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
(에 5:1-5)
(더 5: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더 5: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더 5: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더 5: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더 5: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 무단 통치로부터 자유와 해방과 독립을 외치며 만세를 부르다가 수많은 선열들이 온갖 고문과 장렬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기리는 3.1절 90 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와 같은 3.1절은 약자의 패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뜻 깊은 운동이었음을 역사가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1919년 5월 4일 중국의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이 조선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일어났는데 일본이 산동을 빼앗으려 하니 일어서자고 호소하여 중국 학생들의 구국 운동에 자극을 주었었고, 필리핀의 마닐라 대학생,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3.1 운동이 종교 지도자들의 연합과 더불어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기독교가 결코 애국과 무관한 종교가 아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손을 꼽는 다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모세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더불어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에스더를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에스더의 기도
에스더는 유다 백성으로 바벨론에 잡혀 온 포로였으나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어 수산 궁에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인 유다 백성들은 하만의 미움으로 말미암아 일시에 몰살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자기 혼자서 만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로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이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나라와 민족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독립 운동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서 생명을 걸고 적과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에스더처럼 나라와 민족의 구원과 평안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도 참된 애국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가 동족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왜 하필이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 각오의 기도를 하였을까요?
1) 본래 에스더는 민족적으로 도저히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될 수 없는 식민지 유다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스더를 왕후가 되게 하신 것은 미모 때문이 아니라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게 하기 위함이었음을 모르드개의 책망을 통해서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 전 유다 백성들이 하만의 미움을 받아 아달월 13일이 되면 몰살당하게 되었을 때 그 억울한 사정을 아하수에로 왕에게 찾아가 진상을 아뢰어 유다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원해야 할 유일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벌써 삼심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자기를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궁궐법도를 어기는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에스더가 유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밝히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는 것만이 최선의 대안임을 깨닫고 삼일 동안 전 유다 민족과 더불어 합심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에스더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목숨을 건 기도를 한 사람을 손 꼽는다면 당연히 다니엘 일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온 백성에게 절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하였으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자적 믿음의 승리였습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기도를 금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다니엘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일사각오의 순교자적인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로 말미암아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으나 다니엘은 결코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다니엘을 모함하던 대적들이 도리어 뼈도 추리지 못한 재 다 사자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단 6:24) 왕이 말하여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더라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하나님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로 하나님께 기도한 에스더의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을 하셨을까요?
2. 에스더의 결단
에스더가 동족을 구원하기 위해 사흘간 금식하며 순교적인 기도를 하였으나 아하수에로 왕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에스더의 기도에 대해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침묵도 과연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에스더는 삼일 밤낮 금식 한 후에 왕의 부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알현하기 위해 마치 왕이 부름을 받은 사람처럼 왕후의 예복으로 갈아입고 왕궁의 안뜰 곧 임금이 집무하는 어전 맞은편으로 걸어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의 발걸음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습니다.
(더 5: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예복을 입고 왕에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보다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적인 변화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이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부르지도 않았는데 한 달 만에 갑자기 나타난 에스더를 보는 순간 분노한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 왕후를 간택할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사랑스러운 마음이 되살 난 것입니다.
(더 5: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여기서 금 규를 내밀었다는 것은 왕의 허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비로소 왕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금 규 끝을 손으로 만짐으로 왕에게 나아가는 것을 허락받게 된 것입니다.
겨우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에스더가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나온 것은 마음에 무슨 소원이 있기 때문인 것을 알고 왕이 먼저 에스더에게 소원을 물으면서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더 5: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이는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명을 건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 응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미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경우와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는 가만히 앉아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기다리다가 갈라 진 후에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사십년 광야 훈련이 끝나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범람하는 요단강에 발을 내밀어 담굴 때에 비로소 갈라지고 마른 땅이 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수 3:17)(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 갔더라”
흔히 우리가 자주 범하고 있는 문제는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덤비다가 실수하거나 아니면,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내가 해야 할 것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예화:
인간이 하는 일 중에도 참으로 신기한 것 중에 하나는 그 무게만도 380톤이 넘는 대형 여객기에 승객과 짐을 가득 태우고 어떻게 창공을 새처럼 날 수 가 있습니까? 비행기가 이륙할 때 활주로 끝은 바다를 향한 곳이 많은데 그렇게 큰 비행기가 이륙할 때 비행기를 운전하는 기장은 그 바다를 향해 최고의 속력으로 달려 나갈 때 서서히 달려 가던 비행기가 어느 지점에서는 기러기처럼 대지를 박차고 공중으로 부양을 하는 것을 공항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기도한 후에 가만히 앉아서 응답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응답해 주신 것을 믿고 문제에 도전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때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기도의 응답을 믿고 도전적인 자세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3. 에스더의 지혜
에스더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에스더가 생명을 걸고 기도하고 왕을 찾은 궁극적인 목적이 하만의 미움을 받아 몰살 위기에 처한 동족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아하수에로 왕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소원을 물었을 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과연 에스더는 왕에게 무엇을 구하였을까요?
에스더가 왕에게 구한 것은 하만의 목이 아니라 뜻밖에도 잔치에 왕과 하만을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이나 초청 하면서 소청을 미루었습니다.
(더 5: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원수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를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원수를 사랑하면서 원수를 하나님께서 맡기는 방법입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과연 그 둘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확실한 승리일까요? 기도하는 사람은 하만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목매달기 위해 장대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에스더처럼 원수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 같으나 가장 확실한 승리인 것입니다.
(롬 12:20-21)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만일 처음부터 에스더가 왕에게 하만의 목을 요구하였다면 가장 난처한 사람은 아하수에로 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만에게 제국의 제이인자가 되는 권세를 허락한 사람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이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호언을 하고 거절할 수도 없기 때문에 가장 난처했을 것입니다.
만일 에스더가 하만이 동족을 죽이려고 한다고 직고하였다면 과연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히려 아하수에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만으로 하여금 피해갈 다른 길을 찾게 만들어 일을 그르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에스더가 하만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왕을 위한 잔치를 벌려 하만을 초대한 것은 매우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왜냐하면 이가 맞지 않는 나사를 억지로 잠그려고 힘을 주면 이가 넘어 도리어 겉돌게 되는 것처럼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매사 순리를 따라야 합니다.
하만은 에스더의 저의를 알지 못한 채 두 번이나 왕과 더불어 에스더가 초청하는 잔치에 두 번이나 거듭 초청을 받게 되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과연 하만이 기뻐해야 할 자리입니까?
하만은 에스더가 청한 것이 결과적으로 죽음의 자리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장 슬퍼하고 두려워해야 할 순간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만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으나 대궐 문 앞을 지날 때마다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가 더욱 미워졌으며 그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들을 몰살시키겠다는 악한 마음은 더욱 불타게 하였습니다.
(더 5: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여기서 ‘매우 노한다’는 말은 와우 계속 법으로 마치 분화구에서 용암이 흘러넘치듯이 마음에 분노가 지속적으로 치솟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만은 혼자서 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그를 지지하는 친구들과 더불어 모르드개의 목을 매달기 위해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 기둥을 세웠으나 설마 그 나무에 하만이 달리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더 5:14)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종교가 다 나름대로 종교 예식이 있고 또 기도가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과 타 종교인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경전의 내용이나 종교의식이 각기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기도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기도회와 수요 기도회 심야 기도회 등 많은 기도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와 민족의 평안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심지어 기도를 쉬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제각기 말할지라도 반드시 들어야만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는 사람이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답게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되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한 것처럼 적극적인 자세로 기도해야 하며, 설령 기도했으나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는 24시간이지만 하나님의 시계는 영원하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설령 기도가 내 생각대로 응답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과연 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려야 하며,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에스더처럼 원수 앞에서도 감정을 잘 절제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기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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