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절기설교 모음

부활의 기쁨/고전15장 50절 ~ 55절

미션(cmc) 2011. 10. 24. 17:32

부활의 기쁨

성경본문| 고전15장 50절 ~ 55절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류의 시작과 끝을 바라볼 때 두 가지 사건이 인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음과 둘째 아담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과의 화목사건인 것입니다. 첫째 사건은 죽음과 절망을 가져왔지만 두번째 사건은 생명과 영원한 희망을 가지고 왔

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죄가 영원히 용서받고 청산됨

인간이 있는 곳에는 종교가 있고 종교의 근본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속으로부터 저 북극 에스키모족속들까지 종교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종교의 가르침은 인간은 선한 행위를 쫓아 용서와 의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선을 행해야 우리가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겠습니까?

한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일을 행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을 아느니 율법을 시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율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을 탐하지 말라’고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아∼ 그것은 내가 젊 을때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 청년을 가만히 보시더니 ‘그래도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집에 가서 너 있는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너는 빈손 털고 나를 따라오라. 그러면 하늘에서 네 상이 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고개를 탁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은 굉장히 부자거든요. 도저히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고 빈손 들고 주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주님께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겠나이까?’라며 행위를 물었기에 주님은 끝까지 행위를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행위를 해서 구원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주님이 이 청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착한 행위로 용서와 의와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행을 통해서 죄를 용서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도에 가면 힌두교에서 많은 성자들이 어마어마한 고행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화에 보면 시지프스 신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제우스 신의 진노를 받아서 형벌을 받았는데 그가 어떤 방법으로 죄를 갚는지 아십니까? 큰 바위를 높은 산위에 굴려 올라가서 그 꼭대기에 올려놓으면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닿을 만하면 바위가 도로 굴러 떨어지고 또 열심히 땀을 흘려서 그 바위를 꼭대기에 올리면 올라 갈려고 하자마자 바위는 또 굴러 떨어집니다. 계속해서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오고 또 굴려 올리고 또 굴러 내려옵니다. 끝없는 고행의 연속입니다. 여러분 고행으로써 죄사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 시지프스의 신화와 같습니다. 끝없는 고통의 반복만이 있을 뿐 얼마나 많은 고통이 죄를 용서해 준다는 아무런 보증이 없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나랏돈 1천냥을 포음하면, 다시 말해 개인이 착복하면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일정기간동안 감옥에서 그 빚을 갚지 못하면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랏돈을 포음하고 난 후 감옥에 들어간 지 얼마있지 아니하여 그가 길거리에 걸어다니면 그것은 빚을 갚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1천냥 빚을 갚으면 다시 무죄 백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지시고 죽음의 감옥에 들어가셨으나 3일만에 그 죄를 다 청산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빚을 청산하지 못하면 결코 부활하지 못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값을 청산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부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이 사건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감옥에 들어갔다가 그가 그것 을 다 청산했기 때문에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 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났다는 것은 죄를 다 갚았기 때문에 용서와 의를 우리에게 허락해 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주께서 확실히 인간의 죄를 영원히 갚으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 절로 19절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 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고 예수 믿고 죽은 자도 다 희

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다 청산되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와 의를 얻는 것은 예수님 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를 다 청산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됨

아무리 위대한 일을 이룬 인물이라도 죽음으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전도서 1장 2절로 7 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

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 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죽고 살지 못하면 이 세상 부귀영화 공명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 개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어느 크리스천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이오?’

‘저는 메카에 있는 마호메트의 무덤을 보러 갑니다. 나는 이슬람교 신자입니다. 우리 마호메트는 거기에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은 어디 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는 예루살렘에 갑니다’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 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는데…’ 그래서 크리스천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당신은 마호메트의 무덤에 가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해서 승천해 버렸기 때문에 무덤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이기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습니다. 영원성이 없는 삶의 모든 성취는 허무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그 사람이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버린 바에는 그 성취는 허무합

니다.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서 2장 4절로 13절에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 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자도 우매자도 다 죽고 무덤 속에 들어가면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영원성이 없는 삶의 모든 성취는 종국적으로 허무한 것밖에 없다고 탄식을 한 것입니다

영원성이 없으면 자연적으로 허무주의, 쾌락주의, 방탕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고린

도전서 15장 32절로 34절에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 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 기록되어 있

습니다.

바울은 죽음 저 건너편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땅에 살아서 그리스도를 복음 전하는 것 이 나의 인생의 사명이고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 고 싸워서 맹수를 정복하고 살라고 말합니다. 천재 시인 괴테는 ‘너 아무리 성공의 정상에 서는 순간이라도 죽고 다시 산다는 진리를 알기까지는 처량한 나그네길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라다 하더라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역시 하나의 처량한 인생 나그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 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아느냐 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망을 멸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의 세계, 모든 수고한 것이 종국에는 주님 앞에 헤아림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종결이 된다면 가장 가련한 사람입니다. 더구나 예수 믿고 세상을 등지고 경건하게 산 사람일수록 손해본 사람이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희망이 얼마나 큽니까?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8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명쾌한 해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소망을갖고 그 부활의 능력을 의지해서 산 사람은 이 새 하늘과 새땅과 새 예루살렘에 참여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두려워하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살인자나 행음자들이나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참여하는 둘째 사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3. 희망찬 새 출발이 가능함

부활의 상징인 봄을 보십시오. 황량한 겨울의 들판에 새싹이 돋고 푸른 잎이 나고 꽃이 핍

니다. 어제 우연히 제가 조그만한 수풀동산에 가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메말랐던 나무

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잎사귀들에 생명이 꽉 들어 찼는지요.

부활은 확실히 영광스럽고 좋고 희망찬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

어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매 썩은 냄새가 납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슴속의 희망도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

야 나오라’고 명하니 죽은 지 나흘만에 나사로가 수의를 입은 채 살아서 무덤으로 나왔습니

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슴속에 좌절과 절망의 무덤문도 열려 버리고

희망과 즐거움이 꽃피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종교나 율법이나 윤리, 도덕의 교사가 아닌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려 오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을 종교나 율법이나 윤리나 도덕의 교사로 생각하면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소망과 꿈을 주

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개인속의 희망의 불꽃이 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죽음의 짓눌렸을지라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사망의 세력을 멸하고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개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공허하고 혼돈하며 절망적인 환경에 새삶의 부활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했

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절망해 버린 곳에 부활의 희망이 있습니다. 에스겔 18장 23절

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기록되어 있으며, 에스겔 27

장 4절로 5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

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

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른 뼈 같은 인생이라도

주의 부활의 기운이 들어오면 다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

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끝없는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4. 죽음을 이기신 주님과 함께 부활함

인간 최대의 적은 죽음입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아담과 하와 속에서 죽었고 육신으로 죽습

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또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서 영원히 죽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

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

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고 기

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로 49절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

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말고 내 주먹이나 믿어라’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얼

마 못가서 썩어져 버립니다. 믿을 것이 못돼요.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믿지 못해요. 지

나간 긴 역사를 통해서 어떠한 제국도 무너지지 않는 제국이 없습니다. 어떠한 영웅호걸도

무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의 부활로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심판의

부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이땅에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

다. 지식이 거부하더라도 이성이 거역하더라도 마음에 양심이 우리에게 이 삶 건너편에 심

판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이냐 영원한 수치와 죽음이냐가 이땅

에 사는 동안 결정되는 것입니다.

영혼불멸 같은 가르침은 경험하지 못한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마음에 희망

사항이지요.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단지 그 시점을 늦출 뿐이지 궁극적으로 죽음은 극복

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종교는 영혼의 불멸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영혼불

멸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영생이 있는 것을 압니다. 죽

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고야 죽고 난 다음에 저 세상이 있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습니

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경험된 사건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

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

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

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

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바울선생이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

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오늘도 우리가 성령

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체험도 하게 된 것입니

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오늘날도 우리와 같이 계셔서 지금도 죄사하여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

고 성령을 채워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시고 절망에서 건져 주시고 영원

한 소망으로 채워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국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이땅에 사는 동안 우리 심령

이 부활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 부활의 영광으로 부활의 체험을 할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이 죽었다가 영원히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22절에 “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남녀노유, 빈부귀천할 것 없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당해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지고 부활의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조건이 있다면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조 건도 이룰 수 있을 만한 인간이 못됩니다.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지 인간의 능력으로 변화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어떻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에 관해 한 성도가 저에게 인터넷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33세 젊은 나이로 부활한다 하는데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부활하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지금은 늙었어도 우리는 33세 젊은이로 부활합니다. 제가 지금 67세지만 부활할 때는 33세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도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소명을 받던 그날 사흘간 금식기도를 하는 더운 여름. 제가 오후가 되어서

너무나 땀이 흐르고 덥고 금식해서 기진맥진해서 방에 드러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놀라서 깼는데 집에 불이 났습니다. 온집에 화염이 충천하고 연기

가 공장굴뚝 연기같이 방안에 꽉 들어 찹니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이야!’라고

고함을 치려고 하니까 온몸에 기운이 다 쭉 빠져서 한 마디 말도 안나옵니다. 그냥 입술만

‘불이야, 불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좌절과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산 채로 그냥 타죽는구나. 그런데 어떤 분이 흰옷을 입고 내 앞에 탁 섰는데 왼쪽 손을 가슴에 얹고 오른쪽 손은 하늘을 향했는데 그 머리에 보니까 가시관을 썼어요. 그리고 얼굴에 피를 흘려요. 그래서 제 생각에는 ‘아! 소방대원이 들어오다가 기둥에 부딪쳤구나’라고 너무나 무식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빨리 건져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구름이 사라지고 그 불꽃이 사라지더니만 오직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앞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청년아! 네가 세상의 부귀, 영광, 공명을 찾는구나. 이 세상도 영광도 다 지나가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예비한 곳에서 영원히 살리라. 너는 일어나서 그 나라에 대해서 전파하라’ 그래서 제가 ‘주여!’하자 성령 세례를 받아서 평생에 처음으로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막 방언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구요. 그것이 제가 세상을 다 버리고 예수께로 나오고 주의 종이 된 동기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찬란한 그리스도, 우리도 장차 그 모습 그대로 변화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기 때문에 이제 사망은 구겨진 휴지쪽지와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정원에 가서 이리저리 나무 속을 보다가 새집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파랗고 예쁜 새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만져보고 너무 이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 음에는 잊어버렸습니다. 한 두달이 지나고 난 다음에 자기 여동생에게 ‘내가 정원에 가니 까 새집에 너무나 예쁜 파란 새알이 있더라. 우리 구경하러 가자’. 그래서 여동생 손을 잡고 서 가보니 거기에는 깨진 알껍질만 있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여동생 하는 말이 ‘오빠∼ 다 깨져 버렸어’라고 말하자 오빠가 ‘얘∼ 깨진 것이 아니야. 알맹이는 살아서 날라가 버렸 어. 껍질만 남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알맹이는 날라가고 껍질만 남았습니다. 껍질을 들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껍질을 가지고 절망할 것이지만 믿는 사람은 껍질을 보고 알맹이는 영원히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고향에 들어갈 것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조용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