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믿음의 부모, 믿음의 자녀 /(히 11:23-26)

미션(cmc) 2012. 5. 7. 07:08

믿음의 부모, 믿음의 자녀
(히 11:23-26)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누구나 자식을 낳아 기르는 부모가 되면 사랑하는 자녀들을 현재 잘 먹이고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죽고 난 후 장차 미래에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한 것입니다.
오늘의 가정이나 국가나 교회의 미래는 어른들이 아니라 어린이들에 의해 오늘보다 더 좋게 아니면, 더 나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무엇을 먹이고 입히고, 얼마나 많은 돈을 물려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가르치고 본 보이는가에 따라 오늘의 가정과 국가와 교회의 미래가 좌우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이 오로지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고, 좋은 학교를 보내는 것에만 얽매어 정작 그들의 인격이나 정신이나 가치관이나 신앙 교육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부모들의 수고로 인해 오늘의 청소년들이 옛날 우리 부모들이 자랄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호강하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청소년들을 매일 학교에 보내지만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안심이 되지 않고,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어떤 친구와 어울려서 무슨 생각을 하며 놀고 있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오늘의 청소년들이 옛날 가난하게 자랐던 우리들보다 더 행복하게 자라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앙을 가진 부모들과 주일학교를 둔 교회는 어떻게 오늘의 청소년들이 내일의 주인이 되어 보다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역이 되게 하기 위해 무엇을 가르치고 본보여야 하는지를 오늘 성경 말씀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모세의 출생 배경
오늘 성경 말씀의 배경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흉년을 만나 애굽에서 국무총리를 하는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으로 이주하여 사백년 동안 살던 때의 일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를 지내던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덕에 기름진 옥토가 있는 고센 땅에서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은 후 세월이 흘러가면서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 애굽에 끼친 공로를 까맣게 잊은 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애굽 왕 바로가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화되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더욱 번성해짐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더욱 경계심을 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협오하게 되었습니다.
(출 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여기서 ‘근심하여’라는 말($Wq)은 ‘'몹시 싫어하다, 강한 혐오감을 가지다, 소름 끼칠 정도로 싫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혹하게 일을 시켰을 뿐 아니라 만일 히브리여인이 아들을 낳게 되면 조산원인 산파에게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일 산파들이 애굽 왕 바로의 말대로 하였다면 머지않아 이스라엘 민족은 멸족을 당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가 태어나실 길을 막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가장 즐기는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타락한 인간들을 자기 수하에 두기 위해 구세주가 탄생하는 것을 막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가정에 태어나는 아들들을 죽이려고 하는 바로 왕이나,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왕이나 지금도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이슬람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에는 사단의 강력한 세력이 사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믿음의 청소년들을 그냥 내버려두고만 있을까요? 육신을 온갖 범죄의 소굴로 몰아가고 그 영혼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요즘 사회의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촌대학생 살해 사건으로 들어난 오컬트라고 하는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주문을 가르치는 사령 까페에 수많은 청소년들이 가입하고 있으며 거기에 빠진 청소년이 그 사실을 알고 대학생을 사십군데나 칼로 난자하여 살해하고도 그 이튿날 학교에 가서 태연히 시험을 치고 찜질방에 가 있는 것을 경찰이 알고 검거했다는 끔찍한 뉴스에 온 국민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청소년들을 우리 신앙의 부모들은 어떻게 가르쳐 미래에 용기백배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게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의 모세의 부모를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다른 때 같았으면 아들이 태어났다고 다 함께 기뻐했을 것인데 오히려 모세가 아들이었기 때문에 바로 왕의 말대로 죽임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태어나 죽지 않게 된 것이 부모의 믿음 때문만이 출애굽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출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여기서 ‘두려워하여’라는 말(arey)은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라는 뜻으로 산파들의 신앙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바로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왕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은 죄로 그 산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한 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애굽 왕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산파들의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얼마전 정말 의식이 없는 어떤 어른이 돈에 눈이 멀어 한건당 이천원씩을 받고 청소년들에게 담배와 술심부름을 하다가 잡혔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신의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민족의 미래를 내어다 보지 못하는 한심한 어른들의 모습입니다.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청소년들을 잘 키워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는 것은 가정의 부모나 학교의 선생님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담배와 술을 파는 구멍가게의 주인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의 건전한 의식과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모세 부모의 믿음
바로 왕이 산파에게 히브리여인들이 사내아이면 태어나자마자 죽여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산파들이 살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다가 아닙니다.
만일 그 아이의 부모가 그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않는다면 온 가족은 물론 나중에는 산파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애굽의 산파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부모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가정이 바로 모세의 부모였습니다.
(출 2: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출 2: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여기서 ‘잘생긴’이라는 말(b/f)은 단순히 외모만이 아니라 좋은, 선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여기서 ‘아름다운지라’라는 말(ajstei'o")은 ‘품위가 있는, 잘생긴, 아름다운, 받을실 만한,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으로 하나님도 그렇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아기 모세가 잘 생겼다는 것은 단순히 부모의 눈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아이였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물론 세상에 어느 부모를 막론하고 자기 몸에서 태어난 아이를 아름답지 않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에서 모세의 부모가 모세가 났을 때에 아름다운 아이임을 본 것을 가리켜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낳았을 때 모세를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특별한 하나님의 뜻을 품고 태어난 아이었음을 깨달은 것이 바로 모세의 부모들의 믿음이었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신약신학자 Joachim Jeremias 는 말하기를 ‘믿음이란 약속을 하신 하나님과 약속을 받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끝까지 믿고 약속된 결말이 이루어지기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만 유지되어지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단념되지 않는 신뢰이며, 낙심되지 않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신뢰를 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에게 그와 같은 믿음은 모세를 몰래 감춘지가 석 달이 지나 울음소리가 커져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에 띄워 모세가 어떻게 되는가를 멀리서 지켜 보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출 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 2:4)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그 결과 바로의 딸 공주가 나일 강에 목욕하러 갔다가 마침 갈대 상자에 담겨 떠내려 오는 모세를 건져 그의 아들로 삼고 모세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그것을 지며 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가 겁 없이 다가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라고 물었던 것은 바로 믿음에서 나온 용기인 것입니다.
바로의 딸 공주는 그 말을 듣고 흔쾌히 대답하기를 ‘가라’고 하였을 때 유모가 아니라 모세의 생모를 데려다가 오히려 삯을 받으면서 모세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가 되게 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요 고난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출 2: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출 2: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3. 모세의 믿음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젖을 떼고 바로의 딸 공주에게 갈 때까지 육신의 젖만 먹인 것이 아니라 신앙의 젖을 먹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모세에게도 모세의 부모에게 사용된 동일한 믿음의 대물림인 것입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여기서 ‘장성하여’라는 말은 육신의 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위대하게’라는 말과 ‘생겨나다, 만들어지다, 어떤 것이 되다’라는 뜻의 두 말이 합해진 것으로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석달을 키웠을 뿐 아니라 모세가 죽지 않을 것을 믿고 나일 강에 띄워 마침내 바로의 딸 공주의 아들이 되게 한 모세의 부모는 모세에게 젖만 먹인 것이 아니라 믿음까지 젖 먹여 키웠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좋은 예가 바로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삼고 나서 디모데가 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의 대물림을 받은 것을 칭찬한 것과 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생명이 없는 육신은 부패하지만 생명이 있는 육신은 점점 자라나는 것처럼 믿음도 생명이기 때문에 점점 자란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좋은 예가 세례 요한과 아기 예수의 성장 모습니다.
(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오늘 성경에서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신론의 우상숭배가 만연한 애굽 왕궁에서 모세가 장성하여졌을 때에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것은 바로의 딸 공주의 양자가 되어 애굽의 대권을 이어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살것인가? 아니면 애굽에서 고난받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 갈림길에서 어느 편을 택하였을까요?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가 선택한 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단어는 ‘칭찬받기를 거절하고’라는 말과 ‘고난 받기를 좋아하고’라는 말입니다. 이 가운데 ‘좋아하고’라는 말은 즐겼다는 뜻이 아니라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엇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모세가 거절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모세가 선택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모세의 결정을 가리켜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버린 바보 같은 행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그와 같은 선택은 애굽의 왕권을 이어가는 것이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것인 줄 몰라서가 아니라 모세는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대권을 이어받는 것을 가리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과 애굽의 보화라고 말씀하고 있는 반면에 모세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매우 가치 있는 수모이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상주심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바라봄이라’는 말(ajpoblevpw)은 ‘모든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한 대상만 본다. 주의 깊게 보거나 살피다’라는 뜻의 미완료 능동태 동사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이전에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한 것은 후일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이 바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의 영광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자원한 것과 같은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십자가의 길을 간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반드시 애굽과 같은 세상의 보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늘에 상급이 예비되어 있다고 바울 사도가 고난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다면 모세는 세상 나라의 가치관과 비교가 되지 않은 하늘나라의 가치관을 어디서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바로 믿음의 부모들에게서 배운 신앙의 대물림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기록한 오경 여러 곳에 자녀들에 대한 성경 교육을 강조하였습니다.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11:19) “그것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되 집에 앉아 있을 때, 길을 걸을 때, 누울 때, 일어날 때 그들에게 말해 주라.” (신 31:19) “이제 이 노래를 적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어라. 이 노래를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내가 내릴 무서운 일들의 증거로 삼게 하여라.”
뿐만 아니라 모세 자신도 노년에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신 31:22) 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
믿음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믿음을 대물림해야 할 것을 성경 여러 곳에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34: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믿음은 직분을 따라 대물림을 할 수 있는 세습이 아니라 오직 가르침으로만이 가능한 것임을 엘리 제사장과 한나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모세에게 눈에 보이는 바로 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으로 젖을 먹이면서 신앙의 대물림을 한 것이 후일에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택하게 한 원동력인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고난이 따르긴 하였지만 바로 왕과 비교가 되지 않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장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 왕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는 성경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하마터면 개죽음을 당할 뻔 하였던 불운한 시대에 태어났던 모세였으며, 하마터면 인류를 고통 속에 몰아넣는 사단의 상징인 바로 왕의 후계자로 악역을 할 뻔 했던 모세가 그렇게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부모의 신실한 믿음의 대물림 때문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마치 오늘 성경에 애굽의 바로 왕보다 더 간악한 세상 어두움의 권세를 총괄하고 있는 사단의 권세가 갈수록 극악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모세의 부모가 아름다운 아임을 알아보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석 달을 숨겨 모세를 살린 사건이며, 또 한 가지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거절 한 결단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아이를 보았을 때 모세는 다른 사내아이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이 불행하게 보이고, 불쌍하게만 보였으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이였고 믿음직스럽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오늘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내 자녀들을 보고 주일학생들을 바라본다면 사랑스럽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더욱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와 같은 어두움의 세력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것들과 싸워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청소년 무단 가출, 학원 폭력, 일진회, 가출 소년 소녀, 성매매, 심지어 일들이 무엇보다 청소년의 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세대인 미래의 세대를 사단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 미래의 세대의 주역이 될 오늘의 청소년들을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의 군사로 키워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어린이들을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고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우리 가정에 위탁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낳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믿음이 믿음의 모세를 낳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위기의 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 다는 것은 세상과 세상을 좋아하는 나를 부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은 모세처럼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운다는 것이 바로 내 방법과 하나님 방법 사이에서 하나님 방법을 선택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돈만 벌면 되는 것이 아니고 유산만 물려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돈보다 더 귀한 신앙을 대물림해야만 합니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좋은 본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부단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디모데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의 훈련을 직접 시켜 신앙의 대물림을 해야 하겠습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여기서 ‘어려서 부터’라는 말(brevfo")은 ‘태아 embryo, 갓난 아이 baby, 유아 infant.’를 뜻하는 말입니다. 말귀를 알아듣기 전 영혼의 대화를 통해 어린 영혼에게 믿음을 대물림하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바로왕의 대를 이어 영화를 누릴 기회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길을 택한 믿음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어머니 모태에서 열달 동안 태교가, 부모의 품에서 석달동안 교육이, 유모가 아닌 생모의 젖을 빨며 자란 유년시절의 신앙 교육이 사람들 보기에는 한알의 겨자씨처럼 미미한 것이었지만 점점 자라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부모들도 주일학교 교사들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가르치는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미래의 이 민족과 가정과 교회를 살리는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2012-19(성경구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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