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 7세는 전임교황 레오 9세의 미완의 개혁을 이어간 교황이다. 본명이 힐데브란트(Hildebrand. c. 1015-1085)인 그레고리 7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소바나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40년이 넘도록 로마에서 사역을 한 그는 교회보조로 출발, 집사로 교황청 근무를 한 사람으로 중년에는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중세교회의 집사는 오늘날처럼 일반 신도가 아닌 사제였다. 힐데브란트는 수많은 부패한 교황들과는 거리가 먼 매우 도덕적이고 경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 때 세 명의 교황이 등장한 심각한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그 결과로 교회가 세속 권력의 포로가 된 당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힐데브란트는 교황자리를 탐하지 않았으나 역사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교황이 되게 해준다. 1073년 교황 알렉산더 2세가 급사하자 수많은 로마 시민들은 경건한 추기경 힐데브란트의 이름을 연호했다. 당시 58세의 힐데브란트는 로마의 귀족들이나 국왕 하인리히 4세가 개입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교황에 추대된다. 참으로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할 교황 이름으로 “그레고리 7세”를 택한다. 이 사람 그레고리 7세는 중세천년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유럽의 1000년대 후반을 자신의 세기로 만든다. 교황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콘클라베(Conclave)라고 부르는 교황선출을 위한 추기경단의 조직이었다. 이후 이 방식은 지금까지도 지켜지는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이 된다.
둘째 교황이 된 1년 후인 1074년 모든 사제들의 독신을 의무화한다. 그때 까지 사제독신은 관습적 신분으로 법적 의무는 아니었다. 때문에 당시 많은 사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혼인예식 없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그레고리 7세는 성직과 결혼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유럽 전역에 공포한다. 성직자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눈물을 뿌리며 수녀원이나 수도원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그레고리가 단행한 또 한 가지가 세속 왕들로 주교나 수도원장을 교회의 승인 없이 임명하지 못하게 하여 교회의 위상을 강화시켰다. 이런 일련의 개혁 조치들은 새로운 교황의 인기와 권위 속에 그대로 시행되지만 이 일은 황제와 교황의 대충돌이라는 역사의 사건으로 비화된다.
'신학연수과 > 백향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놋사 굴욕이야기 (0) | 2016.12.25 |
---|---|
황제와 교황 충돌 이야기 (0) | 2016.12.25 |
말시온 이단 이야기 (0) | 2016.12.25 |
축구 이야기 (0) | 2016.12.25 |
대학 이야기 (0) | 2016.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