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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미션(cmc) 2011. 6. 24. 18:00

제사장

    KCM Home >> Study Bible / 제사장 / 신약시대의 로마 황제들 / 유대의 왕들과 행정관들(총독)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A.D. 6년-66년)

    이름

    임기 A.D.

    임명자

    안나스(Annas) 혹은 아나노스(Ananos)

    6-14

    총독 구레뇨(Quirinius)

    이스마엘(Ishmael), 파비의 아들(son of Phabi)

    14-25

    총독 그라투스(Gratus)

    엘르아잘(Eleazar),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시몬(Simon), 카미도스의 아들(son of Kamithos)

    요셉(Joseph) 혹은 가야바(Caiaphas)

    요나단(Jonathan),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37년 이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

    데오빌로(Theophilos), 아나노스의 아들(son of Ananos)

    시몬 칸데라스(Simon Kantheras)

    38-44

    아그립바(Agrippa I) 1세

    맛디아스(Matthias)

    엘리오네오스(Elionaeos)

    요셉 카메이(Joseph Camei)

    45-48

    칼시스의 헤롯(Herd of Chalcis)

    아나니오스 네베데오스(Ananios Nebedaeos)

    요나단(Jonatan)

    48-66

    아그립바(Agrippa II) 2세

    이스마엘(Ishmael), 파비의 아들(son of Phabi)

    요셉 카비(Joseph Cabi)

    아나노스(Ananos)

    예수 담네오스(Jesus Damneos)

    예수(Jesus), 가말리엘의 아들(son of Gamaliel)

    맛디아스(Matthias), 데오빌로의 아들(son of Theophilos)

    신약시대의 제사장

    제사장 및 대제사장을 뜻하는 단어들 중에 히랍어의 (히에류스, 아르키 이에류스) 한가지의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늘 구약의 유대의 제사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단 한가지의 경우는 사도행전 14:13에서의 제사장이란 말인데 이 경우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지방에서 제우스 제의를 주관하는 이교도를 뜻하고 있다.)

    유대교에서 제사장직은 레위지파 사람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직분으로 임명에 의해서 이루전 것은 아니며 혈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다만 대제사장의 경우에 신약시대 때 유대가 로마의 관할할 때 황제나 총독이 제사장 중에서 임명했다.)

    제사장의 계급
    1. 대 제사장 : 1년에 한번 지성소에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특권이 있었다.
    2. 성전의 두목 : 대제사장 차기 후보로 대제사장 다음으로 높은 서열이었다. 대제사장을돕고 산헤드린회원이며 성전 경내에서 수석자를 차지했다(행 4:1, 5:24, 26).
    3. 수석 제사장들 : 신약성경에서 64회이상 요세푸스와 탈무드에서는 자주 대제사장이라는 용어가 복수인 (아르키에레이스)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단어가 대제사장과 전직대제사장, 아니면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특권층 가문에 속한 제사장을 가르킨 것으로 생각해 왔다.
    4. 일반 제사장들 : 제사장 귀족 계층에 비해 일반 제사장들의 수는 굉장히 많았다. 신학자 예레미야스는 예수 시대에 이들의 수를 18,000명 정도가 있었다고 본다. 이들은 24반열로 나누어서 각 반열은 1년에 두번 일주일씩 매일의 성전희생제사를 수행하였다(눅 1:5).
    5. 레위인들 : 제사장 교계제의 밑에층에는 레위인들이 1만가량 있었고 24반열로 나뉘었다. 이들은 성전의 음악 및 다양한 형태의 봉사자들 이었다(참고 눅10:32, 요1:19).

    레위기의 제사장에 관한 규정

    구약성서의 613 계명중에서 149-284 제사장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이 계명 외에도 사실상 제사에 관한 규정 등 많은 부분이 제사장과 관련이 있는 계명들이다.

    제 149 계명 / 제사장은 머리를 풀어서는 안된다(30일 이상 머리를 계속 기르는 것을 금지).
    제 150 계명 / 옷을 찢어 애도를 해서도 안된다(레 10:6).
    제 151 계명 / 제사장은 성전(성소)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레 10:7).
    제 152 계명 / 제사장은 성전(성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된다(레 10:9, 11).
    제 263 계명 / 제사장이 주검을 만져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제 264 계명 / 그러나 가족의 주검은 만질 수 있다(레 21:1-4).
    제 265 계명 / 주검을 만져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의적인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부터 제사 음식을 먹을 수 있다(레 21:6; 22:7).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15).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부정한 여자와 결혼해도 안된다(레 21:7).
    제 266 계명 /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7).
    제 269 계명 /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레 21:8).
    제 270 계명 /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제 271 계명 / 대제사장은 가족의 주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레 21:11).
    제 272 계명 / 대제사장은 처녀와만 결혼해야 한다(레 21:13).
    제 273 계명 / 대제사장은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레 21:14).
    제 274 계명 / 대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해서도 안된다(레 21:14).
    제 275 계명 / 아론의 후손 가운데 몸에 (영구적인) 흠이 있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다(레 21:17).
    제 276 계명 / 일시적인 흠이 있는 제사장도 그것이 날 때까지는 제사 드리는 일을 할 수가 없다(레 21:17).
    제 277 계명 /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레 21:23).
    제 278 계명 / 부정하게 된 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수 없다(레 22:2).
    제 279 계명 / 그는 성물(聖物)을 먹을 수 없다(레 22:4).
    제 280 계명 / 제사장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제 281 계명 / 제사장이 데리고 있는 나그네나 품꾼도 성물을 먹을 수가 없다(레 22:10).
    제 282 계명 / 할례 받지 않은 제사장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0).
    제 283 계명 / 제사장의 딸이더라도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다(레 22:12). - 그러나 다른 남자에게로 시집간 제사장의 딸이 이혼을 하거나 과부가 된 경우에는 "테루마"(제사장을 위해 바치게 되어 있는 수확물의 2%)를 먹을 수 있게 하였다.
    제 284 계명 / "테벨"(tevel)은 먹지 말아야 한다(레 22:16). - 테벨이란 히브리어로 '좋지 않다'는 의미로, 십일조나, 제사장을 위해 바치게 되어 있는 "테루마"를 따로 떼어놓지 않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로마 교회와 제사장직

    <Ⅰ>

    로마 교회의 교리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에게서 끊임없이 계승되어 내려왔다고 하는 소위 제사장직에 관한 교리이다. 로마 교회의 제사장들은 주로 세가지 기능을 행사하고 있다.

    첫째로 저들은 중보(中保)의 일을 한다. 저들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자로서 서 있다. 이 주장은 대체로 인간이 어떤 특별한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억설에 의거하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직접 나아와 그를 신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저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 구원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이며 영적인 인격적 신앙 그것보다도 외부적 의식준수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성례 의식의 거행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들에 의하면 성례 의식들은 다만 구원의 방편일 뿐만 아니라 직접 구원의 은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통 이 예식들은 신부들에 의해서만 거행되므로 결국 사죄와 그 밖의 은총은 오직 저들의 중보를 통해서만 얻어지게 된다. 따라서 신부들을 떠나서는 구원 얻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교리는 필연적으로 성례가 거행되는 그들의 교회밖에 있어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처지를 취하게 한다. 그리하여 실제적으로 이 교리는 신부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취하게 한다. 이 견해가 내포하는 종교상의 근본적 결함은 그것이 죄인들로 하여금 온전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 안에 떨어지는 것보다 한갓 무능한 인간의 손 안에 떨어지게 하는데 있다.

    둘째로 신부는 희생 드리는 일을 한다.

    이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참된 제사장직에 따르는 특수한 직분이니 이는 제사장은 마땅히 드릴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 신부들은 희생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미사제에 있어서 행하여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제사장격이 미사제에 필요한 요소를 채우기 위하여 주장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제사장직의 권리를 뒷받침 하기 위하여 미사제에 희생적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정 지을 수 없으나 적어도 이 두가지 의도가 불가분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저들은 성찬 예식이 한 의식(儀式)일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희생 제물이라고 한다. 이 주장은 다른 특수한 교리들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려 한다.

    성찬이 한 성례 의식일 분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희생 제물이라고 하는 저들의 이 주장은 첫째로 화체설(化體設)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은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참으로 현실적으로 또한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뀌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변화는 신부의 성별하는 권세로 말미암는다고 한다. 곧 신부에 의하여 성별된 떡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떡 그대로이나 실질적으로는 벌써 떡이 아니며, 포도주 역시 외형적으로는 포도주 그대로이나 실상은 이미 포도주가 아니라고 한다. 곧 그것들은 실제로 못박혀 죽으신 구주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한다.

    성찬 자체가 희생 제물이라고 하는 이 주장이 내포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들에 의하여 몇번이나 반복해서 희생 제물로써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하는 가장 모독적인 사실이다. 여기에 관하여 마틴 데일 신부는 말하기를 "신부의 본질적 직무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죄하며 성체를 봉헌하며 이것을 보관하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로마 교회의 예배의 본질이다. 떡과 포도즙이 신부로 말미암아 봉헌되면 그것은 실제로 그의 몸과 피의 제물로 화해진다. 이 헌제(獻祭)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며 사죄와 영혼의 구속이 이루어진다.

    이 교리는 또한 성체숭배(聖體崇拜)라고 하는 우상 숭배를 내포하고 있다. 신부는 제단에서 예배 드릴 때에 마땅히 무릎을 꿇고 떡과 포도즙에 경배 드리며, 마치 그리스도에게 하듯 그것들에게 기도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회중은 하나님께만 합당한 경배로서 그것들을 숭배하지 않으면 안된다(트렌트공의회 제13회기, 제5장).

    이제 셋째로 신부는 대언의 직무를 행사하는데 이는 주로 고해성사(告解聖事)로 말미암아 행하여진다.

    신부는 사람의 죄를 사유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대언의 권세는 땅 위의 산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연옥에 있는 것으로 주장되어 있는 죽은 자의 영혼들에게 까지 미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 말한 것이 로마 교회의 성직에 대한 견해이다. 신부는 한 대언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 있다. 그는 땅 위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인간의 대언자로서 하나님과 의논하며 죄인들을 사죄하거나 정죄함에 합당한 조건을 정하며 죄인들을 사유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린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죄를 보류하기도 하고 이를 사하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Ⅱ>

    위에 말한 로마 교회의 주장들은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못한다. 신약 성경의 그 어디에도 교직자에 대하여 "히에류스"(Hiereus)라는 말 곧 제사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제사장 직무를 돌려서 말한 데는 신약 중에 한 곳도 없다.

    영감된 이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고하여 보면 보통 인간으로서 제사장 직권을 행사한 예를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도들 중에 어느 누가 중보자로 자처하였는가? 그들 중에

    "너희는 구원받기 위하여 내게로 오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이 희생 제사를 드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성경이 조금이라도 암시한 일이 있는가?

    성경 어느 곳에서 사죄의 권세를 인간이 주장한 것을 발견 할 수 있는가?

    더욱이 로마 교회의 전 교리 체계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교훈에 배치될 뿐 아니라 복음의 특징에도 반대된다.

    복음의 근본적 특징은 그 단순성과 영적인 것에 있다. 그것은 인간을 외적(外的)이며 감각적인 기반에서 자유하게 하며 의식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제 2차적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은 어디서나 하나님께 자유로이 나아갈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을 확보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뿐임을 선언한다. 그것은 때와 곳의 상관이 없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직접적 교제를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우리 주님은 가장 뜻 깊은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Ⅲ>

    홀로 한 분이신 참 제사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단지 이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직무는 한갓 모형(模型)이었고 그 모든 상세한 설명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豫表)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무수한 헌제는 예배하는 자들에게 오실 구속주(救贖主)를 지표(指標)할 때에만 그 목적을 참으로 달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오시면 그들의 사역은 성취되며 따라서 그들은 존재를 그치게 된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의 직무를 완성하신다. 그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직무에 부르심을 받았고 이를 감당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무한한 위엄과 완전한 성결을 지니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사 인간을 체휼해 주시는 인자(人子)되신 그에게 우리는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다.

    그는 실로 죄인 괴수까지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시오 또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유일의 길이시다.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그는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참된 희생을 드리셨다. 그의 죽으심은 제사장으로서의 행위이었다. 그는 스스로 제사장과, 또한 희생제물과, 제단(祭壇)이 되셔서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흠없이 바쳤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은 갈보리 제단에서 고뇌(苦惱)와 수욕을 끝까지 견디사 자신을 하나님께 향내나는 제물로 온전히 바쳤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참된 구속을 가져왔다. 이 구속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거니와, 십자가의 오묘한 도리(道理)는 확실히 인간의 모든 해석 보다 훨씬 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성격에 있어서 대리적이요 그 목적에 있어서 구속적(救贖的)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를 멸하시고 불법을 없이 하사 영원한 의를 가져왔다. 이 속죄의 성업은 충분하고도 자유로운 죄의 용서를 위한 의(義)의 기초를 이루셨다. 그의 구속은 완성되었고 그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반복될 필요가 없다. 이 진정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다(히10:14).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한 참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대언(代言)의 역사를 하신다. 이 대언의 직무는 제사장의 영원한 직분이다. 비록 그의 속죄의 성업이 완성되었다고 할지라도 이 대언의 사역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기의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 피는 힘있게 말하여 우리를 위하여 도고(禱告)한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은 모든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이름들을 그 가슴에 달고 있으며 그를 좇는 무리들에 관한 일들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영원히 살아계셔서 대언하심으로써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신다"(히7:25).

    로마교 교리 체계 가운데 가장 큰 죄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 모욕을 가한데 있다. 로마 교회의 신부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들의 주장이 용납되는 한 독일(獨一)하신 구속주의 직분의 영광이 가리워지나니 이는 그것이 제사장직의 최종성(最終性)과 유효성(有效性)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제임스 배너만 박사(Dr. James Bamerman)는 말하기를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제사장 직을 부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게하는 이러한 교회 조직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에 고유(固有)한 이 직분에 대한 이러한 침범은 그의 영광을 너무도 크게 훼손시킨다.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뗄 수도 없고 남에게 양도(讓渡)될 수도 없는 그의 개인적 특권을 외람되게도 인간이 대신 취함은 만물 위에 홀로 뛰어나 계시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가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중보자의 칭호는 홀로 한 분이신 아버지의 독생자 외에 그 누구에게도 합당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에게도 제사장이라고 부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로마 교회의 가장 큰 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곧 하늘에서나 땅위에서나 하나님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합당하지 않은 제사장의 칭호를 그들이 스스로 가로채고 외람되게도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서서 제사장 직분을 사람들 위에 행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리스도의 교회, 제 2권 p.169-170)

    <Ⅳ>

    그러면 신약 시대에 있어서 인간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제사장의 직분을 행사할 수가 없는가?

    이 점에 대해서 로마 교회는 주장하기를 구약 시대에 인간이 누린 특권은 신약시대에 있어서 더 큰 보편성(普遍性)과 포괄성(包括性)을 띠고 존속되는 것 같다고 한다. 로마 교회의 그릇된 점은 복음시대에 있어서 비록 제사장의 대리적 직분이 인간들 가운데 행사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본질적 요소에 있어서의 제사장직은 영원히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 있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제사장의 특권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그것은 벌써 어느 한 특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유산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의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다.

    실로 그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이란 높은 칭호를 받는다(벧전2:9). 그들에게 있는 제단은 흙이나 나무나 구리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드리는 희생 제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이다(벧전2:5).

    이 제사는 그 속에 죄를 속량(贖良)하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갈보리의 한 헌제로 말미암아 이미 구속받은 영혼이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권리를 가지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누린다.

    모든 신자는 끊임없는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대언자의 직분을 다할 것을 부탁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 자원하여 바칠 의무를 지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확보된 지극히 높고 영화로운 특권이요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이다.

    <Ⅴ>

    로마 교회는 신부들이 인간을 그 죄에서 놓아 줄 권세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야말로 실로 중세대(中世代) 교회에 고유한 이론인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세례 받은 후에 타락한 신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죄를 매거나 풀거나 할 권세가 사도들과 그들의 법적 계승자들에게 전달되었다"라고 선언하였고 덧붙여 이르기를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공의회는 이 성례의 제정(制定)에 반(反)하여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권능을 의미한 것으로 거짓되이 왜곡(歪曲)하여 말하는 자들의 가상적(假想的)인 해석을 정죄한다"라고 하였다(신조 14)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라고 말씀하신데 대하여 로마 교회는 이를 고해성사(告解聖事)의 권세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이른바 고해성사로 말미암아 신부가 죄를 사면(赦免)하는 직분을 행사한다고 한다.

    이 사죄 교리를 특별한 의미에서 취급하기 전에 우선 우리는 이 사죄에 따르는 어떤 조건(條件)들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부의 사죄 선고에는 세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요구된다. 곧 참회와 귓속말로 하는 고백과 죄에 대한 보상(報償)이 그것이다.

    이 참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의미에 있어서 회개와 실제상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로마 교회는 그것이 비록 고백이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참으로 참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시인한다. 그러나 그들은 참회가 유효(有效)한 것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완전한 것이어야 하며, 인간으로서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위 "부전(不全)참회"라고 하는 한 낮은 의식을 고안해 냈다. 이것은 실상 자연적 비애(悲哀)와 다를 것이 없으니 곧 죄에 대한 비열(卑劣)한 견해와 이에 따르는 어느 정도의 형벌에의 공포심과, 이 이상 더 죄 짓지 않으려는 생각과 죄의 용서를 받으려는 희망 등이 곧 "부전 참회"라는 것이다(트랜트 공의회 제 14회기 제 4장 참회에 대하여)

    이제 신부가 사죄의 선언을 내리려면 이 불충분한 회개와 아울러 고백이란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세례 받은 이후에 범한 큰 죄(大罪)는 그것이 고백되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로마교 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은 그들의 죄를 신부에게 반드시 고백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 신부는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 관한 모든 사정에 대해서 조사하여, 그가 알고자 하는 사실에 대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어떠한 질문이라도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고해성사의 시행(施行)의 기초를 이루는 그 원리가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능히 1년 동안에 지은 모든 죄, 곧 생각과 욕망과 목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를 단 몇 분 내지 몇 시간 동안에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로마 교회는 '큰 죄'와 '작은 죄'를 구별해서 말한다. 그리고 고백할 죄는 큰 죄에만 한(限)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외람된 간계(奸計)를 더 할 것뿐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에게 대한 죄의 크고 작은 것을 논하며, 더욱이 이 죄는 이 종류에 속하고 저 죄는 저 종류에 속한다고 권위있게 말할 수가 있는가?

    대개 죄의 고백이 있는 곳에는 신부의 사죄 선고가 따르며 이 선고는 죄와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확실하게 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의하여 이 특권이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 뉘 죄든지 신부가 사하면 실제로 사하여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땅에서 신부가 죄를 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이를 시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신부의 중보 사역을 떠나서는 죄인에게 사죄의 소망이 없다. 그들은 외람되게도 사죄의 특권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며 이 사죄의 은혜는 기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재판 행위에 의해서 부여된다고 한다(트랜트 공의회 제14회기, 제 9조). 이는 실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특권에 대한 사악한 침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로마 교회의 사면(赦免)교리에는 간과(看過)해서는 안될 또 다른 요소가 들어있다. 신부에 의하여 획득되는 사죄는 그것 만으로서는 온전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범법한 죄에 해당한 영원한 형벌을 가리워 주는 것 뿐이요,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지불해야 할 속세의 형벌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이 곧 배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그것은 기도와 금식과 고행 등으로 갚아진다고 한다. 이것들은 사랑의 강권(强勸)으로 말미암아 행하여지는 성도의 특권이 아니라 범죄함을 인하여 마땅히 과(課)하여지는 형벌인 것이다.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배상의 양(量)은 신부가 결정한다. 그는 이를 경감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이를 전부 면제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여덕(余德)을 의지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이상 더 파고 들 필요가 없다. 다만 이 교리가 얼마나 성경의 명백한 교훈에 배치되는 것인가를 알면 족하다.

    그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모독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손상시킨다.

    그것은 기독자의 수난과 봉사의 성격을 전혀 잘못 깨달은 데에서 진행된다. 폐일언하고 이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총을 흐리게 한다.

    이 배상 교리에 대하여 베인 씨(John A, Bain)는 말하기를 "이 교리는 모름지기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며, 도덕의 표준을 저하시킨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이 이와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충분히 죄값을 갚을 수 있을 것이고 게다가 각종 의식과 고행과 헌금은 능히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죄를 너그러이 간과하게 하실 것이다.

    참된 심령의 변화가 없이는 그 사회의 도덕률에 대한 요청은 약화되고 그 도덕상태는 타락될 것이다. 이는 사실로 죄를 속할 수 있다는 고해성사 교리에 의하여 죄를 고백하는 결과이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흉악하여서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이는 충분한 배상이 있을 수 없고, 더욱이 참 회개 곧 죄의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죄를 슬퍼하고 이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의 뜻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심령의 변화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죄를 직접 얻는다고 하는 교훈은 도덕의 이상(理想)을 높이고 성결한 생활을 영위할 새로운 힘을 준다"라고 하였다(로마교회의 발전).

    그러면 이제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사죄의 권세를 부여한 것 같이 보여지는 그 성구에 언급된 권세란 도대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일까? 만일 이에 대한 로마 교회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하면 마땅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배상설(賠償設)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신 바 매거나 풀거나 하는 권세는 과연 무엇을 뜻하였으며 죄를 사하거나 이를 그대로 두거나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이 권세가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마태 18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범죄자의 징계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거니와 이 징계의 마지막 단계는 범죄자가 마땅히 교회에 불리우게 되고 만일 그가 교회의 말도 듣기 싫어하면 그는 마땅히 이방인과 세리로 간주되어 교회에서 출교(黜敎)당하게 된다.

    예수께서 마태 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가 선고하는 출교를 뜻한 것이다. 그러면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의 같은 장을 읽어 내려가면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마18:20). 이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교회의 일반적이며 영원적인 소유가 된다는 것을 가르침이다.

    이 권세는 그 안에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가르치는 권세이다.

    교회는 구원의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권위 있는 설명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죄를 얻는데 필요한 조건을 선포할 책임을 지고 있고, 죄를 사하거나 이를 그대로 두는 그의 기능은 이 선포적 권세에 엄밀히 국한되어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신실히 전파하고 그의 사죄의 조건을 바로 나타낼 때에는 그 전파의 배후에 높으신 하늘의 권세가 따르게 된다. 교회의 증거는 그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인정함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땅 위에서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 위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리게 된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권세는 둘째로 권징의 행사권을 의미한다.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마태 18장에 사죄의 권세와 관련하여 언급하신 것은 바로 교회의 권징권의 행사에 대해서이다. 예수님은 어떤 범죄자가 은밀하고도 호의적(好意的)인 충고를 거절할 경우에는 그를 교회 앞에 데려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미 사적(私的) 권면의 범위를 지나 공적(公的) 권징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만일 범죄자가 교회의 지도 받기도 거절할 때에는 교회에서 끊기게 된다.

    그런데 범죄자를 끊는 교회의 결정의 베후에는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권세가 있다. 회개한 자를 받는 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회개의 증거를 나타내어 권징의 목적이 달성되면 이왕에 받은 책벌에서 놓임을 받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가 땅위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동시에 주님께서도 하늘에서 이를 푸신다. 이 권세는 지극히 높고 거룩한 것이므로 이것을 행사할 때에는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곧 이 권세는 오직 그리스도의 산 교회 곧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어 그의 성령을 받은 참된 신도들에게만 속한다는 것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비록 참된 교회라 할지라도 그 치리권의 유효적 행사는 교회가 분명히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행해진다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매는 것과 푸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뒤의 일이었다. 만일 교회가 그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에 불충성하고 따라서 그의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실상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종종 그의 판단을 그르쳤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그 판단은 그리스도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Ⅵ>

    이제 진정한 사죄에 대해서 몇 말씀 하여야 하겠다. 그것은 본서에 있어서 단지 로마교 교리의 부패성만을 드러내보이는 것 보다도 여기에 대한 복음주의 신앙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나의 의도한바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시는 사죄에 관한 교리는 성경 전체에 일관(一貫)해서 나타나 있고 특히 신약성경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예컨대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였다. 곧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요일1:9).

    죄의 용서는 다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주어진다.

    우리가 죄를 고할 때 이를 용서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시면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 있어서도 그 사죄 행위에 내포된 권세는 피조물의 영역을 무한히 초월한 것이었고 또한 그것은 너무도 명백하게 신적 권위를 띤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의 신성을 나타내는 한 방편으로서 죄 사하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육적 세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영적 부문에 있어서도 동일한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그는 이적을 행하셨던 것이다.

    만일 그가 참 하나님이었다면 사죄의 권능은 저절로 따랐을 것이다.

    로마교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들의 신부를 개재(介在)시키거니와 우리는 교직자이거나 성도이거나 천사이거나 그밖에 지음 받은 어떠한 중보자도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필요하지 않다는 확실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

    사죄의 권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려 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라고 하였다. 어찌하여 그의 사죄 행위가 보통 우리의 생각하는 대로 그의 자비와 은혜에 기인하지 않고 미쁘심과 의로우심에 기인해 있을까?

    사죄함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미쁘심은 복음서에 있는 그의 약속에 관련되어 있고, 그의 의로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관계되어 있다. 곧 그의 사회의 행위는 갈보리의 십자가 공로에 기인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리스도의 희생은 무한한 공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어떠한 희생으로도 보충될 필요가 없다.

    사죄는 또한 죄인의 고백과 관련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가 죄를 사하신다고 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죄의 고백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죄를 신부에게 고백할 어떠한 의식(儀式)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겸손히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우리의 마음을 쏟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그는 우리의 신뢰를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는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죄를 자복한다고 해서 그가 우리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죄를 받기에 합당한 마음 자리를 이룬다. 왜냐하면 참된 죄의 고백이란 하나님께 무조건 굴복하고 그의 자비에 전적으로 신뢰함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사죄는 하나님의 부요하신 은혜로 말미암는다.

    이 말은 그의 사죄가 모든 죄에 미치는 완전한 것임을 의미한다. 곧 그의 사죄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깊은 죄와 허물에까지 미쳐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완전히 깨끗하게 한다.

    또한 이 말은 그 사죄의 조건에 관하여 볼 때에 전혀 자유로운 은사임을 뜻한다. 우리는 로마 교회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기 위해 손에 값을 들고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를 만족하게 할 어떠한 희생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를 만족하게 하기 위하여 현세에서나 내세에서나 우리 스스로가 선을 행하고 고난을 당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은 자유롭고도 절대적이다. 또한 그것은 궁극적이며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에 근거하여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무오(無誤)한 말씀을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다"(롬11:29)

    그는 우리의 불의를 참으실 뿐만 아니라 이를 기억하지도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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