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대안
(에 4:13-17)
(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가 명령한 대로 다 행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번 시험을 치룰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험지를 받아 들게 되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의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하나는 문제만 주고 답을 채우라는 주관식의 문제와 또 하나는 유사한 답을 여러 개 제시하고 그 중에 정답을 찾으라는 객관식의 문제입니다.
주관식의 문제는 모르면 아예 답을 쓸 수 없지만, 객관식 문제는 자신이 없어도 사지 선 다식이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를 골라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확실하게 모르면 답을 선택하고 나서도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객관식 시험을 치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민족적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될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을 하게 되는데, 대안이 전혀 없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객관식 문제처럼 해법이 될 만한 대안들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과연 어떤 것이 위기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인지 잘 분별하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를 더 확대시키거나 아니면 시간과 물질과 체력을 허비하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다 줄 위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다고 생각되는 대안도 막상 실행에 옮기면 예상과 달리 어려움이 많거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최선의 대안인지 그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모르드개의 대안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이 유대인인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 하나 때문에 전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주도면밀하고 공공연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르드개가 유대인으로서 아말렉 자손인 하만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이 신앙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절하지 않았던 것도 신앙 양심이 작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을 고집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 때문에 모르드개 한 사람에게만 고난이 따른 것이 아니라 무죄한 동족들이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무자비한 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신앙 양심이 살아있고 의지가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러한 경우에도 그 결심을 끝까지 고집하고 지켜나갈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진들도 초반에는 신앙 양심을 고집하다가 핍박자들이 ‘너 하나만 포기하면 네 가족이 살 수 있지만, 너 하나 양심을 지키겠다고 고집하면 네 가족이 덩달아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회유하는 바람에 중도에 포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모르드개의 경우는 그 보다 더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어떤 타협이나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오직 유대인이면 모두 죽어 주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에 3: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뛰어난 지혜를 주셨기 때문에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미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한계입니다.
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은 천재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만은 유대인 출신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 꿇어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 살고 있는 남녀노소 전 유대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제비를 뽑아 12월 13일이라는 날짜까지 확정해 놓았습니다.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으며 과연 그에 대한 대안이 무엇이었을까요?
1) 모르드개도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대안을 세워야만 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되는 무죄한 동족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존심을 포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든지 동족만이라도 살려 보겠다고 하만에게 찾아가서 애걸복걸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초지일관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만은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됨을 내심으로 기뻐하면서 왕궁에서 아하수에로 왕과 주연을 베풀며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에 3:15) 역졸이 왕의 명령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그러나 모르드개가 민족적으로 당한 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대안은 하만 대신에 하나님을 찾았고, 배부르게 먹는 대신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소문이 유다 백성들에게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다 백성들도 모르드개처럼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적인 대 위기 앞에 민족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에 4:3)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과연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누워 부르짖는 다고 현실이 크게 달라지겠는가? 차라리 하만에게 로비를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한 돌파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부르짖음을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또한 들어 주셨습니다.
(느 9:27)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부르짖어야만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신앙과 나태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에스더의 대안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이 만난 민족적인 대 위기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유일한 유대인이 있다면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된 에스더일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지만 왕의 부름이 없을 때는 마치 구중궁궐에 갇힌 죄수나 조금도 다름없이 외부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에스더는 왕궁에서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시녀들을 통해서 모르드개가 궁궐 문 앞에서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에스더는 큰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에 4:4)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전하니 왕후가 매우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 옷을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여기서 ‘매우 근심하여’라는 말은 ‘빙빙 돌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으로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너무나 걱정이 되어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정신적으로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에스더의 심정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에스더의 모습은 누가 진정한 이웃이요, 누가 진정한 동족이요 애국자인가? 알 수 있는 증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리 이웃이요 동족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편하다고 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은 진정한 애국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똑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형편과 처지가 똑같을 수 없기 때문에 빈부, 유 무식, 지위고하의 차이가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처럼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많이 받았다면 그것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내게 주신 특별한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 이웃, 동족, 교우라는 말은 남남이 아니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지체인 것입니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에스더는 어떻게든지 모르드개를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베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베옷을 입고서는 모르드개가 대궐 안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 4:2) 대궐 문 앞까지 이르렀으니 굵은 베 옷을 입은 자는 대궐 문에 들어가지 못함이라
그러나 강직한 모르드개는 베옷을 벗는 것은 자포자기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에스더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에스더가 보낸 내시 하닥에게 뒤늦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며 에스더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비로소 내시 하닥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고 민족적인 대위기 앞에서 에스더가 동족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에 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보여 알게 하고 또 그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모르드개는 뒤늦게 에스더에게 동족이 당하고 있는 억울한 사정을 아하수에로 왕에게 직언하여 억울함을 풀게 하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모르드개가 민족적인 대 위기를 만났을 때 에스더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만사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그것조차 최선의 대안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후라고 해서 무시로 왕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왕의 부름이 있을 때만 나아갈 수 있는 것이 궁중법도였습니다.
문제는 아하수에로 왕이 무슨 연고인지 삼십일이 지나도록 에스더를 부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에스더에 대한 관심이 식어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 때 만일 에스더를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왕에게 나아갔다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와스디 왕후처럼 위험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에 4: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그렇다면 왕이 부를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합니다. 만일 아하수에로 왕이 아달월 13일이 지나도록 부르지 않는다면 모르드개를 비롯한 전 유다 백성들이 하만의 칼에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진퇴양난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령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놓고 설령 아하수에로 왕에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만이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모험일 뿐이지 최선의 대안은 아닌 것입니다.
에스더가 그와 같은 갈림길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을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더욱 압박하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고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삶의 존재이유와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일깨워 주었습니다.
(에 4:13,14)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모르드개는 대궐 문 앞에서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반면에 에스더는 수산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생사를 같이 해야 할 공동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 하나님이 에스더에게 왕후가 되는 특별한 권세를 주신 것은 에스더 개인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와 달리 고난을 당하고 위기에 직면한 동족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쓰임을 받기 위해 주신 기회라는 것입니다.
2) 에스더가 그 책임과 사명을 망각하면 아무리 왕궁에 살지만 에스더는 물론 그 집안이 다 멸망하겠지만 유다 민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살려 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에스더는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자신의 책임이 무엇이며,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르드개의 말처럼 아하수에로 왕에게 무조건 찾아가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 아니라, 먼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먼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5) 에스더는 왕궁에서 얼마든지 호의호식 할 수 있지만 자원하여 삼일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할 것이고,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허락이 없어도 동족의 구원을 위해 왕에게 나아갈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6) 에스더는 설령 죽게 될지라도 왕에게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하기 위해 자기만이 아니라 모르드개와 전 민족이 함께 삼일 금식하며 기도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위기를 만난 유다 민족이 살 수 있는 최선의 대안임을 믿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궁극적인 섭리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그와 같은 또 하나의 사례를 찾는다면 구약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 덕분에 기름진 고센 땅에서 평안한 삶을 살았을 때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잊어버리고 애굽 나라에 동화되는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히브리 백성들을 압제하고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이게 하고, 강제로 중노동을 시키며 압제와 고통을 당하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음으로 출애굽의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은 위기 중에 부르짖는 히브리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이 본향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흠모하게 하시고, 마침내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출애굽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도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하만의 유다 백성들에 대한 증오심은 유다 백성들에게 육신적으로는 위기를 가져다주었지만, 영적으로는 유다 백성들의 정체성을 되찾게 하는 기회였으며, 안일한 자리에서 일깨우는 비상벨이 된 것입니다.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므로 그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와서 바벨론 땅에서 사는 동안 익숙해지고 편해지게 되면서 약속의 땅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고레스 왕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고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하였고 다수의 사람들이 바벨론 땅에 남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너무나 황폐하여 졌다는 소식을 바벨론 땅에 살고 있는 유다 백성들이 전해 들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그러나 나머지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보다 바벨론 땅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예루살렘을 잊어버린 채 편안한 삶을 구가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풍전등화와 같이 전 민족이 몰살하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을 때 유다 백성들은 비로소 바벨론 땅은 자기들이 정착할 고향이 아니라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의 땅임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유다백성들은 고난 중에 출 바벨론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주전 474년에 일어난 하만의 사건이후, 유다 백성들은 주전 458년과 444년 두 차례에 걸쳐서 예루살렘 귀환을 사모하게 만드는 최선의 대안이었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년에 사계절이 있습니다. 가장 잎이 아름답고 꽃이 아름다운 계절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그러나 그 봄은 추운 겨울을 통과한 후에 봄이 오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식물들만이 아름다운 신록의 새싹과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기는 영적인 새 봄맞이를 위한 기지개라는 사실을 아는 믿음의 사람은 인생의 한 겨울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소망을 품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애 3:31-33)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러므로 위기를 만난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최선의 대안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일깨우시는 최선의 대안이기도 한 것입니다.
(시 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57: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이 항상 평안을 원하는 것을 아시고, 또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원하는대로 하시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고난과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를 만나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원치 않는 고난과 위기가 몰아닥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하시고 교회를 다니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며, 이 때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은혜요, 지혜요, 최선의 대안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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