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말씀을 이루시려고 /마 21:1-11

미션(cmc) 2015. 3. 31. 15:55

말씀을 이루시려고 
(마 21:1-11)

(마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마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고난조차도 할 수 있으면 감하려고 비싼 수임료로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하물며 자기가 어떤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모면해 보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사람을 사형시키는 방법이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미리 다 아셨을 때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일을 엉겁결에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말씀하실 정도로 이미 다 아셨습니다.
(마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마 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만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인기가 많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면 그 같은 채찍과 십자가에 죽음을 얼마든지 피하 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셨을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그래야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보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가 최우선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일이라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신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십자가에 달려 처절한 죽음을 죽으시기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오로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데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을 전 생애에 역점을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조상 첫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죽음과 심판이 찾아왔기 때문에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시고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기기 위함이었습니다.

 1. 예수님의 순종
 마리아와 정혼을 한 요셉이 마리아가 자기와 무관하게 임신한 사실을 눈치 챘지만 그것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곤란하게 만드는 대신 가만히 파혼을 하고자 하였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현몽하기를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모든 일들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란 이사야 7:14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잠잠히 그 모든 짐을 짊어졌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세상에 왔으며 사람들은 혹시 그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호기심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서두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나 관심에 의해서 무슨 일을 결정하시지 않고 과연 그것은 선지자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타이밍을 잡으셨습니다.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성경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통해서 이미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에서부터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는 순종에다 초점을 맞추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uJpakohv, 휘파코에)은 ‘복종하다, 듣다’ 라는 뜻으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최우선을 하셨음을 뜻합니다.
 [롬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순종이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아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 따먹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이미 구원이 충분함을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절대 진리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구원을 말하는 것은 이단일 뿐 아니라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한 것처럼 말하는 것도 이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그처럼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그와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첫 아담의 불순종과는 분명히 대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한 순종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을 통해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종려주일부터 한 주간 우리가 ‘십자가의 순종’이라는 주제아래 매일 새벽마다 십자가의 순종을 깨닫고 본받아 실천함으로 더욱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여 지고,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축복의 특새기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제자들의 순종
 예수께서 전에 예루살렘에 몇 차례 올라가신 적이 있으시지만 오늘 성경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연례 행사였으나 오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눅 2: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요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물론 그 중요성을 이미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거듭해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러나 그 사실을 예수님은 미리 아시고 하나하나 준비를 하셨지만 과연 오늘 성경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종전과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과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과는 무엇인가 다른 점이 있어야만 구분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데 이미 성경에는 그런 것까지 자세히 예언을 해 놓으셨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물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은 나귀를 타고 어떤 사람은 걸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으시지만 슥 9:9에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지금 그와 같은 나귀가 없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과 걸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지 나귀를 타시거나 나귀새끼를 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리상 약 3km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태여 나귀를 타시지 않고서도 무난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나귀를 구하셔야만 하였습니다. 어떻게 구하셨을까요? 물론 아는 베다니 마을에서 주무셨으니 나사로에게 부탁을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전날 베다니 마을에서 일박을 하신 후에 나귀 새끼를 준비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직접 가시지 않고 제자 둘을 맞은 편 벳바게 마을로 보내어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나귀새끼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마 2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을 주시면서 구해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석가들처럼 예수님이 제자들 모르게 사전에 약속을 해놓고 가서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벳바게 동네에 여러 집에 나귀가 있었을 터인데 어느 집이라고 명시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무조건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생각할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든 것처럼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제자들이 얼마나 순종을 하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1) 제자들의 순종
(마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오늘 우리가 생각을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제자들이 무조건 순종하여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직입적으로 우리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새끼를 빌린다고 선뜻 내어준다고 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까 나귀의 주인이 재산 목록 제 1 호에 해당하는 나귀를 제자들에게 순순히 내주는 것이었습니다.
(막 11: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막 11: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막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2) 주인의 순종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직접 나귀의 주인에게 찾아가서 나귀새끼를 빌리신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보는 낯선 사람들이 나귀 주인에게 찾아와서 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얼언 반구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내어준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나귀를 서로 빌리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특별한 일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이로써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경에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같은 일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하나하나 이루심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메시아의 고난의 여정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3. 환호하는 무리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옴에 따라 예수를 옹위하는 무리들의 감정도 점차 고조되어 나귀가 나뭇가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에 따라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나무에서 가지들을 꺾고 그것들을 길에 깔아놓는다고 하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예수님을 왕으로 환호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펴거나 손에 들고 흔드는 것도 왕을 영접하는 고대의식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被造物)들의 고대하던 평화의 왕이 입성을 하시는 것이라면 당연히 백성들의 환호가 있어야 합니다.
(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지금까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 무관심하던 무리들이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왕의 행차처럼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각 나라와 지방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난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 찬 무리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 열정이 빵 터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환호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야, 곧 로마의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잘못 인식하고 예수를 평화의 왕이 아니라 세속정권을 잡을 통치자로서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의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정적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포악한 왕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1) 호산나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환호하는 무리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호산나’ 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하는 뜻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지 않았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 질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환호소리를 기대하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무리들의 겉과 속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얼마 가지 않아 예수님을 환호하던 그 입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면서 배신할 것도 이미 다 아셨습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만일 예수님이 사람들의 환호성에 기대를 거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로마정권에서 구원하여 줄 왕이 되기를 기대하고 환호하였으나 빌라도 총독 앞에 무기력한 자세로 아무런 대응도 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게 된 것입니다.

 2) 성안 사람들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소리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따랐던 성밖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까요? 각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순례객들이 어림잡아 200-300만명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번지는 산불처럼 예루살렘 성을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여기서 ‘소동하여’라는 말(seivw, 세이오)은 ‘흔들다, 전율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입성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가? 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 안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하였을 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소동할 때 도대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이가 누구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소동을 하는가? 라고 질문을 하였을 때 한 대답은 다윗의 자손이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요! 라는 환호성과 달리 예수님을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라고 비하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만일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지 않았다면 길가에 있는 돌들이 오히려 소리 질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1: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여기서 ‘나사렛’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라나신 고향을 비하하는 말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입니다. 또 ‘선지자 예수’라는 말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말과도 사뭇 격이 다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 힘들고 어렵지만 그럴만한 명분이 있으면 비록 힘이 들어도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국자들은 단지 나라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진고초로 다 당하고 순국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환호하는 무리들을 위해서라면 혹 죽으실 수 있는 명분이 될지도 모르나
 1) 환호하던 그들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배신하게 될 것을 다 아시고
 2)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 나사렛 선지자로 십자가에 달린 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최대의 명분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을 변경하거나 중단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리는 일에는 예수님처럼 무조건적이고 적극적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고난주간이 되어야겠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결국 더 큰 고난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고난이 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결국 고난은 축복과 영광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 2:5)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시다.” (빌 2:6)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빌 2:7)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빌 2:8)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빌 2:9)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빌 2:10)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빌 2: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명분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최대의 명분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점차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이성이 신앙을 대체하고 인간의 감정이 신앙보다 더 우선시 되면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순종’이라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주어졌을 때 오늘 성경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순위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다가 보니 순종이라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자유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순간 모든 자유를 다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을 배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순종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그 만큼 내  영혼이 깨끗해지는 일이며, 내 마음에 사랑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먼저 알고 그 예수님의 삶을 본받고 그 삶의 근본인 마음을 먼저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의 마음입니다.
 고난주간 한 주간만이라도 우리 마음에 깊이 묵상해야 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우리도 배워 실천하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지혜요, 그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승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