서 중요하다. 제 4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의 동료들과 내가 (Mckinney, Roogem, and Carroll, 1983 ) 공적생활에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 지역사회지도자들과 인터뷰 했을 때, 그 지도자들은 목사와 그 역할을 동일시 하였다. 집단적으로 교회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교역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역사회지도자들은 목사의 참여를 특별히 중시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목사들이나 신부들이나 랍비들이 지역사회행사에 참여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으면 종교가 그 행사에 부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것은 만인 제사장직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상학적인 시각에서 그들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목사가 수행하는 독특한 대표적인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 역할을 더 정확히 이해한다면, 목사는 하나님이 현존하는 제사장 공동체에서 동등한 제사장들 중에 제일 첫 번째 순서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현존을 대변하는 자로서 목사의 성례전적 위치가 기여하는 분명한 공헌을 넘어서 또 한가지 암시적인 공헌이 있다. 그것은 목사들이 부적격한 경우에라도 그들의 상징적인 역할만이 목사 자신이 말하고 행하는 것에 신성한 무게 다 신성불가침의 현존을 더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직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투사(projection)와 전이(transference)의 현상들도 있다.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보면 그런 현상들은 어린아이들이 목사를 하나님과 혼동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목회심방에서 이런 동일시를 자주 경험한다 : "엄마, 하나님이 문밖에 와 있어요!" 그러나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비슷한 동일시가 어른들에게서도 일어난다. 목사는 자는 교인들의 가장 깊은 감정들과 미해결의 의문들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투사하는 대상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상징이 됨으로써, 목사들은 멀게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을 특정한 인간의 필요들에 가까이 계신 분으로 만들어 준다. 목사들은 특별히 이런 투사와 전이의 대상이 되지만, 이 과정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한다면, 전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사장 공동체라는 사실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특정한 인간의 필요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은 사실 목사의 과제가 아니라 교회의 과제이다. 그렇지만 목사는 평등한 제사장들 가운데서 제일 첫 번째 순서에 서 있기 때문에 신성불가침과 동일시되고 전이와 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목사는 자기와 신성불가침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항하여야 하지만, 그 과정이 건전할 수도 있고 건전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로렌 미드(Loren Mead, 1976 : 4)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를 한사람의 목사로 인식하는 동안에 나를 대면하는 사람들은 중요하고, 아주 미묘하게, 또는 방어적이요 두려워하면서 나에게 투사한다. 그것은 나를 신성불가침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의 전달자로서 나에게 부여하는 영적인 권위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일어나게 조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

또다시 앞서 언급한 TV쇼의 사례를 성찰해 보면, 샬렌이 목사와 자기와의 사이의 불일치를 친구간의 불일치 정도로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샬렌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가장 깊은 소망과 감정을 목사 위에 투사했기 때문이다. 여성안수와 따라서 그녀의 목사직에 대해서 목사가 반대했을 때에 샬렌이 그처럼 고통스러웠던 것은 목사의 반대가 마치 하나님의 반대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하나님 경험은 그 목사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적 임재에 국한되지 않았었다.

전이와 투사는 유익하고 필요한 경험일 때가 있다. 전이와 투사는 신자들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생각과 감정들과 당혹감들을 명료화시켜줄 수 있다. 그것들은 자기방어의 껍질을 깨뜨리고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것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출 수 있게 만들어 준다(마 18:3) ⸃ 동시에 전이와 투사는(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목사에게 불건전한 의존감을 조성하여 착취 당할 수 있는 극단적인 의존감과 신뢰감을 조성한다. 우리들은 목회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인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관련된 목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전이와 투사는 목회관계에서 그러한 위험성을 높여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건들이 근래에 와서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인지 또는 더 많이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것인지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문제들은 목사들 뿐 아니라 다른 전문직들에도 심각한 잇슈들을 일으킨다. 나는 다음에 목사-교인간의 신뢰에 있어서 목사의 성례전적 위치의 중요성을 논하면서 이 문제를 좀 더 언급하겠다.

요약하면, 목사가 된다는 것-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성찰적 지도력에서 전문성과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 됨으로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목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은 성스러운 무게 또는 심각성이 더해짐으로 해서 목사의 권위는 강화된다. 또한 암시적으로 목사가 인간의 특정한 필요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대변함으로서 목사의 권위는 향상된다. 이것은 또한 건전한-가끔은 불건전한-

전이를 일으킨다. 이러한 특별한 대표적 역할과 오용 가능성 때문에 그것은 양육되어야하고 책임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은사이다.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를 대표하는 것은 모든 전문직들 가운데 목사만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사들도 신성한 일들, 즉 생명과 죽음의 잇슈들을 다룬다. 우리는 그들의 의학적 전문성을 신뢰하지만, 우리는 자주 그 이상의 것을 그들에게 기대한다. 특히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빠질 때는 더욱 그렇다. 저명한 에세이, 아나톨레 브로야드(Anatele Broyard, 1990)가 암을 치료하는 의사들을 만나면서 자기가 느낀 감정을 기술한 문학비평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능력있는 의술과 약간의 형이상학적 지식을 갖춘 의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치료하는 자가 되고 싶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자기 아버지는 유대인을 싫어하는 전통적인 남부 노인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방광 암에 걸렸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는 유대인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 다. 그의 주장은 유대인의사가 의학의 진정한 전문인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성경이해에 따르면 유대인의 인생은 연구, 갱신 그리고 개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생존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암과 싸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을 자기일같이 기쁨으로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장사속을 멀리한 다. 환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불행이다.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유대인 의사가 하나님 과 더 가깝고 그러기 때문에 죽음을 저항해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가 종교적으로 진정성있는 목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브로야드는 의사의 역할의 영적 제사장적 차원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어떤 의사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다른 의사들에게서는 경험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다.

성례전적 현존과 신뢰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의 상징적 지위는 권위를 행사하는데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목사는 가장 심각한 인생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자이다. 사람들은 고도로 좌절과 약함에 빠졌을 때 목사를 찾아온다. 목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약함 때문에 손해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나는 목사로서의 전문성을 기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목사가 되었다고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목사는 교인 한사람 한사람의 최고의 유익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며, 복음에 충실하려고 애쓰면서 교회의 최고의 덕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서 위임받은 자로서의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신뢰를 받아야 한다.

교회는 목사를 신뢰하고, 반대로 목사는 교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라틴어 credat emptor라는 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의 뜻은 "고객이 믿을 수 있게 하자" 또는 "고객이 신뢰받을 수 있게 하자"이다. 이 구절은 Cavedt emptor , 즉 "고객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하자"는 말과 예리하게 대조가 된다. 후자는 시장에서 물물교환의 모토로 자주 사용된다. 사회학자 에버레트 휴(Everett Hughes, 1968: 657)는 credat emptor를 일반적으로 전문직업들의 모토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바 있다. 휴에 따르면, "고객은 전문인들을 신뢰해야 한다; 고객은 자기가 파악하고 있는 모든 비밀들을 전문인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고객은 전문가의 말과 판단을 신뢰하여야 한다." "나를 믿으시오" 하고 능란한 자동차 판매원의 음성이 TV대중광고 방송을 통해 매끄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고객은 caveat emptor가 실천규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전문인들은 "나를 믿어주시오" 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고객이나 교인은 credat emptor에 근거하여 응답한다. 전문인들은 고객과 사회복지에 최우선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행동을 실천을 해야하는 수탁자의 책임을 갖는다. 전문인들의 신뢰의 근거는 일반적으로 상당한 토론을 불러일으킬 만큼(예, Barber, 1983 : 131ff)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목사-평신도 관계의 신뢰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모으고 싶다.

자기 목사에 대한 신뢰의 근거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기쁘게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처럼, 목사에 대한 우리의 신뢰의 근거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필요하는 지도력을 제공해 주거나 나의 특정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목사에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문능력에 대한 기대 이상의 것이 개재되어 있다. 즉, 목사의 성품에 대한 기대가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몇 년전에 나의 아내와 나는 남캐로라이나에 소재한 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운전하여 가는 중이었다. 동창회가 열리는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차가 고장이 났다. 우리는 겨우 정비소에 차 끌어다 놓고 고칠 수 있는지 알아 봤다. 차는 고칠 수 없었다. 적어도 그날 저녁까지는 고칠 수 없었다. 이 차로 더 이상 운전하며 간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어떻게 동창회 모임 장소에 갈 것이냐로 의논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내 차를 타고 가지 않겠어요? 그리고 끝난 후 집에까지 타고 가시고 내일 여기에 다시 가져다 놓으시면 되지 않겠어요." 우리는 그의 너그러운 제안에 당황하여 그의 차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동창회장까지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나는 그에게 낯선 사람을 어떻게 믿고 차를 빌려주려 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 모교의 코치로 있다고 대답하면서, 워포드 대학교 졸업생은 누구든지 믿을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우리가 그 대학교 학생이었을 때, 워포드 신사가 되는 것은-그 때는 남자 대학이었다-규범문화에서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었다) 그 코치는 너무 순진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받을지 모르나, 그 코치가 기꺼이 나를 믿어주는 것과 교인들이 목사나 신부를 기꺼이 믿어주는 것 사이에는 모종의 유사성이 있다. 그 코치의 마음에는 워포드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완전히 낯선 사람까지도 신뢰하게 만드는 성품에 대한 어떤 상징이었다. 신성불가침의 대리인이 된다는 것도 비슷한 힘을 갖는다. 목사의 도덕적 영적 실패로 신뢰관계에 금이 갔을 때에라도, 다른 사람들은 목사를 기꺼이 신뢰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목사나 신부에게 그런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뢰의 근거는 목사들이 대변하는 초월자의 성품에 대한 기대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에게 정당성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삶의 깊이까지 내려 가셨다고 믿기 때문에 목사에게서 공감과 자비와 돌봄을 기대한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이 자기들의 유익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유익을 손상시키는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목사도 자기들의 유익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서 헌신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물론 그 반대로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근거하여 목사도 신실할 것이라고 추론하기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더 연역적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목사와 신부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성실함, 정당함, 자비, 돌봄, 그리고 진실함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다. 참으로 나는 이러한 귀납법적인 방법이 더 연역적인 방법과 마찬가지로 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목사의 제사장적, 상징적 성격 때문이다. 어느 접근도 목회현장에서의 신뢰관계의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

그러한 특성들이 교회와 목사 또는 신부와의 유대관계의 성격이 될 때에 그러한 특성들은 성찰적인 지도자로서 목사 또는 신부의 기능향상에 중요하게 기여한다. 기꺼이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공감을 보이며, 돌봄과 자비를 표현하고, 진실을 말하며, 정의로우며,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일종의 "신비적인 토양" (mystical geography)을 창조한다. ⸆ 이 신비적인 토양은 공통적인 관계의 잔디밭에서 목사와 교인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토양은 치료하며, 구속하며, 해방시키는 목회관계를 만들어 준다. 그러한 특성들은 관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주는 은사들을 깨닫게 하며, 다른 사람들의 성찰적인 능력들을 환기시킨다. 화란의 사회학자 릴리안 포이에( Lillian Voye,1989)는 교회구조 외부에서 형성된 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 남미의 기초공동체와 유사한 것들을 연구조사 했다. 어떤 공동체는 지도력의 역할에 목사 없이 운영되었고 다른 공동체들은 목사나 신부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하였다. 한 그룹에서 회원들은 신부에게 떠나라고 요구했다. 한 회원이 그 면직에 대해서 코멘트 했다. "그 신부는 전문지식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분을 모셨다(그분은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분에게서 차이를 발견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노출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결론지으려는 고자세를 취하는 분 보다 이분은 그룹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10. 강조는 덧붙인 것임)

첫 번째 신부에 대하여 그 그룹이 가졌던 감정과 비슷하게 나의 친구 한 분은 자기 교회에 부임한 새로운 목사에게 아주 실망했던 이야기를 성찰했다 : "그는 정말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멋지게 설교했다. 그러나 인격적 목회적 관계에서 보면 그는 냉혈동물이다!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신비적 토양이 결여되었다.

의사와 환자간의 관계적 유대를 깨닫고 나서 몇몇 의과대학들은 소위 "의학적 치료의 관계적 차원"을 시험적으로 가르치고 있다(Suchman and Matthews,1988; Matthews, Suchman and Branch, 연대미상). 이 차원은 지배적인 의학모델인 경험적 과학모델을 확장시켜, 이 모델에 "초 인격적" 또는 "영적" (저자들이 붙인 명칭) 성격을 첨가시키고 있다. 때때로 그들은 의사의 역할의 제사장적 성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적 차원에는 "환자의 불평의 밑바닥을 들어주기," "인격적 관심을 표명하기," "단순히 환자들과 함께 있어주기" 등등이 있다. 수많은 관계경험들을 요약한 후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해, 인내, 그리고 특별한 라포의 순간들을 통해서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장기적인 돌봄과 신뢰간계의 기초가 세워진다. 이런 형태의 의사가 환자관계는 치료효과가 있 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들에서 핵심적인 치료수단은 테크놀러지나 처방약 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이고 의사가 한자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그것이 아 무리 이상하고 괴상하게 보일지라도, 의사가 불시에 전화를 걸어준다든지, 의사로서 의 직업적인 관계이상의 친밀한 우정을 보여 준다든지, 환자의 고민을 주의깊게 경청 한다면 그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효과를 가져오는 헌신과 돌봄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 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고 자기의 짐과 고통을 털어놓고, 의사에게 수용되고 있다고 느 끼고 관계에 안전을 경험하며, 이 관계 속에서 환자가 자기의 짐과 고통은 자기에게 독특한 것이면서도 모든 인류가 경험하는 고통의 일부를 자기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의사 - 환자 관계에는 치료의 효과가 있다.(Matthews, Suchman, & Branch, 연대미상 :26).

관계적 차원은, 의학에서든지 교역에서든지 간에, 전문성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전문인의 전문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장, 신뢰관계, 즉 신비적 토양을 창출한다. 목사나 신부에게 있어서-좀 덜 분명하긴 하지만 의사에게 있어서-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된다는 것의 한가지 의미일 것이다.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것과 소명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신성불가침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목사가-아마도 의사와 다른 전문가들도 역시-도덕적 영적 거인이 되어야 한다고 암시한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2장에서 소개한 직책과 개인간의 중요한 구별을 참고하여 이것을 풀어보자.

목사들의 역할이 신성한 무게를 가지거나 목사들이 신뢰할만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평신도들보다 인격적인 수준에서 더 거룩하고 사랑이 많고 하나님께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구속받은 죄인으로 은혜 안에 살지만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목사를 목사되게 하는 것은 목사의 직책 또는 역할 때문이다. 목사의 역할에는 신성불가침의 대변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규범적인 기대가 포함되어있다. 신실하다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 한가지 의미이다. 교단에 따라 다르고 지역문화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마는 이러한 기대들은 그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기대들을 내면화시키고, 그것들이 목회적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 내면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라도 이런 기대들은 일종의 "교사" 또는 "안내인"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의 용어로 이야기한다면, 몽학선생이다). 내면적인 동기에서는 항상 목회적이요 이타적이 아닌 목사도 교인들과 교회에게 순수한 도움을 제공할 때가 많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개인적인 동기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목사의 역할에 대한 신뢰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

이런 직책 또한 역할과 인격과의 구별이 어째서 중요한가? 그것은 신뢰책임이 우선적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목사나 신부의 직에 대한 제도적인 기대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남성목사는 자기의 여성 내담자에 대해서 성적인 환상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화된 역할기대들이 아주 강하여 그런 환상을 승화시키고 상담전문지식을 사용하여 그녀를 도울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어떤 목사는 자기 교회 지도자들이 신속하게 변화하는 이웃에게 합당하게 대응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기 개인의 입지향상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사가 지도력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역할 기대는 그 목사의 본능적 욕구를 극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 목사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내적인 동기가 별로 없을지라도 그들에게 신뢰책임을 다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그래함 그린의 위스키 신부가 마지못해서 성찬 집례하기로 동의했을 때에 행한 것과 같다. 목사의 직책에 대한 이런 구조적 차원은 목사나 신부에게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여 부르심을 받은 소명을 수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은 내면적인 동기가 흔들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기도에 응답이 없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동안에도 믿음을 지켜 소명을 수행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목사의 내면적인 존재, 즉 목사의 인격적 신앙적 진정성을 감소시키려고 하지 않는다-안수 받을 때에 불멸의 제사장적 성품을 받는다고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그분의 실제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징하기는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매우 어렵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전이 실로암 못에서 회복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비전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요9장).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가 체험자의 교역을 주장했을 때에 여러 가지 다른 뜻도 있었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목사자신의 실존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었다. 물카히 신부는 그의 제사장직 때문에만 신뢰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 직을 수행하는데서 보여준 그의 인격적 신앙적 진정성이 거기에 빛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고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가 찬양한 회중교회 목사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 실존적 지식은 교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반영하며, 그것은 평신도와 목사 공히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소명과 함께 좀 더 특별하게 그 가운데 얼마에게 안수교역에 들어오라는 소명을 의미한다. 목사의 소명에는 외적 소명 즉 교회의 소명으로 그에게 목사의 직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를 교회가 인정하는 것과, 내적 소명, 즉 신비적 소명으로 목사가 되라는 내면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 포함된다.⑧ 신비적 소명은 자기의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온다. 그것은 꿈을 꾸던 야곱, 호렙산의 모세, 성전의 아사야, 또 다메섹 도상의 바울이 경험한 것과 같은 극적이요 영적인 체험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점차적으로 소명을 일깨워가는 점진적 소명체험일수도 있다. 이런 만남-극적이든 점진적이든-은 하비투스(habitus), 즉 자신의 존재와 교역실천을 구체적으로 형성해 주는 기독교 신앙과 삶의 비전의 핵심에 있다. 이것은 신성불가침을 대변하는 신앙적 진정성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요, 외적인 직책 이상의 것이다. 목사의 직책뿐 아니라 목사의 인격은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한다. 목사는 직책상 신실하다고 인정받을 뿐 아니라 인격적으로 신실성을 가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목사의 소명이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목사의 권위에 연관되는 것처럼, 그것은 전문인으로서의 전문능력과도 연관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전문능력을 강조하는 전문교역모델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체험에 근거한 목회모델과 반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양자는 각기 독자성을 가지면서 교역의 완성을 위해 서로 보완하며, 신실하고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제임스 구스타프슨(Games Gustafson,19882:514)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전문성(전문능력)이 없는 소명은 무능하고 비효과적이요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소명이 없는 전문성은 생생한 동기를 부여하고 민감성과 감각을 일깨우고 자기실현의 합당한 의식을 배양하는 도덕적 인간적인 뿌리에 이르는 통로를 열 수 없다. 또한 소 명이 없는 전문성을 우리 인간의 노력이 목적하는 바 인간성의 더 큰 목적을 쉽게 보 여 주지 못한다.

그것은 생생한 소명감이 성찰적인 전문능력을 성례전적인 임재와 연결 시켰을 때에 가능하다. 그럴 때에 우리는 교회의 안수받은 지도자로서의 우리의 권위의 갱신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역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성찰적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법을 배운 목사들이 예수님께 들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목사는 서기관과 같지 아니하고 권세 있는 자와 같이 가르친다."

































후 주

제1장: 권위를 상실해 가는 목사들

1.헌터는 자기의 책 American Evangelicalism: Conservative Religion and Quandry of Modernity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복음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는 신앙고백을 순화시켜서 덜 객관적이 되게 하고 현대인들이 필요와 관점들에 더 합당하게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자이다. 그러한 적응의 노력은 대체로 남침례교단 내에서의 강성근본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간의 갈등에서 기원된 것이다.

2.간선 - 기차노선에 비유해서 - 교단이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은 미국문화의 중심에서 가까이 위치해 왔으며, 성공회, 장로교회, 회중교회들(지금 연합그리스도의 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최근에 루터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교단들은 비공식적이지만 사실상의 종교기관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 간선 개신교단들에 대한 유익한 분석을 보려고 하면 Roof와 Mckinney(1987)를 참고하라.

3.예를 들면 Letly Russell(1979,1987)과 Hahn(1985)을 보라.

제2장 권위의 정의

1.Sweet(1982:721)에서 인용함.

2.권위의 이론들에 대한 토론들을 더 많이 참고하려면 Nisket(1978)과 Sennett(1980)을 참고하라.

3.1954년 교육에서의 "분리와 평등"원칙을 깨는 대법원 판결이 있은 후에 남부의 대부분 개신교단들은 그 결정에 대한 구속력이 없는 해결책을 통과 시켰으나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은 그 결정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는 그 결정을 강력히 지지하고 각 교회에 통합지침을 시달했다. 이것에 반대하는 교인들에게는 수찬정지까지 명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 분의 신부가 나에게 "그것은 개인이 들기에는 너무 무거운 도끼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시달이 카톨릭 교도들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모른다. 내 생각에는 이전에 비해서 나아진 것이 없었다고 본다.

4.코네티커트주 하트포드 대교구의 대주교는 1988년 대선공약에서 민주당이 임신중절찬성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민주당 당원직을 포기했다고 공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결정이 교회의 가르침에 근거했지만, 자기 개인적인 결정이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자기의 결정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포드 법정(1988년 8월 26일)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행동은 행정부의 과정에 대한 일종의 방해라고 해석될 소지가 충분히 있었으며, 이 때문에 임신중절 찬성집단이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다.

5.그러나 웨버가 현대사회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관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종교적인 금욕주의 - 히브리 예언자들과 개신교윤리가 소개하는 서구사회의 카리스마적인 기초 -는 더 이상 현대 관료주의 조직의 적절한 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하였다(Weber, 1985:181-182).

6.만약 웨버의 카리스마에 대한 입장을 이 정도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하면-물론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 파슨즈(1937)와 니스베트(1966)가 주장하는대로, 웨버의 카리스마에 대한 입장과 뒤르껭(1915)의 신성성에 대한 견해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

7.종교지도자의 형태들과 권위의 기초에 대한 뛰어난 토론을 우리는 와츠(1944:331-374)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8.내가 이전에 발표한 두 개의 논문을 참고하라(Carroll, 1981, 1986).

9.O`Dea의 중요한 주장을 "구조의 딜레마"(1966)에서 참고하라. 로마 카톨릭 관점에서 사도적 전승에 대한 교리와 해석에 대해서는 쉴레벡커(Scehillebeeckx,1985)를 참고하라.

10.예언자와 제사장간의 차이에 대한 웨버의 주장은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권위에 대한 복음주의적 이해와 성례전적-예전적 이해에 반영되고 있다. 웨버에게 있어서(1963:46), 개인적 소명은 예언자를 제사장과 구별하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제사장은 신성한 전통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나 예언자는 개인적인 계시와 카리스마에 기초한 권위를 주장한다.

제3장 권위의 관계적 차원들

1.예를들어 Schweizer(1961), Shutz(1975), Cooke(1975), Meeks(1983), Scehillebeeckx,(

1985), 그리고 Dudley and Hilgert(1987) 등을 보라.

2.위에 언급한 3인의 역사가들 중에서, 할란 (Harlan)은 슈모터(Schmotter)와 영즈(Youngs) - 그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 가 성직자 - 평신도 간의 갈등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무비판적으로 신발전주의적해석의 틀을 채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틀의 해석에 따르면 성직구조는 대중적 평신도 위에 군림하고 있으나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평신도들이 성직구조를 이기고 승리 할 것이라고 한다(Harlan, 1980:39). 할란은 어떤 성직자들의 자기들의 기득권에 해한 주장이나 관심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들의 지배는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며 성직자의 기득권 주장에 대항하여 싸우는 수많은 성직자들이 있다고 설득력 있게(나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주장하고 있다.

3.코네티커트주에서, 1708년의 Saybrook Platform은 마사츄세츠주의 1648년의 Cambridge

Platform 보다도 지교회대표들로 구성된 전국적인 연합체 또는 교회회의에 훨씬 더 중앙집권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코네티커트회의는 성직자들만의 회의가 아니라 성직자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평신도들이 오히려 다수를 차지했다.

4.Calhoun(1965)을 참고하라. 영국에서의 병행적 발달은 Anthony Russell(1980)을 참고하라. 약간 다른 목적으로 King(1981)은 미국 감리교단내에서의 권위에 대항하는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여기에는 감독과 목사들간의 권위갈등 뿐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권위갈등도 다루고 있다.

5.예를 들면, 사회참여주의에 대한 성직자-평신도 갈등에 관한 Hadden(1965)의 토의를 참조하라, 또는 미국장로교회에서 우선순위에 대한 평신도-성직자 갈등에 관한 Hodge(1989)의 분석을 보라.

6.균형적인 관계가 규범인 교회에 대한 아주 분명하고 유익한 토의에 관해서 Hahn(1985)을 참고하라. Hahn이 주장하는 교회에 대한 "개방적"모델과 "폐쇄적"모델간의 대조는 내가 주장하는 불균형적 관계와 균형적 관계와의 갈등에 대한 주장과 유사하다.

제4장 권위와 교회

1.켈시(1975)는 성경이 어떻게 신학에 규범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신학적인 주제들의 판단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켈시는 성경본문들이 규범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본문들은 신학적주제들을 도출하는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학의 규범을 제공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Pattern"들이다. 그 형태들(Patterns)이 신학적 주제의 기독교적 성향을 판단하는 기초이다.

2.Reed(1978)는 이 비슷한 형태로 교회를 해석하기 위하여 후기 프로이드 심리학이론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제1차적인 과제는 특별히 교회예배에서 "특별한 의존관계에 도달할 수 있게" 개인들을 돕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들로 하여금 갱생을 경험케하여 자기의 일상생활에서 자율성 또는 상호의존관계를 회복시켜준다.

3.이것은 1988년 9월14일 하트포드신학교 이사회 회의에서 William Farley가 진술한 것이다.

제5장 교회지도력의 중심과제

1.본 장의 내용은 Dudley, Carroll, 그리고 Wind(1991)에 처음 소개되었다.

2.최초의 그리스도인들과 관련하여 인식 불일치에 관한 자세한 토의들을 알고 싶으면 Gager(1975)와 Dudley와 Hilgert(1987)을 보라.

3.이것은 대체로 하트포트 신학교 사회종교 리써치센타가 Parish Profile Inventory 사용방법을 교회에 도와주는 경우에 볼 수 있다.

4.그러나 교회행정가 이미지는 목회학박사 프로그렘에 등록하지 않는 목사들보다 목회학박사를 취득한 목사들에 의하여 약간 더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많은 목회학박사 프로그램들은 교회교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으로서 조직발달이론과 방법들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5.이 실예는 목회학박사 프로젝트 보고서에서 온 것이다(Crabtree,1988). 이것은 책으로 출판되었다(Crabtree,1989).

제6장 권위있는 지도력: 성찰적 지도력의 역동성

1.예를 들면, Hough and Cobb(1985)를 보라.

2."성직적 패러다임"을 성찰하는 이런 가정들에 대한 비평에 대해서는 Farley(1983)를 보라.

3.식민지 뉴잉글랜드의 설교를 여러 해 동안 연구한 Harry Stout(1986)는 최근에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하여 현재 시무중인 회중교회목사 한 사람을 집중 추적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견한 것들 중에는 초기 뉴잉글랜드 설교(Stout,1987)와 놀랍게도 비슷한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또한 성찰적인 실천의 성격도 많이 드러났다.

4.이 방법을 사용하여 목사는 자기의 교역실천가운데서 도전적인 사건이나 또는 분석을 위한 상호작용을 선택한다. 그는 그 사례를 가지고, 그 사건이나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목적, 배경,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한 중요한 다른 정보들을 몇 문단으로 기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전략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술한다: 특별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 목적들을 어떻게 성취하려고 했는가? 어째서 이런 특별한 목표들과 전략들을 세웠는가?

특별히 유익한 것은 다음 단계이다: 그것은 그 사건이나 상호작용에서 실제로 일어난 대화를 몇 장으로 쓰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 목사는 면을 가운데서 두 부분으로 나눈다.

오른쪽 편에서는 그 대화의 핵심을 적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 대화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을 적는다. 왼편에는 목사자신을 표현하며 각자가 그 대화를 하는 동안에 마음에 어떤 것들(어떤 생각, 또 어떤 감정들)이 일어냈는지를 회상하여 적는다.

마지막으로 그 목사는 그 사례를 다시 잃고 성찰하며, 자기가 효과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 그 행동을 하게 한 근본적인 가정들을 적는다. 그 목사는 이러한 가정에 기초하여 성찰하려고 한다: 이런 가정을 하게 한 그 목사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교역접근은 무엇인가?

이런 연습은 동료들의 도움이 없이도 자기인식을 더 향상시키는 반면에, 자기의 동료가 이런 탐구과정에 참여하면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가끔 동료들은 그 목사자신의 목적달성에 기여했는지 아니면 방해했는지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제7장 성찰적인 지도력의 구조

1.인식방법에서의 목적론자들과 구성론자들간의 구별은 오랜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전통을 갖는다. 임마뉴엘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구별, 마틴 부버의 "나-그것"과 "나-너"관계의 구별 등은 그 실예이다. 이와 유사하게 H.리챠드 니버(1941)는 역사에 대한 "외면적 접근"과 "내면적 접근"을 구별했다. 인식자와 인식대상의 구별을 시사하는 친밀관계에서 외면적 접근은 목적론자에, 그리고 내면적 접근을 구성론자에 더 가깝다. 더 최근에 인지심리학자들은 사고 방법에서의 이원론적 방법(목적론자)과 비판적 방법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이와 유사한 구별이다.

2.이와 반대로 어떤 성서신학자들은 객관성추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은 언어학적 역사적 비평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믿음의 예수에 대신하여 역사적 예수를 발견하려한다.

3.이 두 세트 요소들이 성찰적 지도력의 자원들을 설명하는 나의 방식이다. 이에 유사한 방법이, 세 가지 요소들(전통, 경험, 그리고 문화)을 사용하면서, James D and Evelyn Eaton Whithead의 책 Method in Ministry(1981)에서 개발되었다. 나는 그들의 연구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Browning(198 )의 실천신학적 사고의 요소들에 대한 논의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4.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한 여성심리학적 통찰에 대한 개요를 보려면, Smith(1989)를 참고하라. 특히 22-42면을 보라. Ice(1987)는 여성목사들의 세계관에 대한 연구에서 여성심리학의 통찰을 활용하고 있다.

5.Walrath는 그의 책 Frameworks(1987)에서 실제발견에서의 세대차이의 의미를 상세히 예증하면서 교회지도력에 주는 암시성들을 고찰하고 있다.

6.이 여러 차원에서의 교회의 차이들은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트의 교회연구에서 실증되었다. 나의 동료들과 나(Roozen, Mikinney, and Carroll,1984)는 교회를 분류하기 위하여 사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우선적인 강조점이 기독교생활의 피안적 요소에 있는지 또는 차안적 요소에 있는지와 그들이 교회의 주도적 참여를 강조하는지 또는 개인 성도들에게 참여를 맡겨버리는지에 근거하여, 우리는 네 가지 오리엔테이션을 구별하였다. 우리는 차안적인 교회들을 참여적 교회와 사회복지 중심교회로 나누었다. 피안적 경향성의 교회들은 복음주의적 교회와 세상과 분리된 성전중심교회로 나누었다. 이러한 오리엔테이션은 교회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스타일들을 반영한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인 기능수행과 사회와의 관계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또한 역사, 크기, 위치, 교인들의 지역성, 그리고 지도력 같은 것들에 따라서 이러한 차이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7.아주 중요하고 창조적인 책 Congregation(1987)에서 Hopewell은 교회의 이야기들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분석하려고 할뿐 아니라 자기의 교회에 대하여 그러한 분석을 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지침을 제공하려고 한다. 교회의 정체성과 문화연구를 위한 자세한 방법들에 대해서는 The Handbook for Congregational Studies(Carroll, Dudley, and Mikinney,1986)를 참고하라.

8.전통과 전통형성의 이해에 대한 아주 유익한 책은 Schreiter의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1985)이다.

9.예를 들면, Meeks(1983)와 Gager(1975)를 참고하라. 그들은 여러 가지 신약성경의 공동체들을 해석하면서 사회학적 인류학적인 이론들을 사용하고 있다. Dudley와 Hilgert(1987)는 신약성경 공동체들의 사회적 경험들과 현대교회들의 사회적 경험들의 병행점들을 분명하게 추론하고 있다.

10.교회의 세팅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지침에 관해서는 Carroll, Dudley, and Mikinney,

(1986)의 책에서 "컨택스트"라는 장을 참조하라. Carroll(1988)도 참고하라.

제8장 신성성을 대변하는 것과 성찰적 지도력

1.이 관점에서 대한 자극적인 논의는 Hauerwas와 Willimon(1988)의 책 Resident Aliens에 잘 나타나 있다. Hauerwas와 Willimon이 교회의 "타자성"에 대한 사례들을 과장하고 있지만, 나는 오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의 세계에 상징적으로 현존하는 그 역할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교회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라는 그들의 촉구는 공명한다.

2.Carroll Wise와 Wayne Oates와 같은 목회신학 저자들의 순수한 심리학적 상담이해를 거부하고 상담과정에 분명히 목회적이요 신앙적인 차원들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Holifield(1983:304ff)를 보라. 오우츠는 특별히 교회에서 목회상담을 하는 목사와 구조적인 세팅의 상징적 역할에 특별히 민감하다.

3.Reed(1978)은 그의 저서 The Dynamics of Religion에서 특별히 교회의 예배와 연관된 이런 경험을 탐구하고 있다. 그가 "특별의존에의 회귀"하고 부른 경험에는 건강한 형태와 병적인 형태 둘 다 있다. 제사장들과 투사현상에 대한 논의는 Holmes(1978:86ff)를 참고하라.

4.최근의 책 The Soul of the Salesman(Oakes,1990)은 개인적인 장사의 도덕적 윤리정신을 분석하고 개인적인 장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직면하고 도덕적 모순과 파라독스를 지적하고 있다.

5.물론 경직된 재판관과 율법부여자에서 사랑의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개념은 아주 광범위한 다양성을 갖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하나님개념이 예전 집례자로서 목사와의 관계에서 사람들의 기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목사의 행위는 사람들의 하나님개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것은 나의 연구범위를 넘어서는 중요하고도 흥미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사의 기능과 수행과 권위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6.나는 이 구절을 Judy Collins에게서 빌려왔다. 그는 PBS TV에서 빌 모어즈와 인터뷰하면서 "Amazing Grace"를 부를 때 가수와 청중간의 결속을 기술하면서 이 구절을 사용했다.

7.사회학자 Parsons(1949)는 일반적으로 전문직업인들의 역할과 동기사이에 이런 구별을 지었다. 예를 들면, 전문직업인들의 역할의 구조적 세팅이 장사꾼들의 구조적 세팅과 다를 뿐이라고 Parsons는 주장한다. 전문직업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고객이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자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러 종류의 전문직업인의 윤리규정들이 이것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장사꾼들에게는 그런 기대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더 강조한다. Parson의 요점은 역할기대와 개인적인 동기와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사꾼들이 전문인들에 비해서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더 이타주의적으로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전문인들의 규범적인 역할책임과 동기 및 성품의 이러한 구별은 고대교회의 도나티스트는 논쟁과 유사한 점이 있다. 도나티스트들은 제사장들의 효력이 그들의 도덕적 성품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교부들은 어거스틴을 따라서 안수시에 제사장들이 받은 성스러운 성품은 제사장이 내면적인 도덕성 때문에 지워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고대교회의 구별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Parson의 전문인의 직업역할기대와 내면적인 동기와의 구별에 유사하다. Parson은 사회학적으로 정의된 역할에 근거해서 이런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 반면, 어거스틴은 존재론적으로 부여된 성스러운 성품에 근거해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8.H. Richard Niebuhr는 소명의 4가지 요소를 확인하였다:

(1)그리스도인이 되는 소명: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제자직의 소명, (2)신비적인 소명: 안수교역에 들어가고 싶은 내면적인 충동, (3)섭리적인 소명: 자신에게 안수교역에 필요한 지성적, 도덕적, 신체적, 심리적 은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4)교회의 소명: 특별한 교회를 섬기라는 교회의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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