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종 교 개 혁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교류와 논쟁 ① 칼빈과 불링거의 예정론 논쟁

미션(cmc) 2011. 10. 7. 08:04

여름특집/ 이야기로 보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교류와 논쟁
① 칼빈과 불링거의 예정론 논쟁

‘선택’은 같았지만 ‘유기’서 달랐다

볼섹이 지핀 논쟁 꺼지지 않고 이어져
이중예정론 중 ‘유기’부분 해석차 보여
입장 고수했지만 신학적 관계는 계속

현재 종교개혁가에 대한 연구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한국 교회는 칼빈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루터나 쯔빙글리 연구는 기초적인 수준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영향을 미쳤던 부쳐 외콜람파디 멜랑히톤 불링거 등 다른 종교개혁가들은 우리 관심에서 너무 멀리 있다. 그러나 당시 신학자들은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종교개혁을 정확히 인식하려면 루터 칼빈 쯔빙글리 외에 다른 종교개혁가들도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름 특집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교류와 논쟁’이라는 주제로 2회에 걸쳐 글을 싣는다. 첫 번째 글은 제네바교회를 이끌었던 칼빈과 취리히교회를 이끌었던 불링거의 예정론 논쟁에 대한 것으로, 한국칼빈학회에서 발표한 박상봉 박사(대신총회신학연구원)의 <1551년부터 1555년까지 칼빈과 불링거:예정론에 대한 볼섹 논쟁 속에서 야기된 두 사람의 신학적 갈등>을 참고했다. <편집자 주>

 

성만찬 논쟁으로 루터와 쯔빙글리가 분열된 이후, 개혁 교회는 정치적 긴장 상태와 함께 내부적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그런데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인 예정론을 두고 다시 교회가 논쟁을 벌이게 된다. 논쟁의 중심은 칼빈과 불링거였다.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1504년 스위스 브렘가르텐에서 출생해 쯔빙글리를 계승한 인물로, <스위스 제2신조>를 작성한 인물 정도만 알려져 있다.

   
  ▲ 종교개혁자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사상을 확립해 나갔다. 칼빈이 제네바교회에서 개혁신학을 의논하는 모습의 판화. (한국칼빈주의연구원 제공)  
 
칼빈과 불링거의 예정론 논쟁이 발발한 원인은 1551년 히에로니무스 볼섹(Hieronymus Bosec)이 칼빈의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볼섹은 목회자를 위한 금요집회에서 △인간의 구원은 선택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신앙과 불신앙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유효하며 다만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구원을 취하거나 취하지 않는다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론은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한 것이고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볼섹의 이 주장은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 기초인 펠라기안적 입장에 서있는 것이었다.

 

볼섹의 주장에 대해 제네바 목회자회는 신성모독과 이단의 죄목으로 그를 재판에 회부한다. 신학논쟁은 볼섹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멜랑히톤 불링거 등 다른 신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변호하면서 확대됐다. 재판을 진행한 제네바 의회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바젤, 취리히, 베른 교회에 재판 상황을 알리고 의견을 물으면서 합법적인 판결이 나오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 교회들의 답변이 제네바 교회 곧 칼빈의 희망과 달랐다. 불링거가 지도하던 취리히교회 목회자회는 볼섹의 주장을 비판했지만, 죄의 기원이 인간의 의지적 타락에서 기원했다고 밝혔다. 바젤교회 목회자회는 볼섹과 연관성을 거부하면서, 유기가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한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베른 목회자회는 예정론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와 선함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준다며, 볼섹 재판을 통해 교회들이 갈등하지 않기를 바랐다. 취리히 바젤 베른 교회는 전체적으로 제네바교회를 지지했지만, 볼섹 논쟁을 신학적인 면뿐만 아니라 목회와 교회정치 속에서 이해하고 교회의 안정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관용적으로 해결해 줄 것을 권면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제네바교회는 1551년 12월 21일 열린 재판에서 볼섹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영구 추방과 벌금형 수준에서 판결을 내렸다.

볼섹 재판은 끝났지만, 예정론을 둘러싼 종교개혁자들의 논의는 그치지 않았다. 칼빈과 불링거는 1555년까지 예정론 논쟁을 이어간다.

칼빈과 불링거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영원한 선택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불링거도 인식의 차이는 있지만,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론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이 유기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근거를 둔 것과 달리, 불링거는 유기가 하나님의 의지적인 작정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불링거는 유기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의 의지적 행위의 결과로 이해했다. 타락의 결과로 유기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영원한 저주에 이른다는 것이다. 불링거는 칼빈의 예정론이 의도와 다르게 하나님을 죄의 원작자로 만드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칼빈도 이에 질세라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죄의 원작자가 될 수 없다고 밝히면서 자신의 이중예정론을 더욱 정교하게 확립시켜 나갔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예정론을 끝까지 고수했지만, 관계를 단절하거나 반목하지는 않았다. 칼빈과 불링거는 신학적 기본은 같았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불링거는 당시 분열된 개혁교회의 상황을 의식해서 목회적 입장에서 예정론을 이해하려 애썼다면, 칼빈은 신학적 선명함을 추구하려 애쓴 결과였다. 이후에도 칼빈과 불링거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와 교회의 안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교류하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