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고통당하는 자의 소원/(시 10:12-18)

미션(cmc) 2013. 9. 10. 06:39

고통당하는 자의 소원
(시 10:12-18)

 (시 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 10: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 10: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모든 생명들은 그 종류대로 각기 다양하게 지으셨지만 인간만 유일하게 하나님은 형상과 모양을 닮은 단 한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그 사람이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입니다.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아담을 통하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그 조상들이 사는 대륙에 적응하기 쉬운 피부색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속에 흐르는 피는 다 똑같기 때문에 수혈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유일하고 단일하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인간 외에는 인간에게 수혈이 가능한 동물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고 오는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누구다 동일한 인격을 가진 평등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혈통, 신분, 소유, 지식 여하를 가지고 어느 그룹에 속한 사람은 존귀하고 어느 그룹에 속한 사람은 비천하다고 차별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짐승 취급을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회고 해 보면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인종 차별을 하고 심지어 노예로 삼고 짐승처럼 부린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물론 현재는 그와 같은 노예 제도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인간이 자신보다 가난하거나 못 배웠거나 신분이 미미하다고 해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학대를 한다면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에 역행을 하는 큰 죄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인권위원회라는 것이 있지만 인간은 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든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남에게 신체나 물질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유난히 인권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처럼 재산상의 피해만이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는 말이나 행동을 중죄로 여기는 세상을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은 구약 성경에 이미 인간의 평등함을 많이 가르치는 중에 특별히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고 돌보라고 성경 여러 곳에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신앙과 삶의 규범을 가르치는 신명기입니다.

1) 절기를 지킬 때
(신 16:11)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2) 농사를 지을 때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챙기라고 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힘이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누군가 돕지 않으면 생존조차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제나 오늘이나 힘 있는 자에게는 서로 돕겠다고 하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고아나 과부나 가난하고 힘이 없는 자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세상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나름대로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나름대로 법을 제정하고 죄인들이 범한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가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더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점점 더 악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천벌을 받는다 라는 말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악인들이 일시적으로는 득세를 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대부분의 악인들의 말로가 좋지 않고 그의 후손들까지도 마치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 것처럼 불행하게 되는 모습들을 종종 볼 때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악인의 소행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악한 자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고 계시는 것을 보면서 시편 기자가 장탄식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기서 ‘ 멀리 서시며’,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라는 두 말(dm'[ ; !l'[;)이 모두 미완료 상태로 하나님이 시편 기자가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는 불의한 현실에 대해서 전혀 개입을 하지 않으시고 멀리 서서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마치 하나님을 향해 따지기라도 하듯이 ‘어찌하여’ 라는 장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세상에 공권력이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악하고 힘 있는 자들이 씩씩 거리면서 아무런 힘이 없고 가난한 자들을 짓누르고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아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시 10: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세상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인간은 공산품처럼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왜 사람들을 그렇게 차별을 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명의 자녀를 둔 부모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세월이 지나면 자녀들의 삶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그 자녀를 낳은 부모의 마음은 자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잘사는 자녀가 못사는 형제자매를 도와주며, 우애 있고,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자식이 좀 잘 산다고 해서, 좀 배웠다고 해서, 좀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해서, 가난하고 병든 아우나 형을 구박하고 멸시하고 돕지 않을 때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악한 사람이라고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사람 사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세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형제 사랑과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계명을 만들어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악한 자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힘없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등치고 압박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 10: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렇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멸시하는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시 10: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그렇다면 왜 악인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가련한 자를 압박하고 그와 같이 멸시하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빈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다른 사람보다 더 잘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임을 망각하고 마치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는 불신앙과 교만함 때문입니다.

2)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남다른 은혜를 주신 것은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하기 위한 사명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그와 같이 악해지는 근본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인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가련한 자들을 못살게 구는 것은 인간의 선악간의 행실에 따라 언젠가는 반드시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시 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모든 악의 근원은 유물론 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무신론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이 무신론에 빠져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면 그 때부터 교만과 더불어 탐욕에 빠져 점점 더 악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게 된 근본원인이며 그 후손인 인간은 그와 같은 죄악을 통제할 기능이 없기 때문에 마치 마약에 빠진 사람처럼 점점 더 오만해지고, 무자비해지고, 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 10:5) “그러나 그 길이 항상 잘되니 탄식할 노릇이고 주의 심판은 저 멀리 있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들이 모든 반대자들에게 코웃음만 칩니다.” (시 10:6) “그는 마음속으로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니 내게 어려움이 어디 있겠는가?” 합니다.”(시 10:7) “그 입은 저주와 거짓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혀에는 해악과 허영이 있습니다.”

악인의 소행이 무엇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악인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가련한 자들을 등쳐서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가련한 자들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시 10:8) “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시 10:9)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시 10:10)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악인의 그와 같은 소행은 시편 기자 때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난무하는 잘못된 이념가들의 표적은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내세워 결과적으로는 자신은 부귀와 영화를 누립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입니다. 백성은 굶어 죽어도 상위 계층에 있는 공산당원들은 잘 먹고 잘삽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조폭들입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상인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자릿세와 보호세라는 명목으로 등을 쳐서 자기들은 유흥과 향락으로 탕진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유독 악한 자들이 점점 더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리는 표적은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이 아니라, 가난하고 가련한 자들만을 골라서 등치고 울리는 사기꾼들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 10:8) “그는 으슥한 뒷골목에 앉으며 은밀한 곳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가 노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시 10:9) “그는 굴 안에 있는 사자같이 조용히 웅크리고 가난한 사람을 잡으려고 기다리다가 가난한 사람을 잡으면 그물로 덮쳐 끌고 갑니다.” (시 10:10) “그 잡힌 사람은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다 결국에는 그 힘 있는 사람 때문에 쓰러지게 됩니다.”

물론 세상에는 법이 있습니다. 새로운 법을 제조하는 국회도 있습니다. 그 법을 집행하는 수많은 공권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악은 점점 더 거세지고 반면에 힘이 없는 가련한 자들은 점점 더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인간의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면 과연 어느 때입니까?
방방곡곡 가는 곳마다 교회가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세상은 갈수록 점점 더 악해져가고 있지만 는 세상을 좀 더 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만이 아니라 처음에는 악에 대해 의분을 느끼기까지 했던 내가 어느 사이에 내가 비판하던 그 악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정의감에 불타서 죄악을 미워하는 적극적인 삶과 더불어 나만이라도, 나부터라도 죄악에 물들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보다는 훨씬 더 선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주간 세상에서 살다가 주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이켜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것 뿐 일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점 더 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2. 시편 기자의 탄식
사람이 목이 마를 때 더욱 물을 찾고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그리운 것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진다고 해서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게 되면 결국 자포자기에 빠져서 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불의와 타협을 하게 되고 점점 똑같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불평불만에 사로잡히게 되면 악한 자들이 던지는 미끼에 걸려들기 쉽고 한번 걸려 넘어지게 되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 악이 시키는대로 하게 되고 결국은 과거에 자기가 비난했던 사람 못지 않게 더욱 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인간의 한계와 약점을 깨닫고서 그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은 영원한 재판장이요 공의로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탄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선악의 대결은 마치 씨름 경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 제압을 하거나 상대편의 힘을 이용하여 꾀를 쓰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악을 대적하시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으로 제압하시는 방법이 최후의 심판이라면 악인 꾀를 이용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지혜임을 시편 기자가 알기 때문에 그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시 10: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여기서 가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 라는 말은 ‘사로잡히다’ 라는 말의 미완료 동사로 악인이 가련한 자를 압박하기 위해 만든 자기 꾀에 악한 자가 사로잡혀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시편 기자의 소원입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왜 시편 기자가 적극적으로 악한 자를 공격하지 않고 악한 자가 자기 꾀에 빠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매우 비겁하고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시편 기자가 정의감을 가지고 악과 대적하여 싸운다고 해서 악을 이기려면 그 악보다 더 악해지는 것 외에는 악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계획한 자기 꾀에 빠지게 해 주시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편 기자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전쟁터에서 백전백승을 하고 온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을 때 구테타를 일으켜 사울 왕을 제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을 벌하시고 가련한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를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악한 자가 가련한 자를 압박해도 이길 수 없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악인이 그와 같은 죄악을 범하면서 하나님을 들먹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악인을 손보아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시 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여기서 ‘손을 드옵소서’라는 말(ac;n: 5375, 나사)은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악인을 심판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잊지 마소서’ 라는 말(jk'v;(7911, 샤카흐))은 ‘모르다, 무시하다, 시들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하나님께서 악인에 대한 외적인 심판만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가련한 자들을 오래 오래 잊지 말아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가련한 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악인은 하나님을 불신할 뿐 만 아니라 가련한 자들이 믿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 10: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그 때문에 세상에서 악인이 점점 득세하고 그 때문에 가련한 자들이 악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편 기자의 신실한 믿음 때문입니다. 비록 시편 기자가 처한 현실이 악이 득세를 해도 하나님이 멀리 서 보고만 계시는 것 같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시편 기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은 결코 악인의 편들거나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후일을 심판을 위해서 마치 증거를 모아두시는 것처럼 악인을 이미 보고 계시며 억울함을 당하는 가련한 자를 살피고 계신다는 믿음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시편 기자처럼 멀리 보는 것입니다. 깊이 보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오늘 만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남은 날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여기서 ‘보셨나이다’ 라는 말(ha;r;(7200, 라아))은 완료형이고, ‘감찰 하시고’라는 말(fb'n:(5027, 나바트) )은 미완료 형이고, 고아를 ‘도우신다’는 말(rz"[;(5826, 아자르))은 미완료 형으로 시편 기자는 과거의 하나님, 현재의 하나님, 미래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자가 아무리 강한 척 할지라도,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탈세를 하고 감춘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만이 능히 악인의 팔을 꺾으시고 악인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을 때까지 밝히 드러내시는 영원한 무궁하신 왕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1) 세상에는 은밀한 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악이 비밀스럽게 저질러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속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모두 지켜보십니다.

(렘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눅 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악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겁 없이 악을 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지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믿고 악인의 팔을 꺾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 10: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사람이 어떤 중요한 일을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 그가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인지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부탁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인은 세상에서 악인의 횡포를 끊고 약자를 보호하실 분은 영원한 왕으로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악인이 판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가련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악에 대한 심판을 고소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세상에서 악인을 심판하고 약자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확신하였기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인의 심판과 약자의 보호를 간구하는 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입니다.

(시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만일 그러한 믿음이 아니면 가련한 자들이 악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바늘에는 소망이라는 구슬을 꿰어야만 보배로운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렘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삼천년 전에 기록된 것이지만 마치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는 것 같습니다.
1) 악인은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기 위하여 주신 재물과 권력과 지혜를 수단으로 불의하게 재물을 착취하는 일에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헌신을 하게 됩니다.
2) 그러나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믿고 자만심에서 가득차서 그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3)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은 백합화가 썩으면 악취가 더 고약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주신 권력과 재물과 지혜를 가지고 오늘 성경에 악인들처럼 약자를 등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불의한 일에 앞잡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입니다.

세상 풍조가 나날이 변하여도 점점 더 악해져만 가는 세상을 구원하실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 임을 믿고 오늘 시편 기자처럼 공의로우신 재판장되신 여호와 하나님께 불의한 세상이 물러가고 정의로운 세상이 도래하며 악인이 멸망을 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이 위로함을 얻는 날이 오기를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Rise up!)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12)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15) ”

오늘 시편 기자가 세상의 악한 자들의 횡포를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하는 기도로 시작했었으나 오늘 시편 마지막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확신에 가득찬 믿음의 기도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 10: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 10:18)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오늘 우리도 그와 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설령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인생 여정은 마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바쁠지라도 탔을지라도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 중에 부르짖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 주실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보려는 의인들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조차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오늘 우리에게 속죄와 구원으로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렵고 답답했던 날들은 기쁘고 행복한 날로 하나하나 뒤바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시 10:16) “여호와께서는 영원토록 왕이 되시리니 이방 민족들이 그 땅에서 사라질 것입니다.”(시 10:17) “여호와여, 주께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그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시어”(시 10:18) “고아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변호를 맡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다시는 억압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