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Thanks giving day) 유래
해 마다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이란 개신교에서 성대하게 기념하는 날 이었으나 현재는 미국민들이 공휴일로 지정하여 지키오는 기념일이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추수감사절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추석명절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라나 Caroline Baum의 칼럼을 읽으면 인간의 삶에 깊은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추수감사절을 기념하는 것은 미국의 역사를 반영하하면서 오늘의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이어진다고 보고싶다. 인간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개선 발전하여 왔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지난 주말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매년 이맘때면 추수감사절 이야기에 엮어서 칼럼을 쓰는 게 일종의 습관이 돼버렸다. 이번에는 1621~1656년 사이의 기간 동안 30년을 미국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Bay Colony) 총독으로 재직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저서에서 소재를 얻기로 했다. 브래드포드의 연대기 ‘플리머스 농장에 관해(Of Plimoth Plantation)’는 1856년에 첫 출간됐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을 학교나 직장에서 하루 휴가를 받아 가족 친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날로 생각한다.
매년 대통령이 직접 선포하곤 했던 이 국경일의 기원에 대해 만약 아이들이뭔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건 신대륙에서 맞이한 풍년에 감격해 이날을 추수감사절로 지정한 필그림(the Pilgrims)의 이야기다. 어른들이라고 더 잘 아는 건 아니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세계(新世界)로 건너온 한 무리의 영국 청교도 분리주의자들, 즉 필그림이 직면했던 고난에 대해 조금 알지는 모르겠다. 어른들이 잘 모르는 이유는 고등학교 커리큘럼에서 가르치기에는 정치적으로 적절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이주민이 신세계에서 어떻게 장애물을 극복하고 번영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아메리카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담배 재배에 성공해 자활의 기틀을 마하고 이에 자극받아 신대륙에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이주자가 날로 증가하던 1620년, 일단의 영국 청교도들이 일찍이 존 스미스가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한 신대륙 북쪽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대왕정을 꿈꾼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청교도 박해가 심해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거쳐 라이덴으로 피신한 무리의 일부였다. 이처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달픈 유랑의 삶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후세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순례자 조상(Pilgrim Fathers)’이라고 불린 이들은 숱한 난관을 딛고 마침내 자신들이 소망하는 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웠다.
“이주를 준비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고 광막한 바다를 건너왔으나… 눈에 띄는 것은 다만 야생 짐승과 야만인으로 가득 찬 무시무시하고 황량한 황야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비스가 산(Pisgah,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와의 계시로 등정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봤던 산)처럼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 황야를 내려다보면서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살펴봄으로써 희망을 지필 수 있는 산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건너온 바다가, 이제 그들을 문명 세계로부터 절연하는 장애물이요 심연이 되어버린 그 광막한 바다가 보일 뿐이었다.”
180t에 불과한 작은 목선에 의탁해 대서양을 건너오게 한 그 치열한 신앙의실체는 무엇인가. 청교도 연구가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이런 소명의식을 ‘황야로의 심부름(errand into the wilderness)’으로 표현한 바 있다. 밀러에 따르면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에게 식민지 건설은 수세기에 걸친 숱한 희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이뤄내지 못한 참다운 기독교 공동체의 모델을 세우라는, 다시 말해 종교개혁 운동을 완수하라는 신의 엄숙한 심부름으로 비쳤다. 1620년 9월16일 출항한 메이플라워 호 일행은 모두 102명. 라이덴 출신의 순례자, 이른바 ‘성도(Saints)’가 41명, 런던에서 모집한 ‘이방인(Strangers)’이 61명이었다.
항해 중 사망자는 1명에 불과했으나, 플리머스 상륙과 더불어 병자가 속출고 12월에 6명, 1월에 8명, 2월에 17명, 3월에 13명이 죽었다. 첫해에만 필그림의 절반이 죽거나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굶주렸다. 깊은 종교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필그림은 서로 음식을 훔치게 됐다. 브래드포드의 연대기는 1623년 봄 식민지 총독 브래드포드와 사람들이 “절망 안에서 시들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은 농작물을 길러, 지금보다 더 많은 곡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 필그림이 영국에서 가져온 전통 중에는 ‘공동경작’이라 알려진 풍습도 있었다.
그들이 수확한 모든 것들은 공동의 장소에 모았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배했다. 브래드포드의 서술에 따르면 필그림은, “사유물을 공동체로 가져온 뒤 공동 재산으로 만들면 모두가 행복하고 번성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 브래드포드도 “적어도 지금까지 이 공동체는 많은 혼란과 불만족을 길러냈고, 자신들의 이익이자 안락이 될 수 있는 자손을 낳는 일도 방해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썼다. 젊고 건장한 남자들은 보상 없이 남들을 위해 일한 것을 후회했다. 그들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똑같은 양의 식량과 옷을 분배 받는 것에 대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결여돼 있던 건 적절한 인센티브였다. 세 번의 겨울 동안 필그림이거의 굶어 죽을 위기를 견디고 나서, 브래드포드는 실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1623년 봄, 작물을 심을 때였다. 그는 각 가정마다 약간의 땅을 나눠주고 “모든 사람이 각자 알아서 곡식을 길러야 한다”고 선언했다. 결과는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브래드포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우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모든 사람들이 근면하게 일했고, 총독이나 다른 어느 누가 수단을 써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농작물이 심어졌다. 사람들을 커다란 고난에서 구했고, 훨씬 더 큰 만족을 안겨 주었다.”
여자들은 아이를 등에 업고 기꺼이 들판에 나갔다. 이전까지 너무 늙거나 프다고 주장하던 사람들도 사유재산의 아이디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자신들의 노동의 열매를 즐겼다. 생산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곡식을 가죽이나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도 있게 되었다. 적절한 인센티브를 받은 덕분에 필그림은 1623년 가을에는 풍성한 추수를 즐길 수 있게 됐고, ‘추수감사’절을 지정해 그들의 행운에 대해 신에게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날 이후로 어떤 궁핍과 기근도 그들 가운데 머무르지 못했다.” 브래드포드는 그의 연대기가 다룬 마지막 해인 1647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축제를 열고 도움을 준 인디언도 초대했다. 랍게도 추장 마사소이트가 90명의 인디언을 대동하고 나타나 사슴 다섯 마리를 선물로 내놓았다. 그들은 옥수수와 함께 대구, 메기, 거위고기를 마련해 환대했다. 오늘날 미국의 중요한 축일의 하나인 추수감사절은 바로 이 교환(交驩)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처음에는 크랜베리 소스도, 호박파이도, 칠면조도 없었다. 산발적으로 행해지던 추수감사절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공식적인 축일로 지정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에 이주해 왔던 청교인들이 그 이듬해 가을에 1년간의 수확을 감사드리는 축제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추수를 감사드리는 풍습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인류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하는 풍습이었다. 1817년 뉴욕 주가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이어 남북전쟁 중인 1863년 링컨 대통령이 11월의 넷째 목요일을 공식적인 추수감사절로 지정함으로써 전국적인 축일로 지켜지게 됐다.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9년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 목요일로 변경해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한편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것은 1904년 제4회 장로회 공의에서 11월10일을 감사일로 선포한 뒤부터다. 1914년에는 각 교파 선교부 회의에서 미국 선교사의 최초 입국일인 11월 셋째주 수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언했다. 이후 수요일에서 셋째 주일로 바뀌었다. 1623년에 필그림이 반응했던 인센티브는 거의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자유롭고, 생산적이고, 풍요로운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추수감사절은 청교도 인솔자 윌리엄 브래드퍼드(William Bradford, 1588∼1657)가 남긴 ‘플리머스 식민지 역사(Of Plymouth Plantation)’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신학연수과 > 신 학 과 제 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사장 (0) | 2011.06.24 |
---|---|
A.D 700년까지 성경 연대기 (0) | 2011.06.24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이해 (0) | 2011.06.24 |
◈ 사복음서 대조표 ◈ (0) | 2010.11.18 |
4복음서 개요 및 특징, 이적, 비유, 특수자료 비교 (0) | 2010.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