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상/(욥 25:1-6)

미션(cmc) 2012. 6. 11. 15:58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상
(욥 25:1-6)

(욥 25: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25: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욥 25: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욥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욥 25: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욥 25: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어려운 수학 문제의 정답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비슷하게 문제를 풀어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반드시 정답을 써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이 어떤 존재인지? 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작 인간이 인간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말하는 이마다 각기 다른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 칼라일은 “인생이란 단지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며, 그 두 가지를 지양하고 종합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커다란 기쁨은 커다란 슬픔을 불러 올 것이며, 또 깊은 슬픔은 깊은 기쁨으로 통하고 있다. 자기의 할 일을 발견하고 자기의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사람의 가치는 물론 진리를 척도로 하지만,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보다도 그 진리를 찾기 위해서 맛본 고난에 의하여 개량되어야 한다.”

괴테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는 고통도 있으리라! 행복도 있으리라! 어떠한 경우에도 인생에 완전한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인정한 것을 힘차게 찾아 헤매는 하루하루가 인생인 것이다.”

H. 카로 “인생은 짧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애태우고 또 착각에 빠진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사는 짧은 세월 동안에 삶의 열매를 따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열매가 익는 데는 수천 년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려서 숙제를 하다가 문제가 안 풀리게 되면 결국 전과에 나오는 모범 답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인생의 실상에 대해서 바로 알고 싶다면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인생을 무엇이라고 정의했으며, 인생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오늘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자랑하실 정도로 믿음이 좋았고 동방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온몸이 짓물러 건강마저 악화되었을 때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오늘 성경 말씀은 그 중에 수아 사람 빌닷이 욥의 말에 대한 세 번 째() 논쟁으로 욥이 “하나님이 악한 자들에게 안정을 주셔서 그들을 평안하게 하여 주시는 듯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을 낱낱이 살피시기 때문에 악인들은 잠시 번영하다고 곧 사라지고, 풀처럼 마르고 시들며, 곡식 이삭처럼 잘리는 법이다”라는 말에 대한 반박입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생각하는 하나님
사람들이 동시에 똑같은 것을 본다고 할지라도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고, 보는 이의 시각과 감성이 제 각기 다르기 때문에, 대한민국 안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고 백화점마다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손님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견해가 각기 다르다면, 만일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획일적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종교는 제각기 교리가 다르고 구원관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인간들의 문제점을 아시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객관적인 진리인 성경 말씀을 주셔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구세주, 동일한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객관적인 진리인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주관을 앞세워 믿으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신앙고백이 제 각기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상에 각가지 종교와 유사 기독교 이단들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그 원인도 바로 알지 못하는 모진 고난을 당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욥 24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욥 24:1) “어찌하여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을까? 어찌하여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판단받을 날을 정하지 않으셨을까?” (욥 24:2) “경계선까지 옮기고 남의 가축을 빼앗아 제 우리에 집어 넣는 사람도 있고,” (욥 24:3)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수아 사람 빌닷이 하나님에 대해서 욥과 다른 견해로 논쟁하는 것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욥 25: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lv'm)은 세상을 통치하고 감독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뜻하는 말이고, ‘위엄’이라는 말()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됨을 하는 말이고, ‘화평’이라는 말(!/lv)은 모자람이나 거리낌이 없이 모든 것이 충족한 상태로 말미암은 평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수아 사람 빌닷이 욥과 동일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두 사람이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은 견해 차이를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데 동일한 교회를 출석하면서 어떤 사람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처해 있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매사가 다 잘 되고 있는 경우 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오늘 성경에 욥과 수아 사람 빌닷처럼 상반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민족이나 세계의 역사를 보게 되면 어느 시대는 어려움이 많을 때가 있고, 또 어느 기간이 흐르고 나면 번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주권과 위엄으로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할지라도 각 시대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똑같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이 달라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는 형편과 처지가 제각기 다르고, 개인적으로 일평생 여러 가지 기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신앙고백이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믿어야 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2) 인간은 시시때때로 변하나 하나님은 그 능력, 사랑, 정의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3) 나를 지으시고, 나를 택하시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세계정세가 시시각각으로 달라질지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믿음의 사람에게 한결 같은 은혜를 주시마 성경에 약속하셨습니다.
(사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 수아 사람 빌닷이 생각하는 인간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 하늘을 가리켜 시편 기자는 여호아의 하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세계정세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한 나라에 의해 세계 경제와 평화가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리스나 스페인과 같은 유럽국가의 경제 사정 여하에 따라 세계 증시는 물론 한국 증시에 파장을 가져다 줄 정도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패권 경쟁국들은 상대국보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군비증강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의 세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계 정세는 결코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좌우되었음을 보아야 합니다.
세계 역사 속에 당대 최강을 자랑하던 에집트,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헬라, 로마 제국의 멸망이 군대의 쇠약함 때문이 아니었고, 독일의 히틀러와 구 쏘련의 붕괴도 군사력의 열세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구약 성경에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는 몽둥이로 사용되었던 제국이 우상과 온갖 죄악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 제국들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고 시간이 흘러가니 결국 그 예언대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렘 50:18)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앗수르의 왕을 벌한 것 같이 바벨론의 왕과 그 땅을 벌하고” (습 2:13)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성경을 통해서 이같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세계정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게 됩니다.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서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강한 천군과 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 25: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이 마치 세상이 불공평한 것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투로 하나님의 공평하신 처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욥 25:3)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수아 사람 빌닷은 천군과 천사가 부지기수인 여호와 하나님은 그 힘으로 역대 제왕들처럼 약소국을 침략하고 백성들을 노략하여 노예로 삼는 무자비한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태양 빛을 골고루 비추시고 우로를 내려 일용할 양식을 거두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그와 같은 맥락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수아 사람 빌닷은 욥이 은근히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실상에 대해 논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처럼 겸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누구와 비교를 하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교만해지기도 하고 겸손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자기만 못한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자기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수아 사람 빌닷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 놓고 비교하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욥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여기서 ‘여자에게서 난 자’라는 말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의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인간은 때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선할 수도 의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에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불의함과 무능력함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스스로 자신의 의를 내세운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참된 믿음이 아니며 그 사람은 구원의 길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마음과 생각과 입술과 행위로 범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할 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게 됩니다.


2) 하나님 눈에는 달과 별도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욥 25: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고대 근동 지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을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빛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아 사람 빌닷은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것조차 초라한 존재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달과 별의 빛이 태양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빛을 발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사 24:3)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에 왕이 되실 것임이니라”
하물며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의 원죄와 전적으로 타락한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을 가리켜 (렘 17: 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 3장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은 다 거짓되며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빌닷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달이나 별도 그 빛이 밝지 못하고 깨끗하지도 못한데 하물며 인간은 얼마나 오점이 많겠느냐고 말하면서 은근히 욥도 완전치는 못할 것이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수아사람 빌닷이 절대적으로 의롭고 깨끗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미천함에 대한 이같은 주장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구더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욥 25: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빌닷이 사람을 벌레에 비유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약하고 보잘것없음을 의미하며 상대적으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죄는 인간을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에 대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미천한 존재입니다.
빌닷이 이처럼 인생을 벌레에 비유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욥의 무죄 주장을 비난하기 위한 것입니다.
빌닷은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 받는 이유를 묻고 있는 욥에게 한마디의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대자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만을 부각시킴으로 욥을 겸손하게 만들 수 는 있었지만 다 맞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상
사람이 제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의 모습은 수아 사람 빌닷의 논쟁처럼 불의하고 무능하고 구데기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실상이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자학에 빠지게 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이 설령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게 될 때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만사가 헛되고 마는 것입니다.
(시 73: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그래서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다 경험하고서도 인간 만사가 다 헛되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2: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또한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평화는 욥 당시에 경험할 수 있는 평화가 아니라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오심으로만 가능한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격상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하는 편파적인 논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의롭지 못하며 구데기와 같이 무능력한 죄인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 인간이 바로 절대적으로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였을지라도 그 인간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방도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약시대의 제사법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을 드려 속죄를 받게 하신 방법입니다.
설령 인간이 수아 사람 빌닷의 말처럼 그렇게 연약하게 무능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붙드시고 존귀하게 하시면 얼마든지 존귀하게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대상 17:8)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은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연약하기 그지 없었으나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어떻습니까? 수아 사람 빌닷의 말처럼 벌레와 같고 구더기외 같은 허무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존귀한 인생입니까? 나의 실상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1505년 마틴 루터는 독일을 여행 중이었습니다. 청년 루터는 숲속을 걸으면서 몹시 고민하고 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과연 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만 한가?"하는 신앙생활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쳤습니다. 벼락이 한 나무에 떨어졌는데 벼락 맞은 나무가 쓰러지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루터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 살려 주세요 저를 저 벼락에서 살려 주시면 평생 성직자로 살겠나이다.” 그 뒤에 그는 하고 있던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성직자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엄한 계율을 지키면서 수도 생활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금식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경건 생활을 하며 금욕 생활에 전력했지만 그에게 찾아오는 죄책감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로마 교황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 은혜를 받기는커녕 로마 교황청의 부패성을 보면서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곳의 거룩한 계단을 오르면서 계단 돌에 입을 맞추고 있었는데 그의 귓전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계단을 올라가서 기도하는가” “내가 왜 고통하며 고민해야 하는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을까?” 이러한 깨달음이 들면서 새로운 신앙이 생겼고 그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루터에게 새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그 새 빛은 루터가 그렇게도 고민하던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이 빛은 신비주의자처럼 명상을 통한 하나님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나 성례전이나 순례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면죄부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루터에게 구원을 준 새 빛은 롬 1:17의 이신칭의, 이신득구의 진리의 빛이었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고백하기를 “나는 그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곧 믿음으로 살게 되게 하는 그런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곧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 의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단번에 거듭나게 되었고 활짝 열려진 문들을 통해서 천국 그 자체에 들어간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나에게 전체 성경의 전적으로 다른 얼굴이 자기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전에 그렇게도 증오하였던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이제는 가장 열정적인 사랑과 가장 달콤한 말 “하나님의 의”를 극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게 해주실 때에 우리들에게 의로 옷 입혀 주신다는 것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루터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중세교회를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루러와 같은 영적인 거듭남과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아서 일방적으로 깎아 내리는 것도 기독교적 인간관의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라인홀드 니이버가 인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죄로서 교만과 나태를 든 것은 옳습니다.
하나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자리를 넘보는 것은 교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을 주셨음에도 이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 것은 나태의 죄입니다. 교만도 문제이지만 나태 역시 작지 않은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빌닷은 이 점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나치게 자기를 비하하는 것도 죄악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간의 원초적 형상은 상당 부분 훼손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죄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습니다. 하나님이 씌워주시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분명히 수아 사람 빌닷의 말처럼 불의하고 구데기와 같은 존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속죄함을 받고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이시며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나를 위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상에 대해서 어떻게 보증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보증하여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벧후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