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나의 피난처 /(시 11:1-7)

미션(cmc) 2013. 9. 16. 13:38

나의 피난처
(시 11:1-7)

(시 1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시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 11: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시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백 삼십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자력으로는 자유와 해방을 얻기에 불가능하다는 상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 메마른 광야 사십년의 여정을 거쳐 가나안 땅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순종하는 삶이 최선의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나 홍해의 기적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일시적인 목마름과 주림 때문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출애굽 한 것을 도리어 후회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여기서 ‘원망하여’라는 말(@Wl(3885, 룬) )은 (a) '투숙하다, 묵다, 밤을 지내다', (b) '중얼거리다, 투덜거리다, 불평하다' 라는 뜻의 아주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어디까지 부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와 같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1. 시편 기자의 시련
시편 기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삼고 살았지만 어려서는 부모 형제에게, 자라서는 사울 왕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일평생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반드시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학교 다닐 때 열심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보면서 졸업 후에는 잘나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달리 인생살이에서 고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흔히 “아하! 그래서 인생은 성적순이 아니다로구나 라고 하는 것이구나?” 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평생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살아온 사람이었으나 오히려 세상 권력이나 돈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보다 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시편기자에게 마치 난리가 나면 사람들이 산으로 피신을 하듯이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피하지 말고 하나님을 떠나 다른 피난처로 도망하라고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편 기자가 누구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지켜보니 사울 왕에게 신뢰를 받고 그의 사위가 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다윗이 그 사울 왕에게 미움과 시기를 당하고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새처럼 피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동정아닌 동정의 말로 한번 종교를 갈아타보라는 식의 유혹을 받게 됨을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시 11: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여기서 ‘피하였거늘’이라는 말(hs;j;(2620, 하사))은 ‘도피하다, 피신하다’는 완료형으로 우리들처럼 말로는 하나님께 피했다고 하면서, 때로 ‘돈이 없다고, 몸이 아프다고, 외롭다’고 불평하는 양다리가 아니라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하나님만 피난처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시편 기자의 일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떠 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다윗의 장인인 사울 왕이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을 마치 저격수로 비유하였습니다.

(시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여기서 ‘먹임이여’ 라는 말(@WK(3559, 쿤))은 ‘확고하다, 준비하다, 고정하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악인이 시편 기자를 죽일 준비가 완벽한 상태라는 완료형입니다.
악인이 당긴 화살을 시위에서 놓기만 하면 시편 기자는 죽음에 처하게 되는 위기 상태임을 뜻합니다.
시편 기자의 그러한 형편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은 고집스럽게 하나님만 의지하지 말고, 인간적인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는 시편 기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마치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처럼 오해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것을 의지하라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예화
교회를 다니던 어느 분이 우환이 떠나지 않자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결국은 무당이 되지 않으면 귀신이 자식을 잡아간다는 말에 교회를 버리고 결국은 무당이 된 사람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권면을 했지만 딸을 시집보내고 나서 교회를 다시 나오겠다고 핑계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는 과거나 현재에 다윗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는 않았습니까? 설령 아닐지라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언제 시편 기자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지 모릅니다.
그 때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은 마치 나를 외면하고 계시는 것처럼 생각되는데 누군가가 나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처럼 한번 종교를 바꿔보라는 유혹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길인지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시편 기자의 믿음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말을 듣게 되면 위로와 용기가 생기지만 부정적인 말을 듣게 되면 평소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법입니다.
흔히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난 앞에 장사가 없는 법입니다.
지금까지 시편 기자의 주변 사람들은 다윗을 무척이나 염려하고 생각해 주는 척 하면서 ‘네 산으로 도망하라’ 고 믿음 없는 소리를 하였을 때 시편 기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가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사람들의 유혹을 거절하고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견고한 터와 피난처로 삼았을까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공의가 짓밟혀지고 신실성이 사라져버릴 때 그는 하나님만은 요지부동하게 하늘에 앉아 계시며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회복하는 최선의 길은 오직 하나님께만 피난처로 삼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그와 같은 믿음이 가뜩 담긴 말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물론 여기서 ‘터’라는 말(ht;v;(8356, 샤타) )은 ‘기초, 토대’ 라는 뜻이고, ‘무너지면’이라는 말(sr'h;(2040, 하라스))은 ‘넘어뜨리다. 파괴하다’는 뜻으로 기초가 무너져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의 미완료 형입니다.
이 터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기본 원리 곧 원칙을 가리킵니다. 이를 테면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게 국민들의 평안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끌고 나아가는 법질서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도 같습니다.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아무리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크다고 해서 시편 기자의 인생과 신앙의 터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곧 터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인생의 터로 삼았기 때문에 그에게 온갖 시련이 몰아 닥쳤을지라도 마지막까지 하나님만을 자신을 터로 붙잡고 살았기 때문에 역대 왕들 중에 이스라엘 나라를 가장 튼튼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하나님은 분명히 성전에 계시며,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인생들을 살펴보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11: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 하시도다”

여기서 ‘감찰 하시도다’라는 말(@j"B 974, 바한)은 ‘자세히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서 세상에 사는 인간들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를 자세히 눈 여겨 보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곳 왕궁에서 통치하시며 자신의 심판대를 그곳에 두고 계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을 당분간 연기하더라도 오직 이 한 가지 진리, 남아있습니다. 주께서 하늘에서 하감하신다는 점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행위를 살펴보시고 그 행위에 대해 심판하시는 대신 의인을 살피시는 이유는 의인을 단련하시고 세심하게 돌보시기 위해서 감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불로 심판하시되, 의인의 행실을 좋아하시고 또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시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여기서 ‘미워하시도다’라는 말(anEc;(8130, 사네))은 ‘미워하다, 증오하다’는 뜻의 완료 형으로 더 이상 사랑 받을 여지가 없는 확고한 상태를 뜻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들을 단순히 미워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과 유황과 뜨거운 바람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시 11: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정반대로 그와 같은 악인에게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의 얼굴을 마침내 뵙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시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여기서 ‘좋아하시나’라는 말(bhea;(157, 아헤브))은 ‘좋아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사랑하다’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행하는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뵙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만이 아니라 선지자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셔서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물론 그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렘 12: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가장 안전한 최상의 피난처로 믿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상 16:22)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에게 손을 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3. 믿음의 승리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유혹과 수그러들지 않는 악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우직스럽게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전백승 만사형통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도 별수 없다고 비웃을 정도로 위험에 처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의 승리는 결승에 달려 있는 것처럼 신앙의 승리는 끝까지 인내할 때 얻어지는 것처럼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모든 악한 세력들은 다 패한 반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끝까지 승리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삼하 22:2) “여호와는 내 바위시요 내 산성이시요 나를 건져내는 분이시며 내 힘이십니다.” (삼하 22:3) “내 하나님은 내가 피할 내 바위, 내 방패, 내 구원의 뿔, 내 산성이십니다. 내 피난처이시며 내 구원자십니다. 주께서 난폭한 사람에게서 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앞서 간 신앙의 선진들 중에 큰일들을 이루어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인생의 터를 여호와 하나님을 최상의 피난처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 때문에 만사형통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는 이겨내기 어려운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오늘 시편처럼 일관된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나의 피난처로 삼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성경의 시편 기자 외에 또 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느헤미야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으로 수산 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는 술 관원장으로 왕의 비위만 맞추면 자자손손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재건하겠다는 애국심과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사명감 하나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천신만고 끝에 성벽재건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돌아보니 성벽에는 더 이상 구멍 뚫린 곳이 하나도 없었고 이제 성문에 문짝만 달면 모든 공사가 끝날 판이었습니다.
그 때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을 비롯한 원수들이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 여러 번 시도를 하고 심지어 선지자까지 매수하여 하나님의 성전으로 도망하라고 하였지만 오늘 시편 기자처럼 거절을 하였을 때 그것이 거짓 예언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느 6:11)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느 6:12)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느헤미야가 그와 같은 온 갖 위협과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오늘 시편 기자처럼 성전에 계시고 하늘 보좌에서 악인과 의인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에 결국 원수들을 두려움과 낙담에 빠뜨리는 승리를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느 6:15)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느 6: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여기서 ‘크게 낙담하였으니’ 라는 말(lp'n:5307, 나팔)은 ‘떨어지다, 넘어지다, 엎드러지다’ 라는 완전한 항복을 뜻하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진 상태를 뜻합니다.


결 론
사랑한 성도 여러분! 때때로 우리 주변에서 기초가 부실해서 건축하던 대형 건축물이 붕괴하여 인명 사고가 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금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무리 하시면서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높은 빌딩을 지으려고 하지 말고 기초를 튼튼히 해야만 지속적으로 성장과 부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 아무리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나라의 터는 경제가 아니라 ‘법과 정의와 도덕’이기 때문에 온 국민이 법을 존중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으면 경제가 발전할수록 국가는 더 빨리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인생의 터는 무엇보다 신앙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부실하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할지라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도 흔들 수 없고 뽑아버릴 수 없는 든든한 반석입니다. 그 반석에 내 인생의 터를 정하고 그 반석에 내 인생의 배를 단단하게 묶어 둔다면 인생살이에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 몰아닥칠 때 혹 흔들릴 수는 있지만 결코 파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인생의 목적이요 터가 되어 버린 사람에게 인생의 시련인 죽음이 언젠가 반드시 몰아닥치게 되면 한 평생 쌓아 놓은 모든 것들이 단 한방에 산산이 무너져 버리고 말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리처드 알레인(Richard Alleine, 1611-1681)은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생겨서 우리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시험할 것이나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인생의 풍랑 중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고 굳건하게 지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세히 살펴보신다. 그분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부분까지도 자세히 보시는데, 마치 해부된 모습을 처음 보듯이 지극한 흥미를 가지고 바라보신다.” 고 하였습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피난처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의 피난처이고 환란 가운데 우리가 피할 요새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힘겨운 일이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