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눈으로 본 경영
리처드 츄닝. 존 에비. 셜리 로엘즈 지음 / 안동규. 한정화 옮김
책과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경영이라는 세계에서 독특하게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소개하고 있다.
종업원에서 동기를 부여시키는 법, 직장 내의 의사 소통, 리더십, 이윤의 활용,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서
저자들은 기독교적 원리가 어떻게 좋은 경영으로 적용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 책은 경영학과 학생들, 경영자들, 경영의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동기와 관심사를 배우려는 모든 이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저자 : 리처드 츄닝(Richard C. Chewing)
리처드 츄닝(Richard C. Chewing)은 텍사스 주 와코에 있는 Baylor University의 경영학 교수이다. 존 에비(John W. Eby)는 인디아나 주 GoshonCollege의 학장이며, 셜리 로엘즈(Shirley J. Roels)는 미시건 주 CalvinCollege의 경영학 부교수로 일하고 있다.
옮긴이 소개
안동규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듀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림대학교 재무학과 부교술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경영연구회, 기독교윤리 실천운동, 기독교학문연구회, 한국기독학생회(IVF)를 섬기고 있다. 저서로 [리스금융론](법문사), 역서로 [기업경영과 성경적 원리] (IVP)가 있다.
한정화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조지아 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경영연구회,기독교학문연구회, 경제정의 실천연합에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초일류기업으로 가는 길], 역서로 [기업 경영과 성경적 원리](IVP)가 있다.
서 론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을 - 경영을 포함하여 - '신앙의 눈으로' 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시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도록 부름 받았다는 말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교리들과 경영 활동을 통합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쓴 것이다.
제 1 부
조망: 신앙의 눈으로 본 경영
기독교적 관점에 의한 기업 경영은 가능한가?
기업의 목표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우리는 기독교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요한 부분임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의 윤리적. 도덕적 신념으로 CMDS(Computer Management and Development Services) 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그 모든것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 사람들을 개발시킴
우리는 CMDS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 믿는다. 우리는 공정하게 임금을 지불하고 정직하게 서로를 대하며 개인 성장을 돕는 데에 헌신한다. 우리의 고객들 또한 중요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시스템 운용으로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정직하게 대하며, 그들의 발전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한다.
◆ 최상의 서비스를 추구함
서비스는 가장 중요한 상품이므로 지속적으로 개량. 개선해 나가야 한다.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회사가 존속해 나갈 수 있다.
◆ 이윤을 창출함
성경적 관점에서 본 기업
기업과 기독교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긴장이 늘 존재해 온 것처럼 보인다. 성제롬(St.Jermone)은 "상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하였다. 5세기에 기독교 감독이었던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기업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전세계의 다양한 정치. 경제 체제속에서 기업에 관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업을 단지 생계 수단으로 본다. 사람들은 기업을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본다.
CMDS는 사업을 하다가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성경적 주제들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건전하고 유용한 지침을 제공해 주는 많은 성경적인 원리들을 채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동자, 고객 그리고 다른 이해 관계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 어떤 것이 공평하고 어떤 것이 기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고심해야 하며, 창조적인 문제 해결과 세심한 실천 과정을 필요로 한다.
다른 관점에서 본 기업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은 신앙의 눈을 통해서 본 현실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것이 근본적인 약점을 덮기 위한 가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앙이란 어떤 결여 상태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비웃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유한한 존재인 만큼 신앙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신앙에 의하여 사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누구에게 그리고 어디에 두느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기업을 운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기업 활동을 통하여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기회를 갖는다. 결국 기업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일하며 서로를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제도화한 것이다. 사람들은 개인적. 경영적.금전적. 법적 혹은 다른 다양한 이유로 기업을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기업 자체에서 더 큰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이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 활동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기업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수많은 영역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이끌고, 다루고, 능력을 개발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 신앙은 그림의 떡과 같아서 격심한 경쟁과 이기적인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미칠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신앙은 어떤 바람직한 생각이나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며, 맹목적인 것도 아니다. 성경적인 신앙은 아주 실제적이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히 11:1).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역사의 시점에서 사람들이 살아야 할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시며 또한 예를 들어 나타내 보이신다. 가장 적절한 본보기가 예수님이다. 그 분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아주 신실하게 사셨다.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의 독특한 특성은 흔들림이 없는 믿음, 즉 증거가 있는 믿음에 굳게 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헌신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있다.
자본주의는 기독교적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경제 체제의 장단점에 관하여 판단할 수 있고 판단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제 체제를 절대적인 관점에서 기독교적이라거나 또는 비기독교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피해야 한다. 모든 체제는 긍적적이면서 동시에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체제의 상대적 우월성은 세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한 경제 체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 약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제 체제도 완벽하지 않다. 모든 경제 체제는 성경적 원리에 의하여 검토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제 체제에 속해 있든지, 우리는 가금 멈춰서 하나님이 기업과 관련해 모든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개발시킬 수 있는 질서 있는 창조의 복을 주셨다. 성령은 경제 활동에 있어서 죄악과 혼란을 억제하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신다.
2.개인의 목표와 기업
성공에 대한 정의
우리는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서도 영향력 있고 남의 인정을 받는 지위까지 출세 가도를 달릴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이 덜 성공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공, 권력, 영향력 있는 지위는 봉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기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사업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공동체의 필요를 올바르게 채우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법 의약품을 성공적으로 거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공적인 기업으로 인정해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개인 소득 수준이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업에 성공한 사람 못지않게 실패한 사람도 사랑하신다.
부와 하나님의 복을 동일시하는 문제를 '형통 신학'(prosperity theology)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다. 형통 신학은 동기를 왜곡시키고, 하나님을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자판기로 축소시킨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있는 인생 여정은 자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성경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게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가르치고 있다.
부, 권력, 지위나 영향력, 직급 및 다른 어떤 세속적인 성공의 상징들은 빈번하게 진정한 성공의 대체품 역할을 한다. 이와같은 종류의 성공 그 자체가 잘못된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위험하다(딤전 6:10). 그리스도인들이 재정적으로 풍족하거나 높은 지위로 승진한다고 해서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개인적인 성?을 유지하는 데 몰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성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에게 기업의 성공이란 봉사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기업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재무 제표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 기업이 종업원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요소도 보아야 한다. 또한 자원들을 신중하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기업이 만들고 있는 제품들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좀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어떻게 개인의 목표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가?
빛이 채색된 필터를 통하여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동은 현실에 대한 정신적 필터인 세계관을 통해서 나타난다. 자기 중심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인생을 아주 단순한 관점 즉 "나는 인생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인식한다. 불행하게도 기업 활동을 하는 많은 사람이 사람이나 물건이나 사건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본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도 자신의 사적 이익을 보호하거나 증진시키려 한다.하나님은 공허한 말이나 조작된 수치나 외형에 의해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와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신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위에서 언급한 유혹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인에게 복종케"(고후 10:5)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부름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았으며, 서로를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세속적인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필터는 '내가 먼저' 가 아니라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라는 필터여야 한다.
개인적 부의 사용
돈을 어떻게 벌고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돈에 대한 태도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돈에 집착하는 위험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 그만큼 돈은 매우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다.
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한 젊은 관원을 보시면서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눅 18:18-30). 그리스도는 그 젊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아셨다. 그 젊은 관원은 슬픈 기색으로 떠났다. 그 사람은 에수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돈이 비록 방해가 된다 해도 돈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돈이라는 것은 중립적인 교환 수단이 아니다. 많은 사람은 돈을 가지고 있어야만 안전감을 느낀다. 그리고 돈은 충성심이나 복종을 유발시킬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돈을 숭배한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가에 의하여 사람의 개인적인 가치가 측정될 경우 사람들이 돈을 숭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고 왜 돈을 가지기 원하는지 그리고 왜 돈을 사용하기 원하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돈을 안정감이나 명성을 위해서 추구한다면, 돈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만족할 만한 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반면에 돈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주신 선물로 본다면, 우리는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쓸 수 있다.
돈으로는 만족을 누릴 수 없다.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 썼으며 , 그 스스로 '비천한 상황'에 있든지 아니면 '부유한 상황'에 있든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쓰고 있다(빌 4:11-12).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게에 기초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는 성령 충만한
관계에 기초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후히 주도록 가르치셨다. 첫 번째 십일조(소득의 십분지 일을 드리는 것)는 창세기 14:17-24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십일조는 아벨의 부를 증가시키는 축복이었다. 그것은 주인에게 감사하는 청지기의 반응이며 감사와 믿음을 상징하는 사랑의 반응이었다. 후에 십일조는 레위족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 십일조라는 것은 최소한의 반응이다. 성경은 십일조와 헌금에 관하여 자주 말하고 있다. 헌금은 최소한 십일조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돈을 잘 사용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이다.
어려운 사업 기간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헤아리기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시장과 관련된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기업을 경영한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어려움에 빠져 있을 수있다.
그들은 경쟁의 선두에 서기 위한 새로운 최신 기술이 없을 수도 있다. 시장이 변할 수도 있다. 또는 적절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승진에 탈락될 수도 있다. 다른 기업들은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서 성장하고 있는 데 반해 원하는 만큼 확장시킬 재무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업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니다.
사업의 실패를 하나님의 심판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처럼 사업의 성공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간주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하는 세계관을 가질 때 이미 복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즉 우리의 동료들, 고객, 공급자, 섬기는 모든 다른 사람에게 올바르게 행할 때 우리는 복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복된 성공이다.
3. 주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기업에서의 정의 실현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성경의 주된 주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와 성취될 약속으로서 수백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것이 구체화되고 반영되기를 원하신다. 정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해야 되는 관계를 함축하는 아주 복잡한 단어이다.
정의를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세우신 언약을 통해서이다. 정의라는 것은 인간의 불성실함에 관계 없이 하나님이 계속해서 유지하시는 헌신과 관계의 일부였다.
산업도장 사업체에서 난민들을 고용할 대 모든 계약 관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계약에 명시된 조건 이상의 성실함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의롭고 옳은 것을 행하고자 하는 사랑에 의해서 움직여야지 단순히 법이나 시장의 조건을 수용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는 시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임금 , 가격, 원가. 비용 등과 같이 자유 재량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 수 있는 경제적 요소들에 관한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당신이 산업 도장 사업체의 경영자라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에서 정한 최소의 필수 조건 말고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당신은 종업원들에게 어학 연수를 시키기 위해 기업의 자산을 투자할 수도 있고, 거주지의 생활 비용을 감안하여 임금을 산정할 수도 있다. 또는 난민들의 관심사르 듣기 위하여 인사 부서에 통역이 가능한 사람을 배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산업 도장 회사의 경영자라면 임금과 보너스에서 하위직과 상위직 사이의 차이를 어느 정도로 할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장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품의 품질과 가격 사이의 정직한 고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1:22은 포도주를 묽게 하며 은에 불순물을 섞는 사람들의 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종업원들의 작업 조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지고, 기업에서 정의를 행할 필요성을 계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 임금, 가격, 안전기준, 고용 정책 그리고 기타 여러가지 사안들에 관한 의사 결정 속에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의 관심을 드러내야 한다.
정의 실현의 대가는 값비싼 것인가?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에이즈 환자를 돌보는 간호원은 업무
수행 도중에 그 질병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 신체 장애자들에게 엘리베이터나 기
타 보조 수단을 제공하려면 기업은 매우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
과거에 차별을 경험했던 집단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 프로
그램과 지금까지 적용해 오던 방식의 수정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기업에 있어서 온유함을 사랑하는 것
정의와 함께 반드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외부적 상황이나 개인의 성격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즐거운
상황에서나 어려운 상황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
4. 현실적 인간관: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
능력 있는 이미지 소유자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믿음이 생산직이나 사무직 또는 이사회 등 직장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사고 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람됨 (to be a human)이 의미하는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진리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 실제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피조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깨진 거울처럼 그들의 형상은 왜곡되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창조에 관한 구절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 본성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준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셨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중요하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누구이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우리는 실 끝에 매달려 있는 꼭두각시가 이나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자신뿐만 이니라 후손에게도 영향을 준다.
셋째로, 하나님은 교재하기를 원하시며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은 창조물을 보시고 매우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완벽했다. 정의와 온유함과 사랑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지배했고, 거기에는 조화가 있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사람이 죄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업 운영 방식에 중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죄는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을 하기 원하고 창조적이며 선을 행하도록 동기 부여가 되었다고 가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대개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죄로 말미암아 현실적으로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우리의 동기가 항상 순수한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믿을 만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기업 환경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도록 긍정적, 부정적 보상을 함께 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긍정적 보상과 부정적 보상
도덕적 영향력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세 가지 힘이 있다.
첫째로는 내적인 도덕 기준들에 대한 사랑이나 헌신, 둘째로는 선한 행동에 대한 긍정적 보상, 그리고 셋째로는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보상이다.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나머지에게는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랑만큼 강력하게 인간 행동을 인도하는 힘은 없다. 사람들이 깊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투입되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는 사랑과 비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행위에 대한 헌신은 둘 다 내부에서 나오는 헌신이다. 그것들은 기원이 서로 다를지라도 내적인 헌신이다. 사랑과 그 관련된 내적 헌신은 사람들을 선한 행동으로 유도하는 도덕적인 영향력 중 첫 번째 힘이다.
두번째 힘은 적극적인 보상이라는 당김이다. 이것은 특성상 정신적인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대부분의 보상은 돈, 권력, 명성 또는 승진처럼 가시적이다.
수행을 잘함으로써 오는 개인적인 성취감과 만족감 같은 보상들은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보상들은 작업의 질을 높이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여러 면으로 선행과 관련된 긍정적인 측면들을 즐기도록 교육받았고 즐기고 있다. 어릴 때 집안일을 도움으로써 받는 용돈이나 좋은 성적에 대한 칭찬 등을 통해서 선행과 보상에 대한 관계를 배운다.
그와 같은 보상의 가능성이 주어질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좋은 성과를 냄으로써 반응한다.
행동을 하도록 유지시켜 주는 세 번째 힘은 부적절한 행동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보상이다. 우리는 벌집에 돌을 던지거나 시험 전에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정적인 강화는 우리로 하여금 유혹이나 나쁜 습관을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반응
경영자들은 부적절한 행동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바꾸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느 누구도 정의를 실천하거나 온유하게 되는 능력을 저절로 갖게 되는
일은 없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개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신이 고용주나 감독자라면 부적절한 행동을 수정하고자 할 때 다음의 다섯 가지 중요한 과정을 따라야 한다.
1.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관심이 뒤따라야 한다.
2. 교정에 앞서 항상 기대 정도에 대한 명백한 의사 소통이 있어야 한다.
3. 업무 기대나 결과에 관한 지시가 명백히 이해되었다고 단순하게 가정해서는 안된다.
4. 잘못을 저질렀을 때 가능한 한 빨리 긍정적인 시정 조치를 취하라.
5. 시정 업무는 아주 공정해야 한다.
5. 인간의 자아 정체성
자아 정체성의 원천
누가 당신에게 백 단어 또는 그 이하의 단어로 당신을 소개해 보라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당신을 잘 아는 다른 사람들도 당신에 대해 그것과 비슷하게 말하겠는가?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과 실제 우리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한평생 일한다.
정신 상담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Abraham Masiow) 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정체성의 관계를 파악하였다. 그는 욕구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이론화하였다. 이 단계는 음식, 물, 주거에 대한 생리적인 욕구의 기초위에 세워진다. 그래서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 욕구로부터 자아 실현 욕구로까지 발전하여 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최고의 잠재적 자기 표현을 실현하는 것이 욕구충족의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매슬로우는 믿었다. 자아 정체성이라는 것을 욕구 단계에서 그가 위치한 곳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많은 내재적 욕구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세 가지의 중요한 심리적 욕구를 검토할 것이다. 이는 무조건적인 수용에 대한 욕구, 유능하고자 하는 욕구,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이다.
수용
무조건적인 수용에 대한 욕구는 우리 존재의 매우 핵심적인 부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무조건적 수용 대신에 어떤 모조품을 받아들이고 있다는것은 비극이다. 그 모조품은 '조건부 수용'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요구되는 성적을 얻었을 때, 상황에 맞는 옷을 입었을 때, 적절한 모임에 가입했을 때에 수용되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에게는 무조건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기업은 우리의 능력, 지식, 잠재성, 성과를 따라 고용한다. 우리모두는 하는 일로서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체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신다. 하나님의 수용은 우리의 일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이며, 은혜의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무조건적인 수용을 나타내는 데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사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경제적인 생산자로서의 관점을 훨씬 넘어서야 한다.
사람들은 능력 이상의 성취를 시도함으로써 그들이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조앤은 항상 사무실에 가장 일찍 나온다.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이른 아침에 활기차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하기 때문에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방어적인 사람이나 충동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자체로서 수용됨을 안다면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경영자들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수용해야 할 책무를 갖고 있다.
능력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 있게 지으셨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고 유능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능력과 성공에 대한 욕구는 사람들을 비윤리적인 상태로 몰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능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를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라고 정의하는데, 이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경쟁적으로 비교하려는 유혹을 덜 받게 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분명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원 곧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또 다른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들의 일에서 유능함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다른사람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친근하고 세심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소속
누구나 만족하기를 원하는 세 번째 욕구는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이다.
우리가 전인격적인 존재로 되는 데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집단 속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그들의 소속 욕구와 그에 대한 만족을 기업 조직의 소속에 연계시키지 않는다. 많은 일본인은 기업 조직과 자기 자
신을 동일시함으로서 그들의 소속감에 대한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회적, 오락적 욕구들도 만족된다. 그들은 어떤 직업에 평생동안 헌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중심으로 소속감을 발견하는 주요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소속감의 첫 번재 원천인 하나님의 가족에 참여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기업에서 함께 일하는 팀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제 2부
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반응
6 직장에서의 정의
정의로운 회사 만들기
정의를 개방적이고 형평성이 있으며 또한 참여적인 환경에서 종업원들이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정신에서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역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상이나 이념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이념의 개발은 계획될 수 있고 도한 예측될 수 있다.
창조성을 개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아이디어들이 꼭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은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고 활용할 수 있도록 업무 환경을 개발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업원의 지위가 개선되고, 누구나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정의와 정의로운 생각에 대한 개방적 자세는,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중시하는 개념을 온전히 구체화시킨다.
일의 의미
어떤 관광객이 여행을 하면서 도로변에서 일하는 석공을 보면서 생긴 일이다.
그 관광객은 며칠 동안 돌을 쪼고 있는 한 석공을 관찰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광객은 멈춰서서 석공에게 왜 그와 같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석공은, 머리위에 있는, 공사가 끝나지 않은 높은 성당을 가리키면서 "당신은 내가 돌을 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성당을 건축하고 있소' 라고 대답했다.
기업에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모든 종업원에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더 큰 과업에 어떻게 기여하는 지를보여 줌으로써 그가 하는일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7 정의와 고용 기회
모든 사람은 일할 자격이 있다.
' 노동은 치유의 과정이다' 라는 명제를 토의 요점으로 제시한것은 지나친 것일까? 우리 대부분은 가능한 한 노동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병들었을 경우 가장 곤란한 점은 일을 할수 없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에덴 동산을 돌보는 책임을 주셨다(창 2:15). 그들은 모든 동물에게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노동이란 삶의 자연스럽고 중요한 일부분인 것이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일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에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성취감을 느낀다.
일은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핵심적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경제 정의의 실현에 있어 근본적인 고려 사항이다. 또한 봉급을 받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8 직장에서의 인간 개발
창조성에 대한 청지기 정신
폴 굿맨(Paul Goodman) 이라는 사회학자는 '의미 있는 일' 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해 수년간 많은 글을 썼다. 그는 일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창조성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가. 노동자들은 최종 제품의 일부로서 자신들의 일을 볼수 있어야 한다. " 나는 그것을 만들었고, 이 제품에는 나의 개인적인 솜씨가 들어 있다. 나는 그것을 볼때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 라고 노동자들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일은 그런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 자동차 공장에서 엔진의 중앙에 가려진 작은 밸브를 반들어 내는 사람이 완성된 차에서 그의 솜씨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사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의미 있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주인 의식이나 창의성 등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개발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재능을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일은 자기 자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가 온전히 성장할 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 경영인들은 종업원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잠재해 있는 재능을 발견하도록 도와야 한다. 기업은 이로 인한 유익을 알고 있기때문에 훈련과 프로그램 계획에 수십 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많은 경우 완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직접 원재료를 개발하는 것이 더 싼 것처럼, 전문 종업원을 고용하는 것보다 미숙련공을 훈련시키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경영 이론들
세 가지 대조되는 경영 스타일의 유형으로는 X이론, Y이론, Z이론이 있다. 이것들은 종업원 유형에 따라 독특한 경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더글라스 맥그레거는 The Human Side of Euterprise( 기업의 인간적 측면)라는 저서에서 X이론과 Y이론을 내세웠다. 윌리엄 오우치 (Wissiam Ouchi)는 최근에 Z이론을 내세웠다.
맥그레거는 인간의 짐재력을 최대한 개발시키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가 말하는 이론들은 경영 유형의 양 극단에 해당한다. X이론은 종업원을 당근보다는 채찍에 반응하는 사람들로서, 지시와 통제에 의해서 경영이 이루어지고, 본질적으로 비창조적이고 야심이 없으며 안전 지향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으로 가정한다. 종업원
이 자신의 일을 필요악으로 보고 채직을 피할 수 있는 만큼 일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X이론에서 경영의 논점은 강한 훈련, 엄격한 규율과 지속적인 통제에 있다.
마이크 르페브르는 X이론적 종업원 접근 방식이 반영된 경우이다.
다른 한편으로 Y이론에 의하면 일은 노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은 창조성을 표현하기 원하고, 자신을 통제하고, 그들의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표 설정과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질좋은 경영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흥미 있는 일을 제공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근이 채찍보다 더 효과적이다. 칼 베이츠는 Y 이론적 접근 방법의 모델이다. Y 이론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사회적, 교육적인 기술이 큰 역할을 하는 서비스 산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 가는 사회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오우치 교수는 제3의 경영 기법인 Z이론을 개발하였다. Z이론은 일본식 경영 관리 기법의 실험적인 접근 방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상호신뢰와 협력,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있다. 협동 정신과 팀워크를 통해 회사 내부의 경쟁이 원활히 유지되고 있다. 좀더 광범위한 사회 의식을 고취시키고, 경영 태도의 미묘한 사안들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런 경영 이론들 중 어느 것이 가장 기독교 원리에 합당할까? 어떤일을 필요악으로 보고, 조업원을 통제와 지시의 대상을 본다면 X이론이 적합하다. 다른 한편으로 일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보고 종업원이 일을 통해서 발전되고 성장되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Y이론이나 Z 이론이 적합하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보는 X이론은 거부해야 한다.
반면에 Y이론은 인간 본성을 칭찬할 만하고 가능성 있는 족으로 바라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작인 방향으로 어떤 일을 선택하고 있는 현실성을 무시하고 있다.
Z 이론은 신뢰와 상호 존주의 상황을 만들고자 했으나, 고용주와 종업원 사이의 현실적인 이해 관계의 차이점을 무시했다. 그리고 인간 소외나 자기 중심적 성향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었다.
기독교적 사랑과 섬김에 대한 헌신을 좀더 탐두해 보면 최근의 경영 이론에 기독교적 관점을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경영의 스타일
경영을 정의하는 과거의 용어들은 통제, 지도, 명령, 보스와 같은 개념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은 하향식 접근 방법이다. 그러나 기독교 관점에서 경영을 보면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종종 이것을 '섬기는 (종 된) 리더십 ' 이라고 부른다.
섬김은 지도한다는 의미보다 능력을 갖게 한다는 의미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의 행동과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로서의 행동을 예수님이 구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영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눈속임 같은 방법은 적절한 전략이 아니다.
종은 '눈가림'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하듯 마음으로 그들의 상전을 섬겨야 한다. 경영자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속이는 행위는 옳지 않다.
가장 좋은 전략은 신중하게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권력을 소유하셨다. 예수님은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셨다. 예수님의 진정한 힘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경영자 역시 권력을 갖는다. 권력은 그들 직위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에게 부여된 권력을 사랑에 근거하여 사용해야 한다.
사랑은 연약한 사람을 세워주고, 성숙시키며, 강건케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다. 그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고 영적인 힘이다.
사랑: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
만약 그리스도인이 함께 일하는 작업장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경영자가 될 수 없다.
10계획과 조직: 정의를 실천하는 수단
왜 계획하는가?
계획은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성취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매우 세심한 계획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계획은 사업에서 정당하게 행동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선택을 보장할 수 있는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많은 과학자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다. 최근 영국의 한 과학자는, 폭풍이 고물처리장을 통과하면서 고철 조각 더미로부터 보잉 747기를 조립할 수학적 확률이 창조자 없이 우주가 생성될 확률보다 훨신 크다고 주장했다.
성경 역시 실현된 많은 예언의 실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을 가진 동물들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어떤 군주나비는 계절에 따라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다. 캐나다의 거위들은 장거리 여행에서 그들의 길을 계획한다. 개미들은 먹이를 모으고 저장한다. 동물들이 하는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각과 직접적인 노력으로 계획한다. 우리는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우리들의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의사 결정을 한다.
우리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는일
오직 하나님만이 미래에 대하여 완전하고 확실하게 알고 계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식의 한계에 대해서 경고한다.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과거와 미래를 아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의 계획은 항상 우리가 유한하다는 이해를 가지고 행해져야 한다. 다음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한계를 대조시킨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이 긍국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획을 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우리 계획의 모든 것은 훨씬 커다란 총체적 계획(master plan) 안에서 만들어진다.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인 계획자이시고, 우리는 하부 계획자들이다.
우리는 계획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업에서 계획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상호 대립되는 가치관과 자원을 사용하는 여러 대안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의 목적을 조회시키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계획하고 선택해야 한다.
제 3부
리더십 : 지배하는 것인가, 섬기는 것인가?
11 리더십의 기독교적 개념
리더십의 예술
훌륭한 경영 리더십은 하나의 예술이다. 그것은 조직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주며 종업원의 신뢰를 이끌어 내며, 종업원이 조직의 목표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리더십은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리더십을 따르는 자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지도 (lead)하는 자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성품
마태복음 5:3-9에 나오는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특성을 나타내는 대조표로 사용될 수 있다. 팔복은 모두 그리스도인 특히 그리스도인 리더에게 꼭 필요한 인격적 자질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겸손하다. 그들은 자신의 기능과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겸손하고 진실된 이해를 하는 자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지도자는 방어적이지 않다.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열려 있으며 때로는 상처를 입기 쉽다. 따라서 상급자, 동료, 하급자들로부터 건설적인 조언을 잘 받아들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 사역을 통해서 약점이 좀더 강화되
는 것을 깨닫는다.
겸손한 리더는 자신의 최선의 의도조차도 하나님의 최상의 목적에 얼마나 못 미치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방법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애통' 하는 자들이다. 겸손한 리더들은 자신을 비하시키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자들이다. 그들은 비판에 대해서 열려 있으며, 비판을 통해서 배운다. 그들은 하나님, 상급자, 하급자 , 동료들에게 의존하는 자들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딤이요" (마 5:5). 온유함 역시 그리스도인 리더의 특징이다. 온유함은 진실된 겸손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겸손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반면에, 온유함은 유순함의 힘을 인정하는 데서 발생된다.
말이 기수의 고삐에 반응하듯이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반응한다. 말에게 굴레가 채워진다고 말의 의지가 꺾이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리더의 인격, 추진력, 기운과 창의력이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한다고 해서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입을 것과 마실 것어 없이 오랫동안 지내 본 경험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은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의와 정의에 대해 목마르게 갈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여야 한다.
"궁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의 주된 표현은 용서이다. 리더는 긍휼과 용서를 보여 줄 많은 기회에 접하게 된다.
우리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과 나쁜 행동, 보잘것없는 업적들을 간과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실수를 통해서 배우고 향상되도록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는 것이다.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리더들은 결국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닮아 감에 따라 더욱더 마음이 청결해져야만 한다. 그들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되며, 신앙 고백과 일상 생활은 방법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행동해야 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일관성, 협동, 팀워크 그리고 화해를 촉진시키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도록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성장해야 한다. 어려운 불협화음의 순간에도 그리스도인 리더들은 모두에게 보탬이 되는 해결책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의와 정의를 희생하면서까지 평화를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한 협력과 화해의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책임
리더가 내면적인 힘과 성품을 개발하는 것은 중요하다. 리더는 자신의 특별한 책임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며 특히 신앙에 의한 책임감의 모습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될 것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책임으로서 중요한 점 여섯 가지는 아래와 같다.
1.그리스도인 기업 리더는 도덕적 행위의 모델이다.
그들은 바람직한 조직에 꼭 필요한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업의 특징, 추진력, 능력, 기회, 성실성 등을 대표한다. 조직의 하위자들에게 조직을 상징화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적용된다. 리더가 장부에 비용을 허위조작하여 기록하거나, 약속을 어기거나, 진실을 감춘다면 그러한 가치들은 곧 조직에 스며들게 될 것이다. 추종자들은 리더가 제시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리더는 기업에 대해서 높은 도덕 수준을 확립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리더는 조직의 비전을 분명히 제시하고 추구해야 한다.
리더는 조직의 목적 달성에 초점을 맞춘 행동을 해 나가야 한다. 성경은 "묵시 (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잠 29:18)라고 말한다. 방향 제시가 없으면 사람들은 무너지기 쉬우며, 미해결의 상태로 혼란스럽고 정처없이 표류하고 만다. 일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비전을 종업원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이다.
3.리더는 정보가 잘 소통될 수 있는 공개적 커뮤니케이션 을 유지할 책임을 갖고 있다.
4.그리스도인 리더들은 팀 구축에 대한 책임이 있다.
원만하게 기능을 발하는 팀들의 중심에는 강한 상호 신뢰감이 존재한다. 자기 부서의 생산 목표가 희생되더라도 전체 조직의 목표달성과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협동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팀 구축이라는 것을 조직 구성원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단기적인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조직의 이익을 위한 결정이야말로 조직에게 가장 유익한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5. 그리스도인 리더는 성장과 창의성을 결려하고 쉽게 개발되는 환경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
6. 리더는 조직의 기능과 업무 과정을 관리해야 한다.
리더는 매일매일의 의사 결정 과정에 책임이 있다.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
리더십의 자질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리더가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질문을 살펴보자.
·내가 이끄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을 개발시키며 성장하고 있는가?
·그들은 의사 결정과 책임 수행의 능력이 있는가?
·그들은 동역자와 협조하는가?
·그들은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가?
·그들은 지원과 도전을 함께 받고 있는가?
·그들은 나의 리더십 아래에서 발전되고 생산성을 높여가고 있는가?
12 그리스도인의 권력 사용
권력의 위험성
권력이라는 것은 일이 행해지도록 하는 능력이다.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킨 모세는 하나님의권력을 사용했다.
권력의 적절한 사용은 일이 수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권력의 근원
소위 '지위 중심적 권력' (positonal power)이라 불리는 이와 같은 종류의 권력은 대부분 지위에 부과되는 것이다. 대학에서 단과 대학 학장은 그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 때문에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권한은 책임과 권력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자연스런 결과이다. 어떤 지위가 다른 지위보다 의사 결정 권한을 더 갖고 있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카리스마적 권력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특질에서 자라난다.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인격적인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비스러운 자질을 가진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논리성과 설득력 있는 주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권력은 정보에 접근하는 데서 발생한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보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특별히 가치 있는 정보 가운데 하나는, 어디서 어떻게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에 대한 지식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특별한 기술이나 전문적 지식 때문에 권력을 얻는다.
권력의 사용
우리는 기업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조차도 권력 사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권력을 사용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권력을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 된 리더' (servant leader)의 완전한 모델을 보여 주신다. 그 분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쫓아 내기 위해서 채찍을 드셨다. 그러나 우주의 주가 섬기려고 오신 분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다. 그 분의 추종자로서 그리고 교회의 리더로서 제자들이 어떻게 성장하기를 원하는가를 직접 본으로 보여 주셨다. 돕고 격려하고 청지기적 책임감을 가진 추종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권력을 사용하신 종 된 리더의 완전한 모델이 비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13 책임감: 자제력을 위한 자극
책임감의 필요성
하나님은 책임감이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길 의도하셨다.
책임감은 자유를 축소시키거나 처벌 자체를 목적으로 의도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항상 성장과 개선을 지향한다. 책임은 우리의 행위와 결정들에 대해서 독립적인 평가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이 평가가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권위와 책임을 주면서도 그 사용에 대해 책임을 지며 일을 잘 수행하도록 지도하지 않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 권위를 오용할 가능성은 너무나 많다.
자유,통제, 책임성
종종 책임성의 원칙에 반대하는 입장은 책임감이 자유를 축소시키고 개인의 창의력을 감퇴시킨다는 데 근거를 둔다.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는 한 어리석은 이야기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네 칸의 객차가 달린 조그마한 열차가. 엔진이 닳고 마모되어 철로에 멈추어야만 할 지경에 이르렀다. 몇 킬로미터를 달린후 열차는 철로를 벗어나 다음 도시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생각되는 들을 가로지르기 시작하였다. 열차는 철로라는 제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열차가 목장의 관목을 뛰어넘으려고 했을 때 거의 뒤집힐 뻔했으며, 얼마 못가 열차는 시내 옆 웅덩이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작은 기차는 그 지정된 철로를 받아들였을 때가 가장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선의 통제란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렇게 행함으로써 이익을 보기 때문이다.
실패와 책임감
실패는 인생의 한 부분이다. 발전의 중요한 측면은 실패를 건설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실패는 확실히 고통스럽다. 시래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즉 그것은 좌절감을 일으키고 종종 우리의 가치에 ?나 회의를 불러 일으킨다.
실패가 패배 아닌 성장의 기회가 되도록 실패를 다루는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재빨리 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14 동기 부여 : 부르심인가, 조작인가?
동기부여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일을 안 하고는 못 배기는가? 수십 년 동안 사회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시키는 비밀을 풀고 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다.
자신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동기 부여를 이해하여야 한다.
동기 부여를 연구하는 동기 이론가들은 직장에서 사람들을 동기 부여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해 왔다. 사람들은 필요를 가지며, 동기부여란 그 필요를 만족시키는 시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동기 이론가가 동의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동기 부여 이론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법이 존재했다.
네가지 이론- 츠로이트 학설 이론, 결정론적 이론, 인지론적 이론 , 유전론적 이론-을 대략 살펴보자.
프로이트 이론은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가 성(sex)과 공격성 (aggression)과 같은 내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러한 욕구들은 이전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 또는 유전적인 데에도 근거를 둘 수 있지만, 보통은 우리 안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 무의식적인 충동이 우리의 행동을 통제한다. 이 이론은 고든 게코의 타고난 공격성이 고도의 금융 세계속에서 경쟁하는 힘으로 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인간 본성에 대한 결정론적 이론은 동기가 대부분 이전의 경험들에 의해서 계획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행동은 이전의 사건들에 의해, 마치 사슬처럼 연결되는 원인- 결과 형태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동기와 도덕은 외부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반복하기 위해 내부에 기록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일반적으로 조건 지각(conditioned perception)으로 보여진다.
인지론적 이론에서는 동기 부여란 관찰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열정, 인내 그리고 우수한 작업성과 같은 바람직한 행동의 본이 되고자 동기 부여된 사람은 그들을 모방하려는 추종자들을 매료시킨다. 그러한 행위에 대한 보상들은 그들의 가치를 올려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반복하도록 이끌어 준다. 이와 같은 이론에서는 동기 부여란 일종의 선택이다.
사람들은 바람직한 방법으로 행동할 것인지에 대하여 자유롭게 선택한다.
네번째, 유전론적 이론은 동기 부여를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유전의 영향을 든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동기 부여 경향을 갖고 태어나고, 다른 사람들은 낮은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러한 유전론적 이론가들은 부모의 높은 수준의 동기 부여가 자식들에게 평균 이상의 동기 부여로 나타나는 데 유전적 영향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성경은 선택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을 강조한다. 위에 제시한 네 가지 이론과 성경에서 말하는 동기 부여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성경이 행위의 말하는 동기 부여 개념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성경이 행위의 근원에 대하여 어느 한 이론을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니다.
대신 성경은 지, 정, 의의 해교심으로서 마음의 욕구에 대해서 말한다. 욕구, 욕정, 욕망과 같은 옛 성품에 종 된 옛 사람과 그리스도에 의해서 해방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을 하는 새 사람을 대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행동과 사고에 대한 다른 길을 신중히 선택할 수 있다.
부르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동기를 ,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응답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 위한 의식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이 요구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무엇보다도 성도로 부름받아 피조물을 향해 고상한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라고 기록하였다.(고전 1:2-9).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소명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구원의 결과는 거룩하고 의롭고 올바른 삶이다.
행복은 정의를 행하는 데 파생되는 부산물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기준에 의한 경쟁이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 부름받지 않았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예배, 가정생활, 일 등을 포함하는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마틴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고 성스러운 영역과 속된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위적인 구별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조작
개인의 동기를 조사하는 것이 그림의 반쪽이라면 나머지 반쪽의 그림은 다른 사람들을 동기 부여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음 세가지 기준은 우리가 동기 부여의 도구를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도움을 줄것이다.
1. 다른 이들을 동기 부여시키는 사람들은 건전한 동기에 호소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장기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뜻과 잘 조화되는 동기들에 호소하여야 한다.
2.그리스도인은 사용하고 있는 동기 부여 기술에 대해 정직하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3. 건전한 동기 부여는 참여자들에게 적극적 선택을 장려한다.
동기 부여자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은 동기 부여의 이론을 개발시키는 데 공헌해야 한다.
과거 이론가들이 인간 행위의 근원, 보상과 처벌의 역할에 대하여 도움을 주는 통찰력을 제공한 반면에, 현대 이론가들은 참여적 의사 결정, 팀워크. 건전한 인력 자원 정책, 회사 목표에 대한 공유 등을 통하여 종업원을 동기 부여시키는 데 초점을 둔다.
사람들의 기능과 재능을 개발시키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칭찬 부족이나 잘못 정의된 작업 역할이나 회사 목표에 대한 정보 부족 등에 의한 동기 부여는 성장을 방해한다. 가장 최선의 동기 부여 기술은 잡목들을 제거하여 봉사와 성취의 길을 분면히 보여 주는 것이다.
성실성과 일관성 그리고 사랑이 없거나 가공적일 때, 동기 부여를 받은 관계는 결국 상처를 입을 것이다.
15 의사 소통 : 경청하고 진실되게 말하기
주의 깊은 의사 소통의 필요성
"사람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확실한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공적인 의사 소통이란 전달 사항의 수준을 청취자의 자질과 능력에 맞추는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유명한 리(Robert E. Lee)장군이 그의 청취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의사 소통 방법에 대해 꾸준히 노력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장군들에게 공문을 보내기 전에 사병에게 먼저 서신을 읽혔다. 그러면 그 사병은 어떤 조처가 요구되었는지 직접 말로 진술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리 장군이 의도했던 바를 대답하지 못하면 리 장군은 그것이 사병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명확성이 부족한 자신의 과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명확성을 위해 필요한 많은 시간을 들여 서신을 다시 썼다.
훌륭한 의사 소통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듣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청중의 마음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경청하는 데는 큰 노력이 따른다.
이 세상은 방어적이고, 독단적이며, 산만하고, 무지하고, 그렇지 않으면 손상된 청취자들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의 문을 닫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는 폐쇄적인 청취자는 변명만하고 정당화하려 하며, 무시하거나 진실을 외면하려 한다.
주의 깊은 청취는 응답을 요구한다. 개방된 청취자는 그들이 언제 부정확했고 오해했으며 무지했던지를 알게 되는데, 그 때 그들은 변화하고 성숙해지고 역할을 다하도록 도전 받는다. 그들은 진실을 직면해야할 위험에서도 변함없이 겸허하다.
경청하는 데 따르는 보상
경청하다 보면 타인의 반응으로 인해 상처받기 쉽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요구를 분별하도록 도와주어 우리를 더 나은 종이자 청지기로 만든다.
다른 사람의 통찰력에 귀기울이는 것은 자기 평가의 첫 단계이다. 다른 사람의 견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결정했는지 살펴보는 데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만일 우리가 주의 깊게 청취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에 충실해 왔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경청으로부터 얻는 보상은 엄청나다. 청취는 배움의 기본 주춧돌이고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진실한 청취자는 사실들과 의견들, 그리고 가치 있는 진술들을 모은다. 이러한 것들은 지식과 이해와 지혜의 구성 요소이다.
오도된 의사 소통
의사 소통에 있어 두번째 문제는 사람들이 이해 당사자들과 직접적으로 토의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십이라 부르든, 뒷 공론 또는 불평이라 부르든, 어쨌든 이것은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사악한 험담이다.
마태복음 18: 15-17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해를 입었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는 과실을 범한 사람과 직접적으로 그 불평에 관해 토론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성경은 다른 한두 사람을 동반할 것을 제안한다.
세 번째 단계는 권위자에게 그 사건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다.
제 4부
기업: 샬롬을 위한 대리인
16 기업의 사회적 계약
기업 : 샬롬을 위한 대리인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샬롬의 실행자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사업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가 정의와 공의를 수행하며 친절과 자비를 사랑하고 모범을 보이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할 때, 우리는 샬롬을 촉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할 때까지 샬롬은 완전하게 경험되지는 않겠지만, 그 동안 우리는 모든 것에서 샬롬의 모델과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기업에 대한 사회의 기대
최근 기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에 혁명이 일어났다. 과거에는 이윤을 창출하고, 일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제공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불하며, 법을 준수하는 하는 회사가 일을 잘 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미래에는 경제적 공헌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도덕적 기여도로 평
가될 것이다.
사회가 기업에 그리고 기업이 사회에 대해 지니는 기대를 대개 사회 계약이라 부른다. 이 사회 계약은 한 곳에서만 쓰인 것은 아니다.
사회 계약은 다양한 세력들에 의해 변화하였고, 항구적으로 변화한다.
우리 사회는 경제적 사회 계약에 대한 기대의 변화가 일고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해질 때, 정부와 다른 집단에 의해 기회와 부를 평준화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게 된다. 경제적 사다리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공정하게 대접 받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반곤층. 육체적. 정신적 불구자들, 만성적 실업자들의 특별한 필요를 만족시켜 줄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시행된 직업 재활법과 직업 훈련법 등의 법률은 이런 관심들을 반영한다. 경제 정책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주는 예가 레위기 25:8-34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과 언약에는 모든 땅을 원 소유자에게 되돌려주는 희년 제도가 있다. 희년은 한 세대의 재정 부담과 잘못이 미래 세대
의 짐이 되지 않도록 계획된 것이다.
사회는 기업이 빈곤을 감소시켜 주는 동료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도 그것을 바라신다.
이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윤은 필요하다. 이윤이 없다면, 기업은 살아 남을 수 없다.
하지만 이윤이 사업의 일차적인 목적인가? 이윤이 사업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숨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숨쉬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 획득 하나로는 그리스도인 사업가에게 천박하고 제한된 목적이 된다.
그렇다면 헌신된 그리스도인에게 가치 있는 다른 목적은 무엇이 있겠는가? 토의 요점을 보자, 기업이 하나님의 샬롬을 확장시킬 방법이 적어도 네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
1. 개인과 사회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줄 재화와 서비스 제 공하기.
2. 일자리를 창출하고 유지하기.
3. 헌신된 투자자와 소유주에게 공편한 수익을 제공하기.
4. 기업의 자원을 지역 사회 사업에 배분하기.
사업에 대한 규제
통제는 내적인 통제와 외적인 통제 두 종류가 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자제력은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반대로 말하면 성령에 의해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자제력이 있다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의미 있다. 그것이 없다면 사업가는 어떤 행동이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쉽게 합리화시킨다. 그러한 태도로 인해 정부규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래 도덕적 경계를 정해 주는 법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업을 규제하기 위해 자제력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업은 자제력과 사회적 통제의 결합인 규제를 필요로 한다.
자제력이 커질수록 정부의 규제에 대한 필요성은 감소한다. 그러나 정부는 외적인 통제를 가하고, 사회 계약을 강제하는 사회의 대리자이다.
17 청지기로서의 사회적 책임
고객에 대한 책임
어떤 제품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이 힘들지만, 몇몇 유용한 원칙이 있다. 우선, 제품은 그것을 사는 사람의 육체적, 심리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를 내야 한다. 그러한 기초위에서, 우리는 폭력을 촉진하는 장난감의 제조와 판매를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제품이 가지는 기본 목적을 봐야 한다. 제품의 기본 의도가 구매자에겐 사회적 지위를, 그것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겐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거나 그것들을 처분하는 데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키는 제품들에 대해 숙교해야 한다.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지 않아 특별 처분이 필요한 제품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것들을 처분할 장소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큰 문제들을 낳게 된다.
사업가들은 고객을, 자신의 진정으로 섬기고 싶은, 존엄성을 지닌 사람들로 보며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업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직접 판매, 판매 촉진, 대중 광고 등은 정직해야 하고, 건전한 욕망에 호소해야 한다.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지 품행을 단정히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와 친절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지역사회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좋은 이웃이 되려는 책임 의식은 회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일들뿐만 아니라, 전체 지역사회의 복지에 관심을 갖도록 독려한다. 회사에게는 힘이 있다. 회사는 교육, 주거 주위 환경 등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을 위해 적절한 방식으로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지역 공동체만이 아니라 주, 국가, 세계 공동체에 봉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환경에 대한 책임
불행하게도 몇몇 그리스도인 기업가는 그들의 환경 파괴 행위에 대해 비난 받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구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기 때문에(창 1:28-30)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무책임한 경영을 정당화하는 데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것은 더욱 비극적이다. 창세기는 착취를 위한 지배가 아니라 경작을 위한 지배와 하나님의 세계를 위한 보살핌을 말한다.(창 2:15)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오염?!--"<-->
환경에 대한 책임
불행하게도 몇몇 그리스도인 기업가는 그들의 환경 파괴 행위에 대해 비난 받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구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기 때문에(창 1:28-30)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무책임한 경영을 정당화하는 데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한 것은 더욱 비극적이다. 창세기는 착취를 위한 지배가 아니라 경작을 위한 지배와 하나님의 세계를 위한 보살핌을 말한다.(창 2:15)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오염도 하나님의 관심사이다. 구약의 샬롬이라는 개념- 신과 이웃 그리고 피조된 세계와 조화롭게 사는 것- 은 인간에 영향을 끼치는 오염원들에 의해 심하게 파괴되었다. 환경의 적절한 관리를 막는 가장 큰 요소는 무지에 의한 조급함, 탐욕 등이다. 기술 혁신은 그 결과 및 부작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앞질렀다. 제조물들이 대지와 동물, 인간 환경에 위험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기 전에 많은 해로운 결과들이 발생했다. 우리는 이제 모든 신기술은 알지 못하는 잠재적 위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최근에는 더 큰 시장과 더 높은 이윤을 찾으려는 경영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환경에 대한 애정이 무시되곤 한다. 지금이라도 많은 회사들이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18 정의와 세상의 부
탐욕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필요를 잊어버린다. 이기적으로 지위와 안전을 추구할 때 많은 사람이 탐욕적으로 부를 좇는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고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경고하였다. 탐욕으로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다른 사람들의 우익을 위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균등케 되기 위하여 나누어 준 사실을 격려하였다. "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 15)의 말씀처럼 많이 가진 자가 궁핍한 자를 도와 주는 것을 바울은 칭찬하였다.
개인적 부의 축적에 제한을 가하는 나라도 있다. 공산주의 체제는 개인 소유를 금함으로써 이러한 것을 제한한다. 많은 사회주의 국가는 높은 소득에 대하여 누진세를 적용하며 상속 재산의 권리를 규제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 부의 문제에 있어서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소유자이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레 25:23 ; 시 50:10 ; 104:24). 이런 점에서 볼때 우리가 소유한 어떠한 것도 정말로 우리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질을 향상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얼마나 나누어야 하는가?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바울은 나눔에 대한 세 가지 지침을 강조하였다. 첫째, 우리들 나눔의 수준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신실성을 반영해야 한다. 둘째, 우리들의 정당한 필요를 인식해야만 하며 따라서 우리들이 고통스러움을 느끼는 수준 이상을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 셋째, 아무리 작은 양의 선물일지라도 즐거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한 자원
많은 양의 부의 창출은 천연 자원의 확보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가 천연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피조물에 대한 다스림을 허락하셨을때, 하나님은 주어진 자원을 소비하고 사용하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는 신중한 청지기직에 대한 분명한 지침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낭비, 파괴 그리고 해로운 개발 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국민총생산과 공정한 경제 체제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수입이 많아지면 개인의 생활 수준이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국민총생산이 높아지면 그 나라의 생활 수준 향상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둘 다 옳지 않다. 높은 생활 수준은, 개인적인 만족, 건강한 가정생활, 안정적인 지역사회를 희생할 때에야 도달할 수 있고, 종종 그렇게 이루어진다.
국민 총생산의 성장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공급자라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참된 복지를 증진시키는 새로운 생산품을 만들어 낼 때는 자원에 대한 선한 청지기 의식이 반영되어야 한다.
절대성을 해치는 세력들
선악에 대한 개념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같다. 탐욕은 경제를 돕기 때문에 정당화되고, 소득세를 속이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정당화되며, 정치 유세에서 하는 거짓말은 표를 가져오기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죄는 죄라기보다는 단점으로 여겨진다. 만약 십계명이 오늘날에 쓰여졌다면 그것은 열 가지 제안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유물론, 상대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실용주의와 같은 현대의 세속적인 철학들은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실체의 중심부에 두었다. 유물론은 물질과 생명의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은 무엇이든 부인한다. 상대주의는 진리란 상황과 관점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회의주의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진리를 알수 있음을 부인한다. 실용주의는 작용하는 것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철학들은 도덕적 문제에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것을 믿는 자들을, 편협되고, 순진하며, 폐쇄적이고, 불확실한 반지성주의자라고 생각 한다.
세속적 지식인들은 때때로 성경의 권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단순하고, 신중하게 고려할 가치가 없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성경의 권위를 믿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적으로 천진난만하고 비합리적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 자신의 지적 구조나 이성적 논쟁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근거를 두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적 구조나 이성적 논쟁은 그릇된 신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성령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절대적 진리와 도덕성
우리가 도덕적 절대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도덕성이 무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도덕성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도덕적 표준에 대해서 가르친다.
도덕적 절대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은 차갑고, 엄격하고, 굽히지 않고, 생명이 없는 법들이 널리 만연되리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상황들은 하나님의 명령 집행에 영향을 미친다. 율법의 자구들이 율법의 의도와 정신보다 우선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따르는 것은 단지 그것을 법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높은 기준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구약의 율법과 자신의 더 좋은 방법을 비교하면서 이 점을 설명하셨다.
윤리적 수단과 목적
우리는 복잡한 상황에 처했을 때 기업에서 윤리성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성취하려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수단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지 아닐지에 대한 평가를 먼저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의 목적이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을 속이거나, 경쟁자를 몰락시키거나, 지역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종업원을 얕잡아 보거나 또는 주주를 무시하려고 고의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반영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한다.
순종의 응답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동행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모든 상황에 대쳐해 가는 절대적 원칙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반영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동기를 가지시고, 절대적으로 바른 것을 성취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는 방법으로 사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개발할 수 있는 모든 용기와 지혜를 요구한다.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감에 따라 우리는 힘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우리를 부르셨다.(엡 4:22-23).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것은 계속적이고 상호 작용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우리는 사랑의 순종으로써 응답한다.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치신다. 우리는 그의 은총을 경험하고 그를 따르는데 더욱더 깊이 헌신하게 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된 실천과 신앙 안에서 성장할 때, 실수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분의 자비로써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