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서 얻은 교훈
성경본문| 레위기 19장 13절 ~ 14절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놓고 얘기했습니다.
"6·25때 얼마 나 배가 고팠는지 아느냐, 밥이 없어서 사람들이 굶기를 밥 먹듯 했단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지 왜 굶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밥도 없는데 어떻게 빵이 있었겠느냐". 그러자 아이는 또
"그러면 라면 먹으면 되지 않아요"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시절의 배고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 81돌 기념일을 보냈습니다. 3·1절은 이제 옛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흐려져 가고 우리네 관심 속에서도 지워져가고 있습니다.
그 역사가 벌서 81년이나 되었습니다. 어떤 아버지들은 3·1절이 무슨 날이냐고 아이들이 물으면
"일 제 때 우리 조상들이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부른 날이다."라고 대답 해 주는 게 전부입니다. 특별한 관심도 없고 역사적인 의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그렇게 쉽게 잊 을 수있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근대역사 가운데 두드러 진 날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3·1절이고
또 하나는 8·15 입니 다.
이 두 날은 우리 신앙인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 이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 깊이 섭리하신 날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관련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두 날은 우리 기독교가 꼭 되새기고 교훈 을 받고 넘어가야 할 날입니다.
3·1절이나 8·15는 모두 자유와 평등과 관계가 있는 날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입니다. 약자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성경말씀의 정신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말씀들 을 기록한 아주 소중한 책입니다. 여기 보면
"부약사상(扶弱思想)"이 나오고 있습니다. 약한 자를 도우라는 정신입니다. 성경 속에는 이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강자에게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약자에게는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입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삯을 떼먹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며 네 하나님 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씀이 "부약사상"입니다. 이를테면
"약자 보호사상"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한 가지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고 핍박하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경고 입니다.
일본사람들이 36년 동안 우리민족을 아주 가혹하게 압제했고 지배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이름과 성과 이 땅을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약한 나라라고 얕잡아보고 통째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습니 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부약사상을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그런 일본이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왕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고종을 독살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밥을 먹을 때마다 항상 개를 옆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개에게 음식을 먹여서 별 이상이 없으면 그제서야 안심하고 먹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위협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한일합병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민비였습니다. 민비는 아주 똑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냥 밀어붙이면 뜻대로 될 줄 알았는데 똑똑한 여인 하나 때문에 가로막혔습니다. 그래서 민비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고 군인들을 그 방에 집어넣었습니다. 군인들은 민비가 자고 있는 침실에 군화발로 들어가 민비를 칼로 찌르고 썰고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체를 녹지원으로 끌고 나와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기름을 붓고 불태웠다고 합니다.
일본이 이렇게 잔학하게 우리를 압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무시했습니다. 인권이고 주권이고 모든 것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 을 하나님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 부약사상을 송두리째 무시해 버린 그들을 하나님 이 심판해서 그 나라가 잿더미로 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압제를 받다가 견디지 못하여 들고 일어난 것이 3·1 운동입니다. 지금 그 1세대들이 모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두 역사를 통해서 들은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날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3·1절이라는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몇 가지 교훈 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고난은 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고난을 거치면 사 람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성 경 전도서 7:14절을 보면
"너희는 곤고하거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겪은 사람은 생각이 성숙해집니다. 어른스러워집니다. 고난을 겪고 나면 상상도 못했던 생각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고난이 지 혜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독립선언문을 보면 참 문장이 아름답습니다. 문학적으로도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그 런 작품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책 상 앞에 앉아서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다듬어서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닙니다. 그 글 속에 절절한 고난이 배어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과한 후에 나오는 인간의 가장 소중하고 근본적인 외침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 지금 3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시인이 다 됐습니다. 어른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집에 있으면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소중함, 집의 소중함, 음식의 소중 함,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구구절절 이 철든 편지를 썼습니다. 철없던 아이가 군대에 가서 고생을 조금 맛보더니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삶에서 오는 어려움과 고난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보면 아들 에 대한 부성애가 절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기도문은 어느 날 번뜩 생각나서 쓴 기도문이 아닙니다. 전 장(戰場) 터에서 수많은 아픔과 죽 음을 보면서 체험한 것을 쓴 것입니다.
보통 때는 그런 기도문이 나오 질 않습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남자로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절실 하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기도문 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의 기도문을 보면 절절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헌신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가 참담한 방탕생활을 했기 때 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우리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존 밀턴의 "실낙원"을 말합니다.
이 작품들도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이 암 흑과 같은 인생의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가면서 쓴 책들입니다. 한 사람 은 감옥의 고난을 겪으면서, 또 한 사람은 노년에 시력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의 산물로 만 들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흑인영가를 들어보면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 인들에게 탁월한 음악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노예생활을 하면서 아픔을 당하고 압제를 당하면서 그 영혼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고백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3·절이 일어나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곤혹을 치렀습니까?. 이 날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하면서 겪은 것의 발로입니다. 유순했던 민족성으로 보아 우리 선조들이 어지간하면 봉기를 일으킬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무 압제를 당하니까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많은 생각 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3·1운동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3·1절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 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 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날입니다. 평등, 자유는 하나님의 생 각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입니다. 최남선의 글을 보면
"평등, 자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는 그 말을 기독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 다. 최남선이 살아가던 그 시대는 평등, 자유라는 개념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그 개념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그 말과 개념을 깨우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입니다. 평등이 없고 자유 가 없는 것은 짐승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노예의 세계입니다. 짐승의 세계에는 힘만 있을 뿐 자유가 없습니다. 죄인들의 세계에도 자유가 없습니다. 평등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먼저 자유부터 박탈합니다. 짐승, 노예, 죄인은 이렇게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격 이 없습니다.
인간을 무자비하게 압제하고 자유를 뺏고 억압하면 그 억압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독재자는 그 권세가 하나같이 길지 못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의 말로를 보면 하나 같이 비참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먹은 자를 조롱하지 말라. 소경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모두 부약사상, 즉 약한 자를 억압하거나 어려움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만일 약자를 압제하거나 억압 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입니다.
힘없는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당장은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일군의 품삯을 떼어먹으면 당장은 돈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먼 인생길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몇 배로 심판하십니다. 힘없는 사람 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무시하면 하 나님이 대신 그 억울함을 갚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사상입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짓밟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아주 우습게 여겼습니다. 밟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밟힐 줄 알았습니 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용렬하고 무지해도 밟으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들풀도 밟으면 죽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정신이고 생명력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그렇게 쉽게 꺾이고 죽겠습니까. 그래서 억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는 자 에게는 힘을 더해주십니다. 억압자는 심판하고 당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억압당하고 살던 우리 선조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모두 흥분하니까 삽을 들고 곡괭이를 들 고 작대기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이 깜짝 놀랐습니다. 참 무서운 민족입니다. 우습게 여겼는데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아주 무섭게 나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3·1운동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 3·1절은 알아주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지난 역사를 조용히 되돌아보면 참 신기할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면 3·1운동은 우리 선조들이 일으킨 운동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3.1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 째는"약자가 압제 당하면 대신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다"는 점 입니다.
누가복음 19:40에
"이 사람들이 소리지르지 아니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소리 질러야 할 사람을 소리지르지 못하게 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이 소리지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압 제하고 억압하면 대신 다른 사람들 이 소리질러 돕게 만드십니다. 내가 소리지르지 못할 상황이면 누군가가 대신 소리를 질러 준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소리질렀습니까. 그러면 일본은 쫓아다니며 소리지르지 못하게 감시하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래서 세상 누구도 우리의 아픔을 몰랐습니다. 모두 소리지르다 지쳐서 쓰러지고 낙심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던 스코필드 선교사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리 민족의 참상들을 사 진에 담아 외국통신에 전해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언로가 막히고 길이 막히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이 소리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또 우리들이 소리지를 기운도 없을 때 대신 소리질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 입니다. 그는 세계 만국평화회의에 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 이 우리를 대신해서 소리를 질러 준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세계 여러 나라가 비로소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용기를 얻어서 3·1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약자들이 소리를 질러도 누구 하나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재벌들이 꿈쩍도 안 합니다. 권력자들이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신 소리질러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민 단체들입니다. 약자들이 권력자나 재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호소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까 시민 단체들이 나서서 벌떼같이 소리를 질러줍니다. 그들이 들고일어나니까 재벌들도 권세를 가진 정치가들도 무시 못하고 들어주지 않습니까.
3·1운동은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시민운동입니다. 몇 사람 안 되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는데도 세계에 메아리쳐 되돌아온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3·1절, 8·15 만 되면 괜히 흥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이 두 날이 되면 빼 놓지 않고 설교를 합니다. 그만큼 그 날들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늘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으면 잠시는 이익입니다. 그런 데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당장은 수지 맞는 것 같지만 멀리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더구나 약자, 가난한 자의 돈 을 떼먹으면 그 심판은 더 커집니다.
그리고 힘없는 사람을 무시하면 그 것도 심판 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그 아픔과 참상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약자가 보호되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 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 들에겐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시고 약한 자들에겐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 성경은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군의 삯을 떼먹지 말라, 귀 먹은 자를 무시하지 말라, 소경 앞 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말은 이렇게 약한 자를 억압하고 무시하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81년 전에 일어났던 3·1운동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출처 :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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