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눅 19:45-48)

미션(cmc) 2012. 5. 23. 07:15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
(눅 19:45-48)

(눅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눅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가정의 달 5월 셋째 주 교사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돌이켜 보게 되면 누군가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고 믿음을 훈련시켜준 교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일수 있고, 주일학교 교사일 수 있고, 구역이나 셀 리더일 수 있고 교역자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교사의 일을 하는 분들을 격려하는 교사주일입니다. 성경은 가르치는 이를 배나 존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영적으로 백지 상태와 같았던 내가 그와 같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이나마 성경을 알게 된 것이고, 이정도의 믿음을 갖게 된 것이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우리는 배운 것만큼 밖에 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먹을 것이나 돈을 주는 것보다 몇 백배 보람되고 존귀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는 학벌이 있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교회에서는 좋은 믿음만 있으면 나이나 신분이나 학벌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통해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와 같은 원리를 시범적으로 본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삼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중에 역점을 두신 사역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예수님 당시 성전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관할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져와야 하는데 먼 길을 오다가 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또 유대인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일년에 성전세로 반세겔을 납부해야만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통용하던 돈은 헬라나 로마 제국의 화페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세를 납부하려면 환전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장사꾼들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한다는 미명으로 제사용 짐승이나 기름과 포도주와 환전할 돈을 성전으로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파로 환전 수수료를 챙겨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성전을 관리하는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성전에서 그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과 결탁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종교가 얼마나 부패하였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며 그러한 행위를 예수님이 보시고 분노하시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눅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눅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과 ‘강도의 소굴’이라는 말은 정반대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겉으로 보기에는 거룩한 곳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도의 소굴처럼 더럽혀져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같은 행동은 당시 성전을 관리하는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장 돈줄이 말라버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성전을 비난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위가 크게 손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예수가 매우 건방졌을 것이고,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섣불리 예수님에게 손을 댈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눅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죽이려고 꾀하되’라는 말(zhtevw)은 ‘무엇을 얻고자 기회를 계속 찾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미완료입니다.
그런 경우 예수님이 그들과 맞서는 것은 예수님의 신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잘 아셨으면서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 나가셔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는일을 중단하거나 미루지 않고 한 결 같이 지속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일이 그 만큼 시급하고 중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아시면서도 중단하지 않으신 거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러한 종교 지도자들을 두려워하시고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께서 설령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지라도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줄 사람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셨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것을 내어다 보시고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훈련시켜 예수께서 이루신 복음을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는 일을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해 오면 올수록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십자가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비유로 때로는 성만찬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깨우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그와 같이 가르치실 때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모여 들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눅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라는 말ajkouvwn()은 동분사 현재 능동형으로 계속해서 듣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삼년 동안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신 것도 가르치시는 방법과 훈련이었고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명령도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는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을 통해서 이 가르치는 사역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에도 그 자격 요건 중에 하나가 가르치기를 잘하는 사람이어여하고, 디모데에게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4: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여기서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는 말(provsece)은 ‘마음을 돌리다, 주의하다, 애착을 가지다, 붙잡다, 노력을 쏟다, 열중하다‘는 뜻의 동분사 현재 능동형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야 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과 장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제자훈련과 사역자 훈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방법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가정과 교회를 통해 복음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대물림하여 전파되게 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도 제자들이 나가서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가르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어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상에 교회가 세워졌고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꼬리를 물고 연쇄적으로 계속하는 가운데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계속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 이유는 감투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복음 전파와 가르침의 사명을 감당할 일꾼을 뽑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직분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제자훈련과 사역자 훈련과 일대일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성경교육과 가르침의 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구역에서 교우들에게, 교회에서 새 신자와 신앙이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가르쳐 복음을 대물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시는 일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계속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지상에 세워진 교회에는 가로와 세로가 만난 십자가가 높이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그 십자가와 같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과 더불어 수평적으로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또 제자를 삼아 가르치는 교육과 훈련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예배와 교육이 균형있게 이루어질 때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그러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복음의 대물림과 영적인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나 홀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내 신앙이 다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되지 말고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장년들은 이미 학교를 졸업한지가 오래고 나름대로 가정생활 직장생활 개인 사업에 분주하기 때문에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귀가 닳도록 자주 듣는 말은 교육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성경 교육에 소홀히 한다면 기독교의 보다 깊은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각가지 제자훈련과 성경 교육 프로그램을 열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기성 교회는 가르치고 배우는 열기가 점점 더 식어지고 이단들은 일주일에 사일씩 하루에 4시간씩 자그만치 육개월 동안 강도 높은 반복교육과 훈련을 통해 세뇌화 시켜 은밀하게 기성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공략하는 적극적인 작전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1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노벨 수상자의 22%(480명중 93명), 세계 200대 재벌의 15%, 미국 변호사의 30%, 법대 교수의 50%, 의대교수의 50%, 정치, 언론, 예술, 과학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은 유대 민족입니다. 어떻게 소수 유대인들이 이처럼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을까? 그 대답은 교육입니다. 유대인은 부모님의 신앙교육, 선생님의 전문가 교육, 랍비의 신앙 교육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교육의 주체인 부모님, 선생님, 랍비들은 각자의 사명을 다하고 이들을 존경하는 민족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신앙교육 선생님인 랍비를 존경하였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나의 크신 분" "내 주" 라는 뜻입니다. 랍비들의 가르침을 묶어놓은 책이 ‘탈무드’ 입니다. 탈무드는 자녀를 가르치는 교과서 이고 인생 상담서입니다. 이 책이 유대인들을 세계 최고가 되게 했습니다.
예 화 2
교회사에 보면 , AD 70년경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침공했을때, 로마의 군사들은 예루살렘성을 몇겹으로 포위하여 기회를 옅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수뇌부들은 로마군과 싸울것인가? 아니면 항복할것인가를 놓고, 뜨거운 격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급박한 위기 상황 가운데, 유대사회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감당해왔고, 이스라엘백성들로 부터 지지와 존경을 한몸에 받던 요나단 벤자이크는 , 예루살렘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미래의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하여 , 오늘 한발짝 뒤로 물러나서 항복할것을 재안했습니다. 그러나 강경파들의 세력에 밀려 벤자이크의 의견이 묵살당하고 이스라엘 수뇌부는 로마군과 결사 항전하여 싸울것을 선언합니다.
요나단 벤자이크는 그날밤, 예루살렘의 성벽을 넘어 적진 로마군의 디도장군앞으로 달려가서 백기를 들고 항복했씁니다. 그리고 디도장군앞에 무릎을 끓고,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예를 올리면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시 필요한 모든것을 협조할것을 약속합니다. 대신 3가지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장군께서 이 3가지만은 꼭 들어주소서, 첫째 로마군이 예루살렘성안에 진입하거든 그 성안에는 여러개의 학교, 회당이 있는데, 그 학교인 회당만은 불태우지말고, 보존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학교인 회당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러명의 랍비, 선생님들이 있는데, 그 랍비,선생님들만큼은 죽이지 말고, 보호해달라는 요청입니다.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표준인 토라, 성경만큼은 파손하지말고, 보존해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말을 들은 디도장군은 예루살렘침공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요나단 벤자이크로 부터 재공 받아 예루살렘진입에 성공해서 예루살렘성을 점령했지만 벤자이크의 요청대로, 성경과 회당과 선생님들만큼은 보호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보호받은 랍비들이 훗날 이스라엘의 랍비교육을 정착시킨,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랍비교육은 탈무드로 체계화되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널리 잘 알려 져 있는데요, 이 랍비교육이 오늘날 유태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 만들었다고 볼수있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주일학교 교육이나 장년 성경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잊고 있었을지라도 그 일이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최선을 다하셨던 일임을 깨닫고 먼저 제자가 되어 배우는 일에 충성하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신앙의 본을 보이는 믿음의 교사가 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역에서 셀에서 배우고 깨달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구역에서 셀에서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교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고 있는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며, 주님을 닮는 길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며, 미래의 한국 교회를 살리는 일입니다.
가장 모범적인 교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삶을 나누시고, 사랑으로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그 들이 다시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닮은 좋은 교사가 되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주일학생들에게 사회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좋은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형식적인 교사가 되지 마시고 말씀과 기도에 힘써 성령 충만하며 말씀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교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비록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힘이 들지라도 주님이 본을 보이시고 주님이 명령하시고 주님의 본보이신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길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가는 길임을 알고 그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하늘에 칭찬과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