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교수의 개혁주의 설교학] (27)설교문 작성의 요령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대화체 설교, 청중 몰입도 높인다
설교의 결론은 서론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게 준비되어야 한다. 결론은 설교의 목적을 성취하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미리 언제,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지 그 내용과 표현을 분명하게 준비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결론에 이르러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라고 언급한다. 이것은 결론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언급에 대해 청중들은 “이젠 설교가 다 끝났구나”라고 생각하며 긴장의 끈을 놓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지금까지 애써 유지해 온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어져 정작 절정에 달해 호소하고 간청해야 할 결론을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결론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결론은 청중의 마음과 감정에 방아쇠를 당길 시점이다.
설교의 결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1)요약:설교의 강조점들을 재진술해 산만한 끝맺음을 하나로 묶어준다. (2)예화:결론에 쓰이는 예화는 정확히 주제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어야 한다. (3)인용:찬송시나 속담 등의 짧은 인용으로 반드시 암기하여 사용해야 한다. (4)질문:주제와 연관된 적절한 질문을 던져 청중들의 응답을 촉구한다. (5)구체적인 방향 제시:성도들이 진리를 실생활에 옮길 수 있도록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할 때, 설교는 삶의 구조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파고 들어간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 하나의 생각 단위별로 문단을 나누어 작성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때로 두 개 이상의 아이디어를 한 문단에 담아 길게 작성하면 설교자 자신에게 명확하지 않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혼란을 주게 된다. 하나의 개념을 가진 단락은 그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친숙한 어휘와 용어들로 표현되어야 한다. 특히 청중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듯이 그려지는 그림 언어와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제이 아담스(Jay E. Adams)는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센스 어필(Sense Appeal)’의 활용을 적극 주장한다. 그림 언어(시각), 의성어(청각), 향기나 냄새(후각), 쓰고 달고 시고 짠 맛들(미각), 부드러운 손길이나 쓰라린 아픔(촉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감각의 호소가 최대 효과를 누리려면 오감의 언어를 적절하고 지혜롭게 혼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할 때는 그 둘을 이어 주는 논리적, 심리적 교량 역할을 하는 ‘전환문’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자기 앞에 적힌 설교문을 보고 새로운 대지로 전환을 알고 있지만, 청중들은 그것을 볼 수 없고 다만 내용만을 듣기 때문이다. 전환문은 지금까지 다룬 중심 내용을 짧게 요약하여 청중들에게 들려주거나 앞서 다룬 내용과 상관관계를 가진 새로운 내용을 소개하는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설교의 언어와 스타일은 설교의 성격과 색채를 결정짓는다. 네덜란드의 설교학자 훅스트라(T. Hoekstra)는 “언어와 스타일은 반드시 설교된 내용, 말씀 봉사의 목적, 말씀이 증거되는 거룩한 집회의 성격, 설교에 요구되는 심미적, 수사학적, 심리학적 요구들과 일치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그 표현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언어로서 세속적 언어를 거부한 헌신된 성격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언어 표현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설교자의 언어는 청중의 생각과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특히 설교 가운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선정적 묘사와 표현은 절대 금물이다. 달콤한 죄의 현장을 묘사하는 예화 속에서 설교자의 저속한 언어와 천박한 표현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설교자의 노골적인 성적 희롱이나 성적 비하의 발언 역시 절대 금물이다. 이는 기독교 복음과 거리가 멀고, 사람의 기본적 인권도 모르는 무식한 태도다.
복음의 설교자는 결코 무례하고 교양 없는 식으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입술을 지켜 상스러운 욕설을 결코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천박하고 속된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는 잔인한 표현도 피해야 한다. 잔인한 표현은 오늘날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언어폭력에 해당한다.
설교문을 작성할 때 구어체로 작성하도록 노력한다. 설교는 ‘말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설교란 훅스트라(Hoekstra)가 지적하듯이 에세이 낭송이나 선언문 낭독이 아니다. 설교는 토마스 롱의 표현처럼 ‘말의 사건(spoken event)’이다.
따라서 설교문은 자신 앞에 있는 회중을 보고 말하듯이 써야 한다. 구어체 작성의 한 가지 요령은 청중들이 제기할 수도 있는 가상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의 대화체로 작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체는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참여를 부추기고 설교 청취에 몰입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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