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귀를 타신 크신 왕
(슥 9:9-12)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슥 9: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우리가 성경책이나 고전이나 겉만 본다면 둘 다 사람들의 이야기요, 지난날의 역사요, 교훈이 되는 좋은 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는가?를 살펴보게 되면 성경과 고전은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 성경은 그 출발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이미 역사 속에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을 미리 계시하고 약속하여 주신 예언과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에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전은 그 출발이 인간으로 저자의 직관이나 통찰력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부풀리거나 축소하거나 재구성한 것으로 성경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계시나 약속이 될 수 없는 가능성이나 허구라는 점이 성경과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의 나라나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서 미래에 일어나게 될 일을 계시하여 주시는 약속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소망과 기대감을 주지만 일반서적은 가공한 이야기나 아니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과정하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학자들은 구약 성경에 약 450회 이상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난날의 역사만을 다루는 일반 서적과 달리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며 예언이 예언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예언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사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그와 같은 성경 예언의 핵심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약속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예언대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으며 또한 이루실 것인가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 성경에서 한 예를 든다면 인류의 조상 아담의 사건은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그의 후손된 우리들의 현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대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예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도 그 중에 하나로 구약 시대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올라가실 것인가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신뢰하려면 그 사람의 언행이 일치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하는 것인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할 신실하신 분이심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됩니다.
1. 고난주간과 종려주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을 사십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금식도 하고, 세속의 오락을 피하고, 더 많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경건하게 보내려고 만든 교회 의식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으로 부활절 직전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에 이른 한 주간이기 때문에 흔히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한 평생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고난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 동네 한 마구간에서 나신 것부터 고난이고
2) 헤롯왕의 시기로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를 몰살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몸으로 머나 먼 애굽 땅으로 피신하신 것이 고난이고
3) 나사렛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나셔서 삼십년을 사신 것이 고난이고
4)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단 한 번도 단 한 가지도 허물이 없으시고 오히려 찬사를 받으셔야 할 만큼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을 전파하시고 여기 저기 직접 찾아 다니시면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고난이고
5) 예수님을 시기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위증을 하면서까지 예수님을 고발하여 불의한 재판을 받아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최악의 고난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고난의 절정인 한 주간을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1) 월요일-성전 청결의 날(막 11:15-19)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면서 “너희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의로운 분노를 폭발하신 날입니다.
2) 화요일- 논쟁의 날(막 12:28-40)
예수께서 하루 종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하신 날입니다.
3) 수요일- 침묵의 날(막 14:1-11)
예수께서 성 밖 베다니 나사로의 가정에서 묵묵히 보내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송두리째 쏟아 부는 날입니다. 이 때 한 편에서는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 세관,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4) 목요일- 겟세마네 기도의 날(요 13:1-11)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맨 처음 성찬식을 거행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가룟 유다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버린 날입니다.
5) 금요일- 십자가 고난의 날(막 15:16-41)
예수께서 목요일 밤에 체포당한 후 부터 이튿날 금요일 아침까지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며 갖은 모욕과 고난과 부당한 재판을 통해 십자가형을 언도 받으시고 골고다에서 오전 9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무려 6시간 동안 고통하시다 오후 3시에 운명하신 후 무덤에 묻히신 날입니다.
6) 토요일-장사되신 날(마 27:62-66)
금요일에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이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 온종일 무덤에 갇혀 인류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과 저주와 심판을 홀로 다 감당하신 흑암한 날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들과 똑같이 연약한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운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들이 흔히 고난을 두려워할 때 심정처럼 예수님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두려워하신 것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여실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때가 되어 마침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을 다 아셨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기에 순종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었을 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성안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을 환호하는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는 부르게 되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입니다.
2.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예언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이 가난한지 부자인지, 높은 신분인지 낮은 신분인지가 자연히 구분되어집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는 자동차가 없던 시대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은 마차나 말을 이용하였고, 서민들은 나귀를, 아주 가난한 사람은 걸어 다니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끔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무엇을 타고 다니셨을까요? 성경 어디를 살펴 보아도 마차나 말이나 나귀를 타셨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볼 때 제자들과 더불어 늘 걸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마지막 발걸음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왕처럼 말을 타시는 것도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기 위해 종전처럼 걷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서민들이 애용하는 교통수단인 나귀가 나귀새끼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눅 19: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이제 예수님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됨을 다 아시면서 왜 마차나 말이 큰 나귀가 아니라 하필이면 나귀 새끼를 준비하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그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벳바게 마을에 들어가서 만나는 사람에게 무조건 ‘주님이 쓰시겠다“ 하면 허락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마도 제자들은 난감하기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와 같은 선생님의 명령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묵묵히 순종하였다는 것도 특이한 일입니다.
(눅 19: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여기서 ‘끌고 와서’라는 말(a[gw, 아고)은 ‘인도하다, 데리고 오다’라는 말은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단번에 순종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나귀의 주인이 거절하거나, 제자들이 불순종하거나, 나귀가 따라오기를 거부하는 등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나귀새끼를 데리고 와서 그것을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다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종려주일 아침에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1) 당시 사람들이 해마다 유월절이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서 과거의 출애굽을 기념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오래된 종교적인 관행이요 또한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사항이기 때문에 유대 전역만이 주변 나라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조차 예루살렘 성전 제사가 평생소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그와 같은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고 형식을 반복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 관행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제도를 시작하시려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올라가셔서 이루시고 하신 혁명적인 과업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이 과연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기대한 것처럼 로마 정부를 뒤엎고, 헤롯 정권을 퇴출시키고,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정권, 새로운 성전을 이루는 혁명적인 과업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을까요?
사실 그것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목자 잃은 양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던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불의한 정권에 대해 불만히 가득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걸었던 기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려고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왕이 행차할 때처럼 나귀에 옷을 펴서 안장을 만들고 길에다 양탄자를 대신하여 종려나무 가지를 펴고 손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목이 터져라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호한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자 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혁명적인 과업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밤중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실 때 처음에는 그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으나 나중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대로 하시겠노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여기서 ‘아버지의 원대로’라는 말(qevlhma 델레마)은 ‘아버지의 뜻, 의도, 의향, 소원,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givnomai 기노마이)은 ‘생겨나다, 일어나다, 만들어지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는 수동태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예수께서 예루살렘 올라가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어 다시 살아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4)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 일을 위해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예고하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 왔던 짐승의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고 제사장도 필요 없고 심지어 성전도 필요 없게 되고 이전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성전, 새로운 제사장, 새로운 제사가 시작되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이루시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한 것처럼 범죄 할 때마다 제물을 드려야 하는 구습과 달리 가) 죽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제물이 되시고,
나) 부패한 제사장들과 달리 지극히 거룩하신 대 제사장이 되시고,
다)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아니라 피 흘려 사신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라)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만백성가운데 택하심을 받은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시고,
마) 애굽의 바로 왕보다 더 악독한 사단의 권세아래서 일평생 죄와 질병과 죽음의 노예 생활하던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영적 출애굽과,
바) 가나안 땅과 비교가 되지 않는 부활 승천하여 이루어 놓으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이스라엘인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그 일을 시작하신 종려 주일은 우리에게 매우 뜻깊은 주일이요 그 역사는 세상에 어떤 것보다 위대한 혁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올라가실 것인가 하는 것을 미리 예언한 말씀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여기서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늘 날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적 이스라엘이 된 오늘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한 ‘즐거이 부를지어다’라는 말은 신분이 고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와 같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정의로우신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하신 왕으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것이라고 오늘 성경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을 다 이루신 날이 바로 오늘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실 때 멀리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이 헤롯왕을 찾아가서 물어 본 것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이었습니다.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은 자기 정치적인 적이 태어났다고 오해하여 두 살 미만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던진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막 15: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고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때 머리위에 붙이는 죄를 적어 놓은 패에 적어 놓은 말이 무슨 죄가 아니라 단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적은 것도 우연히 아니라 바로 오늘 성경 말씀에 정의로운 왕으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눅 23: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예수님은 그와 같은 지극히 존귀하신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도 바로 오늘 성경 말씀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오늘 성경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도 전에 지극히 크신 왕이 겸손히 나귀를 탈 것이라는 예언을 예수님께서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신 것은 바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 곧 구세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까? 역대 어느 왕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겸손하신 왕이셨기 때문입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대로 세상에 오셨고, 성경의 예언대로 대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성경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유일무이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한 구속의 사건은 우연히나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남김없이 다 이루셨습니다.
(눅 24: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서 나에 대해 기록된 모든 일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하찮은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까지 순종하셨고, 무자비한 채찍과 십자가의 모진 고난까지 다 참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예수님의 끝까지 순종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나의 왕으로 모셔 들이고 예수님께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를 온전히 다스리실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과 자유와 기쁨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해지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민족과 국가에 주님이 이루신 평화가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고 주님을 닮는 것이고 주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라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도 겸손히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을 태운 나귀새끼처럼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만 모자람이 많을지라도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는 영적인 나귀새끼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피면서 소리 높여 호산나를 부르며 찬양하던 입술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입 가지고 두 말을 하는 배신자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간 순교자들처럼 평소에는 물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교회”라고 소리쳐 부르다가 생을 마칠 수 있는 신실한 믿음의 성도가 다짐하는 종려주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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