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같은 가정
(고전 16:19-20)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전 16: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오늘은 가정의 달 5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살다가, 가정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언젠가는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도, 직장도, 사업도 놓아야 하는 때가 오지만 가정은 평생을 떠날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은 직장이나 사업보다 가정생활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더 많은 영향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직장이나 사업에 전념하여 사람들에게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지만 정작 가정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여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가정을 만들어가야만 나만이 아니라 이웃게 행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야겠습니다.
1. 말씀 충만한 믿음의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맨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바울 사도가 철학과 우상의 도시 아데네에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아데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였을 때였습니다.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 지방은 털 장막의 생산지로 바울도 어려서 그곳에서 천막을 만드는 법을 배워 알았기 때문에 생소한 고린도 지방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이 천막을 깁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천막을 깁는 일을 시작한 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구차한 수단이 아니라 복음 전도의 방편으로 천막을 깁는 일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나 선교사가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을 받아 선교지에 가서 오로지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직업을 통해서 수익을 얻어 그것으로 생활하면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하는 비즈니스 선교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퇴폐의 상징으로 사전에 대명사로 남을 정도로 죄악이 흘러넘치는 도시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한 고린도에서 천막 깁는 직업을 가지고 죄악에 물든 사람들에게 거룩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야 말로 ‘거룩한 고독’으로 누군가의 도움과 협력이 절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테네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떠나서 쓸쓸히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에게 믿음의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아볼로와 오늘 성경의 아굴라와 브르스가 부부였습니다.
(행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여기서 ‘본도에서 난 유대인’이라는 말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각국에서 모여들었던 유대인들이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자 온 성도들이 각처로 뿔뿔이 흩어진 곳 중에 하나가 본도였습니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아굴라가 바로 본도 출신이었는데 예수를 믿고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있는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습니다.
(행 18: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아굴라와 브리스가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쫓겨나게 되어 새로운 땅을 찾아 간 곳이 바로 사도 바울이 천막을 기우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는 고린도였습니다.
(행 18: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라는 사람을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와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바울 사도가 복음의 씨를 뿌리면 아볼로가 그 위에 성경으로 물을 주면서 영적인 돌짝 밭과 같은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협력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볼로에게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행 18: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러므로 죄악이 무성한 고린도지방 선교를 완벽하게 하기위해서는 아볼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동역자가 더 필요하였습니다. 그 동역자가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입니다.
그때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그것을 듣고 있다가 아볼로를 불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줌으로 고린도 선교를 보다 더 완벽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다시 말해서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제자로부터 메시아를 영접할 초보단계 '회개의 세례'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이후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하는 초보적인 믿음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아볼로의 재능과 은사가 하나님께 올바로 쓰여질 수 있었던 데에는 곧 겸손한 평신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헌신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그와 같은 아볼로를 불러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을 때 아볼로는 겸손히 배웠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장막 만드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자신들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아볼로를 돕는 일에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아볼로는 남을 잘 가르치고 남에게 말하기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배우기를 즐겨 하는 최고의 덕을 겸비한 겸손한 전도자였습니다.
2. 아굴라 부부의 헌신
하나님은 마치 영적인 하수구와도 같은 고린도에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사도 바울과 아볼로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셔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역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도 외로운 처지였으나 그들 부부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그들 부부의 신앙을 체계화시켜 돌보았습니다.
그 후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업을 위해서라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을 정도로 헌신하는 큰 조력자들이 되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음으로 간 곳은 에베소 지방이었습니다. 이는 아굴라 부부는 한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가 아니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바울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 보낸 두 번째 편지 말미에 아굴라 부부에 대해 문안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딤후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서 천막을 기우면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던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천막을 깁는 다는 말 대신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에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막을 깁는 것은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고, 집이라는 말은 한곳에 정착하여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왜 에베소에서 집을 준비하였을까요?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맨 처음 교회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교회’라는 말(ejkklhsiva)은 ‘무엇 무엇으로부터 불러낸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골고루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내가 자발적으로 나온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러내셔서 나온 곳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오늘 성경 본문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이라고 한 ‘집’이라는 말(oi+'ko")은 ‘집, 거처, 부, 소유’라는 뜻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집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집이라고 사용하였습니다.
[마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물론 초기 교회는 대부분 가정집에서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와 집이 함께 사용되었지만 이처럼 교회만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도 교회로 불러진 것입니다.
(고전 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여기서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 아래에 교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교회는 형식적인 교회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과 더불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과 서로 문안의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 대등한 교회인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모여 시작을 한 것이 지상 교회의 시초인 것처럼 대부분의 초기 교회는 가정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도 건물이 얼마나 큰 집이었으면 교회로 내어 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공간적인 크기부터 생각하기 쉽습니다.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정처가 일정하지 않은 천막을 깁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바울과 동역을 하고, 아볼로를 도우면서 자유롭게 사역하던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일정한 처소 집을 정하고 거기서 사는 궁극적인 목적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에베소에 세운 교회는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과 나란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을 할 정도로 성장하였음을 뜻합니다.
물론 그와 같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는 에베소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자, 과거 자기들을 로마에서 내쫓았던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 다시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는 그동안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주의 일에 헌신하였는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그 때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기록하여 보내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헌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며 문안 인사를 하였습니다.
(롬 16: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아굴라 부부가 어느 때 사도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는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짐작컨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은 핍박과 위협을 당했으며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중에 한 번 이상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목숨을 걸고 사도 바울을 구출해준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그 때 아굴라 부부에게 답례를 하지 못했지만 이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실을 알려 아굴라 부부가 교회 안에서 높이 평가되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를 가리켜 동역자들이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수고에 대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롬 16: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여기서 ‘동역자’라는 말(sunergov")은 ‘ 함께(suvn)’ 라는 말과 ‘일하다(e[rgw)’ 라는 말이 합쳐진 것으로 사도 바울은 아굴라 부부가 자신과 똑같이 천막을 깁는 일에 동역자라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사역에 대해 자신의 사역과 비교하여 과소평가하지 않고 동등하게 취급하였음을 뜻합니다.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한 것은 자신의 주변에 함께 일했던 여러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가장 헌신적인 사역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은 수직적인 우열이 아니라 달란트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성경 말씀처럼 동역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직분이든지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 앞에서 받는 상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에 연연하지 마시고 자신에게 주신 직분에 대해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더 많은 일을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상 교회와 천상교회의 직분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지상 교회에서도 충성하는 사람만이 천상 교회에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3. 가정과 교회의 균형
우리는 오늘 아굴라 부부가 세운 가정 교회를 통해서 가정이 단순한 육신의 안식처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더 교회가 가정보다 더 소중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가정이 곧 교회다’ 라는 생각으로 바꾸고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말씀의 양육이 있는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는 나를 낳아 기른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다면, 교회는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육신의 집은 부모의 혈연으로 연합되었다며 영적인 집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된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기서 ‘권속’이라는 말(oivkei'o")은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르시가와 그 집’이라는 말씀에 집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가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함과 같이 우리의 영혼의 생존을 위해서는 교회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종교 문제로 부부가 다투게 될 때 가정이 더 중요하냐? 교회가 더 중요하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 라고 난처한 질문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에게는 아빠도 엄마도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버린다고 하는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가정생활을 잘해야 하고, 가정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교회 생활도 잘해야 하는 균형이 절실합니다. 결코 교회를 위해 가정을 희생하거나 가정을 위해 교회를 희생하는 것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 교회와 가정 둘 중에 어느 것 하나를 택하라는 말은 불행을 자초하는 말인 것입니다.
요즘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단들이 교회가 가정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정도 포기해야 한다고 유혹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원리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회만이 중요하고 가정은 밥먹고 잠자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육신의 행복만을 위한 곳이 결코 아닙니다.
마치 가정은 군대로 비유를 한다면 세상을 복음화 하는 일에 있어서 최 일선을 담당한 보병과도 같은 곳입니다.
사실상 믿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자라나야만 교회도 부흥할 수 있고 가정에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세상이 복음화 될 수 있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겠다는 소명을 받아야만 신학도 할 수 있고, 선교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이 반대하는 예수를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믿음의 가정들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지역 복음화는 불가능한 것이며, 가족들의 기도와 후원이 없다면 신학을 하고 선교를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한 삶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은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와 아빠처럼, 가정과 교회라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과 교회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마치 사람의 양팔처럼 유기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가정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교회를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고, 가정을 통해서 십자가 사랑을 나누고, 교회를 통해서 전도를 배우고 가정을 통해서 전도를 실천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 주신 선물이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인간은 그와 같은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참 행복을 느끼며, 존재의 가치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정을 통해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가정은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는 것이고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과 같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닮은 믿음의 부부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자녀들 앞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본보이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믿음의 부부가 되기를 힘쓴다면 그 가정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와 같은 믿음의 가정인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와 가정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이 홀로 사는 고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짝지워 가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 가정을 보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남녀가 가지고 있는 미숙한 부분을 서로 보완하여 주시기 위해 돕는 배필로 가정을 세워주셨습니다.
3) 하나님은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기 위해 가정을 세워주셨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인간도 혼자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신앙의 후손을 키워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사회만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을 키워내는 영적인 못자리판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결코 어떤 다른 것들이 가정과 교회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교회와 가정, 가정과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것은 육신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라면,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고 땅 끝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곳입니다.
성경은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 부부가 이루는 가정을 예수님과 교회로 비유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두고 그의 백성들에게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라고 중대한 선택을 요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도 여호수아와 같이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 온 가족이 굳게 결심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어 오늘 성경에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집처럼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 위해서,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송에 힘쓰고
둘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미래의 하나님의 일꾼을 자라가게 하고.
셋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지역을 복음화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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