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을 위한 삼중주
(마 7:7-11)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가을은 결실의 계절일 뿐 아니라 결혼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여러 가정들이 결혼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시간이 겹치는 경우도 있어서 부부가 따로 따로 식장에 참석하여 축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잔치가 잔치처럼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많은 축하객들이 모여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지 설령 부조를 가지고 오지 않고 식사만 하고 가도 좋으니 제발 하객들이 많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신랑 신부의 소원이 아닌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잔칫날이 다가왔을 때 하객은 없고 평소에 얼굴을 늘 대하는 가족만 모여서 결혼 예식을 한다면 그 잔치는 즐겁기는커녕 도리어 서글플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눅 11장 큰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눅 14:22, 23) [22]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강권’이라는 말(ajnagkavzw아낭카조)은 ‘억지로 시키다, 강요하다’라는 뜻의 명령형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가 싫은 것을 누가 억지로 시키면 신앙은 자유라고 했으니 자의에 맡겨야지 설령 부모라고 할지라도 강요하는 것을 다 싫어하고 반항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오는 새 생명축제가 마치 많은 하객들이 모인 즐거운 잔치처럼, 많은 새 생명들이 모여 참으로 기뻐하며 주께 영광 돌리는 n축제가 되게 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 무엇을 구해야 하나?
예수께서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처럼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인간의 생명입니다.
세인들도 잔치 날이 오기 전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하고 심지어 임박했을 때는 밤을 새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다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새 생명 잔치에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는다면 무슨 열매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나의 수고로만 가능하다면 우리가 마음먹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을 구원하는 일만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새 생명 축제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예수께서 삼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를 내 보내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눅 10:1)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 결과 놀랍게도 그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주님께 돌아와서 결과 보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하더라고 기뻐하였습니다.
(눅 10: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 직접 앞장서셔도 힘든 전도를 마치 햇병아리 같은 제자들이 했을 때 과연 얼마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을 따른지 불과 삼년 밖에 되지 않은 제자들이 그와 같은 일을 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중에는 모태신자도 있고 예수를 믿은 지 수년, 수십 년이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능히 제자들처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스펙을 따진다면 제자들과 비교하여 학벌이나 경험이나 지위로 볼 때 오늘 여러분들이 당시 제자들보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제자들에게 밀린다면 분명히 제자들이 오늘 우리와 차별화된 어떤 다른 비결이 있기 때문이라면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전도를 내어 보낼 때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제자들에게 덧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막 6: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물론 그 능력은 한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도 제자들이 계속해서 그런 역사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말세에 만민에게 물 붓듯이 부어 주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 이유는 그 성령은 전도와 선교의 원동력이시기 때문에 그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땅 끝까지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전도는 단순이 보이는 육신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은 육으로 인도할 수 있지만, 영은 영으로만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단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제자가 된 오늘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혜와 축복인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면 천하 보다 귀한 영혼, 주님이 그렇게도 사랑하시는 한 영혼을 우리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새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일평생을 살아왔고,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평생을 그렇게 살지 못할 찌라도 어쩌다가 한 두 번이라도 날 구원하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또한 내게 기대하시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매일 내 육신만을 위하는 삶을 살았고 심지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는 이유가 우리의 육신이 좀더 잘되기만을 바라는 소원 때문이었다면 세상에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할 이유가 없고 일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평생을 내 믿음 하나만 겨우 유지하고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버린 다면 언젠가 주님 앞에 가서 계산하게 되는 날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밖에 들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자주자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기회이며 그 일을 나 혼자 힘으로나 다른 사람과 힘을 합친다고 되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명을 망각한 세상 재미에 취해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기대를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어떻게 받을 수 있나?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지만 세상의 왕처럼 백성들의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명령만 내리는 폭군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반드시 무엇을 명령 하실 때는 그 명령에 순종하면 우리가 복을 받기 때문이고, 그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에게 힘과 능력과 길을 열어주실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명령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구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치 폭격 맞은 것처럼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을 때 거기에 모인 남녀노소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개인과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또 그 변화된 제자들을 통해서 그 지역 사람들이 변화하고, 심지어 그 역사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예수를 적대시하던 제사장들까지 개종을 하고 예수를 믿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서 ‘제사장의 무리’가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말씀에 복종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이 하시면 세상에서 저 사람은 죽어도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야 라고 단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못했다고 마치 성령도 못하시는 것처럼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심지어 제사장도 주께 돌아와서 주의 도에 복종을 하였다면 세상에 못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세상에 변화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고난 앞에 뿔뿔이 흩어졌던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그와 같이 강력한 능력을 힘입게 되었습니까?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서 ‘빌기를 다하매’라는 말(devomai 데오마이)은 ‘요청하다, 기도하다’라는 뜻인데 본래 ‘붙들어 매다, 묶다, 부족하다, 필요로 하다, 간구하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를 왜 하는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는 필요를 느낄 때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되 그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꽁꽁 묶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기도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삼년 동안 일하신 공생애 기간 가장 큰 비중을 두신 사역이 전도 사역입니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의 그와 같은 전도 사역은 크게 세 가지 교육과 전도와 치유사역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르치시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에 사로잡히고 질병에 노예가 된 병자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장소를 이동하시면서 매일 되풀이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일은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고 병자를 치료하는 일입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시라면 얼마나 피곤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피곤을 푸시는 쉼의 방법은 그 밤에 기도의 동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눅 21:37)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예수님의 그같은 모습은 오늘 피곤한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에게 진정한 휴식은 휴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치유와 회복과 능력을 충전 받는 절호의 기회인 기도가 반드시 바늘과 실처럼 병행되어야 함을 본보이신 것입니다.
물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성도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나름대로 태신자를 작정하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지금까지 나의 태신자 기도는 어떤 식의 기도였는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열심히 전도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빼앗겼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화
자갈이 필요한 사람은 가까운 시냇가에 가면 얻을 수 있지만 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험한 산에 올라가 깊이 땅속을 파들어가는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여러 가지 필요를 놓고 기도하지만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새 생명을 주께 올려 드리기를 소원하는 사람의 기도는 금광을 파고들어가는 기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처음 만나서 전도했을 때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던 사람이지만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이를 알고 그 사람의 마음을 선점하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언제 교회 간다고 했느냐는 식으로 딴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광을 캐들어 가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바로 오늘 성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삼중주의 기도입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오늘 성경은 예수께서 마 5장에서 시작한 산상보훈을 마무리를 하시는 말씀 가운데 기도에 대해서 마치 삼중주 연주처럼 태신자 2차 작정을 앞두고 부담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문제 해결의 대안을 제시해 주는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 화
세계적인 음악가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보케리니, 하이든과 같은 유명한 음악가는 수많은 악기와 합창단과 독창자들이 동원된 장엄한 교향곡만을 즐겨 작곡하지 않고 불과 악기 세 개만으로 연주를 하는데도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곡들을 작곡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 베토벤이 1810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기 위해 작곡한 피아노 삼중주 7번 B flat 장조 “대공” (Op. 97)이라는 새 생명을 위한 삼중주라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일부러 감상을 하였습니다.
비평가들은 베토벤이 이 곡을 쓸 무렵 귀가 거의 들을 수 없는 상태였고 이 후에 작곡한 것이 별로 없는 최후로 남긴 대곡으로 가장 웅장하고 가장 거장다우며 무엇보다 가장 쾌활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상한 대공은 2014년 대관령 국제 음악제에서 정영화씨가 첼로를 연주하였기 때문인지 더욱 감동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불과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세 악기만으로 그렇게 장엄한 곡을 연주할 수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대공을 감상하면서 많은 악기가 아닐지라도 불과 세 개의 악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장엄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음에 대해서 새삼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기도로만이 전도를 훼방하는 사단의 권세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전도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베드로를 몹시 염려하신 것은 생계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마치 마귀는 자기가 승리한 줄 착각하고 그 다음 목표를 제자 중에 제자인 베드로를 타겥으로 삼을 것을 염려하신 주님이 제일 먼저 베드로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주님이 먼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만 듣고 기도하지 않다가 마귀의 시험에 빠져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양심의 가책에 빠져 갈릴리로 후퇴했던 것을 성경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어찌 베드로 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그와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하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 유지를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다면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새 생명축제를 준비하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기도 생활에 매우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한 까닭은 주님의 은혜이지만 그 은혜 가운데서 나는 주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있으나 주님은 세상에서처럼 보좌우편에서 여전히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여전한 것입니다.
(롬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가 그와 같은 주님의 중보기도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이처럼 안전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우리도 주님처럼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도가 지금까지 하던 식의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성경 말씀처럼 한번해서 않되면 두 번하고 두 번해서 안되면 세 번하는 기도로 전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생명 잔치를 위해 가장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구하는 기도만 했다면 이제는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하고, 그 사람을 찾아갔는데도 안 되면 문을 두드리는 기도가 바로 삼중주의 기도인 것입니다.
1) 기도는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주님께 아뢰면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되, 그 사람을 내게 붙여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반드시 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자는 것입니다.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2) 기도는 찾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도를 한 것을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하신 것은 나의 가치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라면 내가 구하는 새 신자의 영혼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중한 것은 길거리에 뿌려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소중한 것은 잡초처럼 심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땅을 파는 수고, 씨를 심는 수고, 그것을 가꾸는 수고를 통해서만 결실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구하는 기도를 넘어 찾고 부르짖는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새 신자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면 밤낮이라도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렘 29:12, 13)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3) 문을 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를 나오기까지 누군가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열기 힘든 문은 성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입니다. 성문은 빗장 따고 열쇠로 열면 되지만 닫힌 마음의 문은 오직 지속적인 사랑과 감동이라는 열쇠를 통해서만 열려집니다.
그래서 소중한 시간도 물질도 노력도 쏟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한 사람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세월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부어주셨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의 마음을 쉽게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새 신자의 마음을 열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필요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열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잠 21: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새 신자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만으로 다가 아닙니다. 힘들게 주님 앞으로 인도했을 때 귀에 들려지는 복음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려면 귀가 열려야 합니다.
(계 2:29)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범죄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귀가 있어도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설령 듣는다고 할지라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이 전해질 때 은혜로운 간증이 전해질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그 사람은 주를 믿게 다고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과 영적인 귀가 열리도록 닫힌 문을 두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요청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생명 축제라는 잔칫날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잔치를 위해 손님에게 청첩장을 보내고 여러 날을 걸쳐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은 기도의 준비입니다.
금번 새 생명축제에 우리의 기도는 이전과 달리 오늘 성경 말씀처럼 구하는 기도에서 찾는 기도로 찾는 기도에서 문을 두드려 여는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1) 오늘 주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하여 삼중주의 기도를 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서 그 모든 수고가 결국 남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 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그 만큼 성숙해졌고 나의 관심이 보이는 물질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2) 오늘 주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나같은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안다면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영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도 소원하신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애 쓸 때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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