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러운 또 하나의 이름
(행 8:12~17)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 8:13)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 8: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행 8: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행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마다 뜻이 있고 설령 동명이인이라고 할지라도 각기 삶이 다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의 이름은 유명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이름은 천하기도 한 까닭은 이름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의 차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이고, 둘째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첫 번째 이름은 가정에서 부모님이 자식에 대한 기대가 담긴 이름이고, 두 번째 이름은 일터에서 내 책임이 부여된 이름이고, 세 번째는 교회에서 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이름입니다.
왕언장이라는 사람이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서 이름은 이름 석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가고 오는 역사 속에 위인으로 존경받는 사람의 이름은 이름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답고 귀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라는 간절한 소원 중에 하나는 무명한 부자로 살기보다는 유명한 빈자로 사는 것을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청빈이라는 말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처음 부르실 때 약속한 세 가지의 축복 중에 하나가 바로 이름에 대한 축복이었습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기서 ‘창대하게’라는 말(ld'G, 가달)의 뜻은 ‘크게 하다, 찬양하다, 위대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갈수록 유명해지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그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창 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그 결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처음에 부모가 지어준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는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새로 지어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시간이 흘러갈 수 록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1. 한 가지가 부족한 교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훈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 선교에 대한 지상 명령입니다.
(막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여기서 온 천하는 모든 나라를 뜻하는 말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모든 나라 모든 백성을 뜻하는 세계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그와 같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사고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 교회가 날로 부흥하여 장정들만 오천여명이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하였을 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유훈을 따라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로, 온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실천했어야만 합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는 온 교우들이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면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사도들에게 성경을 배우고, 모여 전심으로 기도하고,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와, 가난한 이웃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나눔으로 임금님도 풀지 못한다나는 숙제를 해결하는 교회였습니다.
(행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원동력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재력가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렇습니다. 가난한 교회는 헌금이 적게 나오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마른 교회요, 부요한 교회는 부자들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많은 성령 충만한 교회인 것입니다.
이는 어찌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교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딱 한 가지가 부족한 교회였습니다.
그 한 가지는 수학적인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세운 이유로 마치 여러 개의 문을 다 열수 있는 마스터키처럼 총체적인 하나를 이행하지 않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오로지 예루살렘 교회로만 만족하고 사마리아나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라는 건물 안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교회들마다 동일하게 소원하는 목표인 성령충만 말씀충만 사랑충만 진리충만한 교회는 다른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과 말씀과 사랑이 충만한 교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점에서는 하나도 문제가 없는 교회였지만 예루살렘을 이끌어가고 있는 지도자와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성도들이 다 똑같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로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선교적인 사명감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 한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라 내가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에 따라 우리 교회의 칼라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나부터 먼저, 나 하나만이라도 성령 충만, 말씀충만, 사랑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 닫힌 문과 열린 문
구약 성경에 보면 성전이 있으나 성전답지 못하고 여호와의 법궤가 있으나 법궤를 잘 보존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그 성전을 헐어버리게 하시고 그 법궤를 원수에게 빼앗기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가 법궤처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십자가의 피로 죄에서 속량함을 받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만 하면 죽어도 사는 복음이 법궤이상으로 소중한 보화였습니다.
구약의 법궤는 성막 안에 안치되어 외부에서 볼 수 없었으나 신약의 법궤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하루 빨리 전파되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폐쇄적인 사고로 말미암아 더 이상 복음이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받게 하심으로 더 이상 문을 열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이어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 흘리며 끔찍한 모습으로 순교를 이어갔습니다.
(행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에 모였다면, 핍박으로 인해 사도 외에 다 흩어져 버렸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된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핍박이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포기하였을까요? 마치 성전이 무너져 버린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끝이 나버린 것이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동안 자원해서 하지 못했던 전도와 선교가 오히려 활성화되어 그 흩어진 성도들이 온 유대와 사도들이 가기를 꺼려하던 사마리아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그들 흩어진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인들이 제일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행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 때 바로 그 흩어진 사람들과 더불어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바로 스데반 다음의 서열인 빌립 집사였습니다.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비록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핍박이 찾아왔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다른 평신도들과 더불어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이전에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이 복음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구명을 청원하는 발언이 아니라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다가 결국은 순교를 당하게 된 내용이 행 7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빌립은 일곱 집사 두 번째 서열에 걸맞게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무덤이 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빌립은 그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예루살렘 한 구석에 가서 피신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명령하신 사마리아 성으로 옮겼습니다.
(행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닫힌 문을 보고 포기하지만 스데반은 다른 한 편 열린 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기도 하고 여시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시는 까닭은 중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문을 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골 4: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3. 빌립의 전도사역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도 위험한 일이지만, 낯선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핍박을 피해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뜨뜻미지근한 신자들이 아니라 마치 바람 앞에 산불을 번지게 하는 불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이전에는 예루살렘 안에만 집중해 있던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명령하신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에까지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여기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말(diaspeivrw, 디아스페이로) )은 ‘곡식을 흩어 뿌린다’는 뜻으로 사울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핍박으로 말미암아 복음 전파가 중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어 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집사 빌립도 주님이 명령하신 사마리아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행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서 ‘전파하니’라는 말(khruvssw, 케륏소)은 세레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함으로 예수님이 오셨음을 사람들에게 알릴 때 사용한 단어로 ‘알리다, 선포하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집사 빌립이 복음의 불모지인 사마리아로 가서 한번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 복음에 반응을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선포하였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과연 그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1) 듣고, 보고, 따름
빌립 집사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행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여기서 ‘듣고’라는 말(ajkouvw, 아쿠오)은 ‘경청하다, 주의하다, 들어서 깨닫다’라는 뜻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지 않고 귀기울여 듣고 그것을 깨닫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표적’이라는 말(shmei'on 세메이온)은 말씀으로 전한 복음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표가 되는 기적을 사람들이 분명히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한마음으로 ‘따르더라’라는 말(prosevcw, 프로세코)은 ‘주의하다, 전념하다, 마음을 쏟다, 생각과 노력을 쏟다’라는 뜻의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기적이 나타남을 보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마음을 합하고, 마음을 집중하여 복음을 믿고 따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동안 악한 영이 지배를 하고 있던 어두운 사마리아 성에 밝은 태양이 비침으로 어둠이 물러가고, 추위가 물러가고, 생명이 싹트는 것처럼 기쁨으로 가득한 사마리아 성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행 8: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행 8: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도도 아닌 빌립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를 명하실 때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2) 듣고, 믿어 세례를 받음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한번 스쳐지나가는 번개 전도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믿는 자의 표인 세례까지 받는 온전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행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3) 안수하고, 성령을 받음
사마리아 성의 놀라운 변화의 소식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고 있던 사도들에게까지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을 사마리아 성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의 변화를 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성까지 직접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였을 때 사도들이 받았던 성령이 사마리아 교인들에게도 임하였습니다.
(행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행 8: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이는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하며, 이전에 육신의 혈통을 가지고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엡 4: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뜻합니다.
물론 빌립은 영적 불모지였던 사마리아성을 복음화시키는 큰 일도 했지만 후일에 성령께서 무조건 광야로 나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광야로 갔을 때 주의 사자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에게 개인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행 8: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그 후 빌립은 사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 가이사랴에 들어갔을 때 빌립의 집에 머물면서 그동안 지친 몸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벌리게 될 영적 전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빌립을 가리켜 집사 빌립의 집이라고 일컫지 않고 ‘전도자 빌립’이라고 일컬었습니다.
(행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여기서 ‘전도자 빌립’이라는 이름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나 교회나 붙여준 집사라는 이름보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새 이름입니다. 이는 사도와 집사라는 직분을 가지고도 전도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과의 차별화된 이름을 뜻합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차 우리가 세상을 떠나 면 두 길로 나누어지는 데 하나는 새 이름이 없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가 지어주고, 교회와 직장에서 붙여준 이름 외에 영광스런 또 하나의 새 이름이 있습니까?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내게 붙여준 이름 외에 주님이 내게 주실 영광스러운 새 이름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 이름은 빌립이 아니고, 집사 빌립이 아니라, 전도자 빌립이라는 이름처럼 우리의 남은 생애를 전도자 빌립처럼 복음을 전하고 복음 전도자를 섬기는 일을 위해 열심히 살다가 장차 주님 앞에 서는 날 흰돌 위에 새겨진 새 이름 곧 주님과 나만이 아는 영광스러운 새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가 지어 준 이름만 남기고 살지 맙시다. 직장과 교회가 지어준 이름으로 만족하지 맙시다. 그 모든 이름은 결코 영원한 이름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차 흰 돌에 새겨진 새 이름, 주님과 나만이 알게 될 새 이름 을 부여받는 그 이름은 영원한 지워지지 않는 새 이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남은 생애를 그 같은 새 이름을 받을 수 있도록 전도자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말씀처럼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 그 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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