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주 날개아래 피하는 자/(시 36:5-10)

미션(cmc) 2014. 7. 14. 11:26
  • 주 날개아래 피하는 자
    (시 36:5-10)

     

    (시 36: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시 36: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 36:10)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요즘처럼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사람들은 온 가족들과 더불어 시원한 피서지를 찾아 온 가족들과 더불어 휴가를 떠날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더위보다 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선하게 살아보려고 할 때 악한 사람들에게 괴롭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악한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을 뿌리치지 못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싸우는 사람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상대방을 이겨야 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때로는 악인보다 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더 악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역사 가운데 가장 무자비한 전쟁이 종교전쟁이었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무자비한 테러배후에는 사악한 종교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악이 어두움이라면 어두움을 이기는 것은 빛인 것처럼 세상에 악을 이기는 것은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악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선을 행함으로 세상을 선하게 만들려는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1. 악의 근원
    오늘 시편 기자는 어느 누구보다 악한 자에게서 많은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시편 기자를 괴롭히는 악인은 철 천지 대원수나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잘 알고, 또한 사랑을 베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처럼 악해진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오늘 성경이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36:1)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시 36: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이라는 말(dj'P',, 파하드)은 악인의 특징은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일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앙’이 악인의 공통점입니다.
     물론 대분의 사람들은 이 말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사항이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독선이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 세계에서는 선악을 논하는 것은 마치 교도소 안에서 누가 더 선하고 누가 더 악한가 하는 것을 가지고 싸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본래 타락한 인간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이유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롬 1:28)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악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롬 1:29) “그들은 온갖 부정, 추악, 욕심, 악한 생각, 시기, 살인, 다툼, 사기, 악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죄에 대한 두려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기가 용감하게 죄를 범한 것을 자랑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시 36:2)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필수사항인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것을 가장 좋아할 자는 사단뿐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사단이 좋아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선과 악은 마치 빛과 어두움처럼 공존할 수 없는 적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에 빠지게 되면 선행을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시 36:3)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여기서 ‘그쳤도다’라는 말(ld'j, 하달)은 ‘그만두다, 끝내다, 중지하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더 이상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을 뜻합니다.
     그 대신 악에 대해서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두 팔을 벌리며 막고,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할지라도 죄악을 포기하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내일 하려고 하는 악을 계획할 정도로 악에 대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악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 36:4)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서 죄악을 ‘꾀하며’라는 말(bv'j, 하샤브)과,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 도다’라는 말(sa'm;, 마아스)이 둘 다 미완료 동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청소년 문제와 사회악을 걱정합니다.  옛말에 ‘호미로 막을 것을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처럼 가정과 교회에서 어려서부터 디모데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 교육으로 심성이 자라가게 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입에다 욕을 달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쳐도 왜 나쁜 것인지 잣대가 없습니다. 타락한 상업주의는 청소년들을 악에 중독되게 하는 그릇된 문화와 상품을 계속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최선의 대안은 어려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선악을 분별하는 잣대인 성경을 가르쳐야 하고 그와 같은 문화가 악의 문화를 몰아내도록 하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십 수년 동안 청소년 사역을 해오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작년 말에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우리 딸이 죽었습니다’라는 전화를 급하게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딸은 불과 22살의 대학교 3학년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고3 때에도 새벽기도회를 나올 정도로 믿음이 좋았고 세속 문화에 물들지 않기 위해 대안학교를 졸업한 후 일반음대 작곡가에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편화된 대학가의 음주, 흡연, 음란, 이기적인 문화를 접하면서도 그것을 잘 극복하면서 학회나 과모임 동기모임과 선배들에 더 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싫어하는 음악과의 여자 선배대학생들이 연습실로 불러서 폭행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충격으로 우울증에 걸려서 많이 힘들어 할 때 그 목사님이 심방을 해서 위로를 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열지 않다가 엄마가 시장에 가느라고 집을 비운 사이에 아파트 10층에서 투신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 여학생을 그렇게 만들었나요? 왜 세상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이것이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대학가의 일부가 아니라 보편적인 현실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만 모인 군대는 어떨까요? 빈번하게 일어나는 총기 사고를 보면 군대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몸담고 있는 직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줄기차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같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일까요?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2. 선의 근원
     오늘 성경에서 시편 기자가 살던 세상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악한 자들이 시편 기자를 까닭 없이 괴롭히고 죽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을 오히려 두려워하며, 그들이 즐기는 죄악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처럼 시편 기자도 악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일이 물론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럴 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칫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라면 그렇게 악한 사람들은 반드시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에 악인들은 더욱더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비웃고 조롱하며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를 마음 놓고 조롱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시편 기자를 보십시오.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시편 기자는 낙심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예화
     여행을 가기 위해 때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을 때 안개가 자욱하거나 태풍 영향으로 먹구름이 뒤덮임으로 대낮에도 어둡게 느껴지면서 과연 비행기가 이륙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기장이 비행기의 엔진을 가동시켜 노려한 솜씨로 활주로를 따라 달려가노라면 어느 새 무거운 동체가 새처럼 하늘로 치솟게 됩니다. 그래도 기장은 저 높은 하늘을 향해 계속 상승하노라면 어느 사이에 먹구름을 뚫고 솜처럼 피어오르는 흰 구름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하늘 위로 나르게 됩니다. 물론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찬란한 태양이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불의만 보지 않고 믿음으로 달려 나가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온 세상에 가득하며, 하나님의 공의는 요지부동한 산과 같고, 주의 심판은 넓은 바다와 같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 36: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여기서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세상을 보살피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힘이 절대라면 세상은 온 통 사자나 호랑이나 표범만이 득실거려야 합니다.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로 힘센 맹수의 개체는 점차 줄어가고 힘이 약한 영양과 같은 사슴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힘있는 재력가나 군력가나 스포츠 맨 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나이 많고 육체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지금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면 세상은 오로지 힘과 돈과 권력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골고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성경 말씀처럼 하나님의 보살피심 때문입니다.
    (시 36: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교회는 벌써 없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고 총리가 되고 국무위원이 되고 국회위원이 될 수 있습니까?
     왜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양로원을 찾고 재래시장을 찾고 장애 시설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에게도 대권주자들이 두려워하는 힘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악의 세력이 한 여름의 잡초처럼 무성하게 보이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코 거꾸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바르게 굴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흔히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그렇게 오만방자하던 악인들이 얼마나 오래 동안 군림을 하던가요?
      때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부패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계곡의 돌처럼 고난 중에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강해지고 거룩하게 정화되는 훈련되어지는 성화의 기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핍박하는 자는 영원하지 못하나 핍박받는 교회는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을 보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자연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한 겨울에 눈이 쌓여도 산은 요동하지 않습니다. 늦가을에 활엽수는 단풍이 지고 낙엽이 되어 만산을 회색빛으로 물들지만 한 겨울에 쌓인 눈 속에 백양목과 같은 침엽수는 푸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든가요?
     인생도 두 종류가 있답니다. 시대를 따라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날씨가 좋을 때는 만산을 신록으로 물들이지만 눈서리가 내리면 죽은 듯이 보신주의에만 급급한 사람과 비바람 눈서리가 몰아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청렴결백한 믿음의 사람도 있답니다.
     전자와 같이 비겁하게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요동치 않는 산위에 사시사철 버티고 서 있는 백향목같은 올곧은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모순 많은 불의한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오늘 시편 기자처럼 불신앙의 먹구름을 뚫고 영원히 인자하시고,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심판자가 되시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유일한 피난처
     우리의 신앙은 흔히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도를 닦는 것이 아닙니다. 돌은 아무리 닦아도 돌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인간일 뿐입니다. 문제는 인간이라고 하지만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은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가 악인들이 득세하여 의인을 괴롭히는 세상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며, 의로우시며, 그 심판은 큰 바다와 같이 요동치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 버리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점차 악에 물들어가는 것을 정의를 실천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악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회의하거나 낙심하고 좌절하며 실의에 빠지는 연약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편기자는 눈을 들어 산을 보며 도우실 이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 임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분명히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인자하심과 정의로우심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마치 넒은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품에 품는 것처럼 악한 자에게도 때를 따라 먹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만이 가장 값비싼 보배가 되시며, 또한 인생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심을 믿고 그 날개 아래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여기서 ‘피하나이다’ 라는 말(hs;j,, 하사)은 마치 공습경보가 내렸을 때 주민들이 방공호 안으로 신속히 피신하는 것처럼,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오래도록 피난한다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축복은 무엇일까요?

      1) 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며.
      어느 누구든지 시편 기자처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기만 하면 겨우 생명만 건짐 받는 것이 아니라 살진 것으로 풍족하게 되고, 축복의 강수를 마시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시 36: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생명의 원천이며 그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아무리 악이 득세하는 세상일지라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정직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한결 같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시 36: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 36:10)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2) 악행 하는 자를 망하게 하실 것이며,
     물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였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금방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단정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할 때 그곳은 악이 발걸음이 미칠  수 없는 가장 안전한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악인을 보복하지 않을지라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이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교만한 자와 악인들의 발과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시 36: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이르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들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시편 기자의 기도대로 악행 하는 자를 넘어지게 하시고, 땅에 엎드러져서 재기 불능하게 하시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을 마치 현실로 이루어진 것처럼 믿었습니다.
    (시 36:12) “악을 행하는 자들이 거기서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여기서 ‘넘어졌으며’ 라는 말(lp'n, 나팔)은 ‘나가 떨어지다, 넘어지다, 드러 눕다, 엎드러지다’라는 뜻으로 시편 기자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보여주며,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은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악인이 결국에 가서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 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주의 날개 아래 피한다는 말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한 사람을 찾는다면 모압 여인 룻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의 시모 나오미가 친정 모압에게로 돌아가서 모압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으라고 자유를 주었지만 룻은 그것을 거절하고 홀로된 나오미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라서 베들레헴까지 따라갔을 때 보아스의 이렇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은 비록 친정인 모압 땅을 떠나 시모 나오미를 따라 낯선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땅에 도착하였을 때 그가 해야 할 일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남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줍는 미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모압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면서 비록 뜨거운 햇살 아래 보리 이삭을 줍고, 또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기는 일을 극진히 한 결과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풍요로움과 복락의 강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부자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나오미를 호강시키고, 다윗의 증조모가 되어 영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에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명문 가문의 조상이 되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복을 받았으니 성경으 약속대로 복을 받았습니다.
    (룻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룻 4: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오늘날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수록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감사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절대자인 것처럼 성경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감히 하나님을 향해 망발을 일삼고,  마치 시무이가 다윗을 비난하면서 돌팔매질을 한 것처럼 교회를 향해 비난과 정죄의 돌을 던져대고 있습니다.
     세상이 막가면 막 갈수록 오늘 시편 기자처럼 더욱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는 삶이란 1) 더욱 주만 바라보고 2) 더욱 주만 의지하고 3) 더욱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4) 더욱 주의 일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5) 힘이 들어도 더욱 헌신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인자하시고,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주의 집에 살진 것과 주의 복락의 강수가 되는 주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배부르고, 시원하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1)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어서 뛰어 들어와야 합니다. 2) 한 쪽 발만 내밀지 말고 온몸으로 던져서 들어와야 합니다. 3)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들어왔다 나갔다가 하지 말고 온전히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반드시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영적인 풍요와 승리의 영광을 얻게 되고, 영원히 줄이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시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 36:7) “하나님이여, 주의 변함없는 사랑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요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두가 주님의 날개 그늘 밑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습니다.”(시 36:8) “주님의 집에서 그들이 마음껏 먹습니다. 주님은 기쁨의 강에서 물을 길어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십니다.” (시 36:9) “주님께 생명의 샘이 있습니다. 주님의 빛을 통하여 우리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시 36:1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고, 마음이 올바른 사람들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