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돕는 이가 누구입니까?
(시 54:1-7)
(시 54: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 54: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54: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시 54: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 54: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시 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시 54: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인생은 한쪽 어깨에는 생존이라는 짐과 또 다른 어깨에는 죽음이라는 짐을 지고 힘들게 고갯마루를 오르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짐은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자신만의 몫입니다.
1) 만일 질병에 걸렸다면 약을 사다주고, 병원에 입원하는 것까지는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아프거나 대신 수술을 받을 수 없습니다.
2) 만일 불의의 사고나, 사업의 실패나, 비리에 연루되어 수감되어야 할 때는 어느 누구도 역시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없는 짐들입니다.
3) 물론 그와 같은 짐들은 예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들이 지고 가야만 하는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짐입니다.
아무리 부귀권세를 누리고 사는 사람도 아무리 젊은 사람일지라도 벗을 수 없는 짐입니다. 설령 사랑하는 자식이고, 사랑하는 아내일지라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짐입니다.
평소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의사에게 그 병을 맡기고, 물질적으로 어려울 때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습니다.
그처럼 누구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반드시 짊어져야 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의 짐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벗지 못하는 죄악의 짐과 죽음의 짐을 맡겨 버릴 곳이 세상에 아무데도 없는 것일까요?
만일 내가 반드시 져야만 할 짐이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 줄이, 내 힘으로는 질 수 없는 죄악과 죽음과 심판의 짐을 대신 저줄 이가 과연 누구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을 상실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물론 이스라엘 주변에는 하나님 대신 미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만은 미신이나 우상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 시편 기자 다윗은 사울왕의 사위입니다. 사위는 사랑하는 딸의 남편이고 그 남편이 죽게 되면 제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백성들이 자기보다 사위에 대한 인기가 더 높다는 것 때문에 시기심에 눈이 멀고 노예가 되어 자그만 치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서 마치 이 잡듯이 수색하여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무엇 때문에 자기 사위인 다윗을 그렇게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좋은 것을 선물하는 것이기 전에 아무것도 주지 않을지라도 미워하거나 시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울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일개 국의 왕이었으나 사랑을 상실했을 때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는 대신 고통을 주는 어리석은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사람들이 최고의 소망은 왕이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이고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하였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갖추어야 할 사랑을 상실하면 그 사람은 더욱 추악해지는 것입니다.
그같은 사울 왕은 자기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옹호한다고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할 정도로 시기심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은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을 상실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를 본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사울 왕의 주변에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충고해주는 충신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일입니다.
오히려 사울 왕의 주변에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사울 왕의 편에 붙어서 고자질을 하고, 아첨을 하여 점수를 따려는 사람들만 많았습니다.
더구나 다윗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는 사울 왕을 돕는 사람들만 점점 늘어 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다윗과 달리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 54: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2.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사울 왕이 사랑해야 할 사위 다윗을 미워하여 사방에 군대를 풀어 수색하는 바람에 블레셋 국경 지대의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블레셋 군대가 그일라 지방을 침략해 왔습니다.
사울왕은 한 개인에 대한 시기심과 증오심에 노예가 되어 나라의 안위에 무관심한 결과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항상 나라를 걱정하고 국민들의 안위를 염려해온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자기 때문에 국가의 안위가 위태하게 되었다는 책임감과 나라 사랑에 대한 열심 때문에 이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결재를 얻어 신속하게 그일라땅으로 달려가서 불레셋의 침략을 물리쳤습니다.
물론 그것은 다윗에게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부하들이 만류하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자기의 위치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것은 그만큼 나라와 국민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삼상 23: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한지라”
그것은 사울 왕에게 자기의 위치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마치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것은 그만큼 나라와 국민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이 자기들을 블레셋 군대에게서 건져 낸 생명의 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기 때문에 다윗은 그곳을 떠나야만 하였습니다.
다윗을 좇던 사울왕은 이 사실을 알고 그일라를 가다가 돌이켜 다윗이 숨어 있다는 십광야로 방향을 돌이켜 매일 다윗을 찾았으나 잡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 왕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그처럼 다윗이 끝까지 사울을 피한 것은 결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비록 고통스럽게 사울을 피하여 다닐지 언정 공격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가 전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가 옳은 대로 행동하는 불신앙의 사람의 눈에는 다윗이 마치 바보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3. 시편 기자의 믿음
십 광야 사람들은 사울 왕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다윗이 자기들과 함께 십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 있다고 사울에게 고발을 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은 군대를 풀어 다윗이 숨어 있는 곳으로 점점 압박하여 마침내 광야 남쪽 마온 황무지에 다윗이 숨어있는 산을 마주 보고 다윗을 에워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나아가기만 하면 다윗을 능히 잡을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삼상 23: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이제 다윗은 독안에 든 쥐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윗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 때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시 54:1)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과연 그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이 같은 기도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려고 했다면 벌써 도우셨을 것입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하나님이 손을 쓰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백날 기도를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낙심하며 지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대를 꽉 붙잡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를 돕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시 54: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여기서 ‘돕는 이’라는 말(rz"[; 아자르)은 ‘원조하다, 지원하다’라는 뜻이고, 생명을 ‘붙들어’라는 말(&m's;, 사마크)은 ‘지탱하다, 지지하다, 지원하다’라는 뜻으로 둘 다 분사형으로 ‘현재 ’돕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곧 사울의 손에 잡힐 것 같은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하나님이 이미 돕고 계신다고 믿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불의한 사울 왕과 달리 정의로우시고 성실한 분이기 때문에 결코 자기를 원수의 손에 넘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시 54: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같은 위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시 54: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자기가 위기를 만났을 때 아무도 돕는 자가 없고 다 하나 같이 원수의 편이 되었으나, 유일하게 하나님만은 1) 자기를 환난 중에서 건져내시고, 2) 원수는 보응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시 54: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과연 그와 같은 믿음의 시편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울 왕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다윗을 잡았다고 쾌재를 부르려는 그 순간 갑자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삼상 23: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말입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사울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하필이면 블레셋 군대가 처들어 온 것입니다.
만일 그대로 방치한다면 나라가 통째로 블레셋의 손에 넘어가서 나라가 멸망하게 될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던지 사울은 블레셋을 막기 위해 다윗을 좇던 군대를 회군하였습니다.
(삼상 23: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 전에 그 후 계속되는 블레셋과의 전투 중 길보아 패전하여 중상을 입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였습니다.
(삼상 31: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삼상 31: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하나님이 그를 도우심으로 죽지 않고 살아서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영광스러운 가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나의 잘못으로 인해 실패하기도 하고 내 딴에 최선을 다했으나 오히려 더욱 어려움에 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니 다윗이 비록 사울에게 쫓겨 다니지만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지금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 같지만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하는 것, 아직까지 건강하다고 하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여기서 ‘붙드심이로다’라는 말(&m's;, 사마크)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의지하다, 기대다, 지탱하다, 지원하다’라는 뜻입니다.
1) 누구도 병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몸에 좋다는 것을 찾고 열심히 운동도 하지만 건강을 보장하지 못하며 때로는 불치의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2) 누구도 자기가 하는 일이 성공하기를 원하여 최선을 다하고 심지어 빚까지 짊어지고 하루도 쉬지 못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불경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과 도산과 폐업을 합니다.
3) 설령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고난과 수고를 겪었을 것이며 그 행복을 누리는 기간은 몇 년이 되지 못하고 살만하면 병들고 살만하면 늙어지는 것이 유한한 인생입니다.
4) 더구나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고없이 불쑥 찾아오는 강도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한번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가지고 가지 못하고 오직 빈 몸으로 홀로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도 그러한 나에게 찾아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 오라고 내가 너희를 쉬게하겠다고 나의 짐을 대신 지시겠다고 자원하시는 짐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만 예수님은 나의 질고와 나의 죄악과 나의 죽음의 짐을 대신 지시기 위해 죄없는 몸이 죄인처럼 취급을 받고 온갖 모욕과 채찍과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묵묵히 나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때 나는 주님을 몰랐고 그 때 나는 주님을 부인했었고 그 때 나는 주님을 불신했으나 그래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래도 주님은 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내게 무슨 신세를 지셨나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딱 하나 나같은 것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런데 왜 나는 아직까지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랑은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짝 사랑을 원치 아니하시고 나도 그와 같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반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그 하나님께 믿음의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바다에 뛰어내린 사람이 마치 헬리콥터에서 내린 구명대 밧줄을 믿음으로 꽉잡기만 하면 그 몸이 바다에서 끌어 올려지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믿음으로 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꽉 붙잡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은혜를 내게 주시려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렇게 하기만 하면 나의 현실은 여전하지만 나의 마음은 크게 달라졌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시편 기자처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히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그 이유는 나를 돕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는 까닭은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행복입니다.
(창 49: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오늘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분명히 나를 돕고 계시며 또한 도우실 것을 믿고 안심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기뻐하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향하신 뜻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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