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나의 안전지대/(시 12:1-8)

미션(cmc) 2013. 9. 27. 08:23

나의 안전지대
(시 12:1-8)

(시 1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 12: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옛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처럼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언행심사에 흠 잡을 것이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시편 기자 다윗을 포함하여 죄와 허물이 전무한 사람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문제 많은 인간들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세상은 점점 더 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생 공존을 위해서 이간 상호간에 어떤 약속이 필요하며 그것을 지키려고 서로 노력하고 만일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합당한 벌을 줌으로 일정한 질서와 평화를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 공동의 약속이 묵시적으로는 도덕과 윤리라는 것이고 그것을 문서화 한 것이 바로 법입니다.
모든 성경은 마치 거미줄처럼 서로 상관되어 있어서 어디를 읽든지 신구약 66권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그와 같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 더욱 이해가 쉽기 때문에 먼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린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시기 전에 이미 근동지방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으며, 역시 그 나라들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질서 유지를 위해 나름대로 법을 제정하여 실행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법은 구약 성경 모세 오경이 아니라 그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오랜 제 6 대 바벨론 왕 하무라비(1792BC-1750BC)가 주전 14 세기경에 만든 전문 282조 안에 민법, 형법, 상법, 소송 법등을 내포하고 있는 하므라비 법전입니다.
모세 오경보다 훨씬 전에 성문화 된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오경과 하므라비 법전과 유사한 점들을 들어 모세 오경이 하므라비 법전을 표절하였다고 비약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은 모세가 만든 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므라비 법전을 표절하실 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모세오경에 하므라비 법전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은 마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덕과 윤리의 근간이 되는 공통된 법인 것처럼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에는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을 처리하는 법도 유사할 수 있는 것이지 표절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워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특별한 기대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하는 이방인들과 차별화된 삶을 살게 하여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들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구원을 받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새로운 나라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 나라의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그들이 지켜야 할 법은 모세를 통해서 기록하게 하신 ‘계명과 규례와 법도’인를 지켜 샬롬이라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 10:13)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그와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순종하기만 하면 개인과 가정과 나라의 평화와 행복은 물론 제사장 나라가 되어 만인을 복되게 하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이방 나라들처럼 인간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간청을 하였습니다.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삼상 8:20)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신 것을 거부하는 배은 망덕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평화와 행복을 거부하는 자살 행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을 세워진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무엇보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나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사울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서 지적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가 무엇보다 큰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울 왕이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나라 안에는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이었습니다.

2. 시편 기자의 처지
오늘 성경의 배경은 시편 기자가 당시에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귀로 들고 체험한 사실들입니다.
이는 당시 사울 왕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는 무리들로 인해 점점 더 사악해져가는 사울 왕의 잘못된 통치로 인해 세상이 점점 더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시편 기자의 심정이 오늘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 1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여기서 ‘끊어지고’ 라는 말(rm'G;(1584, 가마르) )과 ‘없어지나이다’ 라는 말(ss'P;(6461, 파사스) )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끝난 상태를 가리키는 완료형입니다. 이는 세상이 인간의 그 무엇으로도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사울 왕은 본래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를 통해서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실 때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사울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간혹 우리 주변에 보면 평소에는 매우 온순하여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온순해 보이는 사람이 술만 취하면 말이 많아지고 상스러운 욕설을 하고 온갖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왕이 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취한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많은 사람을 억울하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사울 왕을 보고 여호아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삼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울은 점점 더 마음이 강퍅해져서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오로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사정을 하여 진설병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에돔 사람 도엑이 그것을 사울 왕에게 밀고 하자 사울왕은 도엑을 시켜 세마포를 입은 제사장 팔십 오명을 죽이고 그외에 남녀노소 심지어 가축까지 몰살할 정도로 무자비하였습니다.

(삼상 22: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그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로부터 그 같은 소식을 들은 다윗이 듣고서는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삼상 22: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탄식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과연 그 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요? 이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사울 왕권을 개혁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불끈거리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우리 주변에 그러한 명분을 내세워 개인적인 원수에게 복수의 칼을 날리고 정치적으로나 교계적으로 개혁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이 빈번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고 진정한 용기라고 말하고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하여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왜 그러한 정의와 용기를 나타내 보이지 않았을까요?


3. 시편 기자의 믿음
시편 기자는 그러한 처지에서 자신이 세상을 뒤엎고 새롭게 개혁을 하여 억울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쿠데타를 준비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미약하고 비겁한 자처럼 고작 ‘여호와여 도우소서’ 라고 마치 모든 방법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처럼 오직 한 마디 ‘여호와여 도우소서’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여기서 ‘도우소서’라는 말([v'y: 3467, 야샤)은 ‘구출하다, 충분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제한 된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구출’해달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한 한 마디에 제사장의 일가가 멸족을 당한 사건을 시편 기자가 목격하면서 얼마나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까요?

(시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기서 ‘거짓’이란 말(aw]v; 7723, 샤우)은 ‘공허, 헛됨, 허무’ 하다는 뜻이고, ‘아첨’이라는 말(hq;l]j,(2513, 헬카))은 ‘매끄럽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말하는도다’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계속해서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을 내뱉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거짓말과 아첨에 대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느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면 그러한 자들을 보는 시편 기자는 얼마나 속상하였을까요?

(시 12: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가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까닭은 사람은 그들을 어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만은 그들을 용납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음을 시편 기자의 고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여기서 “끊으시리니‘ 라는 말(tr'K;(3772, 카라트) )은 ’잘라버리다‘라는 뜻의 미완료 형으로 악인이 쉬지 않고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과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는 것처럼 제거하여 버리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왜 거짓말 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와 자기 자랑을 하는 자의 혀를 끊으시기를 시편 기자가 기도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그러한 자들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사람들이 경건하고 진실하게 는 것을 보고 나만 하나님을 믿고 나만 진실하고 정직하게 산다고 세상이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낙심을 하고 포기를 하기 쉽고,
둘째는 그러한 자들 때문에 힘없고 연약한 자들이 상처와 손해로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힘으로는 그 악한 자들을 제거하고 세상을 좀더 밝고 희망찬 세상으로 만들 수 없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연약하고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여호와여 도우소서’ 라고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시 1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와 같이 무능력해 보이는 연약한 자의 기도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시편 기자의 기도만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와 자랑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는 가련한 자들과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악인의 손이 미칠 수 없는 안전지대로 옮겨 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여기서 ‘안전지대’라는 말([v'y<(3468, 예샤) )은 ‘ 구원, 안전, 번영, 승리’라는 뜻이고 ‘두리라’는 말(tyvi(7896, 쉬트))은 ‘배치하다, 자리잡다, 지명하다’는 뜻의 미완료 형입니다.
이는 여호아 하나님께서 악인의 거짓과 아첨과 자랑하는 말 때문에 고통을 겪는 가련한 자들을 겨우 구원이 아니라 ‘안전과 번영과 승리’에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전지대가 어디일까요? 어디로 피하면 세상의 거짓과 아첨과 자랑하는 죄악이 홍수처럼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경건함과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의 안전지대가 어디일까요?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간이 사는 곳에는 거짓이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전지대로 주신 곳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이 내뱉는 거짓된 말과는 그 본질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 속에는 진실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치 용광로에서 여러 번 제련한 순수한 은처럼 불순물인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그러므로 가장 완전한 영적인 무장은 말씀의 전신갑주라면 가장 안전한 피난처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비록 지금 자신의 처지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고 그 후에도 사울 왕이 여전히 자기를 죽이려고 할지라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세상에 설쳐대는 거짓된 무리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가련한 자들을 반드시 안전하게 영원토록 보존하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시 12: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여기서 ‘보존하시리이다’ 라는 말(rx'n:(5341, 나차르) )은 ‘지키다, 보호하다, 망보다, 경계하다’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설령 아직도 무가치하고 사악한 자들이 날뛰고 있을 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밤낮으로 지키시고 망보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시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그러한 믿음 때문에 시편 기자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악한 자들을 대적하지 않고 이리 저리 쫓겨 다니는 가련한 삶을 살았지만 마침내 때가 되니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하시고 마침내 다윗을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경험한 시편 기자는 마지막 세상을 떠나기 전 후계자 솔로몬에게 뜻이 깊은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안전지대는 여호와의 말씀 뿐 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왕상 2: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이는 시편 기자가 누구보다 인생의 많은 풍파를 겪었지만 가장 안전한 피난처, 가장 완벽한 안전지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삼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순종하는 삶을 살았음을 뜻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야 말로 거짓의 영이 왕 노릇하는 세상이 아닙니까?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결정되어집니다.
만일 마음속으로 거짓을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서는 거짓말이 나오고 거짓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체는 말이고, 그 말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은 행동입니다.
만일 말이 거짓되고 행동이 표리부동하게 되면 불신 사회가 되고 불신 사회는 법질서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더욱 불법이 성하게 됩니다. 그러한 세상이 바로 불신이 팽배한 말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미 7:5) 라고 경고하였는데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하나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스런 때가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돈이나 명예나 권세 때문에 거짓말에 익숙해질 것이라는 경고하였습니다.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딤후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오늘날 모든 분쟁의 원인은 거짓과 진실을 가리는 게임입니다. 국회나 법정이나 교회 안에서 분쟁을 하는 모든 것들은 둘 중에 어느 한 쪽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만드는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법을 집행하는 법관들을 보십시오, 이단들은 자기들만이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지만 교세를 늘리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죄가 아니라 지혜요, 전략이라고 미화하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거짓말을 마치 진리처럼 말하는 시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세상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고(마 12:39).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고(롬 12:2),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은 우리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약 1:27).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기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해야 하는 말은 ‘사람 살려!’입니다. 만일 물에 빠진 사람이 내가 어쩌다가 물에 빠졌고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자세히 말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물에서 올라오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매우 짧지만 있는 힘을 다해 ‘사람 살려!’ 최대한 소리를 질러야만 지나가는 사람의 듣고 건져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긴급한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짤막한 기도는 "여호와여, 도우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 기도는 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은 변함이 없고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투성이인 인간의 말과 달리 전혀 불순물이 섞이지 아니한 은과 같아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안전지대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용광로에서 일곱 번 단련한 은과 같이 순수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만이 우리에게 최선의 안전지대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그 무엇이 부족하리오.” (시 23:2) “편히 쉬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고이 쉬라 시원한 시냇가로 데려가시네.” (시 23:3) “내게 생기 불어넣으시고 똑바른 길로만 이끌어 주시니 주님이 아니고서야 주님의 이름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리.” (시 23:4) “나 죽음 그늘 드리운 깊은 골짜기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가리라. 주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니 목자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니 하고 많은 시름 사라져 버리고 이 마음 이렇듯 든든하여라.” (시 23:5)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시 23:6)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