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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3대 목표/(갈3장1-9)

미션(cmc) 2011. 10. 26. 08:56

개혁의 3대 목표(갈3장1-9)

<(10월31일) 종교개혁기념주일설교 >

성경본문/갈라디아 3:1-9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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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서양의 신문명이 들어올 때 일입니다. 어느 대감이 서양 선교사로부터 비누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때가 잘 씻기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찾아온 귀한 손님들에게 비누를 자랑하고는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바로 그 때 손님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있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그리스도인으로 독립협회를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입니다. 그리고 ‘청년’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했고, YMCA의 기틀을 잡는데 산파역할을 하셨던 분입니다. 이분은 유머 감각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비누를 받아들고서는 갑자기 칼로 비누를 깎아서 먹는 것입니다. 대감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사람아, 그건 때를 씻는 물건이지 먹는 물건이 아닐세” 그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알다 마다요. 여러분은 이것으로 얼굴의 때만 씻지만 저는 뱃속의 때를 씻어 볼까 해서 먹었습니다.” 그 때 대감과 손님들이 부끄러워 모두 낯을 붉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개혁피로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경제개혁, 제도개혁, 교회개혁 등등-- 너도나도 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개혁되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개혁의 소리가 높아 갈수록 스트레스만 점점 쌓여갑니다.

왜 그럴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겉만 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개혁하겠다고 제도를 바꾸고, 법을 새롭게 하고, 관행을 뜯어고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바뀐 제도, 법, 관행에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새로운 제도, 법, 관행을 또 다시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속사람을 바꾸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삶의 태도가 바뀌고, 그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을 향해 개혁을 외치거나,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에 대해 비판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개혁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개혁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국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주도하고 있는 이안 머레이(Ian Murray) 목사는 “부흥과 부흥주의”(Revival & Revivalism)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의 교회의 문제는 교회 안에 성도들과 세속적인 사람들이 섞여있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교회 안에 진정한 성도들 보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더 많아지다 보니 교회는 이 세속적인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거룩성이 약화되고,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 사이의 차이가 점점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머레이 목사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 겉 사람만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드리고, 교회 봉사에 참여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속 사람이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직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서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의 노예로 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지식이나 경험이나 힘을 의지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태도와 세상에서의 태도가 다릅니다. 세상 속에서 쓰는 가면이 있고, 교회 올 때 쓰는 가면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결국 가면 무도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난 한주간 동안 3일은 G12 국제 셀 목회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나머지 이틀은 기도원에 가서 내년도 목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저는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3일 동안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내 안에 벗겨지지 않은 가면들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나의 모습과 성도님들이 보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다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할 때 너무나 죄송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쓴 뿌리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내 힘과 내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고 발버둥치는 미련한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 있는 모든 가면을 벗겨주십시오. 있는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드리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보는 모습과 제가 보는 모습과 성도들이 보는 모습이 일치되게 해주십시오.”

1만 이천명의 싱가폴 최대의 교회를 이끌고 있는 로렌스 콩 목사님의 도전적인 말씀에 많은 충격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부둥켜안고 기도하는 순간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 가족 여러분!

진정한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가면을 벗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 사회에서의 모습이 일치하면 세상은 분명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놀라운 개혁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성지교회의 개혁도 여기서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조직을 바꾸고, 프로그램을 새롭게 하고, 교회 시설을 리모델링 하는 것으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때 교회의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487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황제보다 교황의 권위가 높았습니다. 교황이 임명하는 사제는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 결과 돈을 주고 성직을 팔고 사는 성직매매가 일어났습니다.

루터가 반박문을 발표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면죄부의 판매였습니다. 면죄부는 원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죄를 용서 받기 위한 방법으로 죄를 사해주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정수입을 위한 방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던 중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연옥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에 해당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서 대기하게 되는데 공덕이 모자란 사람들은 후손들이 공덕을 많이 쌓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테첼이라는 사제가 파송을 받아 면죄부 판매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헌금함에 동전을 넣는 순간 연옥에서 지옥갈 사람들이 ‘땡그랑’ 소리와 함께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루터는 이런 부패상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이 반박문에 나타난 종교개혁의 3대 기본 원리와 목표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과 교회, 이 나라의 개혁은 바로 종교개혁의 3대 목표를 회복하면 가능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진정한 3대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오직 은혜로(sola gratia)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어리석도다(Oh foolish Galatians!)”라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넘어가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절에 이렇게 묻습니다.

ꡒ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ꡓ 너희들이 은혜받고 성령받은 것이 율법을 잘 지켜서 그 자격 때문에 된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은혜 때문이냐를 묻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안타깝게도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속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 천주교는 자꾸 무엇인가를 덧붙이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우리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차이를 '오직'과 '그러나'로 구분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로마 천주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무엇인가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공덕 사상을 첨가시킵니다.

실제로 로마 천주교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해야하고, 고해성사도 해야 하고, 7성례에 참여도 해야 합니다. 특히 고해성사는 죄에 따라 신부들이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무엇인가 하도록 명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몇 번 쓰라든지, 주기도문을 몇 번 암송하라든지, 고아원에 가서 청소를 한다든지...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롬 3:23-4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분명히 '값없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대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고, 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신 감사의 응답입니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공덕을 쌓아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봉사도 하고, 덕도 세우고, 공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태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기에 나를 드러낼 수 없습니다. 오직 겸손 또 겸손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은 합니다. 그런데 삶 속에서는 그 은혜를 망각하며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이 착한 늙은 부부가 오갈 데 젊은 새댁을 데려다가 딸처럼 키웠습니다. 그런데 행실이 좋지 못해 이웃에 사는 젊은이와 눈이 맞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안 노부부는 나무라지도 않고 “조금도 걱정 말아라. 애를 나면 우리가 양자로 삼을 테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양자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자 또 다시 새댁의 배가 불러왔습니다. 이때도 친절한 노부부는 “어린애가 하나뿐이면 쓸쓸해 할 꺼야. 동생이 생기면 더 좋지” 하면서 두 번째 아이도 양자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배가 불렀습니다.

마음 좋은 노부부는 이때도 그다지 화를 내지 않고 출생한 아이를 또 다시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은(大恩)을 입은 젊은 새댁은 산후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노부부의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노부부가 도대체 어떤 불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새댁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이렇게 아이 많은 집에서 식모 살이 할 수는 없잖아요!”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바로 새댁과 같은 모습은 아닌지요? 용서받을 수 없는 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삼으시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하시고, 영원한 기업을 얻을 상속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새댁처럼 세상으로 달려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식모살이 하는 것처럼 힘들어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은 은혜의 결과입니다. 구원도 은혜요, 우리가 입고, 먹고, 자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회복하면 삶에 감사가 넘칩니다. 감사가 넘치면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 속에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은혜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의 출발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진행됩니다. 믿음이 없는 신앙생활은 물 없는 오아시스입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떠나 행함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누구도 자기 행위로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루터는 어느날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벼락을 맞았습니다. 친구는 죽고 자신을 살았습니다. 그때부터 루터의 마음 속에는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을 해결해보려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루터는 깊은 죄의식에 몸부림쳤습니다. 틈만나면 대주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대주교가 루터만 보면 피해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성당의 계단을 수없이 무릎으로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죄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갈라디아서 3장 11절 말씀이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모든 죄는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려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모든 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공적을 쌓는다고 죄사함을 받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나갔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케 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개혁은 내 안에 있는 믿음 없이 행하는 모든 것들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유혹과 핍박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잠깐은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맡길 수 있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1서5:4) 선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해 갈 때 오스트리아의 한 국경 도시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됐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항복해서 피해를 예방할 것인가 아니면 결사 항전할 것인가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존경받는 교회의 사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ꡒ여러분 우리 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길 수 없고 이 위기를 넘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ꡓ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종을 힘차게 치고 모든 교인들을 모아서 힘차게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 외곽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 군대가 교회의 우렁찬 종소리와 시의 뜻밖의 움직임을 보고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지원군이 도착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괜한 희생을 더 치르지 말고 다른 공격루트를 찾기로 하고 작전을 변경하고 이 펠드리히 시 공격을 취소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나가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계산으로 내 경험으로 이기려면 힘듭니다. 주님께 다 맡기십시오.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내가 붙잡고 몸부림치면 내가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대하면서 바라보십시오. 믿음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날마다 펼쳐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개혁의 진행인 줄로 믿습니다.

 

셋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회복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말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부패한 것은 말씀의 상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권위보다 교황의 말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의적으로 성경을 가감했습니다. 구약과 신약 시대에 중간기 문학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12권을 외경으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7권을 자신들의 성경에 추가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의 성경은 73권입니다. 이것을 1546년 4월 8일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교 성경으로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카톨릭교회에서 해왔던 것처럼, 모두 다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드리고 읽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들이 주장하는 연옥이나 선행을 통한 구원은 모두 외경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개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루터는 곧 바로 독일어로 성경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등장으로 인해 급속도로 배포되었습니다. 말씀으로의 회복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가 태동하게 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자꾸 섞어 놓습니다. 말씀이 말씀으로 살아날 때 영적 회복은 일어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나를 던지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 칠 때 진정한 개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5세가 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완곡하게 말렸습니다.

웰매스의 재판장으로 들어서며 루터는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ꡒ웰매스의 지붕을 덮은 수만장의 기왓장이 악마로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주장을 꺾으라 말하지 않는 이상, 성경이 네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는 당당히 내 목숨과 함께 이 재판장에 들어서리라.ꡓ

그리고 자신의 뜻을 철회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생명을 걸고 말씀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던 루터의 결단이 독일을 살렸습니다. 유럽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영국을 살리고 미국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개혁의 3대정신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의 결단과 회복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모두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 개종시켜도 만족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로 다가오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처음부터 이렇게 빌었던들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으련만”

 

그렇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자신을 회복하면 모든 것이 개혁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드림이 어떨까요? “하나님! 나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에 내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