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시 53:1-6

미션(cmc) 2015. 3. 24. 09:22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
(시 53:1-6)

(시 53: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53: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 53:4)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53:5)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시 53: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오늘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최소한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을 한결같이 찾으시고 계시다고 성경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마치 수도승처럼 일년 365일 내내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누가 예배를 잘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만을 지켜보고 계시는 분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섭리하시고, 특히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 한 사람 한사람을 친히 돌보시는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마치 성경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러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갈 때는 전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우리가 믿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여기서 ‘두루 감찰하사’라는 말(fWv, 슈트)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라는 뜻의 분사형입니다.
 만일 불신자는 말할 것 없고 예수를 믿고 지금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만이라도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의 일거 수 일투 족을 다 지켜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의 사생활,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문제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모든 언행심사를 지켜보신다’는 성경 말씀을 알면서도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전혀 그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안보시고 모르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불신자와 다름이 없는 삶인 것입니다.

 1. 어리석은 자
 성경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반대말은 어리석다, 미련하다, 우둔하다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굉장히 기분 나쁜 말이고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의외로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1) 지혜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지혜롭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식이 없거나 부족하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불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잘못 판단을 하여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부족한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바르게 살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일을 위해 잔머리를 굴려 비양심적이고 불법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지식은 자신의 지식을 악용하여 스스로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헛배웠다고 말합니다.

 2) 정반대의 경우는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나 소유나 지위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양심을 속이고 불의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고 매사에 근면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주변에서 그 사람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또 많은 일을 맡긴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지식이나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지식과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고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 오늘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 배운 지식이나 소유가 부족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는 불신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53: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라는 말(lb;n:, 나발)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무감각한, 분별이 없는’이라는 뜻으로 그의 부모에게 근심을 주고 낙심하게 하는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 말이 민족이나 국가에 적용되어질 때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배은 망덕하는 백성’을 뜻하였습니다,
(신 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어리석다는 말은 무식하거나 실수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배은 망덩하는 백성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와 같은 불신앙이나 불순종의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그와 같은 불신앙의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그 마음이 부패해져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을 하게되고 그럴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 53: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앙과 삶은 별개가 아니라 마치 나무뿌리와 줄기처럼 밀접하게 연락되어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가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본래 하나입니다. 곧 ‘사랑하라’입니다.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의 상호관계는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이웃을 사랑하거나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범죄 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담대해져서 나중에는 가증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사람이 선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것이고.  악을 범하거나 선을 행하는 것은 외형적인 것이기 때문에 서로 무관한 것 같지만 외형적인 악은 내면적인 불신앙에서 돋아난 불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형벌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이니 그런 사람이 아무리 지식이나 소유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그와 같은 죄를 범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롬 1: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그와 같은 어리석음의 본질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리켜 오늘 성경은 어리석은 자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 53:1)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이나 소유, 더 높은 지위와 권력은 혹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부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교만하여져서 더욱 악하게 사는 것을 보게 될 때는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보신 세상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있는가하여 세상을 굽어 살피셨을 때 다 어리석음에 빠져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 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뿐만 아니라 다 한결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으로 뒷걸음질을 하여 타락한 자가 되어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시 53: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여기서 ‘물러가’라는 말(gWs 수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 타락해버린 상태를 뜻하며 그 결과 선을 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1) 사람들조차 어리석은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조차도 가증한 일을 행하는 악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마지막에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만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죽음과 심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불신앙에 빠져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삶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시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시 53:5)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

 1) 구약 시대
  인간의 타락과 죄악은 어느 시대나 다 있지만,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신론자들의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 다 타락해 버리고 세상은 폭력과 음란과 갖가지 죄악이 홍수처럼 덮어버린 세상이었습니다.
 (창 6: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창 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세상을 내려다보시면서 심정이 어떠하셨는지 마치 사람의 심정처럼 의인화하여 성경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악행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악을 굽어보시면서 하나님이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여기서 ‘한탄하사’라는 말(!j'n:, 나함)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으로 대신 표현한 신인 동형론으로 ‘후회하다’는 뜻의 와우계속법입니다. 또 이어서 ‘근심하사’라는 말(bx'[;, 아차브))도 ‘몹시 슬퍼하다, 감정을 상하게 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으로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신약 시대
 가)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신 시대도 노아 홍수 심판 시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시대를 가리켜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홍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사람들이 시집가고장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나) 사도 바울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 무신론 황제들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심한 박해를 받을 당시 사회상도 오늘 성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세상을 굽어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삶을 살던 노아시대의 사람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기독교를 핍박하고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이 가득했던 로마제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렇게 심판하신 것은 다음세대가 그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직한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상을 굽어 살피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을 때 노아 한 사람만 끝까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노아를 보시고 칭찬하시기를 당대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노아가 불의한 시대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고 에녹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께서 그러한 노아와 그 가족에게 은혜를 쏟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살던 시대는 눈에 보이는 유혹들이 많았지만 노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친구도 이웃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오로지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즐기는 쾌락주의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는 세상에서 노아가 그들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불이익은 얼마 심했을까요? 그럼에도 그것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노아의 의지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되었나요? 왜 다른 사람들은 노아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을까요?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서 ‘완전한 자’라는 말(!ymiT, 타밈)은 ‘흠없는 건전한, 정상적’이라는 뜻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말(&l'h;, 할라크)은 ‘가다, 오다, 걷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확고부동한 상태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시편기자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이 시편 기자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편기자를 죽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시편 기자와 함께하셔서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사는 길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산성이고 방폐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요 또한 가장 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만일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무엇을 의지하였다면 끝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였을 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시편 기자를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도 평생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이 아무리 머리를 쓰고 많은 군대를 풀어 다윗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사울왕에게 쫓기는 몸이었지만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다윗은 결국 승리하였다면,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시 53:6)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과연 어느 누가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굽어 살피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악을 일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평강과 기쁨이 없고 두려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악인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자는 한 평생이 두려움의 연속이며 또 그 마지막이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잠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부귀권세가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머나 먼 여행길을 혼자서 걷는다면 외롭고 피곤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와 동행을 한다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혼자서 가는 것보다 좋은 친구와 더불어 동행을 한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과연 그 좋은 친구가 누구일까요?
 인생을 굽어 살피신 하나님께서 죄와 동행하며 사망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따라 오너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삼십 삼년을 사시면서 우리 인생들의 삶을 친히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와 필요와 문제점을 너무나 잘 아실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굽어 살피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친히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삶은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길에 동반자로 모셔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