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성
성(性)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성에 대한 논의는 금기(禁忌)시 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일반 교육은 오랫동안 성교육을 무시하였다. 교회 안에서도 성에 관한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이해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1970년대에 와서 청소년들의 성문란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성교육(性敎育)이 <순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 문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닐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1. 성(性)에 관한 이해
1) 역사적 배경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신학이론은 인간의 성에 대해 기능적 성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성을 출산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오늘날 성은 인간의 본질적 결정 요소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을 전체로서 보는 관점을 통해 성은 재평가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파악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그의 작품 <교훈자>에서 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출산의 목적을 위해서만 부부관계를 허용한다. 그는 임신 중의 아내와의 성관계를 단념시킨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결혼의 결속 안에서도 즐거움이 그 자체만을 위해서 추구되는 것은 죄이며, 법과 이성에 거슬리는 일이다. 성에 관한 그의 기본적 태도는 부정적이다.
루터는 성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보았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따라서 한 성이 다른 성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Paul Althaus,The Ethics of Martin Luther,1972,p.83).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작품(God's good work)이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은 20세기말의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어떤 시기에 유럽 문화 가운데 에로티시즘의 물결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결이 매우 강력한 형태로 1950년대에 다시 나타났다. 그 물결은 줄어들 징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성은 가장 값싼 일반적 쾌락의 원천이 되어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수준에 놓이게 되었다”(Otto A.Piper,The Biblical View of Sex and Marriage,p.16). 인간의 죄악은 이제 성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의 영향으로 성문제에 있어서 균형을 잃었다.
우리의 성적 활동은 우리의 전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무제약적인 성관계는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되게 하며 점점 더 인간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2) 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성(性)을 주제로 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성에 관한 많은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성문제를 다룬 저서들도 많이 나왔다. 그 책들은 인간의 성문제를 사회심리학적 인간상호 관계의 차원에서 연구하였다.
공립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이전보다 더 보편적이다. ’70년대 후반기에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에 뿌리내린 성교육 프로그램은 -만일 성공이 행동변화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면- 성공적이지 못했다(G.B.Spanier,Human Sexuality in a Changing Society,1979,p.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성문제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책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남녀평등의 문제도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성운동은 여성에 관한 일반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서구사회의 경우, 성을 죄악시하거나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성문제와 관련하여 전통적 이해와 태도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성문제를 금기사항으로 취급할 수 없다. 성이 상품화된 현실 속에서 이를 금기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성에 관한 많은 질문을 받는다. “그런 것은 묻는게 아니야”라고 회피하는 것은 옳은 응답이 아니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나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임을 가르쳐야 한다.
3) 성경과 성(性)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인 성(性)은 선하고 신성한 것이다. 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을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의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발견되는 성문제의 모순은 타락의 결과이다. 또한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 된 의지의 탓으로 여겨진다.
성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과 같다. 성은 귀중하게 생각되고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그것은 손상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오토 파이퍼에 의하면,“성은 인간의 전체적 자아 기능의 하나이다... 인간의 성적 활동은 그의 인격 형성을 표현해 주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성과 결혼에서의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인간의 성(性,sexuality)의 의미는 하나님의 여자 창조의 기사 안에 나타난다(창 2:4-24). 이 본문은 상호관계 속의 남자와 여자의 가치와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성의 성적 상대역인 여성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부부가 사랑을 익혀 나가기 위해서는 성적으로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이란 죄악된 것도 아니고 타락한 행동은 더욱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결혼 생활에서의 부부의 성의 즐거움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은 고린도 전서 7:3-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을 더 자세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에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부부 연합의 귀중함과 함께 침소를 더럽히지 말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 "침소"(bed)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의 원 뜻은 "성교"(coitus)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히 13:4).
부부의 "침소"(bed = coitus)는 결혼 생활을 아름답게 그리고 친밀한 즐거움을
나누는 곳입니다. 이렇듯 부부의 침소는 영광스러운 장소로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즐거움으로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는 "즐거움"이라는 어휘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심지어 비 신앙적인 것이라는 생각으로 강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일부 목회자들 중에서는 은연중 부부의 성적 즐거움을 靈性에 장해가 된다는 것으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 부부들은 성적 즐거움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심지어 혐오스러운 생각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상대방에 대하여 성적으로 동등하게 만족시켜 줄 의무와 만족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권유가 아니라, 명령으로 배우자의 성적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욕구와 필요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순종하고 배우자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 부부들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기독교 결혼관의 특성은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서로 포기하고 그 권리를 배우자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결혼 이후에는 아내의 몸은 아내의 것이 아니고 또한 남편의 몸도 남편의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하고 그것을 자기의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자기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엡5:28).
그리고 기독교 결혼관의 특징은 부부가 상호간의 동의 아래 일시적으로 성적 교제를 멀리하는 것 외에는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거절하거나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성경의 명령을 어기거나 습관적으로 성교를 멀리할 때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정기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찬의 즐거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배우자의 성적 필요를 부부는 아낌없이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필요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부부가 성적인 필요와 욕구를 충분히 채워 나지 못할 때 사탄의 꾀임에도 빠지는 일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몸의 의탁과 성교를 통해서 최대한의 신뢰를 쌓아 나가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은 상호간 동의하의 일시적인 별거를 제외하고는 성교를 멀리하거나 자기를 핑계로 상대방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부부라면 정기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찬을 나누어야 합니다.
남성들의 무지와 몰이해로 아내는 성찬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있다는 것은 결혼 생활의 비극입니다. 남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는 아내는 없습니다.
여성은 부드러운 분위기에서는 남성 못지않게 신체 구조적으로나 특히 성 심리적으로 받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남성은 신체적으로 성적 교합을 거절할 수 있지만, 여성은 남성을 거절하지 않고, 무한정으로 받아 드릴 수 있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부부 서로의 성적 반응은 부부 서로의 책임과 역할에 달려 있습니다.
- 부부 성의 역할 -
1. 성은 인간의 본능이다.
2. 성은 부부 관계를 확인하는 행위이다.
3. 성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자기 확인이다.
4. 성은 배우자를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이다.
5. 성은 부부를 자연스럽게 묶어 주는 행위이다.
6. 성이 없는 부부관계는 있을 수 없다.
7. 부부의 성관계는 노력을 할수록 즐거움과 기쁨이 커진다.
8. 진지한 성은 서로를 신뢰하고 허물을 덮어 준다.
9. 성처럼 도전을 주는 인생 경험은 없다.
10. 성은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 유일한 작업이다.
11. 성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내어주는 작업이다.
12. 성은 생명을 창조하기 위한 작업이다.
13. 성은 부부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즐거움이다.
14. 성은 여성과 남성을 만들어 준다.
15. 즐거운 성은 모든 질병을 막아 준다.
2. 결혼에 관한 성경적 이해
1) 결혼의 목적
결혼의 우선적 목적은 남녀 상호간의 동반자 관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좋았고’, ‘심히 좋았지만.’ 유일하게 ‘좋지 못한 것’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창2:!8)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면서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지원과 동지애와 우정을 서로에게 베푸는 반려자다. 결혼의 다른 목적은 건설적인 성의 실현이다. 하나님은 결혼을 육체적으로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제정하셨다. 결혼의 또 다른 목적으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출산과 자녀양육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명령은 결혼을 전제한 것이다. 성경은 자녀 출산을 하나님의 선물과 복으로 강조하며(시127:3-5), 하나님의 방법과 교훈으로 자녀를 훈육할 것을 가르친다(엡6:4). 안정된 결혼은 어린이의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다.
2) 결혼의 본질
이러한 결혼의 목적과 관련해 결혼은 다음과 같은 본질을 갖고 있다. 첫째는 ‘영구성’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동안 함께 사는 것이 이상적이다. 둘째는 ‘친밀성’이다. 한 몸을 이루는 결혼의 근본 의도는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친밀성이다.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 일 뿐만 아니라 본래 하나였던 사람의 재 연합이기도 하다. 셋째는 ‘배타성’이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충실한 일부일처의 연합을 이루는 배타적인 헌신이다. 부부관계에는 제3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서로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결혼의 성립조건
결혼의 목적과 본질이 잘 실현되려면 적절한 성립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은 신약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창조명령(창2:24)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떠나는 것’이다. 부모를 떠난 새로운 사회 단위로서 한 가정을 구성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영적으로 독립하는 것 못지않게 정서적으로 독립하는 것도 중요하다. 둘째는 ‘연합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맺게 되는 약속과 부르심과 관계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다. 셋째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부부 간에 생활 전반에서 전인적 상호교통과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이 먼저 갖추어져야 비로소 결혼의 본질과 목적이 온전하게 실현 될 수 있다.
4) 결혼에서의 배우자의 숫자
기독교인들이 모두 합의하고 있는 또 다른 사실은, 결혼은 일부일처제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즉 결혼은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은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7:2)고 말했고, 또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을 교훈했다(딤전3:2). 그런데 신약만이 일부일처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한 남성(아담)을 창조한 다음 그에게 한 명의 아내(하와)만을 주었다는 성경 맨 앞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일부일처제가 구약에서도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혼에 대한 성서적 이해
이혼에 관계되는 성경기록은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복음서 그리고 바울에 의한 서신서에서 다양하게 언급되어 있다. 먼저 구약에서 실증적 결혼관과 함께 잠언에서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받고 은총을 받으며 결혼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이상은 “한 남편, 한 아내”이다. 일부다처제가 구약성경에서 관용되고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성적인 죄의 경우에는 이혼이 허용되었지만, 이상을 제사한 것이 아니라 구제책을 제시한 것이며 이웃 이교도의 문화영향으로 쉽게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 진 것 같다. (말2:16 )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하는 자를 미워하노라”고 단호하게 말씀하며 (렘 3:8) “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하나님은 이혼의 결과, 즉 자녀문제와 주변문제,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오는 결과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확실하게 이혼 자체를 책망하기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한 이혼 즉 성경에 쓰여 진 율례를 따라 행하지 아니한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혼과정을 요약해 살펴보면 (신24:4) 첫째, 서면으로 된 이혼증서를 본인이 상대방에게 전달하며 이혼당한 사람을 반드시 집에서 내어 보내야 했다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서로를 더욱 상하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어리석고 성급한 이혼 행위를 제지하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마5:32, 19:9)“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라고 말씀하셨는데 음행은 어떠한 성적 죄이든지 간에 모두 포함되며 간통은 배우자에게 불성실한 것(unfaithfullness)을 뜻하며, 음행 근친상간, 짐승과 성교 하는 것, 동성연애도 이혼서류를 전달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신다.
바울은 고전7:10~11)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믿는 아내나 믿는 남편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이고 설사 이혼이 됐다고 할지라도 그 아내는 반드시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객관적 성찰을 통해 남편과 화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도록 여지를 주는데 마침내 바울이 바라는 바는 화해이다.
둘째, 불신자와의 결혼에서 믿지 않는 자가 결혼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경우에 바울은 “갈리게 하라”고 말씀 한다 결국 이혼을 통해 믿는 자는 모든 결혼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며 믿지 않는 전 배우자와 다시 재혼해야 하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윤리라는 관점에서 이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 삶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양보이며 특별히 이혼문제를 교회는 3가지 원칙의 입장에서 집약했는데 로마교회에서는 배우자의 죽음이외에 어떤 이혼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것이고 재혼은 곧 간음이라고 까지 했으며, 종교 개혁자들은 죽음이외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하였는데 상대방의 간음, 상대방에게 버림을 받는 경우, 그리고 견딜 수 없는 학대였다. 마지막으로 복음주의자들이 입장은 이혼에 대한 구속적 책임으로“ 구속적 책임이란 죄인들을 구속하신 사랑으로 이혼의 멍에를 지고 있는 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용납하고 치유해야 한다는 뜻으로 기독교인과 교회는 부부간의 갈등과 이혼문제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기울여 이혼이 실패와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요구된 용서로써 대면되어 져야 하며 기독교적 윤리의 관점에서 용기 있게 선포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하는 기독인의 윤리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겠다.
4. 재혼
과거의 상처 때문에 배우자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어려움, 재혼 후에 형성될 가족 문제, 재산소유와 유산문제 등을 충분히 고려하고 또 한 번의 이혼을 초래하지 않는 지혜로운 선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선택임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재혼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재혼가족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 한 전문 교육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재혼가족은 다른 가족 역할모델이 또한 또 다른 가족체계로서의 재혼가족은 가족구성원간의 서로 다른 배경, 삶의 방식, 전혼 경험들을 배려해 주면서 원활한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재혼의 부정적인 면은 재 이혼이다. 그리고 재혼한 사람은 처음 결혼한 사람에 비해 이혼할 확률이 두 배나 된다는 절망적인 보고가 있다. 이혼 후 재혼한 사람들은 한 번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결혼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르고 또 그만큼 노력도 기울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지 못할 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수 있기에 특별한 지도와 의사소통 훈련이 필요하다. 이럴 때 그 결혼은 성공할 수 있다. 즉 재혼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융통성과 갈등을 잘 견뎌 낼 수 있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일찍 깨달을수록 결혼의 성공률은 높아진다.
또한 대부분의재혼 가족의 구성원들은 그 복잡하고 얽혀있는 가족구조를 이해하고 원만하게 형성해 나가기 위해 교육을 필요로 한다. 재혼가족은 결혼경험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 나름대로 가정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과는 달리 다른 생활방식, 다른 인생경험, 다른 자녀들이 만나므로 시작부터 난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