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셜교- 본질적인 일 (요 17:1∼5)'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이 우선 영적 사귐이 있을 때 영원한 생명의 기쁨 얻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1절) - 이제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갔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대속의 죽음을 당해야 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제자들은 모르나 주님은 다 아시고, 마음속에 긴장하십니다. 사랑하던 제자들이 배신하실 것도 아시고,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실 것도 아시고 ….
이런 답답한 때에 주님은 기도하십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심이라.”(요2:23-25). “아시므로” - 속에 있는 것을 아십니다. 인생의 부패와 죄악과 연약을 아십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한 제자가 고백했을 때, “아니라,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미 아셨습니다.
사실 인생이 그러합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이와 같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일, 그리고 그를 인정하는 일. 나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절망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는 그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우리는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의 원천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나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나의 연약을 깨달을 그때에 오히려 강해지며,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나 자신을 부인할 그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이 같은 심령 주시기를 빕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제자들” 그리고 “온 교회와 성도들”로.
우리는 예수님에게 있어서의 이와 같은 기도 순서를 그의 이기적인 동기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하고,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간구하겠습니까? 보지 못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자를 인도할 수 없습니다(마15:4).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영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실은 그럴 필요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부터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일에 싸여 있을 때, 일 그 자체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일하면서도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봉사하십니까? 가르치십니까? 심방하십니까? 그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아버지께 보고를 드립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4절) - 예수님의 사명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2절) - “구속사역”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무엇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절) 여기 “안다”(기노스코신)는 것은?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그런 종류의 단순한 지적 인식을 의미합니까? 아니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귀신들도 믿고 떱니다(지적 인식). 그러므로 3절의 앎은 그런 종류의 지식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 아는 지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며,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경외와 예배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런 지식을 가지는 것이 영생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7:23) -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알지 못하니”로 번역되어 있으나, 실은 과거형입니다. “알지 못했다” 그들이 사역을 할 때부터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날(종말의 시간)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 우리는 여기서 참된 신자의 표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참된 신자인지는 무엇으로 확인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 가지고? 아니오. 선지자 노릇하는 것 가지고? 아니오. 귀신 쫓아내는 것, 많은 권능 행하는 것 가지고? 아닙니다. 명분과 일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시금석입니까? 주께서 “내가 너를 안다”고 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생명의 결속,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연합과 영적 사귐이 중요합니다. 참된 신자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가장 우선적이요, 본질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사귐이 우리 속에 있게 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주님과의 사귐이 더욱 깊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사귐이 우리의 삶 속에, 가정 속에, 직장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노트>
무슨 일에나 본질을 붙드는 것은 중요하다. 신앙생활에서 이보다 더 화급한 일은 없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결속, 교통, 인격적인 사귐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후,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 신자의 참된 표지에 관심을 가지는 일은 이 시대의 교회가 깊이 고민하고 확인해야 할 문제들 가운데 우선되는 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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