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체적이며 선명하게 선포하라3. 개혁주의 장로교 말씀 주해 ⑥ 개혁주의 신약설교
올바른 주해 없이 참된 말씀 선포는 불가능…복음의 풍성함에 대한 포괄적 이해 가져야
온전한 복음 자신에게 먼저 선포하고 은혜 가운데 무릎 꿇는 설교자만이 진정한 감동
▲ 정창욱 교수총신대·신약학 |
구약을 설교할 때와는 달리, 신약을 설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기는 쉽다. 하지만 신약을 설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설교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신약 설교와 관련하여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는 명제를 모르는 개혁주의 설교자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얘기다. 하지만 그렇게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단순히 언급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혁을 이루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설교하라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삶에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촉구하는 경험적 설교(experimental preaching)를 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경험적 설교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성경 진리를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설교였다. 다시 말해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 삶 속에서 실행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설교를 한 것이다. 그 때에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리스도 없이 진정한 변화가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요하듯이 반복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구약도 그렇지만 특별히 신약의 모든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체적이면서도 선명하게 드러내어 선포하라는 것이다.
2. 주해 없이 설교 없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설교하라는 말은 주어진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그저 그리스도를 억지로 끼워 넣어 언급하라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대한 철저한 주해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을 통해서 본문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어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설교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설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설교들이 교회의 홈페이지에 넘쳐나는지 모른다. 하지만 ‘홍수에 먹을 물 없다’는 속담대로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에 갈급해 한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주어지는 설교들이 본문에 대한 올바른 주해과정을 통해 파악한 원래 의미에 근거하여 작성되어 선포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과는 상관없는 내용을 선포하거나, 때로는 아예 본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설교하기도 한다. 설교란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지 설교자가 하고 싶은 말을 본문을 빙자하여 외쳐대는 행위가 아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필자도 총신에 다닐 때 본문에 대한 주해 없이 중고등부 설교를 했다. 졸업해서도 얼마동안은 그렇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주해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총신을 비롯한 합동교단 신학교에서 올바른 주해방법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필자처럼 성경 주해방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졸업하여 목회를 하며 설교자로 살아가는 분들의 상태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그것을 배울 기회를 가진 분들은 축복받은 분들이다. 여건상 그러지 못한 분들을 위하여 시급한 것이 성경주해 과정의 개설이다. 올바른 주해 없이 참된 말씀 선포는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설교자가 때에 따라 본문을 성경 여기저기서 발췌하는 설교 대신 성경의 책을 한 권 정하고 본문을 계속 이어 설교하는 강해 설교 방식이 성경 전체(tota scriptura)의 원리에 따른 개혁주의적 설교이다. 이것은 본문 주해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이것을 통하여 설교자는 말씀의 권위에 온전히 종속될 수 있다.
3.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라
각 본문에 대한 주해와 더불어 복음에 대한 올바른 포괄적 이해를 가지고 설교자는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해 준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선언하는 대로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그런데 너무도 자주 이 복음은 아주 편협하고 빈약하게 이해되어 가난하게 선포된다. 단순히 구원받고 천국 가도록 보장해 주는 역할만 하는 메마른 이론적 개념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복음은 삶의 전 영역과 관련하여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풍성함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설명하는 대로 복음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들은 천사들이 허리를 굽혀 유심히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통해서) 이제 너희에게 알려진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12절, 괄호는 필자가 교정한 내용임) 개역개정의 번역이 모호한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의 내용들이 천사들조차도 자세히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아 그 의미를 알기를 간절히 원할 정도로 깊고 풍요롭다는 말이다. 이것은 복음의 신비인데, 신비로운 측면은 복음의 풍성함을 표현해 준다. 이러한 측면을 강단에서 선포하지 않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힘을 잃어버렸다. 구원의 칭의적 측면만 강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풍성한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게 되자 결국 뿌리가 흔들려 버렸고 구원파처럼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고 안심시키거나 또는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겁을 주는 양 극단의 이단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온전한 복음의 풍성한 의미를 죽여 버리는 바람에 찾아온 필연적 결과다.
사실 복음의 풍성함은 복음서가 한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원사역, 곧 복음사역을 기록한 책이 한 개가 아니라 네 개나 된다는 사실은 복음의 풍성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의 풍성함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설교 때 신약 본문의 구약적 배경을 설명해 줄 필요성이 있다. 이를 통하여 성도들은 신구약의 세계를 넘나들며 성경의 통일성을 느끼게 될 것이고, 거대한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먼 옛날 하나님의 약속이 신약에서 성취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신약 성경의 본문에만 집중하여 놓치게 되는 구속사의 온전한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4. ‘오직 은혜로’를 선포하라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사실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처음 구원받을 때(칭의단계)에만 필요하고 그 이후의 구원의 여정(성화단계)에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칭의의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 어렵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윤리적 교훈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실 윤리적 설교는 매력적이다. 윤리적 설교를 하게 되면 뜬구름 잡는 설교가 아니라 구체적 행동 규칙을 제시해 주기에 설교자도 청중도 무언가 교훈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설교는 도덕 강연이 아니다. 모범적 설교도 마찬가지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서 살아가자고 설교하게 되면 그 보다 더 좋은 내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인간적 노력으로 모범을 따라가라고만 권하는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설교의 결말을 단순한 인간적 차원의 도덕적 교훈이나 권면으로 끝내게 되면 바리새파적 형식주의에 빠진 외식하는 성도들을 만들어낼 위험이 크다. 설교 전반부에 아무리 복음의 핵심을 말했어도 설교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을 윤리적/모범적 내용으로 채우게 되면 앞의 성경적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희미해지고 도덕적 명령만 남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설명한 후에 그것에 근거한 당위적 명령을 설교하고, 그것들을 삶속에서 실천해 나가라고 권면하는 설교는 잘못된 것은 아니나 피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들이 흔히 채택하는 방식이다. 물론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들에서 언제나 도덕적 모범적 내용을 포함한 실제적 교훈들을 마지막 부분에서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실천적 행위를 명령하면서도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에베소서에서 실천적 명령을 주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돌아갈 것을 권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서 믿음 생활을 할 것을 권한다. 이러한 권면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진실한 성도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한다.(엡 4:15) 또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관용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근거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용서에 두고 있다.(엡 4:32) 뿐만 아니라 5장과 6장에서 인간관계들 속에서 지켜야할 교훈을 명령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해 나간다. 이것은 그 은혜를 힘입을 때에만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설교할 때, 본문의 교훈을 파악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설명한 후에 그럴 능력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없음을 선포해야한다. 그것을 이룰 힘은 오직 우리를 은혜가운데 불러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주어짐을 선언해야 한다. 결국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믿은 후에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은혜’를 힘입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력히 선포되어야한다. 종교 개혁가들의 구호인 ‘오직 은혜로’의 정신이 너무도 간절한 상태가 바로 한국교회의 상태다. 은혜가 넘칠 때 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힘을 얻게 되고 교회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오직 은혜로’를 언제나 설교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런데 ‘오직 은혜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이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은혜를 입게 되고 믿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도 설교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또한 칭의를 위해서만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칭의를 위해서만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화를 위해서도 믿음이 필수적이다. 흔히 빠지기 쉬운 착각은 칭의단계와 성화단계를 완전히 별개로 구분하여 칭의 때는 은혜·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성화는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너무도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식의 설교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5. 자신에게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라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고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정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 온전한 복음을 자신에게 선포하지 않고 자신은 단순히 복음의 전달자로 남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려고 하는 자세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에 대한 확신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그 복음은 변혁을 일으키는 말씀이 될 수 없다. 너무도 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역을 과거에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고 생동감 없는 설교를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경험한 복음의 은혜가 그 속에서 더 이상 넘쳐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음을 위해 살았다는데 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죄인 중에 괴수다’라고 말한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가 옛날에 죽었다’로 말하지 않고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고 선포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고 음성을 듣고 사명을 직접 받았으며 너무도 놀라운 기적을 행하며 하나님의 복음 전파사역을 목숨 걸며 감당한 바울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존재이며 날마다 죽어야만 하는 은혜가 필요한 허약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죽는 날까지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가 가져야할 자세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선포하고 그 복음에 자신을 비추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릎 꿇는 설교자만이 진정한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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