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가?/(욥 26:6-14)

미션(cmc) 2012. 6. 18. 07:00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가?
(욥 26:6-14)

(욥 26: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 26: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욥 26: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욥 26:9) “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욥 26:10) “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욥 26:11)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욥 26:12) “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욥 26:13)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욥 26: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우리 인간이 무엇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하고 과학적인 통계 수치가 나와야 하는 것이기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인간의 과학으로 입증될 수 있는 무한한 분이신 반면에 지식이나 경험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철학자들 가운데는 신에 대해서 불가지론을 주장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의 언어‘를 쓴 프랜시스 콜린스는 두 가지의 불가지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인식하기란 앞으로도 절대 불가능하다는 적극적인 불가지론과 또 하나는 지금으로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소극적인 불가지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유한한 인간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자 힘써 알자‘라고 명령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기서 ‘힘써’라는 말은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된 말로 무엇을 추적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알라’라는 말([d'y)도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경험하고 관찰하여 아는 것, 구별할 줄 아는 것, 배워서 아는 것, 관심을 가지는 것, 관계를 통해서 친숙하게 알아가는 것’으로 보다 더 지속적인 이해를 뜻하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을 주셨으며 또한 ‘여호와를 힘써 알자’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그와 같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람이 심한 산 정상에 자라는 나무는 보이는 높이보다 그 뿌리가 더 깊은 것처럼 우리의 보이는 신앙은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내면적인 깊이만큼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문학작품과 같이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은 우리의 이성으로 끊임없이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할 탐구의 대상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1)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과
2) 또 하나는 아무리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을 지라도 우리가 그 계시를 힘써 배우고 관찰하고 관심을 가져야만 더욱 하나님을 친숙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에 대해 돌이켜 보면서 좀 더 깊이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아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수아 사람 빌닷이 아는 하나님의 지식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욥의 친구 수아 사람 빌닷이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욥의 처지에 대해서 논쟁을 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는 주권과 위엄이 있으시다. 그분은 하늘나라에서 평화를 이루셨다. 그분이 거느리시는 군대를 헤아릴 자가 누구냐? 하나님의 빛이 가서 닿지 않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니 어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겠으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어찌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달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밝은 것이 아니며, 별들마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청명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와 같은 수아 사람 빌닷의 이론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 그러면서도 매우 겸손한 사람처럼 생각 됩니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펄쩍 펄쩍 뛰고 있는 욥의 기를 꺾어 놓기에 매우 설득력이 있는 논리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들은 욥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요? 아무리 교수가 학벌이 쟁쟁할지라도 학생들이 그 강의를 알아듣지 못한 다면 실력있는 교수라고 할 수 없듯이, 아무리 의학박사라고 할지라도 그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환자들마다 병세가 악화되기만 한다면 실력이 있는 의사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깊이 있는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결코 능력있는 설교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아 사람 빌닷이 매우 신학적인 깊이가 있는 말로 욥을 설득하려고 하였지만 정작 욥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욥 26: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욥 26: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여기서 욥이 말한 ‘힘 없는 자’라는 말은 도마뱀과 같은 작은 파충류를 가리키는 말로 수아 사람 빌닷이 앞서 말한 인간은 벌레요 구데기 같다는 말처럼 인간의 비천함을 뜻하는 말로 욥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한 ‘기력이 없는 팔’이라는 말도 물질적이나 육체적으로 연약한 상태로 욥이 자신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욥이 친구들에게 '참 잘도 도와주는 구나, 참 잚도 구원하여 주는 구나‘라고 한 것은 욥이 위로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상처가 되기 때문에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이해하고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잣대로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와 같은 의도로 하는 말은 아무리 논리에 충실할지라도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더 의롭고 거룩하며 진리이신 분이 어느 누구이겠습니까?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진리를 가지고 비 진리를 정죄하고, 그 의를 가지고 불의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깨우치시고, 불의에 종노릇하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또한 삼년의 공생애 기간에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만일 예수님이 그 진리를 가지고 무지한 자를 책망하고 그 의를 가지고 불의한 자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면 오늘 우리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남을 용서하고 위로하는 삶을 살라고 그렇게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살전 4: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아는 사람의 삶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고, 구원함을 받은 성도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용서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2.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
수아 사람 빌닷이 불의한 세상에 대해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는 욥에게 하나님에 대해 (욥 25: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말하는 수아 사람 빌닷은 대단히 믿음이 좋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에 비해 욥은 하나님을 향해 투정을 부리고 원망어린 소리를 하는 것을 볼 때 매우 믿음이 적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의 말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입을 열어 반박한 것이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욥 26:3)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욥은 자신을 가리켜 ‘지혜 없는 자’라고 한 반면, 수아 사람 빌닷에 대해서는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랑한다’는 말은 ‘잘 이해한다’는 뜻으로 빌닷을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비아냥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욥의 친구들보다 못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음을 욥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전지하신 하나님
(욥 26: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여기서 ‘음부’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이 죽은 후에 가 있는 미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시기 때문에 세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 어디도 하나님 앞에서는 벗은 몸처럼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아 사람 빌닷이 하나님의 위엄과 통치에 대해서 언급한 것 보다 더 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찬양하는 말로 시편 기자도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2) 전능하신 하나님
(욥 26: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이는 모두가 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으로 지구가 우주 공간에 캄캄한 밤 북녘 하늘에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보석처럼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보게 되면 이 성경말씀을 더욱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욥이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옛날에 지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매어달려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장대비가 쏟아질 때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오르게 되면 시커먼 먹구름만 보이지만 그 구름조차 손에 잡혀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욥 26: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두터운 구름 속에 장마 비가 내릴 정도로 엄청난 물을 저장하였지만 찢어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같은 일을 인간이 과학의 기술로 가능한 일이며, 설령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과연 얼마나 거창한 기계와 많은 돈이 들어야 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구름과 바람만으로 그 같은 일을 하신다면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무한하신 하나님
물론 그 외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보름달을 구름 뒤에 숨기시고, 물 위에 수평선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시며, 한번 꾸짖으시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 흔들리며, 능력으로 바다를 정복하시며, 지혜로 혼돈과 악의 세력을 쳐부수는 변화무쌍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이 그와 같은 하나님에 대해서 내린 결론은 이상에 언급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아 사람 빌닷도 하나님의 주권을 언급했고 욥도 빌닷의 말을 이어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과 무한하심에 대해서 열거했지만 그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빙산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계시나 영감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주 미약한 속삭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듣는 것은 가냘픈 속삭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의 권능에 찬 우레 소리를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 반문하였습니다.
(욥 26:14)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3.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지식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욥이 우리들보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들이 경험한 것을 욥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의 공의는 경험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공의로운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되 독생자 예수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나를 막론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지 못한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지만 아무리 인생을 오래 살았을 지라도 우리는 모르는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유한한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고사하고 인생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자기 자신의 본질과 실상과 미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와 같은 우리가 어떻게 오늘 성경에 욥이 고백하고 있는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나, 지금 우리 주변에 믿음 생활을 잘하는 이들이 알고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를 출석하기 전 어머니 태에서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혼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깨달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와 처음에는 성경 한 장도 읽지 않고 그저 설교 말씀만을 들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풍문으로 들은 지식이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전부일 것입니다.
그 단계를 지나 성경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지면서 교회가 제공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혼자서 큐티를 하기도 하고 성경과 신앙에 대한 서적을 구입하여 읽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씩 향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가 보면 인생살이가 다 그렇듯이 기쁜 일과 슬픈 일,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말씀을 삶에서 경험하게 되면서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겼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제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저를 찾아주신 하나님,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은 내가 이미 죄인이라는 것과 또한 죄를 범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하나님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나의 주변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화가 왔습니다. 반갑게 받으시겠습니까?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만나주시겠습니까? 도움을 요청합니다. 기꺼이 도우시겠습니까? 결코 아닐 것입니다. 받지도 만나주지도 도움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색해서가 아니라 걸려들어 평생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먼저 찾아주셨고, 사랑해주셨고, 용서해 주셨고, 그 용서와 사랑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때로는 너무나 싫고 밉게 생각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배은 망덕한 나를 보실 때 얼마나 속상해 하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함정수사를 하여 나의 숨은 죄를 캐어내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다려주시고, 회개하면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곧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더더욱 감사한 것은 그러한 나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와 복을 주시고, 소중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자주 실수하고 나태할지라도 아직까지 거두어가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때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뼈져리게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면 때로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그 일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남은 생애를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와 같은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이 내 속에서 나온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임을 깨닫게 될 때 교만하거나 나를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인식의 주체는 나의 의지나 이성이 아니라 나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감동으로 계시된 말씀을 깨닫고 느끼고 믿고 결단하는 확신의 신앙이 형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계시를 주셨고, 그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것을 깨닫도록 믿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시기 위해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그 성경을 보더 더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하며, 그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에 욥과 같이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언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선포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 145: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시 145:5)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시 145:6)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