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윈도우'일사각오 주기철 목사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55년이 지났다.
교회는 그를 면직하기도 했으며 사면하기도 했다. 그의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고 유혹하기도 했으며 그의 신앙을 본받자며 소리지르기도 했다. 그의 삶과 죽음을 깎아 내리기도 했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를 면직하고 그의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 했고 그의 삶과 죽음을 깎아 내린 것이 한 시대의 대세였다면, 그를 사면하고 그의 신앙의 절개를 본받자 떠들고 그의 삶과 죽음을 추겨세운 것 역시 한 시대의 추세를 따른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우리는 부끄럽다. 시대를 거역하며 진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그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치닫고 있던 1935년 5월 금강산에서 열린 총회 주최 목사수양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설교를 한다. 『예언자의 권위』가 그날의 설교 제목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신사참배 수용 쪽으로 굴절되어 가는 교회 앞에서,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세례요한을 이야기했다.
저들은 누구인가? 바알 우상에 굴복하고 나봇의 포도원을 늑탈한 아합 왕을 엄책한 이가 엘리야였다. 시대와 대중에 아부하지 않고 시대가 태평성대를 노래할 때 망국을 외친 「매국도」, 대중이 절망의 구릉에 빠져있을 때는 소망을 노래한 이가 예레미야였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헤롯왕의 죄를 고발한 이가 세례 요한이었다. 저들은 한결같이 절대 권력에도 대중에도 영합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주기철은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을 얘기함은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지금을 문제 삼기 위함이었다. 『여러분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으면 엘리야의 권능,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이다. 오늘 목사의 권위는 서는가, 못 서는가?』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레미야의 입장에 서있지 않은가?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외치는가?』 『생살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녹스도 일사각오했던 것이요, 루터도 물론 일사각오였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여러분 몰라서말 못하는가! 왜 벙어리 개가 되었는가? 오늘 목사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경찰관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결국 여기서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평양형무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9년 전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의 예언자적 삶은 가로막을 수 없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며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그리고 총회 후에 총회 「수뇌부들」은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양심의 가시, 주기철 목사가 없는 자리에서(총회 직전 일제는 주기철 목사를 수감하는 사전 공작을 했다) 그들은 일제가 제공한 타협안에 좇아 신앙 양심을 저버렸다. 그들에게 주기철의 고집은 헛된 것이었다.
그의 신사참배 거부와 죽음을 「헛된 죽음」 「자기 학대」 「계율주의」 「독선」 「가련한 보수주의」로 폄하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주기철을 죽이고 조선 교회를 농락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그 논리를 충실히 따랐다.
한편 그렇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 맞는 말이다. 일제는 그들의 「천황」을 「현신인」(顯神人)이라 했다. 「살아있는 신」 천황과 그 조상을 숭배하는 국가신도(國家神道)의 나라, 일본에서 국가는 곧 절대자 그 자체였다. 「천황」과 「국가」라는 절대자에 절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다.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자 국가종교의 종교의식이었던 것이다.
또 더러는 주기철 목사를 민족주의자로 칭송하기도 한다. 신사참배 거부는 곧 일제에 대한 항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황과 일본에게 절하지 않은 주기철은 조선 민족도 숭배하지 않았음에 조심해야 한다.
우상숭배와 사치향락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으며 심지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극언했던, 그래서 「매국노」라 불렸으며 끝내는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돌맞아 죽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설교하고 따르려 했던 이가 바로 주기철이었다. 해방 후 북한 정권이 「반일투사」에 대한 감사와 기념의 표시로 금일봉을 주려하자 오정모 사모는 그것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못 받습니다. 우리 주목사님은 항일 투사가 아닙니다. 일본에 항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 마귀를 배격한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면, 신사참배하도록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를 설득하기 위해 왔다가 주기철 목사와 밤새 격론을 벌였던 일본기독교회대회 의장 도미다와 별다를 바 없다.
민족주의는 상대적이다. 주기철 목사는 민족을 초월한 절대 진리를 위해 싸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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