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僞裝)된 고난
(에 2:1-4)
(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2) 왕의 측근 신하들이 아뢰되 왕은 왕을 위하여 아리따운 처녀들을 구하게 하시되 (3) 전국 각 지방에 관리를 명령하여 아리따운 처녀를 다 도성 수산으로 모아 후궁으로 들여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손에 맡겨 그 몸을 정결하게 하는 물품을 주게 하시고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때로 사단이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마치 번영이나 축복처럼 위장을 하고 접근을 할 때 그것을 잘 분별하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하수에로 왕처럼 위장된 번영을 분별하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위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위장하여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을 잘 분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이 그와 같이 위장된 고난이라는 신앙의 유격 훈련 코스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위장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시는지 위장된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볼 줄 아는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1. 아하수에로 왕의 번민
에스더 서 전체를 읽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단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는 단지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찮은 일에도 사사건건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고,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에스더 서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고 해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역사를 돌이켜 보고, 또한 성경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고, 각자 자신의 지나 온 길을 돌이켜 보게 되면, 면면히 하나님의 세밀하신 돌보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구원하심과 축복하심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중에 그와 같은 진리를 가장 절실하게 깨닫게 하여 주는 대표적인 성경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에스더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에스더 1장을 통해서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선왕 고레스 와 달리 페르시아 제국의 흥망성쇠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수하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자만하다가 결과적으로 자기가 계획했던 일들이 다 무산되고 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과 사는가를 자랑하기 위해 와스디를 잔치에 초청했다가 거절을 당함으로 분노하여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를 시켰는가 하면,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두 차례나 벌렸던 페르시아 전투에서 거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게 되면 의기소침하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아하수에로 왕도 깊은 번민에 사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에 2:1)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치매 와스디와 그가 행한 일과 그에 대하여 내린 조서를 생각하거늘
여기서 ‘생각하거늘’이라는 말씀은 생각을 집중한다는 의미로 깊이 고민하였음을 뜻하며, 구약 성경의 해설서인 ‘미드라쉬’에서는 이 말을 ‘후회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것은 삼년전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게 된 근본 원인은 와스디가 자신의 청에 응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화가 나서 조급하게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와스디가 평소에 문제가 많고 두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오히려 후회가 없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날 수 록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삼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수에로 왕이 재혼을 서두르지 않은 것을 보면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킨 일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가운데 평소 와스디가 자신의 말에 불순종한 적이 없었다면, 왜 그 때 거역을 하게 되었는지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그 사연을 알아보지 않고 자기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분노에 사로 잡혀 충동적으로 조급하게 폐위시킨 처사에 대해 후회가 막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아하수에로 왕만이 범한 과오가 아니라 오늘도 수많은 가정의 부부들이 다투고 이혼하고 좋았던 친구와 결별을 하게 되는 대다수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1)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과 잘한 일과 과오와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하수에로 왕처럼 단 한 가지 실수나 허물을 확대해석하기 때문에 좋았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조급한 마음을 먹지 말고 상황을 좀 더 알아보고 조금만 노력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사가 나 중심이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악화시킬 때가 많지 않습니까?
2) 무슨 일이든지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좀더 이성적으로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것들을 듣고 보고 느낀 대로 생각 없이 말을 하고 조급하게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을 잃게 되고 분노가 활화산처럼 폭발하게 되고 조급하게 되고 충동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헤 하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분노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돌이켜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렇다면 아하수에로 왕이 분노에 사로잡혀 와스디를 성급하게 폐위 시킨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와스디를 복권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결단할 수 없는 이유는 왕이 한번 내린 법은 절대로 취소할 수 가 없다는 법과 주변 관료들이 그것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그러므로 아하수에로 왕은 와스디를 생각하면 할 수 록 더 깊은 번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렇게 번민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나라를 번영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위장된 번영에 대해 자만심이 자초한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었습니다.
2. 왕후로 간택(揀擇) 받은 에스더
아하수에로 왕의 모습을 보고 세상에 어느 누구보다 불안해 한 사람들은 와스디의 폐위를 고집했던 므무간을 비롯한 일곱 명의 지방관들이었습니다.
(에 1: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아하수에로 왕이 만일 마음을 바꾸어 와스디를 복권시킨다면 제일 먼저 목이 날아갈 사람이 바로 자신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게 하는 것만이 자기들이 살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아하수에로 왕을 설득하여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전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아리따운 처녀를 왕으로 간택하자고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마침내 왕의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에 2: 4) 왕의 눈에 아름다운 처녀를 와스디 대신 왕후로 삼으소서 하니 왕이 그 말을 좋게 여겨 그대로 행하니라
여기서 ‘좋게 여겨’라는 말은 미완료 와우 계속법으로 계속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동사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이 와스디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것을 뜻합니다.
아무리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에게 미련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왕이 한번 결정한 것은 돌이킬 수 없도록 신하들이 못을 박았기 때문에 아하수에로 왕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에 1: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당시 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여기던 시대였으나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에스더서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족쇄를 차게 하시고 그 틈새를 이용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다 땅에서 포로로 끌려온 포로 가운데 기스의 자손인 모르드개의 조카 에스더가 궁녀를 총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눈에 좋게 보여 와스디를 대신할 새 왕후로선발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 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하수에로 왕이 폐위한 와스디 왕후를 만조백관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 외모 때문이었다면, 왕의 신하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와스디 보다 더 아리따운 여인이어야만 하는 것이 제일 첫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국적이니 학벌이니 하나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국 127도에서 가장 아리따운 여인만 뽑혀지기만 하면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다 포로의 자손이었던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 에스더였습니다.
(에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여기서 ‘용모가 곱다’는 말은 외모의 아름다움이라면, ‘아리따운 처녀’라는 말은 내적인 성품이 좋고 선하다는 뜻으로 새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는 외모만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까지 왕후가 되는 조건에 흡족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 말씀의 주인공 에스더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궁녀를 총주관하는 내시 헤게는 에스더가 너무나 아리따웠기 때문에 그 한가지만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더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왕후로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 왕후로 선발하는 기준이 아름다운 외모가 첫 번째 조건이 아니었다면 유다 백성 출신인 에스더는 왕후로 간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 그렇게 지혜로울 수 있습니까? 오로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인도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3. 파란 만장한 에스더의 삶
에스더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으로 이역만리에서 노예 생활을 하지 않고 도리어 왕후로 간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에스더가 어떻게 그러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의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을 처지입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어느 누구보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벨론 땅에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고레스 황제의 측령으로 이차에 걸쳐 다수의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지만 아직도 바벨론 땅에 상당수의 유다 백성들이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가문 중에 모르드개라는 사람이 바벨론 제국의 2차 침공 시 유다 왕여고니야오 함께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모르드개가 바산 궁 근처에 살고 있을 때 그의 삼촌이었던 아비하일의 죽음으로 에스더가 졸지에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고아가 된 조카 에스더를 불쌍히 여기고 친딸처럼 키웠습니다.
에스더가 점점 자라면서 그의 미모가 매우 뛰어나서 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중에 와스디를 대신할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기 위해 전국에서 아리따운 처녀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추천하였습니다.
(에 2: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대 페르시아 제국치하 127도에서 가장 아리따운 처녀를 선발하였다면 얼마나 많은 경쟁자가 있었을까요?
에스더가 아무리 얼굴이 예쁠지라도 그 많은 경쟁자들을 어떻게 물리치고 왕후로 간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모르드개는 그 것을 염려하여 에스더에게 국적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인종차별이 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 1:10)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패망국의 백성에다, 포로가 된 신분, 부모가 없는 고아, 삼촌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란 처녀 에스더를 볼 때 인간적으로 어느 것 하나도 부러워 할 것이 없는 불행한 여인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말처럼 부정적인 우리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전환하게 되면, 불행처럼 보이는 것들이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에스더가 그렇게 불우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로 간택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행처럼 보이는 불우한 환경이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의 왕후가 되어 아하수에로 왕의 사랑을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에 2:17,18)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에스더만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다 에스더와 같은 과정을 통과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한 예를 든다면 요셉이 만일 형들에게 팔리지 않았다면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어 흉년을 만난 가족을 살리지 못했을 것이고, 히브리 백성들을 사백 삼십년 동안 애굽 고센 땅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하나님이 에스더의 하나님이시며, 에스더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는 동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들 중에 뒤집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문제는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크고 작은 고난 앞에서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머리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뢰가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잘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내가 아는 것보다, 내가 마음 먹은 것보다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세계 최대의 강국 페르시아 제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이 아니라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요셉이나 에스더 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부르는 나의 갈길 다가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때로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그 골짜기 너머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에 잠시 통과하게 하시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볼 때 나를 삼킬 것처럼 밀려오는 고난의 파도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동정할 정도로 하나님이 나를 어려움에 처하게 하심은 나에게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위장된 고난이라는 것을 믿을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설령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건강을 잃고 재산을 잃고 명예를 잃게 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묵묵히 기다리는 자에게는 그 고난들이 하나 하나가 나의 미래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보석들처럼 쓰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환난과 시련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위장된 고난으로 그 속에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와 위로가 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자갈 밭으로 인도하 하실 때는 반드시 가죽 구두도 함께 준비해 놓으신다”
그러므로 위장된 고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 어떤 일을 만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낙심하지 않을 것이며,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불행처럼 보이는 처지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며,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더더욱 소망을 품고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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