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복을 주신 가정
(삼하 6:8-11)
(삼하 6: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물론 그 답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신 후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명령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 어느 누구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고, 또 어느 누구는 불행한 삶을 사는 것 같은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도 인간처럼 사람을 차별하여 어느 누구는 불행하게 어느 누구는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 공평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 사회가 갈수록 불공평해지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똑같이 하나님은 믿고 똑같이 교회를 다니는데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양극화처럼 보이는 불공평한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아니라 짐승들에게 (창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축복하셨지만, 인간에게는 거기에다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적인 명령을 추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길을 닦을 수 있는 대지를 만들어 주셨지만 그 땅에 어떻게 집을 짓는가에 따라 겨울을 어떤 사람은 춥게, 어떤 사람은 따뜻하게 보내고, 그 땅에 무엇을 심어 어떻게 농사를 짓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은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흉년을 만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그 땅에 고불고불한 비탈길과 가시밭길을 만들어 힘들게 오고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대로를 만들어 소통이 잘 되게 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시간과 기회라는 복을 받아야만 그곳에 씨뿌리고 집을 짓고 길을 낼 수 있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가꾸면서 사는가에 따라 개개인의 행복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재능이라는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행복이라는 열매가 어떤 사람은 많이, 어떤 사람은 적게 얻어지는 개인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는 육신적인 행복에만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교회를 다니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정반대로 불신자처럼 입만 열면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적인 기회와 달란트라는 복을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좌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법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종족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심을 받은 유일한 민족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사백년 간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시고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인도하여 장차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 야 할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주시면서 그대로 순종하면 천대까지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삼사 대까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이라는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그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는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이 좌우되어 졌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는 바로 그와 같은 기준점이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는 궤짝으로 성막과 성전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사십년 여정은 그 법궤를 모신 성막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을 상징하는 영광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주야로 호위하시면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며 따라간 결과가 광야 사십년의 여정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법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앞장서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 요단 강물이 갈라져서 육지처럼 길을 만들어 육십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수 3: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법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 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 6: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그러나 늘 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건국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주변나라들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민족이 불레셋 족속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아의 법궤를 앞세워 전투를 벌렸다가 많은 전사자와 더불어 여호아의 법궤를 적진에 빼앗기자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의 신전에 다곤 신상과 더불어 안치를 할 정도로 여호아의 법궤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삼상 5)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왜 동일한 여호아의 법궤가 어느 때는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게도 하였는데, 어느 때는 무기력하게도 무참하게 패배를 하여 적진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법궤 자체가 적을 이기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의 법궤 관리 능력의 부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리어 패배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믿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상을 믿는 것은 형상이나 형식이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형상을 신격화하고 그 형식을 반복하는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형상을 숭배하는 것을 죄악시하시며, 형식이 아니라 진심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열심을 낸다고 할지라도 그 중심이 바르지 못하게 되면 그로 인해 복이 아니라 도리어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일한 여호와 법궤를 앞세우고 나아갈 때 어느 때는 강이 육지처럼 갈라지고 난공불락의 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어느 때는 우상을 숭배하는 적들에게 패배하고 심지어 제사장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법궤까지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시는 것은 그 법궤를 메고가는 사람들의 본심의 차이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일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와 같은 실 예를 우리에게 또 한번 보여주는 말씀으로 우리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평소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돌이켜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앞으로 더하여 주실 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다윗 왕의 소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여호와의 법궤를 더 의지하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난 후에 여호와의 법궤는 이방 사람들의 손에 이리 저리 옮겨지면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호와의 법궤가 벧세메스 사람들의 손에 넘겨졌을 때 호기심에 찬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그 법궤를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블레세 사람들이 법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에게로 옮기라는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법궤를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의 아들에게 법궤를 지키게 한지 이십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여호와의 법궤가 성막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삶을 살면서 점차 그들의 마음에 여호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상 7)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여기서 ‘사모하니라’는 말(hh;n)은 '울부짖다, 슬퍼하다, 애도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호아의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사무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사울 왕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다윗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다윗 왕국이 강성해지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 온 블레셋을 밀어내게 하셨습니다.
(삼하 5: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정예 부태 삼만 명을 이끌고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이전하는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여호아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지 자그만 치 칠십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일이었습니다.
다윗의 본래 의도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여호아의 법궤를 메어 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법궤를 지켜 오던 아바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준비하여 여호아의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옮기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수레의 실린 법궤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소들이 뛰는 바람에 수레가 기우뚱하면서 하나님의 법궤가 땅에 떨어지게 되자 웃사가 급한 마음에 그 법궤를 맨손으로 잡는 순간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다윗과 그 일행은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시한 채로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좇아 여호와의 법궤를 짐승이 끄는 수레로 운반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입니다.
(출 25: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출 25: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
그러자 다윗이 그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그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게 하였습니다.
(삼하 6: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기서 ‘즐겨하지 아니하고’라는 말(hb;a)은 ‘어떤 일이나 요청받은 일을 기꺼이 한다는 마음의 자세’ 를 의미하는 말로 여호와의 법궤를 옮기려 했던 다윗의 열심히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웃사의 참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법궤를 옮겨가려고 하겠습니까? 그 때부터 여호와의 법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3. 오벧에돔의 가정
다윗이 웃사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 포기한 여호와의 법궤는 다윗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혹시 아비나답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법궤를 하필이면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이송하게 하였을 때 오벧에돔의 가족들에게도 법궤로 말미암아 혹시나 화를 당하게 되지 아니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비나답의 가정은 무려 칠십여년의 세월을 법궤를 모시고 있었는데도 결과가 비극으로 끝이 났지만 오벧에돔의 가정은 석달에 불과하였는도 가시적으로 느껴질 만큼 하나님께서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삼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유명한 성경 주석가 매튜헨리는 이 부분을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동일한 여호아의 법궤인데 기간적으로 볼 때 아비나답의 가정은 이십년이고 오벧에돔의 가정은 석 달이었다면 아비나답의 가정이 복을 더 많이 받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오벧에돔의 가정에 복을 주셨을까요?
물론 여호아 하나님의 내려주시는 복은 인간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임의대로 하시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럴 만한 사연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성경 본문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아비나답의 가정은 여호와의 법궤를 어떤 자세로 모셨나요?
(삼상 7: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여기서 ‘구별하여’라는 말(vd'q);은 거룩하게 성별을 하였다는 뜻이고, ‘궤를 지키게’라는 말(rm'v)은 ‘보존하다, 감시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의 가정은 어떻게 여호와의 법궤를 모셨다고 성경에 기록하였습니까?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삼하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여기서 ‘석달을 있었는데’라는 말은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으로 마치 가족들이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나답의 가정은 법궤를 지키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가정이었다면, 오벧에돔의 가정은 마치 사람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함께 거주하는 것과 같은 자세로 법궤를 모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는 말에 ‘복’이라는 말()은 구약 성겨에서 ‘성공, 번영, 생산, 장수’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 졌지만 원어의 의미는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복을 주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의 가정은 아비나답처럼 여호아의 법궤를 성물로만 여기고 지키는데 급급하였던 것과는 달리 법궤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는 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또한 만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받아야 할 복이 어떤 것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할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여호와의 법궤를 운반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이동할 때처럼 새 수레를 만들어 소들이 끌게 하였지만 오벧에돔의 가정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방식대로 법궤에 달려 있는 양편 고리에 채를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것부터 달랐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운반하는 것이 더 정성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열심도 중요하지만 그 열심히 성경을 추월하거나 성경을 빗나가서는 하나님의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오벧에돔은 타의에 의해 여호와의 법궤를 맡게 되었고 짧은 기간에 다른 사람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소문은 그 부락이나 지역 뿐 아니라 전국에 삽시간에 알려져서 다윗의 귀에 까지 전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에게 변함없는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오벧에돔의 가정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얼마나 받았다고 성경이 증어하고 있는지 찾아 보고자 합니다.
첫째,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대상 26:8)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이니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둘째, 자손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대상 26:6) 그의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대상 26:9) 또 므셀레먀의 아들과 형제 열여덟 명은 능력이 있는 자라“.
여기서 ‘다스리는’ 이라는 말과 ‘큰 용사’라는 말은 ‘지배자, 통치자, 강력한 용사’ 라는 뜻이고, ‘능력이 있는’이라는 말은 ‘힘, 능력, 재산, 군대’라는 뜻으로 집안이 두루 형통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대상 26:11) 둘째는 힐기야요 셋째는 드발리야요 넷째는 스가랴이니 호사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열세 명이더라 (대상 26:12) 이상은 다 문지기의 반장으로서 그 형제처럼 직임을 얻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이라
오벧에돔의 자손은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서 봉사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남방의 문을 담당했습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문은 다윗과 솔로몬의 왕궁이 있는 쪽으로 왕이 사용하는 문입니다. 이 특별한 위치를 얻게 된 것은 제비뽑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잠 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법궤를 잘 모시고 지킨 결과, 즉 작은 일에 충성한 결과 하나님은 오벧에돔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도 복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나 한 사람이 후손들에게 덕을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벧에돔을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정리하여보겠습니다.
1) 온 가족이 하나님의 법대로 섬겨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훌륭한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성경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고 그렇게 원하시는 축복을 거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신 계명을 잘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어렵고 힘들지만, 이제 부터 하나 하나 그것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복을 다 받아 누립시다. 예언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삶 속에서 지켜나갑시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13:13)
2) 오벳에돔의 가정처럼 어려운 일도 기꺼이 순종해야겠습니다.
맡겨지는 주님의 일을 거부하지 맙시다"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27:10)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3) 남이 하기 싫어하는 하찮은 일도 충성해야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더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우리는 항상 큰 일을 찾으면서 현재의 작은 일은 소홀히 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닙니까? 현재 내게 맡겨주신 작은 일에 충성하면서 더 큰 일을 맡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벧에돔이 석달 동안 하나님의 법궤를 잘 모시며 작은 일에 충성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큰 일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13절)
오는 주일은 두 번째로 교회 안에서 주일학생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전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한 가족 예배 두 번째 주일이며, 아울러 아직도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있는 가족들을 교회로 초청하는 한 가족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온 가족에 다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는 것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몇 개의 나라가 있으며,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FIFA 에 등록되어 있는 나라가 약 210개국이 된다고 합니다. 또 전 세계 인구는 미국 센서스 본부의 실시간 통계로는 2012년 4월 21일 11:05 분 현재 7,008,430,774 명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숫자이지만 처음서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산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아라는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가정은 몸으로 비유하면 세포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이웃과 민족과 세계를 행복하게 하는 오벧에돔과 같은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점점 가정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세상도 점차 살아가기가 힘들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가정이 복음화되고 오벧에돔 가정처럼 주님을 섬김으로 자손대대로 여호아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가족 축제를 한 주간 앞두고 우리 가정이 오벧에돔의 가정처럼 복을 받기 위해 먼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오벧에돔의 가족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복을 받는 가문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더불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불신 가족을 초청해야 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들도 오늘 성경의 오벧에돔의 가정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섬김으로 자손만대 영육 간에 풍성한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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