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회인가?
(더 1:9-12)
(더 1: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더 1:10)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령하여』(더 1: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더 1: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전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는 말씀처럼 하늘아래서 모든 일에는 정한 때와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농부가 씨를 심을 때가 있으면 반드시 거둘 때가 있는 법입니다.
만일 그 기회를 놓치게 되면 늙어서 후회하게 되고 다른 사람이 풍성한 수확을 맺었다고 기뻐할 때 아무것도 거둘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할 때인가를 분별하여 적절한 처신을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 보내는 것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면서 주어진 기회를 남용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오늘이라는 날이 어떤 기회라고 생각됩니까?
1. 이방 땅의 유다 백성들
성경은 소설처럼 가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성경도 주전 460 여 년 전에 실재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은 황제입니다. 일반 세계사에서는 크세르크세스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더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이를 입증하는 또 다른 성경이 다니엘 서에 기록된 아하수에로 왕의 연대기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 다리오 왕이라고 하였는데 이 다리오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성전을 건축하게 한 왕입니다.
(단 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라 6: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이를 미루어 볼 때 바벨론 제국에게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이 멸망함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고난 받던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렘 25:11)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그 정한 기간이 차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 과거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 지역으로 집단 이주를 시켜 뿔뿔이 흩어놓아 단합하지 못하게 하였고,
2) 또 바벨론 제국은 패한 수많은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는 강압정책을 썼으나,
3) 페르시아 제국은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인도주의 적인 온건 정책을 썼습니다.
그 때문에 스룹바벨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귀환한 제1차 귀환과(B.C. 536), 에스라에 의한 제2차 귀환(B.C. 457) 및 느헤미야의 제3차 귀환(B.C. 444)의 중간 기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대아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아직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못한 유다 백성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강대한 제국이었는가 하는 것을 전 제국이 127도였다고 하는 오늘 성경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1:1)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는 왕이라”
여기서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페르시아 제국은 현재 이란을 중심으로 하여 인도, 파키스탄 인더스 강 유역과 수단 북부 에디오피아 지역과 유럽의 반가량을 영토로 한 광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 전지역에 흩어져 70여년을 살아가고 있다면 누가 그들을 한데 뫃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페르시아 제국 안에는 유다 백성들을 미워하는 반 유다주의자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최측근인 하만을 비롯해서 그 일파들이 전 제국 곳곳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반 유다주의자들이 도성 수산에만 오백여명이 살고 그 대표자가 하만이었다면 하만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면 누가 유다 백성들을 그 손에서 구원하여 낼 수 있을까요?
(더 9:12)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이르되 유다인이 도성 수산에서 이미 오백 명을 죽이고 멸하고 또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니 왕의 다른 지방에서는 어떠하였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레미야 선지자가 칠십년 포로기간이 다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 제국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는커녕 생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포로가 되었던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불가능한 일은 없으시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시는지 에스더 캠페인을 통해서 차근차근 살피고자 합니다.
2. 아하수에로 왕의 계획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한지 삼년이 되었을 때 전 제국에 흩어져 있는 지방관과 신하와 장수와 귀족과 지방관들을 수산 궁으로 초대하여 장장 180일 동안 바사와 메대라고 일컫는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을 자축하는 대 연회를 벌렸습니다.
(더 1: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여기서 ‘영화로운 나라’라는 말(d/bK;, 카보드)은 ‘모든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나라’라는 뜻이고, ‘부함’이라는 말(rv,[ 오셰르)은 ‘재물과 재산’이라는 뜻으로 국부를 뜻하며, ‘위엄’이라는 말(hl;WdG], 게둘라)은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전 페르시아 제국의 지도자들을 한 곳에 초청하여 잔치를 벌림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위대함을 만 천하에 알리고 페르시아 전역의 지도자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위해 아하수에로 왕은 금잔을 준비하여 왕이 하사하는 어주를 마시게 하였는데 금잔의 모양이 제각기 달랐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것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더 1:7)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치는 무질서하고 퇴폐적인 잔치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지 않고 본인의 희망에 따라 자유롭게 마시게 한 것을 볼 때 질서가 있는 잔치였습니다.
(더 1:8)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여기서 ‘억지로’라는 말(sn"a, 아나스)은 ‘강요하다, 강제하다’라는 뜻으로 왕이 벌린 잔치는 법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술을 강제로 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이 대대적인 잔치를 벌인 목적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즉위한지 삼년이 되면서 자기 나름대로 큰 업적을 이루기 위해 당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제국 침공하는 일을 위에 결집을 목적으로 한 잔치였다는 성경학자들의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수에로 왕이 페르시아 제국의 번영을 축하하며 신하들이 나누는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요 앞으로 헬라 제국과의 전투에서 더 많이 흘리게 될 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아하수에로 왕의 계획에 대해서 어떻게 섭리하실 것인가? 하는 것은 이번 에스더 캠페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3. 왕후 와스디의 폐위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를 벌인지 제 칠일이 지났을 때 무척이나 고무되면서 자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왕후와 사는지를 신하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곧 일곱 명의 내시에게 왕후를 잔치 자리로 불러 오도록 명령을 하였습니다.
(더 1: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물론 그것은 사전에 계획되었거나 와스디 왕후에게 사전에 의논했던 일이 아니라 요즘 흔히 말하는 깜짝쇼였습니다.
이 때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처럼 페르시아 왕궁의 여인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습니다.
(더 1: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이를 볼 때 왕후 와스디는 내치를 잘하는 총명한 여자처럼 생각됩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 도중에 왕후 와스디는 왕이 보낸 일곱 명의 내시들로부터 왕앞에 출두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왕비의 미모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1: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전국 각지에서 수 많은 아리따운 여인들 가운데서 뽑고 뽑은 왕후였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것은 짐작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그와 같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싫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더 1: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여기서 ‘싫어하여’라는 말(@aem, 마엔)은 끝까지 ‘거절’하였음을 뜻하는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입니다.
또한 ‘진노하여’라는 말(#x'q 카차프)도 ‘화내다, 격노하다’라는 뜻의 와우 계속법 미완료 동사로 쉽게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끝까지 분노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당시 아무리 왕후라고 할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왕에게 불쑥 나가면 죽는다면, 정반대로 왕이 왕후를 불렀을 때 응하지 않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더 4: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물론 그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왕후 와스디가 왜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요즘도 중동의 과격파 무슬림 국가의 여자들은 한 여름에도 머리와 몸은 물로 심지어 겨우 두 눈만 내 놓고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니캅이라고 하고, 심지어 눈조차 망사로 가리는 것을 부르카라고 합니다.
무슬림의 그 같은 전통이 어디서 왔을까요? 물론 이슬람 종교가 생기기 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동 지방의 전통 문화를 이슬람이 채택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왕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왕후 와스디는 만조백관들 앞에 몸을 보이라는 왕의 명령에 선 듯 순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가 자기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하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불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전례를 따라 신하들과 의논했습니다.
(더 1: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왕의 신하들은 왕후 와스디에게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왕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정죄한 것은 오래 동안 내려온 가부장 중심, 남자 중심의 시각에서 문제를 해석하였습니다.
만일 이번 기회에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지 않으면 페르시아 전역에 사는 모든 여자들도 여인들도 남편의 말에 복종하지 않고 남편들을 멸시할 것이라고 확대 해석하였습니다.
(더 1: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그러므로 왕의 신하들이 와스디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은 왕비의 자리를 박탈시키고 폐위를 하고 새로운 왕비를 뽑자는 건의를 왕에게 하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도 이에 동의를 하고 마침내 왕후 와스디를 폐회하기로 결정하였숩니다.
(더 1: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그것만이 아닙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 모든 여인들은 남편을 존경해야 할 것을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왕의 명령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각 종족의 언어로 하달하였습니다.
(더 1:22)『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이는 아하수에로 왕이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1) 아하수에로 왕은 전국 187도의 지도자들과 만조백관을 불러 잔치를 벌린 것은 자신을 과시하는 기회로 계획을 세웠으나 결과는 왕비 와스디의 거절로 말미암아 페르시아 대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여지 없이 손상되고 말았습니다.
2)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그 잔치를 통해 왕비 와스디의 아름다움을 온 신하들에게 자랑할 기회로 삼았는데 정반대로 왕후 와스디의 거절로 말미암아 와스디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남편의 말을 거역하는 악녀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3)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를 통해 국력을 결집하여 헬라 제국을 침략하는 동력을 얻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 전투에서 크게 패배함으로 말미암아 페르시아 제국의 약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B.C. 480-B.C. 479)
그래서 상심한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기회를 유다 백성 에스더가 왕후로 간택되는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B.C. 478)
왕비 와스디의 퇴위는 하만의 음모로부터 바사 제국에 흩어져 있던 히브리 민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히브리 처녀 에스더를 왕비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전초 작업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소리 없이 일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십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교훈 받아야 할까요? 에스더 전체에는 하나님이란 이름도 하나님의 역사도 전혀 나오지 않는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깨우쳐주고 있나요?
1)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유다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기초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왕의 강퍅한 마음을 통하여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고, 가룟 유다를 배신을 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심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셨습니다.
만일 아하수에로가 이 연회를 배설하지 않았더라면 왕후 와스디가 폐위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스더가 왕후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에 살던 유다 백성들은 하만의 모략에 의해 다 죽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하여 죽음 직전의 위기에 처한 유다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심으로 훗날 메시아 탄생의 발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오늘 우리가 교회 밖에서의 일상적인 삶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일조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건강합니까? 부요합니까? 만사가 형통합니까? 믿음의 사람은 아하수에로 왕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기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이고, 찬양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며, 겸손히 그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 기회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혹시 고통 중에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 풍랑 인하여 더 빨리 가게 하시고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게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회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고후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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