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매이지 않는 자유인/(골 4: 14-18)

미션(cmc) 2012. 4. 23. 10:54

매이지 않는 자유인

(골 4: 14-18)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골 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골 4: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골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깨우침 받으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사랑한다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자유 할까요? 혹시 세계 최강국이 미국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도 국민의 투표로 뽑혀지는 것이며, 어떤 정책을 세울때 상하 양원의 인준을 받아야만 합니다. 혼자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누구의 지시를 받으셨습니까?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시고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으신 피조물을 창세 이래로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보존하시는 일도 누구의 지시를 받지 않으시고 단독적으로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가장 자유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 유일하게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의 형상’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적인 형상이 아닌 영적인 형상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으로 아무리 남부럽지 않은 부와 권세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만일 영적인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는 까닭은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자유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그 자유를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선하고 정직하게 살며 이웃을 거짓이 없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그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가장 부자유한 존재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오래 전부터 자유를 주시겟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기서 ‘자유’라는 말(r/rD)은 ‘거침이 없이 흐른다’는 뜻으로 마치 깊은 계곡을 지나 넓은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유롭게 하셨으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불의가 폐수처럼 흘러넘치는 세상을 진리가 하수처럼 흘러넘치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시고 인간들에게 가장 절실한 자유를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기서 ‘자유롭게’라는 말(ejleuqerovw)은 ‘육체적인 속박만이 아니라 영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누려야 할 참 자유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 부활을 얻게 된 것만이 다가 아니라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누리고 즐겨야 할 참 자유는 어떤 자유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우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일 아침마다 모두 9회에 걸쳐 골로새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이 마지막 10회를 맞이했습니다.
골로새서를 기록한 이는 사도 바울이고, 기록 장소가 로마의 감옥이었다면 얼마나 부자유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반면에 이 편지를 받는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에서 가정과 직장과 직업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고 있다면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골 4: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매인 것’이라는 말(desmo;")은 ‘올가미, 착고, 사슬, 감금, 투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가장 부자유한 사도 바울이 가장 자유로운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신앙의 서신으로 결론에 해당하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매어있는 사도 바울은 자유로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무슨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자유가 없는 로마 감옥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서만이 아니라 다른 성경들도 기록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세우지도 아니한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옥중 서신을 기록한 것은 바울이 얼마나 영적인 거장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1) 바울은 속 좁은 우리들처럼 네 교회 내 교회를 구분하지 않고,
2) 누가 세웠든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3)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우주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성경 본문은 바울이 얼마나 큰 그릇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 일이삼차 선교 여행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러 교회들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거센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결신자를 얻고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서 반복적인 활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알게 되었고, 함께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도 복음 전하는 일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고, 대화하고, 사귀고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거두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아무리 좋은 관계요, 좋은 일이요, 심지어 부부라고 할지라도 둘 이상이 되면 필연적인 것은 피차에 생겨지는 ‘오해, 미움, 갈등, 논쟁, 충돌, 분열’ 로 인한 마음의 상처라는 부산물입니다.
만일 그것이 정화가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게 되면 부부와 친구와 이웃과 교우 간에 관계를 단절시키고 대립하게 하는 불행의 암세포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마음에는 진정한 평화와 자유가 없게 되고 마귀는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인 사랑을 빼앗아가 버림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 옥중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영적인 거인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얼마든지 육체적으로 자유하고 부귀권세를 누리고 있었을 텐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개종을 한 후부터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아는 것처럼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결단력이 대단한 사람으로 한번 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 설령 죽어도 그것을 해내고야 마는 인물임을 밀레도에서 바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바울이었습니다.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물론 바울이 그같이 결단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주님이 명령하신 땅 끝까지 전파하려는 사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죄수들과 더불어 로마로 가는 호송선을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파선을 당하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천신만고 끝에 로마에 당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감옥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언제 자유와 해방을 얻을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은 처지라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바울을 감옥에 보내시지는 않을 것이고, 설령 감옥이라고 할지라도 수일 내에 풀려 나오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까지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엄청난 수고를 하고 화려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고,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는 바울이 그렇게 소원한 로마 교회 성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가르침과 위로를 받고, 로마 고위층에게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여 로마를 복음화 시키는 일을 위해서라고 바울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셔야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기대가 흔히 오늘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께 거는 기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기대를 걸고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기도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우리의 기대와 달리 차디찬 로마 감옥에서 무려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우울해져야만 정상이 아닙니까?
그러나 로마 감옥은 바울의 육체만을 가두었을 뿐이지 악한 마귀는 바울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감옥에 가두지는 못했습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정말 걱정과 염려의 대상은 바울 자신이었으나 그는 자신보다 성도들을 더 많이 염려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감옥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

1) 진정한 자유자는 남을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자기를 염려하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에 보냈습니다.
(골 4: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골 4: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위로’라는 말()parakalevw은 ‘초청하다, 격려하다, 훈계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입니다.
로마 감옥은 바울의 육신은 가두었지만, 골로새 교회 성도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넓은 마음은 가두거나 묶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몸은 비록 로마 감옥에서 자유가 없었지만 바울의 마음은 창공을 높이 나는 새처럼 사랑의 날개를 펴서 골로새 교회를 향해 훨훨 나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 화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의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한센 씨 병 환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추우니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 하였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다시 저녁을 먹도록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 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시스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프란시스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 주었다. 이튿날 아침 프란시스가 일어나 보니그 환자는 온데 간 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가 간 흔적조차 없었다.
프란시스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기도가 바로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 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하나됨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나 형제나 이웃이나 교우 간에 위로와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 산다고 할지라도 몸은 자유한 것 같으나 실상 그 마음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3. 진정한 자유자는 이웃을 화해시키는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주인에게 죄를 범한 오네시모를 개종시켜 주인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에 돌려보내어 화해하게 하는 일을 로마 감옥에서 하였습니다.
(골 4: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여기서 오네시모는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친 후에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전해 받고 회개항 새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몬 1: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몬 1: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사도 바울은 그같은 오네시모를 골로새 교회 소개할 때 신실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보증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오네시모를 원주인인 빌레몬과 그가 다니게 될 골로새 교회에 돌려보내면서 용서와 화해를 주선하였습니다.
(골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핵심 주제를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용서가 동반되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움이라는 감옥에 가두고 있는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용서할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매였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화해하의 주도권을 가지고 이웃과 이웃을 싸움이 아니라 화해를 붙이는 참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자유자는 미워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성도와 성도, 교회와 교회간에 화해를 주도하는 피스메이커가 된 것은 먼저 그 자신이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바울이 되게 한 일에 누구보다 공로가 많았던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지만 무슨 사연인지 바울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행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만일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이라면 마가 요한만이 아니라 바울의 일행도 다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서만 빠져 나갈 때 공동체를 와해하고 동역자간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문에 용서를 구하는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갈라서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바울은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편협한 마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에게 승복하지 않은 것은 마가 요한이 그만큼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바나와 바울과의 사이가 불편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난 후 오늘 성경을 보니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고 한 것은 이미 마가를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마가 요한만이 아닙니다. 데마라는 보고 싶지 않은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데마였습니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서 ‘버리고’라는 말(ejgkataleivpw)은 ‘뒤에 남겨 두다, 포기하다’ 라는 뜻으로 바울이 누구에겐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데도 물구하고 데마는 자기 혼자서만이 아니라 다른 일행인 그레스게, 디도까지 바울을 버리고 떠나는데 주동자처럼 생각 될 정도로 바울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바울의 처지라면 과연 용서가 가능할 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 과거에 그와 같은 사랑의 배신자가 현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고 오늘 성경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누가와 데마를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를 하면서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골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4) 진정한 자유인은 신앙 공동체를 화합시키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동안 소홀히 하였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가면서 문안을 하는가 하면, 교회와 교회들끼리 결연을 주선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골 4: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는 오늘날로 말하면 이단과 핍박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교회와 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성도와 성도들끼리 예수님의 사랑으로 형제애를 가지고 교회를 잘 섬기기를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아름다운 소통과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통과 연합이라는 말은 본래 협주곡을 의미하는 ‘concerto'라는 단어로 그 어원은 ’겨루다, 다투다, 경쟁하다‘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로 다른 것과 합치다, 일치하다’는 뜻으로 정착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세상에 조화는 처음서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겨루고 다투고 경쟁하다가도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춰가면서 조율을 하다가 보니 정반대의 뜻으로 정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콘서트를 하기 전에 시끄러운 조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도 성도와 성도, 교회와 교회간에 화합과 네트워킹을 주선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밀려 올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에 대한 최선의 준비와 대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와 같은 진정한 자유의 메시자를 담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하여 서신들을 각 교회가 윤독(輪讀)하고 서로 문안하며 하가 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골 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이것을 보면, 사도 서신들이 개교회에 국한된 사서(私書)가 아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위하여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시고 낭독하여 한 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 주신 정경 문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그의 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들과 성도들이 사랑으로 서로 결속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어찌 바울이 감옥에 갇힌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자유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두 손이 쇠사슬에 묶이고 차디찬 감방에 던져진 몸이라고 할지라도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자는

1) 진정한 자유인은 다른 사람에게 위로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위로해주는 여유로운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비록 바울처럼 육신이 부자유하다고 할지라도 위로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고 하셨습니 위로 받기를 요구하는 자보다 더 자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진정한 자유인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야할 길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구하여 그 일에 정진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을 지라도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고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간에 화목을 도모할 사람을 보내어 일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올지라도 거기서 사람을 용서하고 세우시고 일을 맡기는 사람이라면 참 자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